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의 종교부서로 전락한 러시아정교회
2018-03-29 아나이스 요벳 | AFP통신 기자
3월 18일 러시아 대선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지만, 푸틴의 새로운 임기 시작은 서방 국가들과의 보다 팽팽해진 긴장 관계뿐 아니라 보수주의로의 선회로도 부각되고 있다. 지난 6년간 러시아의 수장은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나란히 등장했다. 이처럼 푸틴은 정교회의 영향력을 도구 삼아 애국심을 되살리고 해외로 손을 뻗치려 한다.
2017년 5월 25일 화창한 하늘 아래, 모스크바 및 러시아 전역을 대표하는 러시아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는 수도 한복판에 위치한 스레텐스키 수도원(Sretensky Monastery)의 새 성전 축성식을 거행했다. 그 옆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근엄하고 굳은 얼굴로 예식 전체를 지켜봤다. 이후 푸틴은 총대주교에게 세례자 요한이 그려진 400년 된 낡은 이콘(주로 동방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화상, ‘상(像)’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역주) 하나를 건넸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강림을 알린 예언자로, 이 이콘은 지금까지 크렘린의 대통령 집무실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이 이콘은 새 성전의 제대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정교회의 총대주교와 러시아의 수장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이 수십 년 전이었다면 낯설어 보였을 것이다.)
‘반종교적 박해에 희생당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봉헌된 이 성전은, 1930년대의 대대적 억압을 상징하는 소련 내무부 건물로 쓰인 루뱐카역 부근에 있다. 푸틴은 축성식 이후의 연설에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에 성전 축성식을 거행하기로 한 것은 ‘중대한 상징성’을 띤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문명의 평화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잘 알고 있다. 분열에서 비롯된 상처는 치유하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국가적 화합을 지켜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는 것, 이는 우리 공동의 책임이다.”
러시아정교회는 공산주의 시기에도 명맥이 끊기지 않았으나, 긴 세월 겪어온 혹독한 시련에서 이제야 벗어났다. 1914년에 5만 4,000개였던 교구 수는 볼셰비키의 폭력적인 반종교 운동을 겪은 뒤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는 단 250개만이 운영됐다. 당시 독일군대가 진격해오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총동원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교회를 복권시켰다. 이는 러시아가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시작한 ‘성전(聖戰)’의 유구한 전통에 따른 것이다. “형제자매여, 죽음의 위험이 우리 조국을 위협하고 있다.” 1941년, 스탈린이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연설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1943년에 실시된 성직자의 복권은 비밀경찰 및 러시아정교회 업무 협의회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이뤄졌다. 미사 집전은 조심스럽게 허용됐으나, 교회가 일반인들의 생활에 개입하는 일은 철저히 금지됐다. 그 뒤 소련이 붕괴하자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시민들의 수가 점점 불어났다. 1991년에 정교회 신자라고 밝힌 러시아인은 1/3에 불과했으나, 2012년에는 74%에 달했다. 이는 응답자의 약 7%인 무슬림보다 훨씬 앞선 수치다.(1)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교회는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판단 하에 화해를 시도했다. 러시아의 내로라하는 정교회 전문가 안드레이 베글로프는 “수십 년간 배척당해온 세월을 뒤로하고, 교회는 가정, 문화, 교육, 출산, 풍습 등 그간 염두에 뒀던 분야에서 자신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설명한다. 정교회 활동가들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뒤에는, 학교 개혁으로 ‘종교문화 및 세속윤리 기초’ 수업이 의무화됐다. 2012년부터 학부모들은 자기 종교에 맞는 과목을 선택할 수 있지만, 실상 온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는 않다. 여기에는 총대주교가 새 교육부 장관 올가 바실리예바와 우호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 작용한다. 더욱이 유명한 정교회 역사학자이자, 수도원장 티혼 체프쿠노프와 친분이 두터운 바실리예바 장관은 종교 교육 시간을 증설하는 데 호의적이다.
보건복지부에까지 진출, 낙태 반대에 앞장
교회는 보건복지부에도 진출했다. 정교회 사제들은 시민 보건위원회에 정기적으로 초빙돼 보건정책을 건의한다. 2015년 10월 이 위원회 회의에서 판텔레이몬 샤토프 사제는 베로니카 스크보르초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에이즈 바이러스는 사회적, 도덕적 원인, 보다 정확히 말해 비도덕적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샤토프 사제는 “병에 맞서려면 오로지 건전한 도덕적 가치들을 장려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국은 모스크바 번화가에 위치한 ‘어머니를 위한 집’처럼 정교회 단체들이 운영하는 임산부 및 어린 엄마들을 위한 시설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 시설의 운영자인 마리아 스투데니키나는 “우리 시설에 머무는 여성 10여 명은 아이 아빠의 강요나 경제적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낙태를 거부했다”며 뿌듯해하면서도, 이 ‘대량학살’에 대해 거론할 때마다 매번 그 온화한 얼굴이 굳어졌다. 이 29세의 젊은 여성은 “정교회 신자가 된다는 건 애국이자 러시아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훗날 러시아를 수호할 미래의 군인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푸틴이 우리 총대주교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2014년 교회는 사법개혁안과 관련해 미성년 범죄자들에 대해 기존법보다 좀 더 완화된 대체법안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저지했을 뿐 아니라, ‘가정 덕목’ 수호를 내세워 빈곤층 부모가 자녀들을 위탁기관에 맡기도록 돕는 육아지원 및 사회적 후견 법안을 폐기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정교회가 러시아 정권에 정치적 연줄을 댈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오산이다. 총대주교는 정교회를 초월한 일부 단체들의 과격 행위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가을, 이 단체들은 알렉세이 우치텔이 만든 영화 <마틸다(Matilda)>의 개봉을 방해했다. 2000년 개봉한 이 영화는 러시아정교회 성인으로 시성된 니콜라이 2세와 볼쇼이 발레단 소속 발레리나의 연애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이 단체들은 2개 주요 배급사에 상영을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러시아의 페미니스트 펑크록 인디 그룹인 푸시 라이엇(Pussy Riot)의 3인조 멤버는 2012년 모스크바의 구세주 성당에서 ‘성모여, 푸틴을 쫓아내소서’라는 기도형식의 펑크록 공연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총대주교는 “신자들의 종교적 감성을 모욕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 법안 채택을 환영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대외교회 관구(DECR)의 책임자인 힐라리오 대주교는 영화 <마틸다> 개봉과 관련해, “폭력에 호소하는 모든 행위에 무조건 그리고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한편,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옹호하는 이들의 편에 설 수도 없고, 또 전혀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덧붙였다.(2)
다른 한편으로 종교단체가 옹호하는 의견이 항상 우세한 건 아니다. 1920년 이후 러시아에서 합법화한 자유의사에 의한 낙태(스탈린 치하에서 잠시 금지됐던 때를 제외하고)가 지속해서 교회의 공격을 받아왔다. 2016년 9월 키릴 총대주교는 “출생 전 자녀의 합법적 살해 종식”에 호소하고, 사후피임약 금지를 위한 ‘법안 수정’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별 효과가 없었다. 프랑스처럼 러시아에서도 여성은 임신 12주까지 낙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다만, 합법적인 예외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만 그 기간을 넘길 수 있다. 2012년까지는 빈곤이나 아이 아빠의 구금 같은 사회적 기준들이 예외사항으로 채택됐으나, 그 후 임신 13주부터는 강간으로 인한 임신일 경우만 낙태가 허용됐다. 정교회의 새 대변인인 드미트리 스미르노프 사제는 “우리가 없었다면 이 살인은 묵살됐을 것이다. 하지만 살인 금지를 위해 우리가 협상을 추진한 덕분에 낙태는 러시아에서 (4년 동안) 절반으로 줄었다”며 흡족해한다. 그러나 스미르노프 사제는 피임이 더욱 손쉬워지고 여성들이 자신의 건강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 것으로도 이런 극적인 수치가 설명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레바다 센터가 2018년 1월 실시한 여론조사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35%가 낙태에 대해, 가족이 아이를 보살필 수 없는 것만큼이나 낙태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1998년의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18%가 이런 견해를 밝혔다.
정치적 영향력도, 신앙심을 높여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정치권에서 정교회의 영향력이 되살아났다 해서, 좁은 의미의 신앙심이 높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스스로 정교회 신자라고 한 사람들의 약 30%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3) 이들 중 3%만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성당에 가는데, 이 빈도는 프랑스에서 조사된 가톨릭 신자의 미사 참석률(4.5%)과 비교될 뿐 아니라, 미국의 개신교 신자 예배 참석률(48%)에도 한참 못 미친다.(4) 적당한 거리에 교회가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다. 모스크바에 널려있는 예배당들 대부분이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수도 북쪽의 성 피멘 교회의 경우가 그렇다. 주일이면 사제들은 겨우 스무 명 남짓한 할머니들 앞에서 미사를 집전한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이유에서 두건으로 흰 머리칼을 가린 마리아 리체프스카이아 부인은 “알다시피 소련 시절보다야 신자가 늘 더 많은 셈이다”라며 흐뭇해한다. 67세의 은퇴한 이 노부인은 미사를 거르는 일이 없지만, 젊은이들이 부름에 불참하는 상황을 지켜본다. 부인은 젊은이들이 다른 방식으로 믿음을 실천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독립 그래픽디자이너인 일리아 스토니아킨은 1년에 한 번 정교회 부활절에만 성당에 간다. 그럼에도 일리아는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지니고 다니며 사순절을 지키고, 반년 전에는 등에 커다란 성모마리아 문신도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일리아는 “약간은 반항의 뜻도 있다. 우리 가족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생각하는 무신론자들이다”라며 칼 마르크스를 인용해 말한다. 일리아는 대통령과 총대주교의 친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가 보기에 교회는 러시아 정계에서 ‘도덕 책임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정교회 신자로 규정한다면, 이 수식어는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는 러시아라는 국가에 소속감을 밝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러시아는 1991년 이후 국민국가의 이념적 초석을 다지려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총대주교와의 화해를 고려하게 됐다. 표트르대제가 1721년에 총대주교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임명한 고위 성직자 단체(시노드)를 만든 이후, 결국 러시아의 세속권력은 교권을 장악한다. 정교회는 세르게이 우바로프 백작이 ‘러시아정교회, 전제정치, 국민정신’의 세 가지 이념을 토대로 삼은 국가 정체성의 근간으로 정의된다. 니콜라이 1세(1825~1855)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대혁명 정신이 러시아에 ‘전염’되는 것을 막으려던 시기,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세르게이 우바로프는 이 세 이념을 러시아 정신의 핵심으로 삼았다.
1997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 재임 당시, 1993년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첫 번째 위반 사례가 발생한다. “러시아 역사에서, 그리고 러시아 정신과 문화의 변천 및 발전 과정에서 정교회의 특수한 역할을 인정한다”는 법안이 그것이다. 이 법안은 정교회의 우위를 인정하며, 달리 말하면 모스크바의 종교 전문가 알렉산더 아갓자니안의 말마따나 ‘위계적 다원주의’의 창시를 의미한다.(5)
푸틴은 처음 두 번의 대통령 재임 기간(2000~2008)에, 자신을 “이념이 없는 순수한 관리자”로 소개했다. 당시 푸틴은 종교의식에 대한 재정지원이나 연방 텔레비전 채널 신설을 거부하며 교회의 야심을 눌렀다.(6) 정교회의 ‘특수한 역할’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재임 기간에 구체화했고, 그의 재임 초기인 2008년 말기에는 총대주교 알렉세이 2세가 타계했다. 알렉세이 2세의 후임인 키릴 총대주교는 6세기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구축한 ‘권력의 조화’ 모델을 재건하려 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속권과 교권은 마땅히 협력하고 서로 지지해야 한다. 메드베데프는 새 총대주교 취임 축하 메시지에서, 그 자신이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 “국가 발전과 영적 가치의 강화”를 위해 교회와의 대화를 요청함으로써 이에 부응했다.
“정부와 교회의 결합은 괴물을 낳을 것”
메드베데프와 당시 총리였던 푸틴의 추진으로 교회는 엄청난 수입에 대해 매우 신속하게 상당한 세금감면 혜택을 받는다. 2014년, 교회는 신실한 신자들과 부유한 후원자들의 헌금뿐 아니라 교구의 성화, 양초, 장식품 및 케이크 판매로 56억 루블(7,600만 유로)을 벌어들였다.(7) 당시 러시아는 국제경제 위기로 타격을 입었으나, 메드베데프는 2008~2010년 러시아 전역에서 성전건축에 60억 루블을 쾌척한다. 2010년에 정부는 옛 소련 당국이 몰수한 6,400건 이상의 재산반환을 약속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키릴 총대주교는 메드베데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실시된 ‘현대화’ 정책을 적극 지지하겠다고 했다. 메드베데프는 국영 대기업들의 민영화 재개와, 더 많은 정치세력들에 선거전을 개방하는 정책을 결합한다. 모스크바에 거점을 둔 소바 센터(Sova Center) 대표로서 종교적 관용과 외국인 혐오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알렉산더 베르호프스키는 “교회는 정부가 혜택을 주기 때문에 정부를 돕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은 평등한 관계라고 볼 수 없다. 칼자루는 국가가 쥐고 있기 때문”이라며 미묘한 부분을 지적한다.
이런 (비대칭적) 상부상조 관계는 푸틴이 권력에 복귀하면서 더 명확해졌다. 2000년 3월 푸틴의 초선 이래 전혀 볼 수 없던 규모의 선거운동이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 곳곳에서 벌어졌다. 3선에 성공한 국가수반 푸틴은 강력하고 반박 불가능한 원칙들을 동원하고 나섰다. 그는 서방 국가, 즉 미국이 자유방임적 가치나 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고립시키고 러시아의 전통가치를 위협하는 데 맞설 것을 천명했다.
2013년 발다이 클럽(Valdai Club) 콘퍼런스에서 푸틴은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도덕적 기준이 없다면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년 뒤 같은 콘퍼런스에서 “사회가 존속하려면 우리의 전통과 위대한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지켜나가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스미르노프 사제는 대통령의 이런 공세를 반기는 입장이다. 그는 “러시아인이, 정교회 신자가 어떻게 동성 결혼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된다! 러시아와 교회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 대통령도 마찬가지다”라고 강조한다.
정교회는 애국심의 한 요소로서 러시아 국경을 넘어 러시아를 투영하는 탁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전 세계, 특히 옛 러시아제국 주변부에서 약 1억 5,000만 명의 신도를 끌어 모았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고도의 전략적 해군기지 세바스토폴을 손에 넣은 크림반도 합병 직후, 푸틴은 크림반도가 성 블라디미르의 세례를 받았음을 상기시켰다. “정교회 세례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국민들의 문화, 가치관, 문명의 기본 개념을 결정한다.” 그러나 키릴 총대주교와 국가수반 푸틴의 시각이 늘 완벽하게 일치하는 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중요 공동체에 공을 들여온 키릴 총대주교는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돈바스(Donbass) 분리주의 반군과 우크라이나 정부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 지난해 12월 27일,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중재로 300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정부군 및 반군 포로의 맞교환이 성사됐다.
2016년 말 파리에 러시아정교회 영성 및 문화 센터가 문을 열었다. 에펠탑이라는 매우 상징적인 기념물 아래, 서방의 수도라 할 수 있는 파리 한복판에 반짝이는 정교회 성당의 돔이 들어선 것이다. 마를렌 라뤼엘 연구원에 따르면 성당, 학교, 문화센터를 아우르는 이 복합 건물을 짓는 데 모스크바는 1억 5,000만 유로의 비용을 들였으며, 이 건축물은 “러시아의 소프트파워적 요소로서 정교회의 도구화”(8)를 입증한다.
정부가 패를 쥐고 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하원의원인 보리스 비츠네프스키는 “상황이 예기치 않게 바뀔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는 성 이삭 성당 사용권을 정교회에 양도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스탈린에 의해 무신론 박물관으로 뒤바뀐 뒤, 1937년에는 다시 역사 및 예술 박물관이 된 성 이삭 성당은 모스크바의 주요 관광명소 중 하나다. 성 이삭 성당의 건물 유지보수 책임은 정부에 있으나, 성당이 창출하는 상당한 수입(2016년, 1250만 유로)은 이제 교회로 들어갈 것이다.
비츠네프스키는 “왜 정부가 정교회에 호의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극도로 위험한 게임이다.” 다른 종교와 비교해 정교회에 특권을 줌으로써 러시아 정부는 일정 기간 다른 종교를 소외시키거나 러시아 사회 내 사회계약을 배제할 위험이 있다. 러시아정교회 전문가인 캐시 루슬렛 연구원은 “중요한 건 일상적 관행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아니라, 교회의 상징적 자본”이라고 강조한다. 국가가 전통가치를 수호하는 데 정교회라는 덕목이 필요한 만큼, “권력은 성직자들에게 굽신거리게 될 것”이라고 비츠네프스키는 예측한다. “이 상호결합은 괴물을 낳게 될 것이다.”
글·아나이스 요벳 Anaïs Llobet
프랑스의 뉴스에이전시인 AFP의 모스크바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필리핀 주재 특파원 근무당시에 겪은 하이얀 태풍 피해의 악몽을 바탕으로 소설 『Les mains lâchées(놓친 손)(2016)를 쓰기도 했다.
번역·조민영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석사 졸업. 역서로 『지도로 읽는 아시아』 등이 있다.
(1) Sondage du centre d’études Levada(레바다 연구센터 여론조사), Moscow, 2012년 12월.
(2) Jacques Berset, ‘Le film Matilda, réprouvé par l’Église, réveille les extrémistes orthodoxes(교회가 배척한 영화 <마틸다>, 정교회 극단주의자들을 일깨우다)’, Portail catholique suisse, 2017년 12월 25일, www.cath.ch.
(3) Boris Doubine, ‘Formes de la foi orthodoxe en Russie contemporaine(현대 러시아에서 정교회 신앙의 형태)’, conférence au Centre Carnegie, carnegie.ru, 2012년 6월.
(4) Institut Sreda, 2012년 8월, ‘sondage IFOP pour La Croix(<십자가>지를 위한 프랑스 여론연구소의 여론조사)’, Paris, 2009년, Pew Research Center, Washington DC, 2014년.
(5) Alexander Agadjanian, ‘Pluralisme religieux et identité nationale en Russie(러시아의 종교적 다원주의와 국가의 정체성)’, <International Journal on Multicultural Societies>, vol. 2, n° 2, Unesco, Paris, 2000년.
(6) Régis Genté, ‘Russie: l’Église orthodoxe, l’État et la société. Entretien avec Nikolaï Mitrokhine(러시아: 정교회, 정부, 사회. 니콜라이 미트로힌과의 대담)’, <Religioscope>, 2014년 1월, www.religion.info.
(7) Enquête du quotidien russe RBK(러시아 <RBK Daily>의 조사), Moscow, 2016년 2월.
(8) Marlène Laruelle, ‘Le soft power russe en France: la paradiplomatie culturelle et d’affaires(프랑스의 러시아 소프트파워: 문화 및 비즈니스의 양립외교)’, Carnegie Council for Ethics in International Affairs, New York, 2018년 1월 8일.
박스기사
‘반혁명군의 혈통’ 카자크의 딜레마
러시아 남부에 위치한 스타로체르카스크의 옛 요새 터에, 돈 카자크(Don Cossacks. 러시아 남방 변경지역으로 이주해 자치 군사 공동체를 형성한 농민집단-역주)에 소속된 수백여 명이 연례 경기를 위해 모여 있다. 전통의상을 입은 남성들이 검을 휘둘러 수박을 반으로 쪼개거나, 달리는 종마 위에 올라타면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본다. 드네프르강 일대와 돈강 및 볼가강의 러시아 지류 사이에 정착한 슬라브족 출신이 대다수인 카자크는 과거 차르의 군대에서 보충병으로 복무했다. 카자크는 주로 러시아제국의 국경을 수비했고, 그 대가로 그들의 공동체 운영에서 상대적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볼셰비키 혁명 당시 대부분이 반혁명군인 백군에 참여했으나, 이후 소련에서 축출된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이 집단의 일부 구성원들이 ‘영광스러운’ 용병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우며 전통문화를 되살려냈다.
햇살은 강하지만 산들바람이 불어와 예수의 초상이 그려진 깃발이 나부낀다. 발레리 레자노프는 목에 건 굵직한 나무 십자가를 보여주며 “우리는 무장한 기독교도이자 정교회 신앙의 수호자다”라고 선언한다. 카자크는 출신을 가리지 않고 신병을 받아들였으나, 그들은 정교회와 투철한 관계를 구축했다. 카자크의 지도자인 미하일 베스팔로프는 “신앙을 존중하는 것, 조국을 수호하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카자크의 세 가지 가치관”이라고 소개하면서, 그가 애지중지해온 덕분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콘 하나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와 우리의 대통령에게 봉사한다. 언제나 그렇게 해왔다”고 덧붙인다.
베스팔로프 곁에서 일리아 체르치노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역시 커다란 십자가를 걸고 정교회 기도문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가 ‘정교회 공동체에 꼭 필요한 구성원’으로 여기는 카자크는 비록 미사 참례 등 신자의 의무는 지키지 않더라도, 신앙을 중심에 둔다(카자크가 되려면 반드시 정교회 신자가 돼야 한다). 일리아는 말한다. “카자크와 러시아가 신앙을 지키는 것은 곧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푸틴은 가장 훌륭한 지도자다. 신앙 덕분에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덜 훔치고 덜 술을 마시기 때문이다.” 일리아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료들도 대부분 애국심은 곧 정교회라고 연결 짓는다. “카자크는 교회와 러시아의 적에 맞서 싸울 의무가 있다.”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들의 거점으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나눈 이 호전적인 대화는 ‘러시아의 적’이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의 입에 다시 오르내리고 있다. 일부 분리주의자들은 친 러시아 성향의 동부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키예프(우크라이나 정부)는 모스크바가 분리주의자들을 보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분리주의자들은 2014년 4월 이래 이미 1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이 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레자노프는 “우리는 언제나 애국자였고, 따라서 러시아의 이익을 수호해야 하는 곳에서는 전쟁을 벌일 것이다. 국가와 신앙이 우리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곳에 갈 것이다. 우리는 성전(聖戰)을 수행하는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 정교회 측은 키예프와 모스크바의 험악한 관계를 불편해하는 눈치다. 2014년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속한 크림반도를 합병했을 때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가 축하행사에 불참한 일은 이목을 끌었다. 이후 몇 달간 이어진 정교회의 침묵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의미했다. 키예프 총대주교와 경쟁 관계에 있는 러시아정교회로서는 충실한 신자가 될 우크라이나인 인구의 75%를 잃는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정교회 측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대다수 카자크는 보통 별 충돌이 없는 교회와 국가 간 공조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익명을 원하는 청년인 세르게이 L.처럼 이런 공조는 과거의 교훈을 망각한 것이며, 이는 ‘배신’이나 다름없다고 보는 소수도 존재한다. 그는 고조부모의 사진을 보여줬는데, 둘 다 1920년대 소련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추방된 뒤 살해됐거나 사망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런 민족 말살에 대해 보상을 약속했으나 보상 같은 건 없었다. 왜 우리가 소련을 계승한 자들에게 납작 엎드리는 교회를 우러러봐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멋대로 주물러 국가에 충성하게 만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또한 푸틴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미사 참석이 금지된’ 카자크도 봤다고 이야기했다.
자치 러시아정교회 사제이자 카자크인 알렉세이 레베데프는 매우 신랄한 입장이다. “누군가 정교회 신자라면, 그래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머리에서 나온 종교적 계획을 그대로 읊어주는 것이다. 내 생각에 키릴 총대주교의 정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기관이라기보다, 정교회 업무를 담당하는 크렘린 관할 부서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