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토르체타가 『중국인 철학자 공자』를 젊은 신부에게 바친 이유는?
문명교류의 비밀 텍스트(6)
2018-02-28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지난 호(1)에서 ‘쿠플레(Ph. Couplet, 1623~1693)가 『중국인 철학자 공자』를 루이 14세에게 바친 이유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앞에서 밝혔듯이, 『중국인 철학자 공자』 서문의 저자는 쿠플레가 아니고 인토르체타(Pros. Intorcetta, 1625~1696)였다. 책을 헌정하려 했던 이도 루이 14세가 아니었고 동양에서 선교를 희망하는 젊은 신부들이었다. 여기에 얽힌 사연을 공개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책의 저자를 소개하겠다. 인토르체타는 1625년 8월 28일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 1696년 10월 3일 중국 항주에서 사망했다. 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642년 12월 31일에 예수회에 입회했고, 1654년에 메시나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원래는 카타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의 로마노 대학에서 신학공부에 전념했다. 그가 쿠플레와 함께 중국으로 출발한 해는 1657년이었다. 1659년에 도착했다.
박해 끝에 결국 인정받은 그리스도교
인토르체티는 주로 중국 강서성 구강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 그가 북경으로 간 것은, 더 정확히는 ‘소환’된 것은 1665년 6월 28일이었다. ‘소환’이란 표현을 쓴 것은 양광선이 예수회 신부를 고소했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역법소송(Calendar case)’이 그것이다. 서양의 천문학과 동양의 천문학이 정면으로 맞붙은 사건이다. 결과적으로 서양 천문학이 승리한 사건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회 신부 대부분이 곤욕을 치렀다. 그는 1666년 10월에 예수회를 관리하는 부감독관으로 선출돼 로마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지만, 광둥에서 갇혀서 1년을 넘게 머문다. 그러다가, 1668년 9월 3일에 마카오로 간다. 1669년 1월에 유럽으로 가는 배에 올라 1671년에 로마에 도착한다. 인토르체타는 시찰관 자격(1676~1684)으로 1674년 10월에 중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중국 전체를 관장하는 총대리(1686~1689)로 활동한다.
그의 활동 중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동양 사상과 서양 종교 간의 긴장은 예수회가 중국에 들어온 초기부터 있었지만, 갈등은 아담 샬이 청나라의 과학-기술-군사에 관한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본격화된다. 위에서 소개한 양광선과 마르티니의 논쟁이 그것이다. 충돌은 강서성 지역에서 큰 세를 유지하고 있던 도교 세력과의 다툼에서 확장된다.
인토르체타가 관장하던 지역인 항주에서도 1678년과 결정적으로 1691년에 충돌이 발생한다. 사실상 박해였다. 사정이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자, 인토르체타는 강희제에게 포교의 자유와 “그리스도교”를 불교나 도교와 동등하게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 결과 포교 100여 년 만에 마침내 예수회는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으로 승인받게 된다(1692년). 건축학적으로도 인토르체타는 중요한 업적을 남긴다. 1692년 10월 2일에 건립된 항주 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건축도 중요하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중요한 점은 역시 『사서』의 번역을 기획하고 직접 출판했다는 것이다. 인토르체타의 노력은 최종적으로 쿠플레에 의해 완결됐다. 1687년에 파리에서 출판된 『중국인 철학자 공자』가 그것이다. 책은 『서문』, 『공자의 생애』, 『대학』, 『중용』, 『논어』 그리고 『중국연대기』로 구성돼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재할 글에서 차례로 소개하겠다. 이 중 『서문』은 네 개의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루이 14세에게 바치는 헌사,’ ‘중국의 학문과 종교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와 이에 대한 예수회의 입장을 밝히는 제1부,’ ‘예수회의 선교 전략이 보유론(補儒論)에서 색은주의(索隱主義) 노선으로 옮기게 된 과정을 해명하는 제2부’, 마지막으로 『공자의 생애(vita Confucii)』가 그것들이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사본 6277』을 파리국립도서관에서 만나게 됐고, 해서 이를 『파리본 1687』과 비교해 보니, 먼저 ‘헌사’의 저자는 쿠플레였고, 제1부와 2부의 저자는 인토르체타였다. 하지만 『공자의 생애』의 저자는 1662년에 『대학』을 번역했던 다 코스타(Ignacio da Costa, 1599~1666)였다. 중요한 점은 『파리본 1687』과 그가 저본(底本)으로 사용했던 『필사본 6277』 간 큰 차이가 있고, 쿠플레가 자신의 입장과 필요에 따라 인토르체타의 글 대부분을 삭제하고 편집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쿠플레본은 2012년 메이나르(Th. Meynard)에 의해서 편집돼 다시 출판된다.
17~18세기 동서교류의 증거,
『중국인 철학자 공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이나르가 편집한 『중국인 철학자 공자』(이하 메이나르본)는 많은 오식과 탈자를 가진 텍스트다. 내 판독에 따르면, 메이나르본은 파리본 1687의 판독에 실패했다. 결정적으로 필사본 6277본을 참조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그동안 국내외의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던 인토르체타의 생각을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이유다. 이를 통해 『중국인 철학자 공자』의 관련된 논의에 새로운 전환점이 열리기를 희망한다.
이런 희망을 피력하는 이유는 17~18세기 동서 교류를 증언하는 여러 책 중 그 실제와 전개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 『중국인 철학자 공자』이기 때문이다.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서양의 사유 체계와 동양의 사유 체계가 전면적으로 비교된 거의 최초의 문헌이고, 다른 한편으로 예수회 신부들이 서양의 그리스도교를 동양 전통에 이식-착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긴장과 충돌이 고스란히 반영된 문헌이기에. 참고로, 서양의 종교와 동양의 사상이 서로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과정을 지나 본격적으로 융합하는 단계에서 벌어졌던 충돌이 “전례 논쟁”인데, 이 과정에서 태어난 작품이 『중국인 철학자 공자』다. 『중국인 철학자 공자』와 중국의 전례 논쟁에 대해서는 많은 선행 연구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먼젤로(D. E. Mungello)의 역작인 『진기한 나라 중국』, 2012년에 출판된 메이나르(Th. Meynard)의 『중국인 철학자 공자』, 2012년에 출판된 김혜경의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역사와 의미』와 2012년에 출판된 스탠다이어트(N. Standaert)의 『중국의 전례 논쟁에서 조명받지 못한 목소리들』이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필사본 6277』을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필사본 6277』은 도대체 어떤 문헌일까? 크게 두 가지를 말하겠다. 먼저, 『필사본 6277』이 하나의 문건으로 묶이게 된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겠다. 그것은 ‘역법 소송’ 사건이었다. 전거는 아래와 같다.
6. 그 때에 갑작스럽게 무섭고도 사나운 재앙이 덮쳤고, 우리의 노력들과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일을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니 거의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1665년에 터졌던 역법 소송 사건) 이때에 그리스도의 진리를 적대시 하는 자들이 무슨 짓들을 꾸몄는지,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하는 선교자인 우리가 무엇을 겪어야만 했는지,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기적으로 저 불경한 자들이 꾸민 사악한 짓들을 깨부수거나 제압했는지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늘어놓아야 할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중략...)
가장 슬픈 시기였음에도 (이런 일에) 가장 적당한 여유가 주어졌기에 최상의 호기였다. 또한 아주 많은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의심스럽고 흔들렸던 나의 발걸음들을 더욱 굳건하게 내딛을 수 있었다. 또한 더 나아가 이들은 이 작품(『사서』)을 유럽의 활자로 출판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일이라는 생각을 굳힐 수 있도록 확신의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우리의 책들을 중국 활자로 출판하는 것은 일단 시간이 많이 걸리고 무엇보다도 드는 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경험을 통해서 배운 사실이다).
( 『필사본 6277』. p.iii.)
다음으로, 쿠플레가 지워버린 문장들의 성격에 대해 말하겠다. 인토르체타가 『필사본 6277』을 묶은 이유는 『사서』가 중국의 선교 사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거는 이렇다.
5. 중국에서 아주 중요한 일들에 대한 판단의 단서와 마치 영원불멸의 진리로 여겨지는 말들의 출처가 『사서』라는 점도 알게 됐다. 그래서 신부들은 굳은 결심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맨 먼저 『사서』의 이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겨운 일이었는지는 형언키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읽어보니, 이 책들에서는 본성(natura)의 원리와 법칙에 어긋나는 대목을 한 구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진실로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많은 글의 경우, 이를 외웠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마음을 먹게 할 정도였다. 우리의 이와 같은 큰 노력에 대한 성과도 마찬가지로 컸다. (중국인들의 의견에 따르면,) 자신들의 원리들에 의해서 해명된 그리스도의 진리가 상고 시대 왕들과 현자들을 그 증인으로 삼아 견고해지고 그들의 권위에 기대어 빛나게 됐으며 마침내는 그들의 의견과 말들로 제시됐고 아름답게 꾸며졌고, 그 결과 중국인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 이상 이방의 그리고 야만의 것으로 혐오하고 특히 경멸하는 시선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중국의 선교사업에 『사서』가 유용하고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인토르체타의 문장과 문단들이 거의 ‘조직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쿠플레에 의해서 지워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인토르체타가 『중국인 철학자 공자』를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헌정한 편지가 쿠플레에 의해서 지워지고 루이 14세에게 바치는 헌정사로 대체됐다는 사실에서 쉽게 확인된다.
인토르체타 『헌사』의 시작이다.
7-a. 중국과 극동의 다른 지역으로 선교를 희망하는 지원자들에게
나는 여러분 중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능한 한 빨리 내가 출발했던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럽에 왔다. 저 활활 타오르는 열망이 이렇게 희망하도록 나에게 명하고 있다.(…) 중국을 보아라. 저 광활한 제국 중국을.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동양의 전 지역이 여러분의 진영이다. 그리스도의 용맹을 휘날릴 무대(『마태오 복음』 제13장)다. 나는 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여러분임을! 기쁜 마음으로 길 떠날 채비를 해라.
다음은 쿠플레가 루이 14세에게 바치는 『헌정사』의 시작이다.
그리스도의 가장 경건한 루이 대왕께
(1) 대왕이시여, 이미 저 멀리 극지(極地)까지 넓게 퍼진 대왕의 덕성과 지혜에 대한 명성에 감동한 것이 분명한 태국인들의 강력한 왕의 사절단이 장엄한 채비를 갖추어 전하를 방문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여기 극동(極東)으로부터 한 사람이 당도했습니다. 중국 황제들의 혈통을 이어받는 왕자입니다. 중국인들은 그를 콘푸키우스(孔子)라 부릅니다. 그는 최고의 현자이고, 도덕과 동시에 정치의 사표(師表)이고 예언 (자체)입니다. 이는 중국에서 큰 명성을 휘날렸던 모든 이들이 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바입니다.
(『파리본 1687』 p.i)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양자를 비교하면 유럽에서 『필사본 6277』의 출판을 통해서 쿠플레는 루이 14세와 같은 군주의 교육과 설득에 방점을 찍었다면, 인토르체타는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려는 젊은 사도들의 교육에 무게 중심을 뒀다. 전거(典據)는 다음과 같다.
나는 우리의 밤샘 작업의 결실의 주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여러분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여러분이 선교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가능한 한 빨리 유럽에서 출판돼서 여러분의 손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이런 마음에서였다. (…) 정치-도덕에 대한 학문을 막힘없이 설명할 것이고, 이를 들은 (중국) 사람들은 당연히 경이로움을 표할 것이고 동시에 즐거워할 것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권위도 함께 커질 것이다. 이때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저 학문 자체를 여러분이 알고 있는 철학의 심판대로 소환해서 엄중하게 검사하고, 마치 자연에서 막 캐어 다듬지 않고 아직 모양을 갖추지 못한 은 덩어리를 용광로에 넣듯이, 형이상학이라는 시료를 이용해서 불순물과 쓸모없는 찌꺼기들을 걸러내어야 한다.
또한 이어서 유럽 표현법의 세련된 장식과 기품 있는 위엄을 덧붙여야 한다. 마치 보석들로 금을 갈무리하듯이 말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복음의 태양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감싸주게 되면, 여러분은 이 학문을 바로 하늘로 끌어 올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이 책을 출판한 것은 유럽 사람들에게 중국의 지혜를 제시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필사본 6277』, p. viii)
전례 논쟁, 중국의 상제가 ‘주님’이라니…
서양 철학의 도움을 받아 유교를 정련하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교리로 포장하는데, 『사서』를 그 대상으로 삼겠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필사본 6277』은 원래 저자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쿠플레의 편집을 통해 그러니까 『중국인 철학자 공자』는 원래 저자인 인토르체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유럽의 독자들에게 소개됐기 때문이다. 조금 보충하겠다. 이는 『공자 서문』의 핵심 요지가 무엇이고, 『필사본 6277』이 역사적으로 어떤 논쟁사의 배경에서 묶이게 됐는지에 대한 해명으로 직결돼 있기에. 각설하고, 쿠플레가 삭제하거나 생략한 문장들은 모두 ‘전례 논쟁’(제사 문제를 놓고서 17~18세기에 중국과 유럽에서 동시에 벌어졌던 논쟁)과 관련된 서술들이다. 쿠플레가 지워버린 문단을 하나 소개하겠다.
57. 비로소 밝혀진 진실을 다시 어둠으로 덮고 이미 논쟁이 끝났음에도, 어언 70여 년이 지난 지금,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평화가 참으로 필수적임에도, 그럼에도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무기를 드는 것을 누구라도 당연히 비난해야 함이 분명하다. 그가 올바르고 현명한 자라면 말이다. 나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도록 강요한 것은 한 사람의 독단적인 질투다. 이 사람은 옛날 논쟁을 담은, 하지만 불완전한 사본을 우연히 찾아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는 갈기 갈긴 찌긴 누더기 조각인데) 이 사본은 어떤 계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을 피할 수 있었다. 그에게 우리 예수회에 속하는 그와 친했고 신의가 돈독했던 어떤 이가 단지 감사의 표시로 읽어보도록 이 사본을 줬다. 갑자기 격분했다. 진실을 규명해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우리 예수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필사본 6277』, p. xx)
“옛날 논쟁”은 전례 논쟁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인토르체타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58. 따라서 다른 이유를 차지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이유가 나로 하여금 여기에 간략하게 중국인들의 새로운 철학(신유학)이 『성리대전』이라는 책에서 자연의 생성, 원리들과 원인들에 무엇을 밝히고 있는지를 해명하도록 압박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와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 선교사들 사이에서 이런 방식으로 내가 조언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이에 대해서는 1668년에 며칠 밤을 온전하게 새워가면서 엄밀함에 못지않게 충분히 토론했다. 이 해에 벌어진 박해와 광둥에서의 감금은 중국 선교에 나선 신부들에게 이 사태를 조사하고 논의할 수 있는 휴식을 제공했다. 이런 밤샘의 기록들은 우리 선교회의 문서 보관소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문서보관소에 고이 보존돼있다. 이런 이유에서 이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우리는 이제 옛날 철학(그 어떤 무엇이 그것이었다면)과 새로운 철학(신유학)의 해명에 착수하겠다.
인토르체타가 『필사본 6277』을 엮고 펴내려는 계기가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전례 논쟁이었다. 두 명의 증인을 부르겠다. 도미니코회 소속의 사제로 중국에 사찰관으로 부임해 8년간 전례 논쟁을 관찰한 사르페트루스(D. M. Sarpetrus, 17~18세기)를 먼저 이 자리에 초대한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신부들은 중국인 신자들이 철학자 공자와 그들의 죽은 조상들을 모시는 몇몇 의례들을 승인하거나 관용한다고 스스로 고백하는데, 이런 조치는 안전할 뿐만이 아니라 (검사성성(현재는 신앙교리성)이 승인했듯이) (중국의) 주요 분파들이 내세우는 원리들을 검토해보면, 비록 반대 의견이 제시됐지만 그것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중국의 종족들에게 복음의 문을 여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매우 유용하다고 판단한다.
(『필사본 6277』, p. xx)
두 번째 증인으로 롱고바르디(N. Longobardi, 1565-1655)를 초대하겠다. 롱고바르디는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의 적응주의 노선에 반기를 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623년에 저술한 『최고의 통치자인 상제, 하늘에 속하는 신령들인 천신, 이성적인 혼인 영혼에 대해』에서 리치를 이렇게 공격한다.
중국의 상제(이 용어는 높은 곳의 왕을 뜻한다)를 놓고서 씨름한 지 이미 25년이 넘었다. 동료의 권고에 따라서 중국 왕실에 들어오자마자 공자의 『사서』를 읽었다. 상제에 대한 여러 주석가들이 제공하는 개념이 신적인 본성에 반대한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선교에 나섰던 신부님들은 나에게 말했다. “상제가 우리의 주님”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중국의 문헌들과 주석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이런 차이가 이와 같은 해석의 오류를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2)
한 마디로, 리치의 『사서』 해석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롱고바르디에 따르면, 리치의 “상제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해석은 견강부회라는 것이다. 지금도 논쟁거리지만, 당시에는 아주 뜨거운 이슈였다. 이 비판으로부터 저 유명한 “전례 논쟁”은 촉발됐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이야기하겠다.
글·안재원
서울대 서양고전학 협동과에서 석사(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나타난 호메로스의 수용과 변용 연구)학위를 받은 뒤 독일 괴팅엔 대학 서양고전문헌학과에서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수사학자인 ‘알렉산더 누메니우의 <단어-의미 문채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키케로의 <수사학>(2006), <Hagiographica Coreana 2> (2012), <인문의 재발견>(2014),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공저, 2016) 등의 저술과 <교황 요한 22세가 보낸 편지에 나오는 Regi Corum은 고려의 충숙왕인가?>(2016), <서양고전문헌학과 동양고전문헌학의 만남> (2017)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다.
(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8년 2월호.
(2) 롱고바르디의 라틴어 원문(1623)은 필사본의 형태로 전승된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이를 입수하지는 못했고 이하에서는 라이프니츠가 불어로 번역한 텍스트(G. Leibniz(1701, 89-144))를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