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안에선 누구나 운명의 노예

[서평]

2010-06-07     자비에르 라페루

 미국 루이지애나. 먼지 날리는 건조한 농장에서 흑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을 갈고 있고, 백인 주인들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며 지시를 내린다. 그런데 한 남자가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그는 바로 마커스. 세상의 질서는 변화의 시점에 와 있다. 과거의 질서는 흔들거리고 이에 따라 두려움이 퍼져간다.

짐 켈리는 자신이 본 것, 다른 사람들이 본 것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짐은 밭에서 힘들게 일하는 평범한 흑인으로, 어느 날 마커스를 맡게 된다. 마커스는 농장 주인 마셜 허버트가 감옥에서 빼낸 남자인데, 대신 마커스는 마셜의 농장에서 7~8년간 뼈 빠지게 일해야 한다. 마커스는 끔찍한 그 세월을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지금이 내 인생 최악의 시기야, 짐. 여기서 난 노예야. 노예 생활보다 끔찍한 것은 없지.”

저자 어네스트 J. 게인스는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을 가까이에서 살펴본다. 이를 위해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결절하는 메커니즘의 톱니바퀴를 하나하나 분해해본다. 힘든 현실, 지배 관계, 압박처럼 다가오는 규범, 법과 다름없는 사회 규칙이 바로 그런 톱니바퀴다.

마커스는 농장 감독인 봉봉의 아내 루이즈의 애정을 받게 된다. 루이즈 역시 자신의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커스는 루이즈에게서 자신을 본다. 마커스는 짐에게 “이제 난 그녀와 함께 도망치고 싶어. 그녀도 여기서는 노예지, 나처럼 말이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루이즈는 백인 여자이기에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비참함이 밴 이야기다. 그러나 사랑도 조금 있는 이야기다. 등장인물 각자 자신의 갑갑한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서로를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만적이고 소용돌이치는 세계, 몰락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 짐, 마커스, 루이즈, 봉봉, 폴린(봉봉의 흑인 내연녀), 마셜 허버트, 가정부 마거릿, 비숍, 그외 주변 인물 모두가 복잡한 운명이지만 사회에서 맡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흑인과 백인 모두 자신의 운명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질서가 갑자기 변하면 커뮤니티 전체가 흔들리고 파멸을 맞을 위기에 처한다.

저자 게인스는 꼬불꼬불한 길이 아니라 지름길로 가는 것처럼 시원시원하게 사건과 주요 인물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처럼 생생하다. 현실감이 그만큼 크다. 게인스는 세련되고 직설적인 문체를 구사하며 절대로 이야기를 질질 끌지 않는다. 군더더기는 모두 쳐낸다. 그렇기에 독자는 강렬한 이야기의 힘, 세련된 현대적 작품의 멋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마치 존 스타인벡, 테네시 윌리엄스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든다. 게인스 역시 이들 유명 작가와 마찬가지로 등장인물을 이미 정해진 거대한 운명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소설 속에서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장면이 있다. “그는 발로 문을 막았다. 두꺼운 안경을 낀 비숍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숍의 조부모가 지은 집이었다. 하지만 그 집은 노예들이 지은 것이었다. 그가 이 집의 문을 발로 막은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이 없어진 짐은 상황을 제대로 보게 되고 루이즈와 마커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낸다. “루이즈와 마커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지금 길을 열고 있다고. 두 사람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두 사람이 길을 열면 다른 사람들이 이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며 두 사람의 길을 따를 것이라고.”

‘남부 시대 소설’의 대가인 게인스는 1994년 <난 사람이라고 전해줘>로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했다. 게인스 역시 분명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글•자비에르 라페루 Xavier Lapeyroux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한불상공회의소 격월간지 <꼬레 아페르> 전속 번역. 번역서로는 <여성의 우월성에 관하여>(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