부르키나파소에서 ‘혁명’이란 무엇인가

2018-02-28     레미 카라욜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2014년 블레즈 콩파오레 대통령의 퇴임을 이끌어낸 부르키나파소 반정부 시위에서는 변화 세력들 간 분열이 두드러졌다. ‘전통적인’ 노조와 새롭게 등장한 ‘버섯(버섯처럼 우후죽순 생겨난-역주)’ 조직들 사이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그 원인으로는, 시위 이후 확산된 부르키나파소 국민들의 실망과 환멸이 낳은 세대 갈등과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꼽힌다.


겸손한 성품의 오귀스탱 로아다는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자동차 운전대만 잡으면 수다쟁이가 된다. 수다로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는 것이다. “만일 제가 오늘 조직을 하나 만든다면, 조직명은 ‘Tout ça pour ça(실속 없는 소란)’으로 할 것입니다.” 부르키나파소 수도의 한 골목길을 지나 혼잡한 차로로 들어서면서 그는 말했다. “2014년 봉기의 영향으로, 블레즈 콩파오레 대통령이 퇴진했습니다. 현 집권당은 그를 죽이려 하고 있어요. 괴로운 일입니다.”

와가두구 대학의 법학과 및 사회학과 교수인 로아다는 17년 전 ‘민주적 거버넌스를 위한 센터’(DCG)를 설립했다. 2014년 10월 30일과 31일, 그는 콩파오레 대통령이 프랑스군의 헬리콥터를 타고 도주하게끔 했던(이후 코트디부아르로 망명함) 바로 그 협상 현장에 있었다.(1) 프랑스와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콩파오레는 1987년 토마 상카라(부르키나파소 전 대통령)가 살해된 이후부터 줄곧 대통령직을 유지해 왔다. 로아다는 과도정부(2014.11~2015.11) 하에서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을 잠깐 맡은 적이 있다. 이제 교수직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부패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힘을 보탰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는 않았다. “봉기가 일어날 당시, 저는 우리의 운동을 무조건 방해하는 노조 지도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변화를 위한 변화는 옳지 않다고요. 우리는 그것이 궤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적어도 일부는 옳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조가 이뤄낸 민주적 혁명, 그러나···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시민사회조직들 간의 알력 관계와 조직들 각각의 변화 양상을 보면, 콩파오레의 퇴진이 낳은 ‘꺾인 희망’의 모습들을 엿볼 수가 있다. 봉기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조직들과 2014년에 생겨난 ‘버섯’ 조직들 간에는 분열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조직에는 각종 노조들이 해당되는데, 가장 영향력이 큰 조직인 ‘부르키나파소 노동총동맹(CGT-B)’이 있고, ‘인권과 국민의 권리를 위한 부르키나파소 운동(MBDHP)’ 등이 포함된다. MBDHP는 10년 전부터 부패와 무처벌 특혜에 반대하는 단체와 노조의 비공식 연합인 ‘비싼 물가에 반대하는 연합(CCVC)’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이 조직들의 대부분은 ‘볼타혁명공산당(PCRV)’과 깊게 관련된 순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끌고 있다. PCRV는 1978년에 설립된 불법 정당으로, 노동 계층의 ‘진정한 혁명’을 주장한다.

대부분의 서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노조는 노동자의 권익보호에 집중할 뿐, 정치 게임에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부르키나파소의 노조는 제도 및 경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66년에 ‘독립의 아버지’ 모리스 야메오고를, 1980년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부바카르 상굴레 라미자나를 물러나게 한 것도 총파업이었다. 그리고 PCRV와 노조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일치했던(전형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토마 상카라(1983~1987)에도 맞섰는데, 그가 혁명적 인문주의와 완전한 민주주의, 그리고 범아프리카주의를 주장하면서 노동자들보다 농민들의 입장을 더 대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토마 상카라의 집권 계기가 됐던 혁명을 군사적 쿠데타로 간주했고, 이 때문에 당시 수만 투레를 포함해 ‘반동적 부르주아’로 평가된 일부 노조원들이 투옥됐다. 이 갈등은 토마 상카라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1987년 10월 15일 블레즈 콩파오레가 주도한 쿠데타에 의해 토마 상카라는 실각했고, 암살당했다.
1990년대 말, 취재기자였던 노르베르 종고의 암살사건으로 촉발한 대규모 시위에서 노조는 마침내 민주적 혁명을 이뤄냈다(<인디펜던트>의 발행인 노르베르 종고는, 콩파오레 대통령의 동생인 프랑소와 콩파오레의 집에서 발생한 절도사건의 용의자인 운전기사 다비드 웨드라오고가 고문을 받고 살해된 사건을 기사화했는데, 종고는 교통사고로 위장된 현장에서 동료 3명과 함께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됐다. 노르베르 종고의 죽음에 관한 조사가 이뤄진 뒤 2017년 콩파오레 전 대통령의 형제인 프랑수아 콩파오레에게 국제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수차례의 시위가 있은 후, 노조는 대통령이 2번에 한해서만 연임할 수 있게 하는 헌법개정을 얻어냈다. 이는 콩파오레 대통령이 1997년 폐지했던 법안이었다.(2) 부르키나파소 노조들에 대해 사회학자 샤를르 카베야-무아스는 “파업권을 가진 정당”이라고 일컬었다.(3) 즉, 정치인들이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하는 세력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공공 분야와 서비스 분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이 전통 조직들은 2014년 이후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난 각종 단체들(이른바 ‘버섯’ 조직들)에 의해 입지를 위협받고 있다. 이 새로운 조직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콩파오레 세력들을 처단하는 것이다. 1992년 12월 15일 자 법에 명시된 시민사회조직의 자격에 따라 행정구역부의 조사에 의하면, 2014년 등록된 단체는 1,800개로 2013년 800개에 비해 1,000개나 늘었다. 주로 도심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시민 빗자루’, 국민투표반대집단(CAR), 5월 21일 운동(M21), ‘흑색 완장’은 거리에서뿐만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다. 생각보다 행동을 중시하며 때로는 토마 상카라의 후예를 자청하는 이 단체들은 변화를 갈망하는 부르키나파소 젊은이들의 마음을 빠른 속도로 끌어당기고 있다.

이 단체들은 콩파오레 대통령이 헌법개정을 통해 또다시 연임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려 하자, 2014년 초부터 부르키나파소 전역에서 격렬한 반대시위를 벌였다. 야간에 이뤄진 회의에서 젊은 활동가들은 정부의 보안 시스템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10월 30일과 31일, 그들은 거사를 치러냈다. 그때 “전통적인 기존 조직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시민 빗자루’의 대변인 기 에르베 캄은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요란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 조직들은 공모 혐의로 기소됐고, 정권에 의해 매수됐다는 의심까지 받게 됐다. 부르키나파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와 같은 상황은 사실 여부를 증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노조원들 중 일부가 2014년에 콩파오레 대통령이 좀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해 만들려 했었던 상원의회에 합류하기로 돼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민사회 조직들 간 갈등의 이유는?

부르키나파소의 시민사회 내부적으로 전통적인 조직들과 버섯 조직들 간에 이런 갈등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대 요인이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연구원인 오귀스탱 로아다와 마티유 일게르가 설명한다. “영향력이 큰 조직과 노조의 책임자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입니다. 그들은 종종 급진적인 입장을 내놓지만, 자신들의 역할이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부르키나파소 유권자의 75% 이상이 50세 미만인 데 반해, 권력층은 점점 더 나이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 이 젊은 세대는 폐쇄적인 정치 시스템 안에서 성인이 되고, 대부분은 권력층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장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4)

몇 번의 혁명 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다변가 에르베 와타라는 이런 설명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인물이다. 그는 2014년 초 34세로 국민투표반대집단(CAR)을 설립했다. 현 대통령(2015.12~)인 로크 마크 크리스티앙 카보레의 소속당 진보국민운동(MPP)와 긴밀하게 관련된 CAR은 와가두구(부르키나파소의 수도)에 문자 그대로 불을 질렀다. 몇 개의 발화지점이 확인됐는데, 대부분 공공건물이나 체제 유력인사의 자택이었다. 그에 의하면, 시민사회조직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노조를 향한 불신이 싹튼 원인은 바로 ‘세대 간 갈등’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전략 및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대립이 ‘구’ 조직과 ‘신’ 조직을 갈라놓고 있기 때문이다. 볼타혁명공산당(PCRV)에 잠깐 몸담기도 했던 와타라는 노조 책임자들의 전략을 분석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혁명은 반드시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노동을 통해서 이뤄져야 합니다.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그저 쿠데타에 불과합니다.”

전통적인 노조 활동가로서 1988년부터 2013년까지 부르키나파소 노동총동맹(CGT-B)을 이끌었던 톨레 사뇽은 헌법개정 반대투쟁이 최우선 과제는 아니라고 2014년 내내 부르짖었다. “우리는 자유주의에 대해 불필요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10월 봉기가 일어나기 몇 달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상대편의 정책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정책 역시 자유주의적 정책입니다. 자유주의자를 또 다른 자유주의자로 바꾸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권교체가 아니라 확실한 해결책입니다.” 사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2015년 12월 대통령으로 당선된 로크 마크 크리스티앙 카보레의 경제 정책은 그의 전임자인 콩파오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교육과 보건을 좀 더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해외 투자자 유치를 최우선 과제로 둔다. 민간 분야의 사업가들도 정권교체 때문에 특별히 손해를 본 부분은 없다고 스스럼없이 인정한다. 사뇽의 말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배울 만큼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교육계를 포함해 사회의 주요 분야들을 꾸준히 지원해 온 볼타혁명공산당(PCRV)의 계획을 방해하는 청년들에 대한 일종의 경멸이 담겨 있었다. 

한편 국민투표반대집단(CAR)의 설립자인 에르베 와타라는 말한다. “그들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반동적 또는 부르주아적 성격의 소집단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봉기를 일으키자 그렇게 놀랐던 겁니다.” 경제학자인 라 사블가 우에드라오고는 “봉기에 참여한 이들의 공통분모”는 토키 상카라라고 말했다. 토마 상카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이들은 콩파오레만 아니면 누구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바보라도 그보다는 낫겠다”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버섯’ 시민사회조직들이 공산권의 붕괴 이후 “소프트웨어를 교체할 능력이 없다”며 종종 비웃는 PCRV의 영향력은, 부르키나파소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시민 빗자루’의 기 에르베 캄도 이에 동의한다. “그들의 힘은 교육계 구석구석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부터 우수한 조합원들을 선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원합니다. 토마스 상카라의 이야기도 그렇고요. 사실, 발전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마르크스까지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서로 경멸하고 적대하는 혁명동지들

17년 11월 말 프랑스의 새로운 대통령이 방문하기도 했던 부르키나파소 지성의 상징 와가두구 대학은 좌파의 내부 갈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2013년, ‘시민 빗자루’의 회원인 세르쥬 바얄라는 토마 상카라를 추종하는 대학생들과 함께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토론회를 열고 우리를 위해 2시간, 아프리카를 위해 2시간.” 매일 2시간 이상 캠퍼스 내에서 하나의 주제를 놓고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대학생들의 의식화”를 꾀하고 토마 상카라의 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아프리카인들에게 해당하는 문제를 고민해본다”는 취지였다. 2013년에서 2014년까지 매일, 토론회에는 150~600명이 모였다. 그러나 이는 곧 캠퍼스 ‘터줏대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바로 부르키나파소 전국 대학생 연합(ANEB)와 같은 대학생 노조단체 회원들이었다. 사실, ANEB와 ANEB의 상위 조직인 부르키나파소 대학생 총연합(UGEB)은 토마 상카라의 혁명과 콩파오레 체제도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던 두 단체였다.

1981년 설립 시점부터 PCRV의 전략과 전술을 그대로 따랐던 UGEB는 수 세대에 걸쳐 활동가들을 배출했고, 이들은 훗날 정당, 노조, 각종 조직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다. “우리가 토론회를 만든 이유는, 인간의 비극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또 정당들이 조종하는 노조활동 속에서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토론회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가진 권력에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들은 대학생들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허수아비 조직으로 폄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2014년 10월에 시위를 벌이기로 했을 때도 그들은 반대했습니다. ‘진정한 혁명가가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면 모두 실패’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바얄라가 설명했다.

부르키나파소 전국 대학생 연합(ANEB) 측의 입장도 이와 같았다. 의대 7학년에 재학 중인 알렉시스 자브레는 2017년 3월부터 노조를 이끌고 있다. 그는 “봉기는 실패였다”고 단정 지으면서, ‘시민 빗자루’와 같은 조직들은 ‘성숙함’이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콩파오레의 퇴진 이후 전혀 나아지지 않은 대학생들의 상황, 즉 학생 과밀, 교수 부족, 불충분한 사회 지원금 등을 예로 들었다. 반면 콩파오레는 코트디부아르에서 현재 호화로운 망명 생활을 즐기고 있다. 자브레는 진정한 변화란 “오랜 시간 동안 투쟁을 지속해온 조직”만이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한편, 내부적으로 분열돼 심지어 서로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한 ‘버섯’ 조직들은 이제 새로운 존재 이유를 찾고 있다. 특히, 단체들 간의 통합이 활발하다. ‘시민 빗자루’가 조직한 ‘디타니에(Dytaniè) 연합’은 ‘시민봉기의 정신과 사상의 승리’를 내세운다. 국민투표반대집단(CAR)이 속해 있는 ‘보리 바나(Bori Bana) 연합’은 “보건, 경제, 교육 분야의 해결책을 제안”하겠다고 나섰다. ‘존엄성 네트워크’는 “마음을 다잡고 상황을 재정비”하고, ‘도덕적인’ 조직들과 그렇지 않은 조직들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블레즈 콩파오레는 실각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전열을 다시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에르베 와타라는 말한다. 와타라가 이끄는 국민투표반대집단(CAR)은 기존의 목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분위기 쇄신을 위해 명칭만 ‘아프리카 시민을 위한 운동’으로 바꿨다. 와타라는 범아프리카주의 운동을 지지하면서 “식민주의의 잔재”인 세파프랑(CFA franc,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의 단일 통화)의 폐지를 새로운 목표로 설정했다. “봉기 이전에 CAR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지만, 봉기 이후 많은 활동가들이 조직을 떠났습니다.” 

CAR은 다른 ‘버섯’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과도 정부 시기에 신뢰를 많이 잃었다. 콩파오레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나듯 내려온 후, 몇몇 새로운 조직들은 군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콩파오레 전 대통령의 대통령 경호실 소속이었던 아이작 야쿠바 지다 중령이 과도 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는 일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전통적인 조직들은 이에 대해 ‘군사적 쿠데타’라고 한목소리로 비난을 퍼부었다. 1989년에 설립된 인권과 국민의 권리를 위한 부르키나파소 운동(MBDHP)의 수장인 크리조고메 주그모레는 설명한다. “그들이 우리의 역사를 몰랐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결국 1966년의 사건을 또다시 반복한 셈입니다(당시에도 야메오고 대통령의 사임 이후 군부가 정권을 잡았었다). 반면 노조는 1966년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련된 60대 노장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시민사회조직들은 그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과대평가했습니다.” 2014년 봉기에서 그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1998년 노르베르 종고의 죽음 이후 노조와 기타 조직들의 투쟁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4년 봉기는 우리가 주도해온 어떤 긴 과정의 종착점과도 같았습니다. 봉기를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힘은 부르키나파소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시민 빗자루’를 보세요. 와가두구와 보보디울라소 말고는 도대체 어디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까?”

여전히 최하위권인 인간개발지수

그의 주장은 노동조합 사무소의 입장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와가두구의 ‘마르크시즘 사령부’라 불리는 노동조합 사무소에는 부르키나파소의 모든 노조조직들이 소속돼 있다. 2016년에는 내부 인테리어까지 마쳤다. 새로운 집권당의 ‘선물’이었다. 일주일 중 6일은 각종 회의와 워크숍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우리가 방문했던 2017년 9월의 어느 토요일에는 부르키나파소의 6대 노조 대표들(5)이 1층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부르키나파소의 노조 가입률과 관련해 CGT-B가 한 감사기관에 요청했던 조사의 결과를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단편적인 자료인 탓에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조사 결과는 부르키나파소 노조의 높은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조사된 노동자 53만 701명(공무원 15만 6,231명, 민간기업 노동자 36만 9,470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7%가 노조에 가입돼 있었다. 조사 기관에 의하면 이는 상당이 높은 수치로, 이웃 서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수준이다.

그러나 조사결과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 이 조사는 사회보장기금에 분담금을 내는 노동자들만을 대상으로 했으며, 이는 부르키나파소 경제인구의 8%에 불과하다. 나머지 92%의 대부분은 비공식적 경제에 속해 있는데, 식량 생산을 위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 부르키나파소 내 300여 개 금광에서 일하는 사금 채취자, 행상인 등 약 600만 명이 노조와는 무관한 상태다. “오늘날 국민들은 노조에 대해 신뢰가 없습니다. 노조는 10만 명의 공무원들을 위한 수호자일 뿐 나머지 1,700만 명 부르키나파소 국민들의 수호자는 아니라는 것이 국민들이 내린 최종 결론입니다.” 와타라는 강조했다. 토마 상카라의 의견도 이와 비슷했다.

가입자가 10만 명에 이르는(‘계급투쟁을 위한 혁명적 노조 활동’과 같이 동일한 지향점을 공유하면서 CGT-B에 연관된 독립 노조의 가입자까지 합하면 약 16만 명) 부르키나파소파소 노동총동맹(CGT-B)은 부르키나파소 최대의 노조다. CGT-B의 사무총장인 바솔마 바지에는 독특한 불어를 구사하는 50대 활동가다. 그와 단 몇 분간 나눈 대화에서는 엥겔스, 마르크스, 레닌 등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와타라는 ‘버섯’ 조직들의 실패에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봉기 이후 노조 운동은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14년 봉기 때 노조가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질베르 디엥데레 장군의 주도 아래 과거체계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벌였던 2015년 쿠데타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주장했다. 그는 2014년 봉기가 “표현의 해방”, “사법권과 입법권의 독립”, 그리고 수많은 계약직 직원들을 공무원 신분으로 전환한 것, 노동법을 노동자들의 권리를 더 많이 보장하는 방향으로 현재 개정하고 있는 것 등과 같은 “몇몇 사회적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은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현재 부르키나파소의 경제성장률은 봉기 이전과 동일하지만(IMF에 의하면 2016년 +6.2%), 부르키나파소 국민들의 대부분이 이 수치를 전혀 체감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봉기 이전과 같다. UNDP의 인간개발지수(HDI) 순위에서 부르키나파소는 여전히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188개국 중 185위). 

잦은 파업, 노조 플랫폼들 간 경쟁

CGT-B와 다른 노조들은 오늘날 계속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재무부, 경찰, 교육계, 보건 분야, 심지어 행정관들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파업이 발생했다. “시민사회조직들이 위축돼 있는 동안, 일부의 경우 마비 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노조는 기선을 제압했습니다.” “자유를 위한 경제”를 주장하는 연구 및 교육그룹인 Free Afrik 측은 말했다. 2008년과 2014년 사이에는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연간 5~15회 정도의 파업이 있었지만, 지난해에는 40건 이상 일어났고 올해인 2017년도 작년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와 같은 시위의 물결은 분야별로 원하는 요구사항들이 많아졌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노조 플랫폼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졌음을 방증한다.(6)

콩파오레가 사임한 이후 노조의 수는 급증했다. 6대 노조와 관련이 없는 42개의 독립적인 조직들 가운데 2/3는 2014년 이후에 만들어졌고, 특히 공무원들의 노조 설립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Free Afrik의 수장인 라 사블가 세이두 우에드라오고는 이런 현상이 민주적 발전의 증거가 아니라 2010년 봉기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7) 강경파 지식인 우에드라오고는 과도 정부 시기에 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토마 상카라 추종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고 사업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흔치 않은 인물로, 노조들을 향한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1990년대의 노조들은 공공의 자유를 비롯해 국민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합의 이익과 관련된 요구사항들만 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PCRV의 잘못이라고 우에드라오고는 말한다. 그에게 PCRV는 “선동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단체로, 결국에는 무엇이 됐든지 간에 정권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사실, 그동안 불법 정당으로 활동해오기는 했지만 PCRV와 정부 간의 연결 고리는 끊어진 적이 없다. 콩파오레 정부 때나 카보레 정부 때나 상황은 마찬가지다. “블레즈 콩파오레는 PCRV의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콩파오레 전 대통령의 측근이 말했다. “콩파오레는 그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필요시에는 자금도 대줬습니다.” 알리두 우에드라오고를 포함해 PCRV의 회원들 중 일부는 최근에 정부 요직에 임명됐다. 2016년에는 카보레 대통령의 임명으로 MBDHP의 전 지도자가 새로운 헌법 초안의 작성을 담당하는 위원회의 위원회장 직에 올랐다.

그러나 과도 정부 시기에 또는 2015년 카보레 대통령 당선 이후에 정부 관료 임명을 수락한 노조 출신의 책임자들 일부는 사실상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모든 투쟁에서 콩파오레의 편에 섰던 기자이며 과도 정부 때 국회를 이끌었던 셰리프 시는 현재 대통령의 고위 대표이지만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시민 빗자루’의 몇몇 회원들은 정부로부터 토마 상카라의 추모관 건립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들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힘쓰기보다 다른 업무에 몰두하도록 만들기 위한 꼼수가 아닌가 합니다.” 2014년 봉기에 관한 조사를 진행한 압둘레이 우에드라오고는 추측한다.(8) 한동안 그들과 자주 접촉했던 한 프랑스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Y'en a marre(세네갈의 정당. ‘지겨워’라는 의미)’의 지도층은 명확한 정치적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시민 빗자루’의 행보는 정치적 선동과 선전에 가깝습니다.” 세네갈의 ‘동료들’과는 달리, ‘시민 빗자루’의 일부 회원들은 여전히 정부와 적절한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다.  


글·레미 카라욜 Rémi Carayo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특파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다비드 코멜라, ‘부르키나파소의 청년단체, 시민 빗자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5년 5월호.
(2) Mathieu Hilgers&Augustin Loada. 『Tensions et protestations dans un régime semi-autoritaire: croissance des révoltes populaires et maintien du pouvoir au Burkina Faso(준 독재주의 체제에서의 긴장과 항거 : 민중 봉기의 증가와 부르키나파소 정권의 유지』, Politique africaine, 2013/3(n° 131), Paris.
(3) Charles Kabeya-Muase, 『Syndicalisme et démocratie en Afrique noire. Le cas du Burkina(블랙 아프리카의 노조활동과 민주주의. 부르키나파소의 사례)』, Karthala, Paris, 1989.
(4) Mathieu Hilgers&Augustin Loada, Art. Cit.,2013.
(5) 6개 주요단체는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du Burkina(CGT-B), Confédération Nationale des Travailleurs du Burkina(CNTB), Confédération Syndicale Burkinabé(CSB), Force Ouvrière-Union Nationale des Syndicats libres(FO-UNS), Organisation Nationale des Syndicats Libres(ONSL), Union Syndicale des Travailleurs du Burkina(USTB)다.
(6) 『Burkina Faso 2016/2017. S’éloigner du précipice, engager le renouveau!(파멸의 길에서 벗어나, 부흥의 길에 동참하라!)』, Institut Free Afrik, Ouagadougou, 2017년 1월. 
(7) Thomas Sankara, 『la liberté contre le destin(토마 상카라, 운명에 대항하는 자유)』에서 Ra-Sablga Ouedraogo의 서문 참조, Syllepse, Paris, 2017.
(8) Abdoulaye Ouedraogo, Sylvie Capitant, 『Burkina Faso: mobilisations sociales pour une insurrection inachevée(부르키나파소: 미완의 봉기를 위한 사회적 동원)』, in État des résistances dans le Sud, Afrique, Cetri, 2016.


박스기사 

토마 상카라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

1987년 10월 15일 일어난 토마 상카라 암살사건의 진실은 밝혀질 것인가? 2014년 10월 블레즈 콩파오레 대통령이 퇴진하자, 부르키나파소 역사에서 상처로만 남아있던 이 사건의 봉인이 해제됐다. 그동안 생명에 위협을 느껴 입을 열지 못했던 증인들도 하나둘씩 증언을 시작했다. 무차별적으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상카라와 그의 동료들 12명이 숨진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알루나 트라오레도 그중 한 명이다.

2015년, 과도 정부는 법원에 이 사건의 심의를 허가했다. 이에 심의를 관장하는 군사법원의 재판관 프랑수아 야메오고는 콩파오레 전 대통령과 질베르 디엥데레 참모 사령관을 포함해 총 17명을 고발했다. 부르키나파소에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본 사건의 재판은 2018년에 열릴 예정이다.

총격에 직접 가담한 특공대원 6명의 이름은 알려졌지만, 지시를 내린 배후의 인물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수없이 많은, 그리고 서로 모순되는 가설들이 존재하는데, 누군가를 체포하려던 중에 일어난 단순한 ‘실수’였다는 설부터, 프랑스, 코트디부아르, 리비아가 주도한 국제적 음모였다는 설까지 다양하다.(1) 토마 상카라의 측근들이 주장하고 있는 음모론은 현재 법적으로 조사 중에 있다. 2016년 4월, 재판관은 프랑스 정부에 사법공조의뢰서를 보내 일부 프랑스 문서들에 대한 ‘군사기밀’ 해제를 요청했다. 몇 달간의 침묵 끝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11월 28일, 모든 프랑스 문서들의 기밀해제를 약속했다. 

붉은색 베레모와 거침없는 화법으로 유명했던 토마 상카라는 1983년 8월 대통령직에 오른 후부터 주변에 수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국내외의 구분이 없었다. “토마 상카라는 서방 국가들 앞에서 쩔쩔매는 아프리카의 지도자들과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또 그에 걸맞은 행보를 이어나감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과거 동료지간이었던 피델 키앙테가는 회고했다. 아프리카 엘리트층의 부패를 비판하고, 신식민주의를 격렬하게 규탄하고, 부르키나파소의 부채문제를 해결하려 힘쓰면서, 그는 젊은이들, 특히 프랑사프리카의 주요 인물들(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 토고의 냐싱베 에야데마)을 국가수반으로 둔 주변국의 젊은이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고, 모든 특권을 거부하고, 또한 부르키나파소가 비록 지금은 최빈국들 중 하나지만, 스스로 발전을 이뤄갈 잠재력이 있으며 투자자에게도 얼마든지 ‘No’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것이 비록 당원들과 지지세력이 원하는 관례에 어긋날지라도 말이다. 토마 상카라는 아프리카 국가도 다른 방식으로 통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산 증인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상카라는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했다. 환경보호, 여성권익 향상, 부채문제 해결, 빈곤층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한 그의 연설은 오늘날의 활동가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있다.(2) 토마 상카라의 기억은 부르니카파소의 2014년 봉기뿐만 아니라 세네갈, 토고, 가나에서 일어난 시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제 넬슨 만델라, 파트리스 루뭄바, 콰메 은크로마와 함께 아프리카의 위대한 지도자들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재판 결과가 어떻든, 토마 상카라의 투쟁은 이미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글·레미 카라욜 Rémi Carayol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1) Radio France internationale 사이트의 웹문서 『Qui a fait tuer Sankara?(누가 상카라의 암살을 지시했나?)』 참조. www.webdoc.rfi.fr
(2) 토마 상카라의 연설문집 『Thomas Sankara parle. La révolution au Burkina 1983~1987(1983~1987년 부르키나파소의 혁명에 대해 토마 상카라가 말하다)』, Pathfinder, Montréal,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