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청년에게 항복이란 없다

2018-03-29     아크람 벨카이드, 올리비에 피로네 | <르몽드 디플로&

2017년 12월 6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평화 프로세스’를 더욱 가로막고,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에서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이런 항의는 군대를 앞세운 이스라엘의 기습공격과 체포 작전으로 매몰차게 진압됐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 소재지인 라말라시 외곽에 위치한 비르제트 대학의 도로 위에 팔레스타인 국기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살해된 이곳 출신 대학생 28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위령탑 근처에서 한 무리가 행진을 시작한다. 질서유지단원 중 한 명이 광장 이쪽저쪽으로 이동한다. 철모를 쓰고, 수류탄과 폭발물 벨트가 달린 위장 전투복을 입은 그는 얼굴을 베두인 모자로 가린 올리브색 전투복 차림의 젊은 남녀들에게 박자를 알려주고 있다. 모두 무력항쟁의 영광을 위한 슬로건들을 리듬에 맞춰 읽는다. 
 
그들은 고(故)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에게 경의를 표하는 ‘파타(Fatah: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중 최대조직이자 중요 정당으로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이라고도 한다. 1956년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됐으며, 1965년경부터 무장투쟁을 전개해 오고 있음-역주)’의 고유색들로 이뤄진 깃발과 이슬람 저항운동단체(하마스, PLO의 온건 노선에 반대하며 창설된 무장단체)의 창설자인 셰흐 아메드 야신(1937~2004)을 추념하는 현수막들을 흔든다. 행진의 기획자들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의 집권당인 ‘파타’의 청년 단체(샤비바)에 속한 이들이다. 그들은 이 모임이 ‘화해’ 협정 체결에 힘쓴 팔레스타인 정치권의 위대한 두 계파(PLO와 하마스)를 기리기를 원했다. 2017년 10월 조인된 화해 협정은, 10년이 넘는 적대관계와 살육의 과거를 끝내기 위한 것이었다(PLO와 하마스는 지난 2007년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하면서 대립의 길을 걸어왔으며, 이번 화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 단일정부를 출범시키겠다고 선언했다-편집자 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사회학과 학생들이 그 모습을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20세의 라미 T.는 내뱉듯 말했다. “저것은 허울일 뿐이다. 파타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청년들에게 제안한다는 것이, 바로 저런 상징적인 무력시위들이다. 이것은 결코 진지한 정치 활동이 아니다. 현 체제는 실제 결실을 볼 공동의 결집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없다. 그들은 청년들의 정치화가 무엇보다 현 체제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1) 
 
팔레스타인 국민의 70%가 30세 미만이다. 따라서 점점 더 정당성에 논란이 일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에게 청년의 정치화는 아주 민감한 주제다. 1993년 오슬로 협약 및 자치정부 수립 이전에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산하기관인 청년·스포츠 고등위원회에서 방학 캠프와 자원봉사 편성을 통해 이념교육을 해왔었다. 그러다가 1993년 ‘청년들에게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행동할 힘을 주기 위한’ 청년·스포츠부가 탄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당 부처 차원의 지휘 활동은 소홀해졌고, 2013년 해당 부처의 업무가 일시중단 돼, 아바스 수반의 지휘로 고등위원회에서 업무를 다시 맡게 됐다. 또 한 명의 사회학도인, 22세의 유세프 M.이 말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활동주의에서 청년들을 멀어지게 하고, 청년들이 정치 분야에서 새로운 행동방식을 구상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이후, 그리고 오슬로 평화협정의 이행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거의 예속된 상태가 되면서) 청년들은 방향성을 잃었다. 우리는 분노했다. 우리 국민에게 주어진 정치적 소득은 아무것도 없었다. 파타와 하마스 사이의 분열은 우리를 분노케 한다. 점령 문제는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로 인한 폭력을 우리는 일상에서 겪고 있다. 우리들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은 불안정하다. 대규모 결집이 싹틀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결합돼 있다.”
 
“점령은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청년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인한 사망 및 부상, 체포, 구금에 있어 최대 피해자다. 이는 최근의 한 연구결과 밝혀진 사실이며,(2) 2017년 이스라엘 군대나 이주민들에 의해 살해된 95명의 팔레스타인인들 중 50명 이상이 25세 이하의 청년들이었다.(3) 게다가 UN에 의하면 “대공황 이후 드물게 나타난, 세계 최고 수준의” 약 27%의 실업률(요르단강 서안지구는 18%, 가자지구는 42%)로, 청년들은 경제적 타격도 직접 받고 있다.(4)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15~29세 중 약 1/3이 일자리를 찾지 못했는데, 교육수준이 높은 젊은 여성들의 경우 실업률이 더욱 높아, 약 1/2에 달한다. 
 
국가 전체로 보면, 노동시장에 합류하는 팔레스타인인 청년은 40%에 불과하며, 가자지구에서는 15~29세 중 56%가 실업 상태다. 대학 진학률이 아랍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들지만(유네스코에 의하면 44%), 졸업생들에게 취업 시장의 문은 대단히 좁다. 그래서 이들 중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눈을 돌려야만 하는데, 그 경우 이들은 대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한 최저 임금(시급 2.4달러, 약 2유로)을 밑도는 보수를 받으며 그 어떤 사회보장 혜택도 받지 못한다.
 
20세의 후다 A.는 베들레헴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다. 이 대학은 베들레헴의 예수탄생 기념 성당을 찾아 이스라엘에서 온 관광객들의 버스로 붐비는 도시의 언덕 높이 자리한, 훼손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직원들의 3/4이 이슬람 종파이자 80%가 여성인 이 가톨릭 교육기관에는 3,5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한다. 이스라엘에 의해 팔레스타인 고등교육기관 입학이 금지된 동예루살렘 출신인 후다 A.는 6km에 불과한 통학 길을 이스라엘 장벽 때문에 매일 3시간을 왕복한다. 그녀는 계속 악화되는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점령은 학생들의 삶을 짓누른다. 공부하고 싶은 대학 등 우리의 모든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 점령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은, 단지 이스라엘이 강제하는 이동의 자유 제한 때문에 비르제트나 나블루스의 대학에 등록하기 전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5) 하지만 대학교는 우리에게 이런 상황에 어떻게 맞설지, 그런 정치적인 교육은 생략한 채 세상을 외면하고 있다. 이전 세대들의 경우,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정당을 선택하고 활동주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만난 많은 대학생들과 교사들은 파타도 하마스도 청년들을 결집시키고, 정체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의 선두를 이어받을 엘리트들의 부상을 독려할 정치적 계획을 누구도 하고 있지 않다고 한탄했다. 이런 비판을 우리는 여러 번 듣게 됐다. 예를 들어, 베들레헴 대학교에서 목격한 오전 자유 활동을 통해서는 상황의 양면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약 200명의 대학생들이 그늘진 마당에서 쾌활하고 소란스럽게 서구의 노래나 레바논 팝 음악 소리에 맞춰 퀴즈를 맞히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학구적인 분위기의 강당에 30여 명이 모여 2017년 6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채택해 논란에 있는 사이버 범죄에 관한 법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 통제를 위한 이 법률은 “국가의 완전성, 공공질서 및 국내외 안보”를 해치거나 “국가의 일체성과 사회 평화”를 위협하는 글을 작성한 모든 시민을 투옥시킬 수 있다.(6)
 
시민사회에서 기본권에 반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 법은, 현 체제를 경멸하는 기자들, 야당 인사들뿐만 아니라 정권 비판이 쏟아지는 사회관계망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청년들의 입을 막고 처벌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증거로 지난 9월 팔레스타인 국가 안보국에서는, 마무드 아바스의 사임을 촉구하던 기자의 체포 소식을 페이스북에서 고발했던 헤브론(알칼릴) 지역의 반식민지 청년 운동 대표, 이사 암로를 검문했던 일이 있다. 암로는 이스라엘의 점령과 식민화에 반대하는 평화시위를 조직해, 2016년 2월 이미 이스라엘 군대에 체포된 바 있다.(7)
 
저널리즘 과정에 등록한 23세의 야시르 D.는 이 토론을 이끄는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대학생들이 자신들과 밀접한 주제나, 사생활 및 표현의 자유를 무시하는 법체계에 대항하는 결집력이 부족한 점에 덤덤했다. “우리 부모들은 소비를 위해 빚을 지도록 정부에게 선동당해 왔다.(8) 이 때문에 기성질서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청년들은 현실이 힘들기 때문에 즐기는 삶을 원한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청년들은 기존 정당들로부터 동질성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다.” 한 참고 연구에 의하면, 15~29세 팔레스타인 청년들 중 73%가 어떤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고 하며, 기관들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9)
 
커뮤니케이션을 전공 중인 22세의 마날 J.는 토론과정을 모두 지켜보다가 박수를 보냈다. 또한 기자인 함디 파라즈가 ‘이견의 목소리를 침묵 속에 가두려는’ 이른바 자유침해법을 고발할 때도 그는 환호했다. 그러나 정권을 옹호하는 한 변호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고, 또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온전한 표현의 자유를 요구한다”고 말할 때,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마날 J.는 정치계에 입문할 준비가 된 것일까? 이에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변했다. “나는 정치계 입문을 결심했지만, 그것은 간단하지 않다. 모든 청년들이 알고 있는 법칙이 하나 있다. 정치에 투신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든 팔레스타인에서든 한 번은 감옥에 간다는 것을 뜻한다. 여성에게는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다. 투옥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 외에도 절대 결혼을 못 하게 될 수 있다. 여전히 매우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온갖 소문이 감옥에 다녀온 여자의 평판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수감된 모든 여성들이, 아헤드 타미미(17년 12월 두 명의 이스라엘 군인을 폭행했다는 혐의로 수감된 16세 소녀)처럼, 국제 언론의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아헤드 타미미는 자기 집에 들어온 이스라엘 군인들의 뺨을 때렸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몇 시간 전 타미미의 사촌이 이스라엘군이 쏜 고무총탄에 얼굴을 맞아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편집자 주).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체포로 수감된 팔레스타인인들은 8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성인 남성 5명 중 2명에 달하는 숫자로, 대부분 행정구금이라는 규정 하에 혐의도 재판도 없이 수감된다. 이 중 1만 5,000명은 여성이다.
 
Nabd, 점령과 식민화에 대항하는 운동
 
비르제트 사회학 대학에 재학 중인 극좌파 성향의 26세 위삼 J. 역시, 팔레스타인 활동주의의 융합지라 할 수 있는 이 대학의 많은 학생들과 같은 이유로 수감된 적이 있다(이들 중 60여 명이 현재 이스라엘에 의해 구류된 상태이며, 약 800명이 10여 년 전부터 군대에 의해 체포됐었다). 그는 이스라엘 감옥에서 3년을 보낸 후 2015년 풀려났다. 당연히 그 시간만큼 그의 학업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왜 체포됐던 것일까? 그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다만 수줍은 미소로 “체포돼 ‘과격주의’ 혐의로 형을 선고 받았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학교 친구들인 라미와 유세프처럼 Nabd(아랍어로 ‘고동’)에서 활동 중이다. 
 
Nabd는 이스라엘의 점령과 식민화뿐만 아니라, ‘자치정부, 팔레스타인 내부의 정치적 분열, 그리고 몇몇 NGO와 정부 거물들이 장려하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항하기 위한’ 청년들의 운동이라고 유세프가 말했다. 그에 따르면 Nabd는 이스라엘에 맞서, 국가 통합을 촉구하는 대중 항의운동에 따라 2011년 라말라에서 시작됐으며, 대규모 정당들과는 독립적인 관계를 갖길 원한다. 일부 회원들이 이슬람 계파 출신이기도 한 이 운동은 라미가 우리에게 털어놓았듯이 ‘좌파’로 낙인찍혔으나, 요르단강 서안의 여러 도시들에 확산돼, 가자지구의 청년들과도 관계를 맺으려 시도하고 있다. 또한 이 운동에서는 세계은행과 서구국가들의 영향을 받은 자치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사회 정체성의 혼란을 부채질 한다고 보고, 대중운동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공동의 기억을 되찾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Nabd의 활동가들은 영토 분열에 맞서 싸우고, 요르단강 서안의 대도시들 사이의 분리(가자지구의 고립도 포함)가 팔레스타인인들의 뇌리에 ‘자치 도시들 간의 분열’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지 않게 하려 한다. “우리는 공동체 정신을 살릴 문화 및 예술 활동도 제안하고 있다. 일례로 난민캠프에서는 순회극단도 생겼다”고 위삼은 덧붙인다.

‘오슬로 세대’에 공동의 전망을 선사하다
 
팔레스타인의 사회학자이자 엑스-마르세유 대학교 교수인 스베 스베는 “Nabd 활동가들은 ‘다른’ 정치를 원한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가 군림하는 현실적 한계는 결코 간단치 않다. 이 운동의 주요인사 중 한 사람인 바셀 알아라즈는 2017년 3월 6일, 긴 추격전 끝에 이스라엘 군대에게 살해됐다. 저항 활동과 대중교육 강좌에 활발히 참석했던 알왈라자(베들레헴) 출신의 이 33세 약사는, 2016년 4월 “테러활동 준비” 혐의로 팔레스타인 안보군에 의해 6개월간 수감됐다가, 사망 직전에 풀려났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의 원인을 팔레스타인 정보국과 이스라엘 정보국의 보안협력에서 찾았다. (10)
 
Nabd가 팔레스타인에서 활동 중인 유일한 청년단체는 아니다. 15~29세의 약 40%가 유사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최근 몇 년 동안 “팔레스타인 민족 통일”을 키워드로 내세운 Gaza Youth Breaks Out(GYBO)이나 Jabal Al-Mukabir Local Youth Initiative 등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전자는 2011년 가자의 블로거들이 설립한 뒤, 이스라엘 점령, 정치 책임자들의 부패 그리고 주요 정당들의 태만을 같은 시각으로 규탄한다. 동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하는 후자는 2014년 3월 16일 성도의 성벽지대 주위에 인간 사슬을 만들어 유대인 정착촌에 항의하고 팔레스타인 정체성을 재확인한 일을 계기로 유명해졌다. 
 
“우리 세대는 혁신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전통적인 정치적 견해를 재고하길 희망하는데 이것이 바로 문화, 사회, 정치 참여 그리고 예술을 혼합한 제안들이 급증하는 이유다.” 베들레헴 출신의 연구자이자 작가인 카림 카탄은 이렇게 분석한다. 팔레스타인 국내외 청년 예술가, 연구자와 작가들이 예리코에 거주하며 작업하도록 초대하는 엘아트랄(‘폐허’) 프로젝트의 회원인 그는 창작의 힘을 빌리는 것이 “새로운 결집 방식의 일부라고” 확신한다. 그에 의하면, 이는 또한 서방국가 국민들과(특히 프랑스인들)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끔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와서 석 달을 지내고,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NGO들의 시대는 끝났다. 외국인들은 더 이상 우리를 ‘돌보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 온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 대해 배우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러나 이런 운동들의 영향과 사회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떨까? 아바헤르 엘사카 비르제트 대학 사회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그들이 행동할 수 있는 공간적 제한, 권력조직에 의한 통제 조치, 그리고 당연히 이스라엘의 탄압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한계가 있는 그들의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Nabd와 같은 운동들은 새로운 역동성을 만들어낼 수 있고, 결국 사회정치적으로 중요한 변화들을 위한 터전을 준비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미래 전망의 부재와 사회 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불가능성 앞에서 환멸에 휩싸인 팔레스타인 청년들에게 이 운동들이 공동의 참여를 위한 해결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청년들 중 상당수가 자신이 소외됐다고 느끼며, 모든 정당들을 거부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머무는데, 일부는 폭력적인 행동을 할 위험도 있다.” 
 
2015-2016 봉기가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당시에 단순히 칼 하나를 가지고 이스라엘 군인들이나 점령지의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독 공격 사건이 증가했었다. 이는 주로 정당에 속하지 않고,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는 25세 이하의 청년들에 의한 사건이었다.(11) 이 사건들은 2015년 10월~2016년 2월 팔레스타인인 사망자 175명을 기록한 가혹한 진압을 일으켰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런 절망적인 행위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25세의 아니사 D.는 1만 3,000명의 주민 중 70%가 실업 상태인 제닌의 난민 캠프에 살고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 공식적으로 52명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자(주민들에 의하면 최소 200명)를 낸, 2002년 4월 이스라엘의 난민캠프 기습공격을 겪었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들이 주요 고객인 도시 북쪽의 호텔단지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그녀는, 종종 폭력에 기대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 이스라엘인들이 우리 가족 모두를 처벌할 것임을 알고 있고, 우리는 반란을 일으킬 때마다 큰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견딜 수 없다.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존경한다.” 
 
베들레헴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대학생 후다는 말한다. “바리케이드의 군인들을 향한 개별 공격들은, 점령에 저항하고 이스라엘이 행하는 폭력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다.” 이에 대해, 비르제트 대학의 유세프도 “이런 극단적인 행동은, 계속되는 식민화, 검문소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모욕, 완전히 막혀버린 미래에 대한 엄청난 절망감의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나블루스(팔레스타인 중부 도시) 구시가지의 한 카페에서 일하는 20대의 웨이터는 우리에게 훨씬 더 거친 표현으로 자기 생각을 표명했다. “내가 태어난 이후, 이스라엘인들은 내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단 한 번밖에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숨이 막힌다. 내 나라에 감금된 느낌이다. 난 통장에 돈도 없고 아내도 없으며, 고등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이곳에 머물면서 조국을 위해 희생했건만, 나는 이제 단 한 가지밖에 바라는 것이 없다.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게 안 된다면, 바리케이드의 군인에게 몸을 던질 것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이곳에 남을 것이다”
 
베들레헴 데이셰 난민캠프의 유명인사인 28세의 마즈디에게 망명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1만 5,000명이 사는 요르단강 서안최대 캠프인 이곳에서는 청년들이 무력감을 느낄 틈이 없다. 마즈디는 이곳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데이셰는 이스라엘 군대의 조준경의 탐지거리 안에 있다. 이스라엘 군대는 대부분의 난민캠프처럼 데이셰를 매우 자주 기습한다. 페이스북에서 폭력을 조장하거나 군인들에게 돌을 던졌다는 혐의로 체포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청년들이다. 지난 6개월간 일어난 충돌에서 1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고, 올해에만 두 명의 사망자(각각 21세와 18세)가 있었고, 고의로 다리를 겨냥해, 약 80명의 아동들이 장애를 입었다.”
 
점령과 자치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청년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대해 우리가 묻자, 그는 기탄없이 답변했다. “우리는 항의할 수 없고, 정권의 감시를 받는 활동들 외에 다른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도 없다. 우리는 양쪽에서 압박받고 있다. 유일한 해결책은 평화적인 참여다. 내 경우, 이곳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외국으로 가지 않고 사회적·문화적 활동들을 통해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곳에 평생 있어야 한다고 해도, 우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남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는 것이 수무드(아랍어로 ‘끈기’)가 필요한 저항의 행위라면,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 역시 그렇다. 패트리아크 동굴(또는 이브라힘 사원)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헤브론 구시가지의 상인인 26세의 마헤르 L.의 의견이 그렇다. 1997년에는 이곳에 3만 5,00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했다. 이제는 그들 중 8,000명만 남았다. 이들은 유난히 공격적인 800명의 이주민들과 3,000여 군인들의 지속적인 억압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가 설치한 콘크리트 장벽, 검문소, 승객들을 거르기 위한 회전문, 감시 카메라 그리고 금속탐지 게이트, 아직까지 드물게 문을 연 가게들을 탄환과 이주민들이 위층에서 던지는 오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상인들이 놓은 철책과 그물망, 이주민들이 훼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 이곳에서 사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주름진 얼굴의 마헤르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만, 3년 동안 해외로 떠나있던 그는 더 이상 고국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나는 독일로 망명했었지만, 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다시 떠날지도 모른다. 이주민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단체들이 우리에게 떠날 것을 부추긴다. 돈까지 주는 이들도 있다. 내 장사판은 망하기 직전이라, 돈의 유혹은 대단히 크다. 우리에게 물건을 사러 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사람들은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남을 것이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글·아크람 벨카이드 Akram Belkaïd, 올리비에 피로네 Olivier Piron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두 명의 사회학자 및 작가를 제외하고, 모든 인터뷰이들의 이름은 가명 처리됐다.
(2) ‘Palestinian Youth’, Palestinian Academic Society for the Study of International Affairs(Passia), Jerusalem, 2017 4월, www.passia.org
(3) Cf. ‘Deaths in 2017’, Israel-Palestine Timeline, www.israelpalestinetimeline.org
(4) 「Rapport sur l’assistance de la Cnuced au peuple palestinien(팔레스타인 국민에 대한 UNCTAD의 원조에 관한 보고서)」,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 제네바, 2017.7.10.
(5)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동의 자유 침해와 관련한 내용은 2008년 2~3월호 n.157 <마니에르 드 부아> ‘Palestine. Un peuple, une colonisation(팔레스타인. 하나의 민족, 점령)’ 프랑스어판에 삽입된 포스터 지도를 참고할 것. 
(6) ‘Presidential Decree No. 16 of 2017 Regarding Cybercrime’, 제 20조 및 51조, Ramallah, 2017년 6월 24일. 한편, 이스라엘 국회는 2017년 초, 페이스북 측에서 ‘폭력’이나 ‘테러리즘’을 선동하는 본문을 삭제하도록 하는 법안을 일차 심의에서 채택했다. 
(7) Cf. ‘Farid Al-Atrash et Issa Amro(파리드 알아트라슈와 이사 암로)’, La Chronique d’Amnesty, Paris, 2017년 11월.
(8) 2007년에서 2013년까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총리를 지낸 살람 파이야드는 2008년 소비를 위한 대출을 용이하게 하는 조치들을 수립했다. 예를 들어, 라말라의 가정 중 2/3이 빚을 진 것으로 추산됐다. Cf. ‘Palestinian workers campaign for social justice’, Middle East Report, Richmond(États-Unis), n° 281, 2016년 겨울.
(9) ‘The Status of Youth in Palestine 2013’, Sharek Youth Forum, Ramallah, 2013.
(10) Cf. Shatha Hammad 그리고 Zena Tahhan, ‘Basil al-Araj was a beacon for Palestinian youth’, Al-Jazeera, 2017년 3월 7일, www.aljazeera.com.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보안 협력에 관해서는 다음 기사 참조, Olivier Pironet, ‘En Cisjordanie, le spectre de l’Intifada(불평등 공간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10월호‧한국어판 2014년 11월호.
(11) Cf. Sylvain Cypel, ‘Pourquoi “l’Intifada des couteaux” continue(왜 ‘칼들의 인티파다’는 계속되는가)’, Orient XXI, 2016년 2월 24일, http://orientxxi.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