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안개
요르단 ‘형제들’로 번진 그림자

2010-06-07     비켄 슈테리앙

무슬림형제단(이하 형제단) 요르단 지부의 전설적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압델 라티프 아라비야는 지도부 내의 대립에 관한 언론 보도가 지나치다고 본다. 언론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론에서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눈 형제단의 두 분파 사이에 간혹 내부 균열이 우려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2009년 여름에 불거진 조직 내부의 위기는 안 그래도 취약한 한 나라의 주요 정치권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요르단 하심 왕조는 1967년 6월전쟁에서 동예루살렘과 요르단 서안지구의 주권을 상실하고, 영토 수복을 포기했다. 자국의 영토 수복 요구를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신 맡긴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자신의 정치적 미래가 달려 있음을 알고 있다. 600만 명이 조금 넘는 국민이 팔레스타인계와 요르단계로 나뉘기 때문이다. 요르단 국민 2명 가운데 1명은 팔레스타인 난민이거나 팔레스타인 난민의 후손이다.

요르단 다수당이 된 ‘형제단’

요르단이 독립을 획득한 1946년 공식 출범한 형제단 요르단 지부는 오랜 기간 하심 왕조의 굳건한 지지대 구실을 해왔다. 1970년 팔레스타인 게릴라단이 요르단의 후세인 왕권과 대치했을 때(‘검은 9월’(1)), 형제단은 ‘중립’을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그 대가로 여러 장관직을 얻었다. 과거 장관과 요르단의회 대변인을 지냈던 압델 라티프 아라비야는 “형제단은 혁명 조직이 아니었으며, 안정을 권유했다. 민족주의 정당과 좌파 정당이 부상하자 우리는 정권과 호의적 동맹을 체결했다”고 말한다.

1989년 의회 선거에서 형제단은 전체 80석 가운데 22석을 획득하며 다수당이 됐다. 하지만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 이후 정권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강화됐고, 후세인 국왕의 서거와 압둘라 2세의 즉위 이후 관계가 한층 악화됐다. 압둘라 2세가 하마스를 금하고 하마스의 지도자 여러 명을 국외로 추방시켰기 때문이다. 이슬람운동 전문가인 하산 아부 하니에는 “후세인 국왕에게는 형제단이 정치적 사안이었다면 압둘라 2세에게는 안보적 화두다”라고 지적한다.

이스라엘 때문에 국내 갈등 불거져

요르단 정권은 단순히 하마스에 맞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러 차례 형제단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2006년, 이라크 알카에다 조직의 대표적 인물인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의 장례식에 참여한 죄로 형제단 출신 의원 4명이 체포됐다. 같은 해 요르단 당국은 이슬람 중앙 자선단체의 병원·진료소·학교·고아원 등을 통제했으며, 법정 소송까지 걸지는 않았지만 ‘국가 안의 국가’로 여겨지는 이 단체의 지도자들을 부패 혐의로 고소했다. 형제단 가담자들은 요르단의 학생협의회, 시의회, 회교 사원 등에서 제명됐다. 형제단의 대변인 자말 아부바케르는 “이제 영향력 있는 설교사는 1명도 남지 않았다”고 한탄한다. “사회의 인정과 존경을 받은 대중운동 단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계엄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2007년 총선에서 형제단 소속의 대표 정당인 이슬람행동전선은 다양한 선거법 조작으로 의석수가 6석으로 줄었다. 이에 따라 요르단 국왕은 2009년 11월 어렵지 않게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으며, 차기 투표일도 공지하지 않았다. 오라이브 란타위 예루살렘 연구소장은 “20년 전 좌파운동 세력에 가해지던 탄압의 바람이 오늘날 이슬람운동 세력에 휘몰아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요르단의 외교정책은 국내 정치 못지않게 중요하다. 요르단에서는 선거 부정이나 실업 상승에 대한 반발보다 팔레스타인 문제나 이라크와의 연대 문제로 일어나는 시위가 더 많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하마스 세력이 성장하는 것에 요르단 정치권이 우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암만 쪽은 마무드 아바스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형제단과 대립할 경우 공식적으로 자치정부를 지지한다. 그런데 요르단의 형제단 가담자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출신이며, 그 가운데 다수가 하마스 쪽으로 돌아선 상태다.

따라서 형제단 조직 내에서는 두 가지 논란이 붙고 있다. 요르단 정부가 민주주의적 투표 절차와 대중의 의지를 무시하고 형제단 출신의 입지를 제한하는 상황에서 선거에 참여해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요르단의 형제단 조직은 요르단 조직인가, 아니면 팔레스타인 조직인가?

2009년 8월 “팔레스타인 문제를 청산하려는 미국-시온주의의 계획에 연루”(2)됐다며 지도부를 비난하는 내부 보고서가 유출되면서 이런 반목이 불거졌다. 역설적이게도 요르단 정부의 억압이 강화되면서 젊고 급진적인 지도자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조직의 대표적인 두 ‘강경파’ 자키 바니 아쉬드의 2006년 이슬람행동전선 대표 임명과 하맘 사이드의 2009년 4월 형제단 ‘총괄 조정직’ 임명은 형제단의 운동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60년 만에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출신 요르단인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젊고 급진적인 지도자들 등장

바니 아시드는 언론이 자신을 흠집 낸 것에 대해 개탄한다. 그의 의사 표명을 막아설 뿐 아니라, 전력을 다해 그를 무척이나 급진적 인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아시드는 “나는 극단주의자가 아니며, 중도파에 속한다. 나는 개혁에 대한 신념이 있으며, 폭력과 테러의 사용을 비판한다”고 확언한다. 그러면서 ‘테러리즘’과 ‘점령에 대한 저항’은 다르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하마스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는 혐의도 반박한다. “하마스가 요르단에 있을 때, 조직 차원에서의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99년 이후부터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아시드는 조직 내에서 ‘팔레스타인파’와 ‘동요르단파’ 사이의 결별이 진행 중이라는 것도 부인한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이 없는 만큼 요르단의 불안감은 고조되고, 수도 암만에서는 비관적 분위기가 지배한다. 2009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선출된 이후 더욱 그렇다. 암만은 이스라엘이 요르단을 팔레스타인인의 ‘대안 국가’로 상징화할까 우려한다. 이미 이스라엘 강경파에게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의 한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 또한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점령지에서 요르단으로 내몰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

요르단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은 대부분 형제들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이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스라엘과의 갈등이 올바르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이들은 지역 차원의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 이들은 대개 요르단 정치에 별 관심을 갖지 않지만, 요르단 시민권을 가진 만큼 지역 차원에서 활동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 순수한 요르단 출신의 정계 엘리트나 군인과 씁쓸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을 감수하고, 이들은 의회나 군대 같은 국가기관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요르단 내 무슬림의 정치 흐름이 과격해질 것이다.

알카에다엔 새로운 기회

형제단의 입지가 취약해지는 작금의 현상이 폭력을 예찬하는 살라피즘과 지하디즘 세력의 부상을 부추길지 벌써부터 주시 대상이 되고 있다. 학자이면서 그 자신도 전통적 살라피즘 운동가인 오사마 샤하드는 요르단 당국과 형제단 사이의 불화가 그 불씨를 지펴놓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요르단의 살라피스트들은 제대로 조직된 세력이 아니다”. 이슬람운동 세력 전문가이자 일간 <알가드>의 기자인 모하메드 아부 람만은 형제단이 알카에다에 대한 비난 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부 람만은 요르단 내에서 형제단과 살라피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경쟁 관계를 강조한다. 살라피스트들은 전통적인 형제단원 사이에서 동원된다. 과거 회교 사원에서는 형제단원도 찾아볼 수 있고, 무카바라트(비밀경찰)도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형제단원, 무카바라트, 히즈브 우트 타흐리르(해방당),(3) 살라피스트, 지하디스트가 있다. 한마디로 경쟁이 치열하다. 회교 사원 내 형제단원을 없애기 위한 요르단 정부의 싸움은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금 암만의 회교 사원에서는 주로 알카에다의 연설이 돌아다니고 있다.” 비록 “알카에다가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소외된 세력에 가깝지만, 알카에다의 범위는 계속 넓어지고 있다.” 1999년과 경제위기 이후 국왕이 실시한 엄청난 민영화의 영향 탓이다.

2008년 말 아부 무하마드 알마크디시의 석방은 논란의 제기와 함께 살라피즘-지하디즘 흐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라크 알카에다 조직 수장인 자르카위의 정신적 스승 알마크디시는 자르카위의 전략과 방법을 호되게 비판한 인물이었으나, 그때까지 그의 영향력은 세력 내부에서 미미한 수준이었다. 요르단 보안 당국의 조종을 받는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방된 이후, 알마크디시는 운동원들의 신임을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자르카위를 추종하던 이들에게 현 상황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강한 리더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4)

암만의 정치학자인 파드 알키탄에 따르면, 형제단은 아직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긴장 모두에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다른 어떤 정당보다 내부의 민주주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형제단의 지도부 가운데는 제아무리 요르단 정권이 형제단에 강제 정책을 행사하더라도 분열이나 정권과의 전면전 같은 선택을 배제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형제단이 내부 반발을 잠재울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사회적 긴장이 높고 요르단 서안에서 공정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이 나타나지 않는 이때, 요르단 유일의 대중운동 세력이 소외됨으로써 이득을 볼 정치 세력은 누구인가?

글•비켄 슈테리앙 Vicken Cheterian
<코카서스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in the Caucasus: Russia’s Troubled Frontier>(C. Hurst-Columbia University Press·New York) 등의 저서가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

<각주>
(1) 1970년 9월. 팔레스타인 게릴라 세력은 요르단에 정착하고, 이곳에서 반이스라엘 무장활동을 벌인다. 이들 세력의 힘과 이스라엘군의 보복을 우려한 후세인 국왕은 게릴라 세력에 대항해 군대를 움직인다.
(2) Ali Abd dl-Aal, ‘The Ghost of Division is Following Jordan’s Brotherhood’, <Islamyoon>, 2009년 9월 8일.
(3) 1953년 요르단에서 창당했으나, 여러 나라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 칼리프 직의 재건을 주창.
(4) Mohammad Abou Rumman, ‘Jordanal-Maqdisi wins in the first ‘round’ over the inheritance of al-Zarqawi’, Al-Hayat, Beyrouth, 2008년 11월 30일, http://international.daralhayat.com/archivearticle/23106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