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루슈, 프랑스의 그리오* 

2018-02-28     필립 페르손 | 작가

장 루슈(1917~2004)는 카메라에 담기로 작정한 이들에게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자유로운 촬영 수단을 확보했다. 그는 장비를 직접 제작하고 민간 투자자를 구하지 않으며, 다큐멘터리와 픽션 간 경계를 두지 않는 방식으로 시네마 디렉트(객관적이며 연출과 편집이 개입되지 않음-역주)와 에스노픽션의 선구자가 됐다. 대담하면서도 즐겁게 경계를 허문 것이다.


“땡땡이치는 것을 삶의 신조로 삼아라, 그렇지만 이왕 하는 거 진지하게 해야 한다.” 장 루슈는 젊은 영화학도들에게 이렇게 충고했고 또 그 자신도 그렇게 살았다. 교량 및 도로 엔지니어였던 그는 194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자 아프리카로 향했다. 니아메(니제르의 수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식민주의에 대한 혐오, 아프리카인들과의 끈끈한 유대감, 민족학자로서의 소명을 발견했다. 민족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영상인류학’의 개념을 발전시키기 전에도 그는, 아프리카 민족의 의례를 연구하기에 더 이상 연필과 수첩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1931년 <도곤 족의 나라에서>를 제작한 마르셀 그리올처럼 그도 이제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그들의 의례에 관한 자료를 최대한 빨리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독학으로 촬영을 시작했지만 진정한 영화광이었던 그는 1920년대부터 <키노프라우다>(영화로 보는 진실, 러시아식 시네마 베리테)를 제작한 걸출한 예술가인 지가 베르토프와 <북극의 나누크>의 감독인 로버트 플라어티의 영화에 대해 훤했다. 두 명의 거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힘입어, 그는 주로 아프리카에서 자유롭게 촬영하며 전무후무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루슈는 연구주제에 최대한 근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음향 엔지니어 한 명만 동행해 감독 혼자 촬영했다. 초경량 카메라로 촬영하고 싶은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게 하면서 의례에 동참했고, 이 과정은 후에 그가 ‘시네트랜스(Cine-trance, 무아지경에 빠지는 일종의 영화 삼매경-역주)’라고 명명하게 된 상태에서 이뤄졌다. 

초라한 장비에 의존해야 했던 초기에 그는 엔지니어 기질을 발휘해 간단한 수작업은 직접 하기도 했고, 기존 영화의 문법에 도전하고 기술적 돌발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면서 각종 실험을 이어갔다. 루슈는 때때로 화면이 흔들리거나 구도가 언제나 완벽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촬영했다. 그의 눈이 포착한 것에는 경이로운 힘과 아름다움이 배어있었다. 그는 화상과 음성의 동기화가 가능하고 롱 테이크 촬영을 위한 배터리가 갖춰진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황금기를 맞게 된다. 

아프리카에 대한 기록과 그를 둘러싼 비난

<하마 사냥>(1950), <절벽 위의 장례식>(1951) 등 그의 초창기 영화는 순수하게 민족학적 성격을 띠었지만 점차 ‘에스노픽션’이라 불리는 민족지 극영화의 장을 열었다. 그는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의 빈민가 트레슈빌에 정착한 니제르 이민자의 삶을 다룬 <나, 흑인>(1958)을 통해 도시를 향한 열망이 아프리카 사회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일찍이) 포착했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의 목소리나 소리)을 넣은 이 영화에서 루슈는 주인공이 영상에 따라 자유롭게 코멘트를 입히도록 하면서 영화에 독특한 사실감을 부여했다. 다무레, 랑, 이요라는 니제르인 세 명이 돈을 벌기 위해 가나로 떠나는 영화 <재규어>(1967)에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됐다. 그들은 즉석에서 자유롭게 대화를 이끌어 갔다. 

루슈는 이처럼 아프리카인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직접 설명하는 ‘공유 민족학(Shared anthropology, 또는 성찰적 민족학 Reflexive anthropology라고도 함)’을 실천했다. 영화인이자 작가인 우스만 셈벤이 루슈가 아프리카인들을 “마치 벌레처럼” 바라보며 은밀하게 지켜져야 하는 의식을 침범했다고 비난했을 때, 루슈는 “내 작업은 사라질 위기에 있는 전통을 기록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영상을 촬영된 이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 최종편집을 한다”고 당당하게 반박할 수 있었다. 그는 영화에 대한 피사체의 시선을 ‘창의적 반향’이라고 명명했다. 

<아프리카 50>(1980)의 감독 르네 보티에도 루슈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루슈가 도곤 족의 이야기를 촬영하고 있을 때, 프랑스 식민주의를 비난한 탓에 식민지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고 지적했다.(1) 루슈가 식민주의를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투사라기보다는 자유지상주의자에 가까웠다.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다른 영화에 영감을 주는 영화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베르토프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좀 더 과격한 비평을 과감하게 제기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으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1968년 5월 이후의 유토피아를 그린 상징적인 영화인 자크 두아용의 <01년>(1973, 제베의 <원년>을 각색한 영화)에서 니제르를 담은 짧은 시퀀스의 촬영을 장 루슈에게 맡긴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2004년 니제르에서 사고로 사망했을 때 레몽 드파르동은 그가 “아프리카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바꿨다. 그는 우리가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죄책감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2)라고 강조했다.

1957년에 가나 공화국으로 독립한 황금해안 식민지를 촬영한 <신들린 제사장들>(1955)에 대한 반응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독특한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루슈는 송가이족 니제르 이민자들이 추종하는 하우카 종교의식을 이 영화에 담았다. 그들은 식민지 관료(총독, 사령관 등)의 의상을 입고 신들린 춤을 추다가 개를 제물로 바친 후 뜯어먹는다. 다음날 그들 모두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들의 삶을 이어간다. 이 영화에 나온 신들린 제사장들의 모습을 지배자의 광기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수많은 식민지배 당국에서 이 영화상영을 금지했다. 일부에선 이 영화를 아프리카와 야만을 동일시한 인종차별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영화는 프란츠 파농이 언급했듯 식민지 소외를 빗댄 뛰어난 은유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구도를 잡느냐가 바로 미장센”

루슈가 자신의 ‘불량한 친구들’(다무레 지카, 랑 이브라이마 디아, 탈루 무주란)과 함께 즉석에서 촬영한 영화는 더 가볍고 때로는 솔직히 우스꽝스러운 경향을 띤다. 주인공들은 <재규어>, <조금씩 조금씩>(1970), <꼬꼬댁, 닭집 아저씨>(1974), <물 여사님>(1992) 등의 영화에서 열연을 펼쳤고, ‘프랑스의 그리오(구송 시인)’ 루슈는 그들 덕분에 픽션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 <조금씩 조금씩>에서 몽테스키외의 현대판 페르시아인들인 그들은 파리의 ‘다층 건물’을 발견하고 트로카데로 광장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머리 크기를 재고 치아 개수를 세면서 민족학 조사를 하게 된다(몽테스키외는 1721년 익명으로 <페르시아인의 편지>라는 소설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두 명의 출중한 페르시아인 여행자가 뒤죽박죽이었던 당시 프랑스 사회를 돌아보면서, 왕에서부터 최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조롱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역주). <물 여사님>에서 그들은 이제 튤립 몇 송이가 나기 시작한 니제르강으로 최신식 풍차를 옮겨올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 네덜란드로 떠난다. 루슈는 영화를 위해 아프리카 친구들을 아프리카 밖, 특히 파리로 데리고 갔는데 나중에 그는 혼자 다시 파리로 돌아와 ‘파리인 부족’을 장시간 연구하게 된다(아프리카의 부족 문화를 주로 탐구하던 루슈는 왜 자기 자신이 속한 파리의 부족은 다루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파리지안’에 대한 영화 <어떤 여름의 기록>을 기획했다). 거리 행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촬영하기 위한 동시 녹음이 얼추 가능해진 상황에 고무된 그는 에드가 모랭과 함께 <어떤 여름의 기록>(1961)을 제작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두 젊은 여성이 행인들에게 “당신은 행복한가요?”라는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 기술적 측면에서 루슈의 가장 큰 기여는 카메라 감독의 역할을 확장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이 자리를 맡으면서 이 일을 영화의 중심에 뒀다. 그는 “어떤 구도를 잡느냐가 바로 미장센”이라고 여겼고 촬영 감독은 단순히 조명을 조절해 분위기를 잡는 담당자가 아니라 장면(숏)을 창조하는 일에 동참하는 일원으로 봤다. ‘어깨’에 멘 롱 테이크 카메라를 이용해 영화를 제작할 때 자유와 속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즉흥연기를 선호했고, 촬영이 진행되는 흐름에 시나리오를 맡기면서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픽션 부분을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맡겼다. 앙드레 브르통의 열혈독자였던 루슈는 브르통과 마찬가지로 우연을 ‘객관적’이라고 보았다. 자신의 방식대로 실천한 ‘시네마 디렉트’는 기술적으로 그런 작업이 가능해지기 이전부터 <네 멋대로 해라>(1960)의 장뤼크 고다르를 비롯한 누벨바그의 젊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디지털 비디오 카메라’와는 결국 친해지지 못하다

하지만 그가 하루 반나절 만에 <처벌>(1962)의 촬영을 끝냈을 시기에, 젊은 영화인들 대부분은 이미 기존 영화계에 편입된 상태였다. 수업에서 쫓겨난 파리 여고생이 연이은 ‘잘못된 만남’ 속에 뤽상부르 공원과 샹젤리제 거리를 활보하며 보내는 하루를 다룬 이 영화는 45세의 나이에도 그가 여전히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준다. 옴니버스 영화 <내가 본 파리>(1965)의 단편 ‘북역’도 마찬가지로, 젊은 부부가 다투는 장면을 롱 테이크로 낱낱이 분석하는 이 영화에서 <처벌>의 여주인공 나딘 발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북역 철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마무리되는 결말은 관객들을 아연하게 만든다.

대담함의 측면에서, 다른 감독들(장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을 단연 뛰어넘는 이 단편으로 루슈는 프랑스 영화계 복귀를 예고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35mm 카메라 촬영이 의무화되다시피 하면서 촬영팀을 꾸려 영화를 제작해야 하는 등의 제약으로 촬영의 즐거움이 반감됐기 때문인 듯하다. ‘프랑스식’으로 제작한 <디오니소스>(1984)에서 그는 그리스 신들의 비호 하에 기쁨에 도취해 자동차를 제조하는 모습을 담으려 했으나, 결국 미진한 느낌을 남긴다. 초현실적 판타지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아프리카 친구들의 고품격 즉흥 연기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는 전적으로 그들과 함께 일하며 16mm나 ‘슈퍼 8’ 카메라로 지칠 줄 모르고 촬영했다. 그리고 ‘디지털 비디오카메라’라는 기술 진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프링 모터 카메라와 혼연일체가 돼 그 카메라와 함께 꿈꾸고 사색하는 그에게, 디지털 비디오카메라는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매체였다. 

50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는 장편, 중편, 단편을 합해 총 170편 넘는 작품들을(3) 연출했는데 이 중 대부분은 민간제작자의 투자 없이 프랑스국립과학원(CNRS), 또는 그가 1952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앙리 랑글루아 등과 함께 설립한 인류박물관(4)과 산하 민족지영화위원회(CFE) 등 공공기관에 고용돼 제작했다. 궁극의 역설은, 장 루슈가 공무원이자 대학교수였기에 영화가 생계수단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즐거운 인문주의자였던 그의 논조나 표현이 어떻게 그토록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로써 그는 자기 스승인 로버트 플라어티가 장차 진정한 “영화인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 곧 무엇보다 세상에서 얻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고 세상을 촬영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했던 예언을 직접 실천해 보였다.   


글·필립 페르손 Phillippe Person
작가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그리오(Griot): 아프리카에서 특히 민족의 구비 설화를 이야기나 노래로 들려주던 사람, 세습 음악가의 일족이나 음유 시인을 가리킴

(1) ‘Cinéma ethnographique et cinéma d’intervention sociale: des frères ennemis?(민족지 영화와 사회 개입 영화, 적인가 친구인가)’, ‘Jean Rouch, un griot gaulois(장 루슈, 프랑스의 그리오)’호, <CinémAction>, n° 17, Paris, 1982.
(2) Antoine de Baecque, ‘Le ciné-père Rouch(영화계의 대부 루슈)’, <Libération>, Paris, 2004년 2월 20일.
(3) 몽파르나스 제작사에서 『장 루슈, 가벼운 영화!』라는 타이틀로 미공개 희귀영화(<처벌>, <바바튀, 세 가지 조언>, <피곤한 나는 서있다, 나는 누웠다>)를 포함해 총 840분짜리 DVD 10장 박스세트를 출시했다. ‘장 루슈’(516분)와 ‘장 루슈, 아프리카 모험’(547분)이라는 타이틀로 DVD 4장 세트 2질, 개별 DVD로는 <어떤 여름의 기록>(158분), <물 여사님>(172분), <꼬꼬댁, 닭집 아저씨>(144분)가 판매되고 있다.
(4) 그는 첫 번째로 영화박사준비과정(DEA)을 개설했고 파리에 ‘아틀리에 바랑’을 열었다. 아틀리에 바랑은 1981년부터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지망생 1천여 명에게 실습을 통한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