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왕국 내 ‘탈(脫) 와하비즘’의 열쇠

2018-02-28     나빌 물린느 |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연구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다방면으로 깊이 있는 개혁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극단주의 해결에 대한 약속이 반드시 사우디아라비아의 ‘탈(脫) 와하비즘’을 의미하지 않는다. 군주제를 향한 종교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와하비즘 고위 성직자들은 항상 이전 왕들의 개혁시도에 잘 적응해왔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의 왕세자 전격 책봉은,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질 것을 의미한다. 2017년 6월 왕세자가 된 리야드의 새로운 권력자, 빈 살만 왕세자는 세상을 들썩이게 하는 행동과 선언으로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사우디 사회를 재정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왕세자의 야망이다. 이 야망은 정치‧경제‧외교 분야의 긴밀한 통제를 통해 실현되겠지만, 무엇보다 빈 살만 왕세자가 자신의 절대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우디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인) 분야, 바로 종교를 통제해야 한다. 여성들의 운전 허용, 콘서트 개최, 영화관의 재개관 등은 온건 이슬람 노선의 일환으로, 왕세자의 이례적이고 혁명적인 계획을 의미하는 여러 신호로서 광범위하게 풀이된다.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와 제도의 ‘탈(脫) 와하비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지금 논의해야 할 것은 이 온건적 정책 발표 효과보다, 왕세자 계획의 실현을 담보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적‧사회학적 변수다.

재정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 와하비즘

와하비즘을 확산시키거나 반대로 주변부로 밀어내는 여러 시도는 사우디의 다사다난한 정치-종교적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 중앙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된 사우디의 신정정치는 주도권 장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글자 그대로 해석한 코란과 구세주 사상의 엄격한 교리를 기반으로 한다. 와하비즘은 수니파의 율법학파인 한발리학파에 기초하고 있다.(1) 와하비즘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하브(1703~1792)는 이승과 저승에서 성공할 유일한 방법이 한발리학파 교리와 일치하는 실천과 생각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교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이들, 특히 수피파(이슬람교의 신비주의 분파)의 광신적 운동은 공동체에서 축출됐다. 압둘 와하브에 의하면, 이슬람을 보호하거나 전파하기 위한 전쟁을 의미하는 ‘지하드’는 올바른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데려오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런 교리를 가지고, 사우디 토후국은 18세기 말~19세기 초 아라비아반도에서의 영토확장 정책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공동체가 안정을 찾고 아라비아반도 여러 지역 내 교리가 전파되자 압둘 와하브의 태도는 미묘하게 변화했다. 특히 알타크피르(Al-takfir, 다른 무슬림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행위)에 대한 태도를 바꿔 다른 무슬림들도 수용하도록 했다. 기존 질서를 신속하게 통제하는 진정한 종교적 기득권이 된 압둘 와하브 계승자들은 교리의 엄격한 장벽을 여러 방면으로 완화했다. 특히 수피즘과 여러 이슬람 분파를 처벌하는 수위를 조절했다. 이런 방식으로 압둘 와하브 계승자들은 와하비즘을 일상화하는 과정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사우디 토후국은 19세기 초 메디나와 메카를 정복한 후 더 이상 변두리 공동체가 아닌, 이슬람의 강자로 떠오르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와하비즘은 더 이상 주변 현상이 아닌 무슬림 공동체인 움마(Ummah)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이후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으로 와하비즘 교리는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다. 역시 무슬림이던 오스만제국에 맞선 투쟁과 후퇴한 사우디 토후국의 통합과 통일을 지키기 위해, 와하비즘의 율법학자들은 19세기 내내 극단적 보수주의와 배타주의 이념을 확장했다. 그리고 여러 호의적 상황 덕분에 압둘 아지즈(1902~1953) 국왕은 와하비즘의 율법학자들이 세운 이념 대부분을 기반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설했다.

와하비즘 성직자들과 사우디 군주 간 동맹이 영원히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사우디 군주는 종교적 전통의 수호자 역할과 국가의 수장 역할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우디 군주는 위기를 피하고자 이중 작전을 실행한다. 더 광범위하고 온건하며 현대화한 정치-종교 흐름, 즉 이슬람 개혁주의 속에서 와하비즘을 ‘희석’하면서 한층 수용하기 쉬운 와하비즘으로 만든 것이다. 

와하비즘의 약화와는 다른, 이런 와하비즘 재정비 시도는 사우디 성직자들의 높은 적응력을 보여준다. 교육과 행정 분야, 지하드와 비(非)무슬림 관련 교리 등에서 몇 가지를 양보한 대가로, 사우디 성직자들은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막스 베버가 정의한 ‘책임 윤리’를 찾아볼 수 있다(책임 윤리란, 예견할 수 있는 결과를 충분히 고려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2) 즉, 힘의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비교 측정한 후에 행동하는 능력을 말한다. 와하비즘은 바로 이 책임윤리를 통해 위기를 극복했고, 지역에서 자신들의 지배를 확립하며 파이살 국왕(1964~1975) 통치시대부터는 다방면으로 야심을 드러낼 수 있었다.

위기 속에서 꿈꾼 ‘리야드의 봄’, 그러나…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우디아라비아는 대내외적 여러 문제에 직면하는데, 특히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이집트 나세르주의에 맞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우디 군주는 국가구조를 현대화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와하비즘 성직자들의 이익을 해치지 않아야 했다. (특히 여성들의) 교육 보편화, 해외인력의 대거유입, TV와 영화관 등의 허용, 종교경찰의 특권 축소와 예산삭감, 자유지역 설립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우디 군주와 와하비즘 성직자들 간에 갈등이 생겨났다.  

이때 와하비즘 성직자들은 다시 한번 양보와 회피적 언사, 압력이 결합된 그들만의 적응전략을 살려 갈등을 막고 사우디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나는 상황을 모면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교묘히 빠져나오기 위해 오일달러 흐름과 이집트 투쟁 상황을 이용했다. 또한, 극단적 보수주의자인 와하비즘 성직자들은 ‘종교에 직업적으로 종사하지 않은 사람들’의 노하우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확산되는 현대화에 맞설 수 있는 여러 기관들을 세웠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수많은 교육기관과 연구소, 행정기구와 법률기관, 단체, 언론기관이 불과 몇 년 안에 세워졌다. 이와 동시에 와하비즘 성직자들은 세속주의에 맞서고 새로운 이슬람 교리로서 와하비즘을 추진할 목적으로 범이슬람기구(세계무슬림연맹, 메디나이슬람대학교 등)를 만드는 데 착수했다.

대립적인 두 길을 오가는 와하비즘 성직자들은 군주제의 딜레마를 이용해, 때가 오면 바로 펼칠 수 있는 가공할 영향력을 지니게 됐다. 1979년 여러 사건이 사우디아라비아 사회를 강타했다. 이란에서 발생한 이슬람 혁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극단주의 세력이 주도한 메카사원 점거 사건이다. 그리고 그다음 해 사우디아라비아는 예산 어려움을 겪으면서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불안정한 상황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년 전부터 사우디에 자리 잡은 무슬림형제단 지도부의 지지를 받던 와하비즘 성직자들의 지원으로 전통주의 경쟁에 뛰어든다. 결국 영화관을 폐쇄하고 공공장소 내 남녀를 분리하면서 사우디 사회가 다시 폐쇄적으로 변화하는 동안, 와하비즘과 무슬림형제단의 여러 이념이 뒤섞이며 사우디 이슬람주의(Sahwa)와 지하디즘이 등장했다. 게다가 지하디즘은 부자들에게서 빼앗다시피 한 기부금으로 재정지원을 받았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태풍의 눈 안에 있게 됐다. 사회적 변화, 석유가격 인하, 미국의 압박과 지하디스트의 위협으로 사우디아라비아 권력층은 완화정책을 실행하게 되는데, 정책의 큰 기둥은 ‘온건’과 ‘개방’ 그리고 ‘관용’의 이슬람을 추진하는 것이다. 일부 지식인과 논설위원들은 숨김없이 와하비즘을 비판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종교경찰의 특권은 축소되고 상호적 종교대화가 이뤄졌다. 또한 많은 학생들이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여성지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며 이와 함께 고등교육 접근을 더 쉽게 하는 등 여성의 지위가 (약간은) 개선됐다. 게다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존이 만들어지고 외국 연구원을 허용하고 자유지역이 활발해졌다.

국가개혁 속에서 몇몇 사람들은 ‘리야드의 봄’, ‘포스트 와하비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환멸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경제가 좋아지고 정치 상황이 안정을 찾기 시작하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점차 처음으로 돌아가고 다시 ‘자유’에 제한을 두었다. 2011년 이후, 보수로의 회귀는 빠르게 진행됐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방적 차원으로 ‘반(反) 혁명’ 정책을 폈는데, 선봉에는 와하비즘이 있었다. 종교 기관의 예산을 늘리면서 백 년에 한 번 일어나는 이슬람 반대 운동의 싹을 자르는 것이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엄격하게 사형제도와 태형제도를 적용하고 반(反) 시아파 토론도 장려하면서 공개적으로 와하비즘 교리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그리고 이 정책에 대한 대가로 율법학자들은 약간의 양보를 했다. 여성에게 지방선거(나라에서 시행하는 유일한 선거) 투표를 허용하고, 보여주기식이었지만 일부 정부기관 내 여성의 자리를 허용한 것이다.

변화를 막고자, 약간의 변화에 동의하다 

2015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를 겪어왔다. 아버지의 지지를 얻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가 2년 만에,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권력을 정당화하면서 대내외적으로 도전을 시도한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변신시키려는 의지를 보여줄 기회를 여러 번 잡았다. 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8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의 운전과 35년 만에 영화관의 재개관(우리는 이 정책의 실행법을 모른다)을 허용한 빈 살만 왕세자는 2017년 10월 24일 ‘극단주의 이념’을 정식으로 비난하고 이를 ‘파기’할 것을 약속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말에 의하면, 이로써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와 다른 종교에 개방적인, 중도‧온건‧관용의 이슬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3) 아라비아반도에서 석유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와하비즘과의 단절 의지를 보이기도 했던, 빈 살만 왕세자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선, 빈 살만 왕세자는 지하디스트와의 구분을 위해서 ‘중용’의 온건 이슬람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뜻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사와(Sahwa, ‘각성’이라는 뜻으로 수니파 각성운동을 주도하는 민병대 조직)를 극단주의의 근원으로 언급한다. ‘사와’는 와하비즘의 이념과 무슬림 형제단의 행동방식을 혼용하고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바로 이 점을 비난한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과 모든 관련 하부조직, 특히 지하디즘을 철저하게 제거하기를 원한다. 이는, 와하비즘 교단에는 가장 큰 기쁨이 될 수밖에 없다.

사우디의 여성 정책은 기회주의와 구조적 강요, 이 두 요소 사이에서 결정된다. 여성의 운전 허용은 압달라 국왕(실상 1995년부터 통치, 공식통치 기간은 2005~2015년)에 의해 시행된 정책을 이어가는 것이다. 여성 운전을 허용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 여성과 국민 일부의 지지를 확보하며 서구사회에 비치는 자국 이미지를 재개선할 수 있다. 이것이 기회주의적 요소다. 한편, 사우디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들이 점차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선 배제된다. 이런 구조적 상황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일하게 된다면 외국인 노동자의 자리, 특히 서비스직을 대체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와하비즘 성직자들은 어떤 입장일까? 이들은 적응하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서 율법학자들은 최소 형태의 이슬람 현대화를 진행하며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던 요소들에 대한 양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예를 들면 주요 성직자들은 이미 몇 해 전 여성들의 운전은 종교적 문제가 아닌, 변화 가능한 사회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의 운전을 허가한다는 발표에는, 여성의 아버지나 법적 보호자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조항이 붙어있었다.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 내 군주제와 종교계 기득권 간 관계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둘의 역사적 연합은 현재로선 재검토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율법학자들은 어김없이 이를 강조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권위의 재편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와하비즘 성직자들은 다시 한번 일부 변화에 동의하는 듯 보인다. 그 무엇도 변하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글·나빌 물린느 Nabil Mouline
역사학자, 정치학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소속 연구원. 저서로는 『칼리프: 이슬람교의 정치적 역사(Le califat: histoire politique de l’islam, Flammairon, 2016)』, 『정치적 이슬람교: 분파, 교리, 이데올로기(Islams politiques: courants, dorctriens et idéologique, CNRS Éditions, 2017)』등이 있다. 

번역·윤여연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Nabil Mouline, ‘Genèse du djihadisme(지하디즘의 기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5년 12월호.
(2) 1918년 ‘소명으로서 정치’라는 제목의 회의에서 다룬 주제로, 1919년 출간된 『직업으로서의 정치(le savant et la politique)』에서 다시 다룬다.
(3)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Future InvestmentInitiative)’ 회의에서 발표한 연설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