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자선…무질서 정치적 갈등 조장

'세계화의 검은 수익, 표백 수단?' 인도적 개입 정당성 의심받아

2008-10-29     베르나르 우르스

특집-인도주의를 해부하다 Ⅰ

'흑심' 감춘 인도주의…

 지난 7월 2일 인도주의 단체와 연계된 콜롬비아 군대는 제네바 협약을 무시한 채 적십자 상징을 이용했다.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으로부터 15명의 인질을 석방시키기 위해서였다. 카불에서는 8월 13일 피살된 자원봉사 요원 세 명이 소속돼있던 국제구호위원회(IRC)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구호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1967년 비아프라 전쟁 이후, 긴급 원조가 중립성을 표방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인도주의 단체들은 '내정간섭 권리'를 주장하고, 각국의 군대는 인도주의 단체와 뒷거래에 나선다. 그 후 이들 사이의 모호한 관계는 순수한 비정부 기구(NGO), 특히 현지 비정부 기구들을 위험한 경지로 내몰고 있다. 인도주의(Hum-anitarianism).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동등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에서 인류의 공존을 꾀하고, 복지를 실현시키려는 박애적(博愛的)인 사상이 과연 온당하게 구현되고 있는 것일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인도주의 특집'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이뤄지는 인도주의 활동의 현황과 바람직한 모습을 다뤄본다.

 

인도주의 성공의 대가로 예기치 못한 문제점들이 불가피하게 나타나자, 그 목표와 도덕성 자체가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2007년 차드에서 프랑스 자선단체 '아르슈 드 조에'가 보여주었던 사례는 언론의 성토의 대상이 됐다. 이전 같았으면 이들의 '선의'만이 언급됐을 것이다. 2004년에도 동남 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쓰나미 사태 때, 재해 후 거둬들인 막대한 기부금에 대한 비정부 기구들의 관리 역량이 이미 도마 위에 오른 상태였다.
 
 인권·희생자 구호·접근 '인도주의 3원칙'
 인도주의 활동은 원칙과 실제의 일관된 통일성에 기초한다. 도덕성이 요구되는 인도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원칙은 크게 3가지에 기반을 둔다. 첫 번째는 보편적 인권이다.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주장이긴 하지만, 동시에 논란의 여지도 없지 않다. 두 번째는 희생자를 만드는 것이다. 희생자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구호 활동 또한 불가능하다. 마지막은 희생자에 대한 간섭권으로, 일종의 '접근권'과 같은 것이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정당한 인도주의 활동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건, 교육, 치안 같은 분야에서의 인권은 무엇인가? 분명 1789년 인권 선언의 성격과는 다르다. 그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정치적 인권이었던 데 반해, 지금은 기아, 질병, 자연 재해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생물학적 인권이 추가 된다. 국경없는의사회(MSF)가 지구적 차원에서 설정한 목표도 바로 이 것이다. 생명에 대한 권리는 20세기 후반 무렵부터 본격화한 인도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인도주의 시대가 실질적으로 구체화된 건 1980년대로, 탈정치화와 도덕성의 보편화가 자리 잡으면서부터다. 
 희생자의 존재가 어디까지 주체 혹은 객체가 될 것인지도 의문이다. 가령 난민촌 같이 상황에 따라 상대적 입장이 되는 희생자는 그 의미가 모호하다. 구조하는 자와 구조되는 자의 사이에 상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 사이의 관계는 불평등이 특징이다.
 
 구호 대상, 인도주의 단체 의해 만들어져
 재해 당사자는 대부분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저 끔찍한 비극에 직면한 인간일  뿐이다. 사실 태고적부터 인간은 자연, 권력, 사회의 횡포에 맞서 싸워 왔다. 해마다 태풍으로 인해 풍비박산 나는 필리핀 사람들이나, 반복적인 홍수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방글라데시 국민들은 자신의 운명의 일부가 된 이 같은 위기에 맞서 싸워 나간다. 그 것이 위험지대에서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걸맞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을 희생자로 만든 건 바로 이들을 바라보는 외지인의 시선이다.
 응급 의료 구조대는 구조 요청이 있을 때에만 출동한다. 하지만 인도주의 구호 단체는 느닷없이 들이닥친다. 재난 현장에 오기로 결정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건 외지인인 그들의 몫이다.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 주는 경우도 자주 있지만, 그 또한 자신들의 '일정'에 따라서 행동한다.
 인도적 개입의 정당한 명분이 되는 희생자 수의 관리 또한 정치적으로 결정되곤 한다. 희생자의 수는 때로 낮게 추산되기도 하고, 종종 실제보다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예컨대, 1998년 허리케인 '미치'가 니카라과, 온두라스, 과테말라, 살바도르를 강타했을 때 일부 국가들은 희생자 수를 높이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야 세계 인도주의 단체들의 구호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인도적 개입의 당위성을 내세우며, 희생자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요구하는 20세기 인도주의자들은 '내정 간섭의 권리'를 만들어냈다. 이 권리가 사용될 경우, 이는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승리보다는 어느 국가에서든 민감한 정치 사안이 되기 쉽다. 서구의 내정 간섭권이 등장한 1980년대 말은 그 주장이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사정이 다르다.
 
 곳곳서 피랍·피살…현지인 '분노·좌절의 표현'
 중국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권위주의 체제와 그 외 수많은 다른 국가들에서, 서구의 인도적 개입은 쓸데없는 정치적 긴장을 유발하는 연막탄처럼 여겨진다. 최근 들어선 서구 인도주의자들이 현지 무질서의 책임자로 비난받는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국가가 힘이 없어 비정부 기구, 인도주의자, 서방 군인 등 외지 사람들의 관리 감독을 받게 되는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아이티 같이 혼란 사태가 장기화되는 경우에는 높은 보수를 받으며, 사륜 구동 자동차를 굴리는 외지인들이 돌 세례를 맞기도 하고, 심지어 납치까지 당할 때도 있다. 몸값이라도 받아보겠다는 생각이지만, 이는 분노 혹은 좌절의 울부짖음에 더 가깝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기아퇴치활동(ACF) 회원 두 명이 인질로 잡혔고, 국제구호위원회(IRC)의 자원봉사 요원 3명은 자신들의 차를 몰던 운전사와 함께 살해되었다. 스리랑카에서는 2006년 ACF 회원 17명이 피살되었고, 2005년 이후 MSF의 자원봉사자들은 다게스탄이나 콩고민주공화국 등지에서 피랍됐다.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곳은 주로 유엔이 다국적군이나 평화유지군과 함께 상주하고 있는 분쟁 지역이다. 팔레스타인이나 에리트레아, 예멘, 스리랑카, 다르푸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이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  문제의 핵심은 인도적 개입이 정치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인도적 개입은 세계 시민 사회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취지의 인도주의 단체일지라도, 그 국적이나 이데올로기 등이 마법처럼 은폐될 경우, 이에 보편적 권한을 위임해주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도적 개입은 종종 주권국가를 부인하곤 한다.
 
 사악한 모리배, 비즈니스, 정치 등에 악용
 국경없는의사회(MSF)나 세계의사회(MDM) 혹은 국제기아퇴치행동(AICF) 같이 비정부 기구의 효시가 되었던 기구들의 손 안에서 오랫 동안 머물렀던 인도주의는 1990년대 '국가'들의 개입에 의해 변질되었다. 이 같은 국가들의 개입은 인도주의 단체의 천사주의적 정신에 종말을 고했다. 프랑스에서 베르나르 쿠슈네르와 클로드 발뤼레는 좌파와 우파 정권에서 초기 인권 정무차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비정부 기구의 역할을 제도화·공식화했다.1)
 그러나 이들은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적 명분 때문에 버마의 자연 재해나 중국의 티베트 사태2)에서 인도주의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국가적 차원의 인도적 개입은 인도주의 단체 소속 의사들을 방해할지라도 그들 뒤로 군인을 보낼 수 있는 전략적 영역이다. EU와 UN 등 국제 기구들은 대규모 인도주의 활동에 재정 지원을 해주고 있다. 이들 국제기구의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서로 마주칠 때도 있으나, 이들 사이의 공조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게 떼거지로 몰려와서 최빈국을 북적거리게 만드는 외지인들은 질서뿐만 아니라 무질서도 양산해내고 있다. 국가든 다국적 기구든 인도주의 단체들이 감정, 연대, 이타성을 독식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따라서 인도주의 진영에는 인기에 영합한 정치인, 비즈니스를 노리는 전문가들, 금융 및 관료적 논리로 무장한 테크노크라시 성향의 다국적 후원자들, 의심스런 기부자들, 혹은 도덕성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상황이다.2)
 
 스스로 만든 덫에 발목 잡힌 인도주의
 인도주의는 현재 진행 중인 정신적 세계화의 중점적 요소이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그간 세계화를 통한 착취에서 거둬들인 수익을 즉각 '표백'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동 노동, 생산제일주의, 무임금 초과노동 등 수많은 규제 완화의 세상 속에서 가혹하게 돈을 벌어들인 것에 대해 이제는 위장술을 써야할 때인 것이다.
 사회적 폭력이 만들어낸 이 수많은 소외계층 가운데에서 정작 희생자로 규명된 사람들의 수는 극히 적다. 도덕성, 가장된 투명성, 자선이라는 보증수표를 부여해주면서 사회적 폭력에 앞장서거나 묵인해온 국가나 기업 그리고 후원자들을 도덕적 인류에 부합하는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에 발목 잡힌 도덕적 기업, NGO가 시작했던 조잡한 양심의 세계, 그게 바로 인도주의 활동의 세계다. 20세기는 사회 문제의 시대였다. 21세기는 자연의 희생자들,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전 지구적 소외를 만들어내는 시장경제의 엄청난 피해자들을 다스려야 하는 시대이다.3)
 이 타락한 자선 위에서, 자원봉사자들과 자선활동가, 전문가들은 물이 새는 구멍을 막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유용하고도 고귀한 일을 하지만, 그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인도주의 활동은 '빈곤 퇴치'라는 개념으로 개발을 대체하며 이를 위장시켜주는 데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위중한 상태에 놓이는 것이 구조 지원을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인가? 그게 정말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것인가? 먼저 불을 밝힌 사람들의 열망과는 반대로, 인도주의 세계는 능력 있는 사람들과, 난민 혹은 병자들이 양분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번역 | 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르몽드 아틀라스>의 창(窓)

'NGO' 그들은 누구인가?

 대안 세계화 운동가들의 대규모 포럼은 사회 운동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비정부 기구들은 이러한 변화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들 활동의 일환인 신사회 운동과 차별된다.

 1992년에 열린 국제연합 환경개발회의에서 활약한 비정부 기구(NGO)들은 지구촌 시민 사회의 도래를 알렸다. 비정부 기구란 국제연합이라는 체제의 토대인 각국 정부 및 국제적인 정부 기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국제연합이 만들어낸 용어다. 국가 및 정당에 대해 독립성을 갖는 비정부 기구 운동은 20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에 크게 활성화되었다.
 이는 특정한 분야(긴급구호·개발·인권보호·환경·평화 등)에서 활동하는 단체로, 한정된 수의 전문가 그룹과 일반 대중운동으로 나뉘며, 때로는 두 가지가 혼합된 성격을 띠기도 한다. 많은 기구들이 처음에는 한 국가에서 시작되었지만 국제 협력을 통해 규모가 커졌다(프랑스의 기아 퇴치와 발전을 위한 가톨릭 위원회가 그 예이다). 일부 기구는 처음부터 국제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조직되었다(국제사면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이런 단체들을 가리켜 국제 비정부기구라는 뜻의 'INGO'라고 한다.
 비정부 기구는 이렇듯 다양한 형태의 그룹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최근엔 조직 결성의 자유를 인정하거나 부분적으로 인정한 나라들이 많은데, 이들 나라에서 'NGO'란 국제연합이 정의한 전문화된 기구가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의 단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적 활동과 재정 확보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면서 가짜 기구들이 판치게 되었다. 정부가 운영하는 'GONGO', 비정부 기구를 자기 사유재산으로 생각하는 'MONGO', 마피아가 영리를 목적으로 조직한 'MANGO', 해외 자본가들이 조직한 'FONGO'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해외자본가들 중에는 국제연합의 윤리를 준수한다고 주장하는 비영리 재단들도 포함된다(포드 재단, 조지 소로스의 열린 사회 재단).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제1차 세계사회포럼 이후 'NGO'와 복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운동의 새로운 국제주의가 출현했다. '사회운동'은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대중적 현상을 가리킨다.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목적을 위해 모인 집단들은 국내 혹은 국제 정치판의 주역을 자처한다. 여기에서 비정부 기구는 운동에 직접 개입하기도 하고(대중 NGO), 체제 친화적인 전문가 입장이나, 어용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GONGO, MONGO 등). 그러나 사회운동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자기만의 영역으로 활동을 제한하는 기구들도 있다. 비정부 기구의 범세계적 활동은 진정한 국제연대의 형태를 띨 수도 있고, 종교색 없는 포교 활동의 형태나 전통적인 권력 정치의 형태(로비)로 나타날 수도 있다.
 
 10년 만에 활동인원 2배로
 런던정치경제대학의 시민사회감시기구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와 공동으로 세계시민사회에 관한 연례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국제 'NGO'의 인원은 1993년과 2003년 사이에 50% 증가했고, 1993년에 1만 2,547개를 기록했던 사무국 수도 2003년에 1만 7,952개로 늘어났다.
 특히 선진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다(1993년에는 인원의 51%와 사무국의 82%를, 2003년에는 인원의 38%와 사무국의 83%를 차지했다). 그러나 현재 'NGO'가 가장 크게 성장하고 있는 지역은 동유럽·중앙아시아·남아시아다. 반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은 정체상태다.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남반구의 비정부 기구들은 사회 포럼과 여러 캠페인(부채 탕감을 위해 주빌리사우스가 벌인 캠페인 등)을 통해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2004년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는 인도의 불가촉 천민인 달리트들이 대거 참여하여 눈길을 끌었다.
 번역|권지현 yein2007@gmail.com

'차드 고아 입양'은 납치극?

 프랑스 자선 단체 '아르슈 드 조에'가 지난해 아프리카 인종 학살의 현장인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프랑스로 데려오겠다던 고아 103명(남아 82명) 중 대부분은 고아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아르슈 드 조에'는 다르푸르 고아들을 프랑스로 데려와 돌봐 주자는 어린이 구호 캠페인을 벌여왔다. 그러나 이들 어린이 103명을 프랑스로 데려오기 직전에 이 단체 회원 6명 등 17명이 어린이 납치 혐의로 수단 다르푸르의 이웃 국가인 차드에서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국제적십자사 등 3개 단체 요원이 어린이들을 면담한 결과, 103명 중 91명은 아버지나 어머니로 여기는 어른 1명 이상과 살고 있었다. 또 어린이 대부분은 수단 다르푸르가 아닌, 인접국인 차드의 동부 지역에 거주했다. 아이들 나이는 1~10세로 다양했다.

자선단체'아르슈 드 조에'
부모 생존 103명, 돈받고
프랑스 데려오려다 '들통'


 '아르슈 드 조에'는 프랑스 정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직면한' 다르푸르 어린이들을 데려 오겠다며, 지난 여름부터 프랑스와 벨기에의 300여 가정으로부터 가구당 2,800~6,000유로(약 360만~780만원)씩 기부를 받았다.
 '아르슈 드 조에'가 현지인을 동원해 서둘러 아이들을 모으면서, 어린이들에게 사탕과 비스킷을 주며 데려온 사례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인류학자이자 프랑스 개발 연구소(IRD) 연구부장. <정부, NGO, 그리고 빈국에서의 안전망 기준 마련>(L'Harmattan, Paris, 2005)의 필자다.  

 

1) 참고 : 니콜라 귈로 Nicolas Guilhot, <민주주의 메이커: 인권, 그리고 세계 질서 정책 The Demo-cracy Makers. Human Rights and the Politics of Global Order>,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5.
2) 피에르 미슐레티 Pierre Micheletti, '인도주의자, 국가 논리의 희생자 Les humanitaires victimes des logiques d'Etat', Le Monde diplomatique, 2007년 6월 기사 참조.
3) 이브 드잘레 Yves Dezalay& 브라이언트 가쓰 Bryant Garth, '인권과 패권적 박애주의 Droits de l'homme et philanthropie hegemonique', 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n°121-122, Paris, 1993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