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피폭 당했다!”

후쿠시마 원자력 재앙 7년의 악몽

2018-03-29     필립 파토 셀레리에 | 언론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진, 해일에 이어서 노심용융을 일으킨 1~3호기 원자로. 2011년 3월에 연속으로 일어난 재앙으로 일본은 여전히 멍들어 있다. 인명과 재산을 순식간에 앗아간 것은 해일이었지만,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 인간과 경제에 미친 파장은 앞으로도 깊게, 또 길게 남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실의 칠판은 여전히 글자, 숫자,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이후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하다. 말라붙은 칠판지우개 한 쌍이 분필대 위에 찌그러져 있다. 7년 전만 해도 아라하마(荒浜: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의 작은 어촌도시-역주) 초등학교였던 이곳 주변은, 모든 것이 해일에 휩쓸려 사라진 이후 잔인할 만큼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학교 옥상에서 바라본 와카바야시(若林: 센다이시를 구성하는 5개 구 중 하나-역주)에선 굴착기와 덤프트럭들이 끝없이 움직이며 모래를 쏟아 붓는 풍경만이 보일 뿐이다. 이 학교 주변에 주민 2,200명이 살던 집 800채가 있었다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바다는 7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방파제 공사와 6m 높이의 고속도로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다. 두 공사 현장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라고는 비석들이 미카도 게임의 나무 막대기들처럼 뒤얽힌 작은 묘지뿐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일본 열도의 중앙부 혼슈(本州)의 동북부인 도호쿠(東北) 지방의 동쪽 해안이다. 

주민 1백만 명이 사는 도시 센다이는 미야기현의 도청소재지다. 미야기 현은 남쪽으로는 후쿠시마 현, 동쪽으로는 태평양과 접해 있다. 2011년 3월 11일의 해일은 센다이 앞 바다 120km 지점에 나타난 강진에 의해 발생했다.(1) “높이 20m의 파도가 시속 600~900km로 해안을 덮쳤습니다. 1873년에 지어진 이 초등학교만 버텼습니다! 학생, 교직원, 이웃 주민 302명이 일단 이 학교로 피신했다가 헬리콥터로 구조됐습니다. 처음에 시청은 학교를 허물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학교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사는 현이 최대 피해지역입니다. 1만 2,000명이 목숨을 잃었거든요. 센다이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 대부분(930명)은 와카바야시 구의 주민들입니다.”

우리를 안내한 자원봉사자의 설명이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우리는 흙, 쓰레기, 고철 더미에 뒤얽힌 자동차들과 충돌해 망가진 교실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현장이 전부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구조만 무너지지 않게 보강해서 2017년 봄에 일반인에게 개방했습니다. 그 후로 매일 1천 명 정도의 관람객들이 찾아옵니다. 일본 전역에서 오는 관람객들이죠.”

현재 시청은 와카바야시 구를 위험지대로 분류해 건설을 금지하고 있다. 생존자들은 임시숙소의 지하로 대피했다. 대재앙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지진, 해일, 그리고 원전 사고. 대피한 45만 명 중 16만 명은 후쿠시마 다이이치 원자로 폭발에 따른 방사선을 피해야 했다(지도 참조). 해안 500km를 따라가면 푯말이 세워진 거대 공사장에서 재앙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육지에서 약 30km 떨어진 곳까지 피해 흔적이 있다. 여기저기 토목공사 기계 수천 대가 바쁘게 잔해를 치우고 쓰러뜨리고, 다시 새로운 것을 세운다. 버스가 태평양 해안을 따라 앞으로 갈수록 정신없는 공사장이 보인다.

센다이 동북쪽에서 90km에 위치한 미나미산리쿠는 주민 1만 7,000명이 살던 작은 해안도시였다. 약 70%가 파괴된 이 마을에 새롭게 들어선 것은 피라미드 모양의 산더미다. 즉, 쓰레기 더미, 그리고 굴착기들이 쌓아 올린 흙더미. 피라미드 모양의 산더미 너머로 작은 목조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체국, 미용실, 초밥집, 그리고 제과점이 나타난다. 음악 소리가 조악하게 20여 개 가게에서 들려온다. 공사장 인부 한 명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한때 어부였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짓는 공사가 진행 중이지만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거든요. 7년간 젊은이들은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 출발을 하곤 했습니다. 저야 운이 좋아 여기서 100km 떨어진 형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일거리도 있고요. 다시 어부가 되고 싶으냐고요? 아무리 방사능이 허용기준치 이하로 검출됐다 해도, 여기서 잡히는 물고기를 누가 먹으려 하겠어요.” 게센누마(氣仙沼), 라쿠젠타카타(陸前高田), 오후나토(大船渡), 가마이시(釜石). 이들 해안 소도시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도쿄의 전기를 위해, 도호쿠에 발전소를?

가마이시에는 자비를 상징하는 대관음상이 높은 받침대 위에 당당하게 서 있다. 48m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장관이다. 공사장 기계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방파제를 다시 쌓고 있다. 해일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이미 시공에 들어갔던 방파제들이다. 높이가 다른 3개의 방파제(990m, 670m, 330m)는 수심 63m 이상을 자랑했으나 완전히 물에 잠겼다. 뿐만 아니라 이들 방파제는 다시 밀려드는 파도의 속력만 높여주는 걸림돌이 됐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공사장 감독이 묻는다. “주민들이 돌아오게 하려면 주민들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지금은 주민들보다 공사장 인부들이 더 많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정부는 슬슬 손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2011~2015년 25조 5,000억 엔(1,957억 유로)을 투자했지만, 2016~2020년을 위한 예산은 이 금액의 1/4로 축소했다.(2)

“여기는 관동 지역(도쿄)이나 간사이 지역(교토)처럼 인구와 자본이 집중된 곳이 아닙니다.” 인구 1천만 명의 도호쿠 지방 출신, 고와타 씨의 증언이다. 다와다 요코는 저서 『헌등사(獻燈使)』(3)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1995년 고베 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백화점에서 코너에 있는 식품들을 꺼내 보도 위에 늘어놓으면 즉각 식량공급이 가능했다. 하지만 도호쿠 지방의 어촌마을에는 백화점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재민들은 제한된 구역에 한 데 모여 있지 않다.” 왜 2011년 헬리콥터로 식료품을 투하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작가 다와다 요코가 썼다. “국토안전법상 금지돼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긴급상황이라도 국토안전법을 위반하면서까지 필요한 조치를 행할 용기 있는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혼슈에서 가장 넓은 지역은 원래 아이누 원주민이 정착해 살던 도호쿠 지방이다. 이들 아이누족은 19세기 일본에 ‘개척’되기 전의 홋카이도(북해도)에도 살았다. 일본 황실의 옛 궁궐이 있던 교토와 일본 황실의 현재 궁궐이 있는 도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도호쿠 지방은 추운 외곽지역이었기에, 오랫동안 일본인들에게 홀대를 받았다. 도호쿠의 옛 지명인 미치노쿠는 ‘길 끝’이라는 의미다. 권력중심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이곳에 사는 이들은 야만인, 천민, 혹은 사회 부적응자들뿐이었다. 야마가타현의 추운 산에서 떠돌며 산악신앙을 행하던 야마부시(山伏し)가 대표적이다.

1960년대에 들어 일본 정부는 도호쿠 지방에 원자력 발전소 여러 곳을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했다. 주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하겠다는 것이 공식적인 건설 취지였으나, 사실 전기의 주요 사용자는 도쿄의 주민들이었다. 즉,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쿄(2187㎢)와 그 주변 지역(주민 4천만 명)에 비해 낙후됐으나 규모가 큰 도호쿠 지방(67,000㎢)은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에 유리한 지역이다. 어업, 농업, 관광업 외에 변변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이곳에서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고 있다. 

도호쿠 지방 6개 현은 뜻밖의 행운처럼 찾아온 원자력 사업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한다. 북쪽 맨 끝에 건설되는 아오모리 현 롯카쇼 촌의 복합시설도 이 같은 원자력 사업에 포함된다. 롯카쇼 촌 복합시설에는 우라늄 농축 공장, 핵연료 저장소, 그리고 라아그(La Hague, 프랑스 북서부) 지역을 모델로 삼아 프랑스 아레바(AREVA) 그룹과 협력해 건설하는 핵연료 재처리 공장이 건설되기로 했다. 해당 건설 분야에 200억 넘는 투자 계획이 발표됐으나 30년이 지난 1월, 재처리 공장의 가동은 무려 20번 연기됐다. 재처리 공장은 2021년에, 논란이 됐던 MOX(플루토늄과 우라늄 산화물을 혼합하여 만든 혼합산화물핵연료) 생산공장은 그 이듬해에 가동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내륙에는 광대한 수로망이 없기에 원자로 냉각에 적절한 해안 연안지대가 있는 후쿠시마현은 후쿠시마시의 지지에 힘입어 원자력 발전소 건설 후보지가 됐다. 도쿄 북서쪽에서 220km 떨어져 있는 에너지 공급시설은 너무 멀다. 따라서 원전 1~6호기가 1967~1979년 후쿠시마에 차례로 건설됐다. 후쿠시마 다이이치 원자력 발전소는 제1원자력 발전소다. 원자력 발전소가 생기면서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산문집 『그늘에 대하여』(4)에서 예찬한 ‘그늘의 미학’은 사라졌다(준이치로는 빛이 없으면 없는 대로 도리어 그 어둠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어둠의 문화가 있다고 봤다-역주).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해 정부가 내놓은 다양하고 막대한 지원 정책(지원금, 세제 혜택)은 지역 경제를 발전시켰다. 막대한 운영 예산(후쿠시마 시가 7~10년간 자립하는데 도움이 된 금액)의 혜택을 누린 것은 표심을 확실히 얻게 된 지역의원들이다. 도쿄전력의 이니셜 TEPCO가 후쿠시마 역의 박공에서 당당하게 빛난다. 

원자로 해체작업, 앞으로도 40년 

그늘이 여전히 있다 하더라도 그늘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말한 것처럼 내면의 본질과 내부의 빛을 비쳐주는 명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 지방자치제(현, 시), 양심 불량의 원자력 업계 사이의 결탁 속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쿄전력은 1984~2002년 발생한 약 200건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은폐하고 감사 보고서를 위조한 것으로도 모자라,(5) 6m보다 높은 파도를 동반한 해일이 몰려올 것이라고 경고한 2009년 보고서도 모른 척했다. 2011년 지진이 발생하고 1시간 후에 높이 14~15m의 해일이 일어났다. 전기공급이 완전히 중단됐고 예비냉각 시스템이 물에 잠기자, 1~6호기 원자로 중 1~3호기가 노심용융을 일으키면서 방사능이라는 치명적인 숨결을 내뱉었다.

그로부터 7년 후, 해야 할 일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엄청나고 원자로 해체든, 토양과 수질에 스며든 방사능 제거든 재앙에 따른 비용은 천문학적인 규모로 보인다. 즉시 업무에 투입할 인력은 어떻게 찾을까? 도쿄전력은 다단계로 하청을 늘렸다. 그 결과 본사에서 먼 아래의 하청업체일수록 업무지시가 내려오는 과정에서 능력과 고용기준이 점점 느슨해진다.(6) 간혹 야쿠자가 운영하는 하청업체들(7)은 각자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노동자들은 조금이라도 수입을 늘리기 위해 방사능 오염지대에서 피폭 허용치가 넘어도 목숨 걸고 일한다. 한편 고용주는 작업현장의 위험 때문에 지원자들이 계속 줄어들자, 부족한 인력을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2011년부터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는 이미 6만 명 이상의 인력이 투입됐다.

이 중 6,000명은 노심용융을 일으킨 1~3호기 원전해체작업을 매일 하고 있다. 무엇보다 노심용융물의 위치를 파악해 통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핵연료가 중간에 금속재료와 만나 융합하면서 발생하는, 방사능 수치가 높은 물질이 노심용융물이다. 도쿄전력이 2018년 1월 제공한 일부 이미지 자료를 보면 노심용융물이 제2원자로의 탱크 속으로 들어가 최후의 보호막인 원자로의 기초 부분(콘크리트 부분)을 공격했고, 이어서 노심용융물이 지하수를 오염시켰으며 지하수가 태평양으로 흘러갔음을 알 수 있다. 

일본과 국제사회가 내놓은 공식 보고서들은 원전사태가 건강에 미칠 영향이 그리 크지 않으며, 암 발병률이 높아진 것은 체계적인 검진제도의 발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011년부터 세실 아사누마 브리스는 후쿠시마 지역을 답사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소속의 도시사회학자 세실은 불안감을 잠재우려는 일본 측의 발표에 의심을 품는다. “당국은 18명의 노동자들이 치사량의 방사능에 노출돼 사망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수치는 매우 과소평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후쿠시마현의 아이들 38만 명을 대상으로 한 병리학 조사는 갑상선암 197건의 발병상황을 이미 밝혀낸 바 있다. 세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쿠시마 지역을 청소하거나 방문하는 것에는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다. 주민들을 안심시켜 귀환시키려는 목표죠. 이를 위해 방사능 허용치 기준도 상향조정됩니다. 실제로 일본 정부가 2011년 4월부터 하는 일이고요.” 일반인의 허용 가능 연간 방사능 수치가 1mSv(밀리시버트)에서 20mSv로 상향조정됐다. 20mSv는 평상시 방사선 작업 종사자에게 연간 허용된 피폭량이다. 한편, 원자로 종사자의 허용가능 연간 피폭량은 사태의 위급성에 따라 1차 100mSv, 이어서 250mSv로 상향조정됐다.

원자로 해체작업이 앞으로 40년은 더 걸릴 텐데, 목숨 걸고 일할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 로봇연구가 한창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막대한 양의 작업은 굳이 로봇이 필요하지 않은 아주 초보적인 일이다. 원자로의 녹아내린 반응부를 냉각시키기 위해, 300톤의 물이 매일 오염된 채 방출된다. 현재 1백만㎥ 이상의 물이 약 600개의 탱크에 저장돼있다. 이미 수천 톤의 물이 태평양에 배출됐다. “나머지도 배출될 겁니다.” 도쿄전력이 조심스럽게 알려준다. 

게다가, 원자로를 제외한 600㎢의 땅이 전부 방사능 오염제거 대상이다. 일본 정부는 수백만 ㎥에 달하는 오염물질로 가득한 이 땅들을 여러 소유주들에게 점진적으로 사들였다. 매달 몇 ㎥씩 쌓여가는 이 폐기물들은 원전 근처에 있다. 오염토의 제일 윗부분인 표토 부분이 몇 km 떨어져, 따로 쌓여가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 방사능이 퍼져나가면, 노동자들을 오염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폐기물 5천만 톤은 이미 검은색 비닐포대에 들어있는데, 이 포대를 열지만 않는다면, 평균 3~4년까지 수명을 더 유지할 수 있다. 방사능이 8,000bq/kg(베크렐/킬로그램) 미만인 폐기물은 교량과 도로공사에 쓰인다.
 
“후쿠시마산 제품은 신선하다”는 주장

일본 정부는 여전히 귀환을 망설이는 이재민들(피난민 16만 명 중 약 1/3)을 귀환시키기 위해, 2017년 3월 31일 원전 피난민에게 조건 없이 제공하던 피난처를 없애버렸다. 그 결과, 약 2만 7,000명의 이재민이 귀환할 수밖에 없게 됐다. 다른 전략들은 더욱 은밀하게 이뤄진다. 후쿠시마로의 귀환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후쿠시마 에토스 프로젝트는 주민들이 오염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이런 목적으로 매뉴얼이 배포됐다. TV 광고마다 후쿠시마산 제품이 신선하다고 홍보하고 아직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사능 오염제거방식이 효과를 거뒀다고 자랑한다.(8)

광고기획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더욱 해로운 것은 오염된 환경이라기보다는, ‘근거 없는 방사능 공포’ 혹은 고향을 떠난 괴로움으로 인한 스트레스라는 것이다.(9) 아타데촌의 주민 한 명이 말한다.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핫스팟(고오염 지역)’에만 안 가면 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산에도 강에도, 어디로도 갈 수가 없어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까요?”(10) 2018년 3월 3일 자 <후쿠시마 민보>는 재해 이후 2,211명이 자살하거나 치료나 약이 부족해 죽어갔다고 전하며 후쿠시마의 비참한 생활조건을 고발했다.
마침내 도쿄전력은 2017년 9월 22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받았으나, 일본 정부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국민이 원자력의 실질적 폐해를 알지 못하도록’ 허위 정보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세실 아나스마 브리스는 주장한다. 진실 은폐는 인체의 방사능 피폭 허용치에 대한 의심과 혼란을 해소하려는 설득 작전의 핵심이다. 일본 정부와 원자력 로비스트들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이유는, 보수성향의 아베 신조 총리가 강조하듯 “일본은 원자력 없이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전사고 이전에 일본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30%가 원자력에서 나왔다. 

현재 5개의 원자로가 재가동됐고 19개의 원자로는 승인을 기다릴 예정이다. 일상에서 방사능에 대한 불감증이 커지고 있다. 2020년 도쿄 하계 올림픽 담당 국제위원회의 집행위는 후쿠시마의 아즈마 야구장(원자로의 북서부에서 90km 떨어진 곳)의 경기 개최안을 2017년 3월에 승인했다. 이를 위해 아즈마 야구장은 개보수 될 예정이다. “도호쿠 지역민들에게는 세제 혜택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후쿠시마를 떠나온 다케다 씨가 빈정거리듯 말한다. 이어 의견을 이야기한다. “저희들은 일본에서 배척받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저희가 피폭됐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요….”  

<<원문 보기>> À Fukushima, une catastrophe banalisée

글·필립 파토 셀레리에 Philippe Pataud Célérier  
언론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등 다양한 언론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한불과 졸업. 번역서로 『인간증발-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2017년)가 있다. 

(1) Ishida Hidetaka, ‘L'espoir d'un nouveau souffle(새로운 숨결의 희망)’ / Harry Harootunian, ‘La maison Japon se fissure(균열하는 일본 집)’ / Gavan McCormak, ‘Le Japon nucléaire ou l'hubris puni(원자력의 일본 혹은 대가를 치루는 자만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4월호.
(2) Reiji Yoshida, Tsunami-hit Rikuzentakata rebuilding on raised ground, hoping to thrive anew, <Japan Times>, 도쿄, 2017년 3월 7일.
(3) 국내 번역서 제목. Tawada Yoko, 『Journal des jours tremblants. Après Fukushima』Verdier, coll. ‘Der Doppelgänger’, 파리, 2012
(4) 국내 번역서 제목. Tanizaki Junichiro, 『Éloge de l'ombre』, Verdier, 2011
(5) Tepco must probe 199 Plant Check Coverups, <Japan Times>, 2007년 2월 2일.
(6) Tatsuta Kazuto, 『Au cœur de Fukushima. Jounal d'un travailleur de la Centrale nucléaire 1F(후쿠시마 한 가운데. 1F 원자로에서 작업한 어느 노동자의 일기)』, Kana, 브뤼셀, 2016
(7) Philippe Pons, ‘Les yakuza font peau neuve(새옷 입은 야쿠자)’, <르몽드>, 2017년 4월 3일.
(8) Louise Lis, ‘À Fukushima, la population est dans une situation inextricable(복잡한 상황에 놓인 후쿠시마 사람들)’, <Journal du CNRS>, 파리, 2016년 3월 11일, https://lejournal.cnrs.fr
(9) Yves Baron, Jacques Foods, Jean-Paul Martin, Bernard Rozé, ‘L'accident de Fukushima, six ans après(후쿠시마 사태, 6년 후)’, ‘원자력에너지와 대체에너지에 관한 토론그룹(Gaena)’, 2017년 10월, www.energethique.com
(10) Cécile Asanuma-Brice, ‘Les migrants du nucléaire(원자력 이주민들)’, Géoconfluence, 2017.10.18. http://geoconfluences.ens-lyon.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