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흐리르 광장은 7년 전의 혁명을 기억한다

2018-03-29     피에르 돔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2018년 3월 26일 대통령 선거를 치른 이집트에서는 예상대로 군부 출신의 압델 파타 엘시시 현 대통령이 연임 당선됐다. 야당 측은 뻔한 선거결과를 놓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재 이집트에선 2011년 1월 혁명이 낳은 희망은 사라지고, 국민들은 경제난과 정부의 억압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12월 어느 날 저녁, 타흐리르 광장. 1950년대 구소련 시대에 크고 웅장한 소련 스타일로 지어진 정부종합청사(Mogamma) 앞의 매끄러운 광장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스케이트보드 연습을 하고 있었다. 경찰관 두 명은 이들을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다양한 연령대의 커플들이 광장 곳곳에 놓인 연석에 앉아 이 모습을 지켜본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매캐한 먼지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카이로 전체를 뒤덮는 자동차 소리와 먼지는 혁명 전이나 후나 변함이 없다. 불과 몇 년 전 바로 이 광장에서, 수만 명의 이집트 국민들이 어깨를 맞대고 “무바라크는 물러가라!” “Aïch, Horia, ‘Adala Edjtéma’ïa(빵, 자유, 사회적 정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친 끝에 무바라크 독재정권의 퇴진을 이끌어낸 사실(2011년 1월 이집트 시민혁명)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2013년 6월의 타흐리르 광장에는 1월 혁명(2011년)이 일어난 지 2년 6개월 만에 다시 그때보다 더 많은 이집트 국민들이 집결해 무슬림형제단의 일원이자 2012년 6월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 군부는 이집트 국민들 중 일부의 지지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시를 축출하고 2013년 6월 30일 다시 정권을 잡았다.(1) 이후 친-무르시 진영은 저항과 시위를 계속하면서 군부와 갈등을 빚다가, 급기야 2013년 8월 14일에는 카이로 라바 광장의 시위를 군부가 강경하게 진압하는 가운데,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나 1천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체포된 이들은 수천 명에 달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14년 6월, 국방부 장관이던 압델 파타 엘시시가 97%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후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오늘날 카이로의 삶은 어떨까?

일단 혁명 전에 비해 나빠진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이 몇 시간 동안 죽치고 앉아 시샤를 피우면서 축구를 보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거리의 카페들도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인다. 맥주를 마시고 싶은 이들은 건물 테라스의 바를 찾는다. 영화도 보고, 콘서트도 관람하고,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도 관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제지공장을 개조해 만든 타운하우스 갤러리는 수준 높은 전시로 유명한데, 타흐리르 광장에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지하에는 널찍한 주차장이 있고 지상에는 이집트 국기가 새겨진 타흐리르 광장은, 마치 무엇이든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과거 이집트 국민들이 이 공간에서 두 명의 대통령을 퇴진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일부러 망각하려는 것 같다.(2)

광장 주변의 도로는 잘 정리되고 깨끗한 상태였고,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증오의 대상이 됐던 내무부 건물은 교외로 이전했다. 푸른색 옷을 입고 손에는 위반 딱지를 든 채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경찰 몇 명을 제외하면 경찰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2017년 가을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이집트의 부정적인 정치적 분위기를 규탄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변호사, 기자, 야당 지지자, 시위대, 인권운동가 등 이집트 정부는 정부를 비판하는 모든 목소리를 억압한다. 이집트 정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평화적으로 이행하는 사람들까지 체포하고, 기소하고, 구금한다.”(3)

그러나 타흐리르 광장 근처에서 만난 젊은 여성 마이란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독재정권 하에서 살고 있냐고요? 전혀요!” 아버지는 엔지니어이고 어머니는 주부인 카이로의 서민가정 출신으로 올해 30세가 된 마이란은 “당연히” 2011년 혁명과 2013년 시위에도 참여했다. “저희 엄마는 무조건적으로 엘시시를 지지하십니다. 아주 좋아하세요. 아빠는 좀 더 비판적이시고요.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며, 엘시시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 물가가 너무 올랐다고 하십니다. 저는 두 분의 중간 정도예요. 엘시시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원래부터 이집트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고 그분도 나름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감옥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들어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조금 놀랍긴 합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테러리스트들도 있어요. 그리고 엘시시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상황이 나아지면 알아서 풀어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쨌거나 마이란은 친구들과 함께 노천카페에 앉아서 정치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동차 소음이 크다고 해도 옆 테이블의 누군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대화 내용을 충분히 엿들을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페이스북에서도 저는 정부를 자주 비판합니다. 대통령도요. 하지만 그 때문에 불안했던 적은 없었어요.” 마이란의 친구인 아메드도 덧붙였다. “사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자유가 아니라 돈입니다. 요즘에는 다들 경제위기 때문에 힘들어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니, 마이란의 가족들만큼이나 의견이 제각각이었다. 따라서 반란 의지를 꺾는 데 혈안이 돼 있는 현 정부하에서 살아가는 이집트 국민들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엘시시 대통령은 3월 말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 전에 보이콧 의사를 밝혔던 사회 유력인사들과 야당 측을 겨냥해 1월에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부활동에 개입하고 또 이런저런 말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정말 참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 엘시시 대통령이 라이벌 관계에 있던 대선후보들을 체포하고, 출마 철회를 유도하고, 그들의 선거활동을 방해하는 모습을 지켜본 반대파들은 이번 대선을 ‘부조리한 코미디’라고 평했다. 이에 엘시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안정과 안전을 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집트는 곧 붕괴될 것입니다. 저는 그 누구도 위협하지 않습니다. 7년 전의 일이 이집트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군부의 손아귀에 들어간 미디어

최근 이집트 정계의 특징은 군부세력이 모든 분야, 특히 경제 분야를 다시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군부는 오랫동안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군부는 경찰보다는 덜 부패되고, 공무원보다는 일 처리가 더 효율적이며, 민심을 적절히 대변할 줄 안다고 인식돼 왔습니다. 아마 모든 이집트 국민들은 군에 친척이나 지인 한 명은 있을 겁니다.” 카이로 대학 소속의 정치학자 튜피크 아클리만도스는 설명한다. 이집트 국민들이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니, “해당 주제에 대한 여론조사는 금지돼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낙관적인 지표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들을 보면 2013~2014년 엘시시 대통령이 처음 당선된 당시의 지지율이 현재 크게 떨어진 것만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특히 2015년 이집트 상공에서 일어난 러시아 여객기 폭파 테러 사건 이후 하락세가 두드러졌습니다.(4) 그러나 엘시시 대통령의 지지 기반은 여전히 탄탄한 편입니다.”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기 위해 엘시시 정부는 매우 강력한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다름 아닌 언론통제,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TV의 통제다.(5) 호스니 무바라크의 재임 기간(1981~2011) 그리고 혁명 이후 몇 년 동안에는 여러 개의 민영방송 채널이 등장해 토크쇼와 토론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사라졌다. 오늘날 모든 TV 채널들은 정부 및 그 측근들 소유이다. 인쇄 언론도 마찬가지다. 발행 부수 12만 부의 일간지 <Al-Masri Al-Youm>만이 예외인데, 이집트 인구가 1억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소규모 언론사에 속한다. 

“자유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집트의 유명 풍자만화가 중 한 명인 도아 엘라들은 말한다. “그러나 넘어서는 안 되는 레드라인(한계)은 분명히 있습니다. 모호한 레드라인 때문에 작업이 더 어려워지기도 하고요. 어떤 주제가 정부를 화나게 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기검열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무의식중에 이미 하고 있다는 것을 저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을 만화로 그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2017년 11월, 그녀는 감옥에 갇혀 있는 이집트 젊은이들을 그린 적이 있다. 당시 엘시시 대통령은 샤름 엘-셰이크에서 개최된 세계청소년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그 어떤 신문도, 심지어 우리 신문도 언급 자체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검열행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외국 스파이 공포증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TV 쇼에도, 신문에도, 어디에나 정부의 심복이 한 명씩은 꼭 있는데, 이들은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이 이집트 시민 단체들을 지원해 무바라크 정권이 축출된 것이라고 설명해주곤 합니다.” 소설집 『Taxi(택시)』(2007)와 장편 소설 『L'Arche de Noé(노아의 방주)』(2009)로 큰 인기를 얻은 작가 칼레드 알-카미시는 말한다.(6) “한때는 미국과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시나이반도의 일부를 팔레스타인에게 넘겨주려 한다는 말도 돌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엘시시 대통령은 이 모든 음모를 좌절시키고 이집트를 구해냈지요.” 그리고 정부의 계획은 의도했던 대로 잘 실행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실제로, 버스를 타고 거리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만 해도 다른 승객이 이를 “즉시 중단”해줄 것을 지시한다. 왜냐고?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는 이유다.

정부의 검열과 지식인들의 자체 검열 

이런 상황 속에서 반정부 세력의 입지는 크게 줄었다. 이집트 인권위는 현재 “6만 명의 정치범 수감자들”이 있다고 발표했지만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우선은 체포됐다가 경고만 받고 풀려난다. 대부분은 무슬림형제단과 관련이 있거나 친-무르시 세력이라는 의심을 받은 경우다. 이집트 인권단체 이집트자유와권리위원회(ECRF)에 의하면, 정치적 실종사건은 매달 40여 건에 이른다. 수십 년 동안 유일한 야당이었던 무슬림형제단은 정부의 억압과 내부 갈등으로 지금은 이집트 정치에서 거의 사라진 상태다. 그들 중 수천 명은 터키로 망명했다. 

“이집트에 남은 사람들은 감옥에 있거나 유령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래의 옷차림과 말투를 완전히 바꾼 채로 말이죠. 무슬림형제단 소속이라면 반드시 참석해야 했던 주간회의 우스라(usra)도 모두 중단됐습니다. 지도부와 갈등을 겪으면서 조직에서 멀어진 이들도 있습니다.” 무슬림형제단에 관한 논문을 작성 중인 연구원 파티하 아말 아바시는 설명했다.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일부는 테러 조직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확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반대파라면 무조건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해버리는 정부는, 뻔뻔스럽게도 이를 오히려 선전 도구로 삼고 있다.

2011년 혁명의 주역이었던 활동가들의 경우 “초기에는 수천 명 수준이었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동조자들이 모여 정당이 아닌 조직을 구성”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현재 모든 종류의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 상태라고, 프랑스계 이집트인 정치학자 유세프 엘 샤즐리는 설명했다. 일부는 감옥에 있고, 일부는 해외로 망명했으며, 상당수는 우울증을 겪었다.(7) “혁명과 같이 거대한 흐름에 동참해 조국을 변화시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 꿈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견뎌내기란 매우 힘이 듭니다.” 주간지 <Al-Adab>의 문화부 기자이자 글쓰기의 필요성에 관한 섬세한 소설 『에메랄드빛 산』(2014)을 발표한 작가 만수라 에즈-엘딘은 탄식했다.(8) 그녀는 타흐리르 광장과 소속 언론사에서 멀지 않은 아들리 거리에서 스위스 레스토랑 ‘La Chesa’를 운영하고 있다. “제 경우 글을 읽고 쓰고, 또 삶의 작은 것들에 집중하면서 그 시간을 견뎠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교외 지역 뉴 카이로로 이사도 했고요. 거기서는 타흐리르가 아닌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소수의 혁명가들은 인권보호 NGO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말렉 아들리가 그런 경우인데, 2016년에 감옥에서 4개월을 보낸 뒤 현재는 이집트경제사회권리센터(ECESR)의 변호사 네트워크 책임자로 있다. “경찰들은 우리를 지속해서 괴롭혀왔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출국금지 상태입니다. 국외 자본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혹은 ‘국가안보를 저해’했다는 이유로 진행 중인 소송이 지금도 여럿입니다. 잘못하면 재판에서 수십 년 형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활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계속할 겁니다.” 

정부가 ‘외국의 손’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명목으로 도입한 국외자본 수혜금지 조치는 이런 활동 단체들에 치명적이다. 또한 수많은 문화 분야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집트 문화부는 아무런 지원금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수년 전부터 문화계의 조직들은 서구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것을 관례로 삼아왔다. 이제는 또 다른 경제모델을 찾지 못하면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다. 2017년 5월에는 NGO에 대한 새로운 법이 공표돼 그나마 명맥을 이어오던 소수의 단체들까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국외자본 금지에 덧붙여 이제는 군부로 구성된 위원회에 등록증 갱신 요청서까지 제출해야 한다. 

그럼에도, 인권을 위한 투쟁은 계속된다 

혁명이 일어날 당시 ‘페이스북 걸’로 유명세를 얻었던 에스라 압델 파타 역시 이와 비슷한 환멸감을 토로했다. “2011년에 저는 18일 동안(1월 25일부터 무바라크가 퇴진을 발표한 2월 11일까지) 황홀한 유토피아를 맛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바보였습니다. 무르시의 민주주의에의 약속을, 그 뒤에는 엘시시의 민주주의에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바보였지요. 현재 상황은 무바라크 재임 시절보다 더 부정적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엘시시는 마치 영구집권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활동을 멈추면,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갇힌 모든 이들을 배신하는 것 같아 이 일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엘시시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고 야당까지 제거한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민중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타흐리르’에 대한 강박과 불안 때문에 정부는 민심이 폭발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정치학자로 오래전에 카이로에 정착한 카리마 H.는 가명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신중한 편이 좋으니까요.” 

모든 시위와 규모가 좀 있는 모든 모임들은 엄격하게 금지됐다. ‘테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모든 정부 부처 건물들과 중앙은행의 주변에는 4m 높이의 콘크리트 벽을 쌓고 무장 군인들을 입구에 상시 배치시켰다. 휴무일이라 대형 시위들이 종종 일어나는 매주 금요일이면, 군모를 쓰고 군장화를 신은 경찰들이 타흐리르 광장으로 이어지는 7개 대로에 배치됐고 시위진압용 트럭들은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는 상태로 대기했다. 이런 이유로 지난 2년 동안 일어난 시위는 단 2건에 그쳤다. 그나마도 타흐리르 광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한 건은 2016년 홍해 위의 두 무인도, 티란 섬과 사나피르 섬을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이양한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였고,(9) 또 한 건은 2017년 12월 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한 선언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매우 민감한 이집트 국민들 모두가 반대했던 선언이었다. 집회 마지막에 시위대의 일부가 “빵! 자유! 정부 타도!”를 외쳤다. 이 불안 유발자들은 즉시 감옥으로 넘겨졌다. 2월 초에는 엘시시 대통령의 대선 출마에 반대하며 2014년 시위를 벌였던 17명에게 종신형이 선고됐다.

이집트의 공공장소에서 친구들과 정치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마이란처럼 말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문제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넘어서는 안 될 선은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모르는 사람에게 접근해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우리는 마흐무드를 아인 샴스에 위치한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났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택시로 1시간 넘게 걸리는 곳으로, 인구 2천만 명의 대도시 카이로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빈민가들 중 하나다. 

“저는 이제 동네 카페에서는 이야기도 토론도 할 수 없습니다.” 마흐무드는 현재 무직인 30대 남자로, 2011년 시위에 참여했다. “정말 역겨운 상황이에요. 모두들 먹을 것도 없고, 자유도 없어요. 3일 전에는 친구들이 저에게 말하길, 사복 경찰들이 와서 저에 대한 질문을 하고 갔다고 합니다. 주변에 그런 경험이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지금 감옥에 있어요. 이건 경고예요. 저는 이제부터 누구에게도,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을 겁니다.”

이처럼 국민들에게 자유를 주되 끊임없이 감시하고 경고하는 것은 반란 의지를 잠재우기 위한 정부의 전략이다. 논쟁 자체는 자유로웠지만, 우리와 인터뷰를 진행한 많은 사람들은 중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방금 그 문장은 쓰지 말아 주세요. 잘못하면 감옥에 갈지도 몰라요!” 2016년 1월 대학가에서는 박사과정에 있던 이탈리아의 유학생 줄리오 레제니가 거리 한복판에서 납치됐다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 있었다. 로이터 통신에 의하면, 그는 사법 경찰에게 체포돼 경찰서로 넘겨진 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주검으로 발견됐으며, 그의 시신에는 고문과 신체 훼손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10) 이집트 당국은 치정 살인이나 성범죄와 같은 다른 범죄들로 추측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11) “실수이든 계획된 암살이든, 우리는 더욱 신중해졌습니다.” 한 프랑스 출신 연구원이 말했다. 그는 현재 이집트 국민들에 관한 연구를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 중이다. 

“무바라크 재임 시절보다 더 부정적”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하는 오늘날의 억압적 상황에 깊은 실망감을 내비치면서도, ‘1월 혁명’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이집트 사회에 “부인할 수 없는 긍정적 흔적들을 남긴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2008년 『구혼자들의 론도』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38세 여성 가다 압델 알은 이렇게 말한다.(12) “혁명 이후 공개토론석과 SNS에서의 수많은 금기들이 깨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혼전 성관계, 동성애, 강간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됐고, 몇몇 종교적 원칙, 심지어 신에 대한 믿음 자체까지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아직도 매우 보수적인 정부는 계속해서 이를 처벌하려고 하지만, 실제 사회 속에서는 이미 자유롭게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년 전 그녀는 팔로워 수가 18만 명에 이르는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과감한 시도를 했다. ‘사회적 코드라는 이유만으로’ 어릴 때부터 착용해야 했던 히잡을 벗은 사진을 올린 것이다. 2011년 타흐리르 광장에서 의사로 자원봉사를 했던 조르주 세이프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타인의 시선을 덜 의식합니다. 각 건물에 배치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스파이-관리인도 이제는 힘을 잃었습니다.” 1세대 활동가인 사라 모하메드는 덧붙였다. “2011년 이전에는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성을 보면 창녀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리나 관공서에서도, 공무원이나 경찰의 제재에 대해 사람들은 당당히 ‘아니요’를 외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이집트 국민들은 조만간 대통령 선거의 폐쇄성과 관련된 논쟁보다 더 중요한 주제를 놓고 열정을 폭발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는 2018년 6월 러시아에서 치러질 월드컵을 앞두고 무려 2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정부는 몇 주 동안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16강 진출에 성공하거나, 혹은 반대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거나 두 경우 모두, 이집트 국민들은 타흐리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 비판과 의견 표출이 함께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Alain Gresh, ‘En Egypte, la révolution à l’ombre des militaires 군부 그늘로 들어간 이집트 혁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3년 8월호.
(2) 몇 번의 재판 끝에 무바라크는 2017년 3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됐다. 사형에 처해질 뻔했던 무르시는 45년 형을 받았다.
(3) ‘Égypte: les voix critiques réduites au silence(이집트: 침묵하는 비판의 목소리)’, Amnesty International, Paris, 2017년 10월 21일.
(4) 2015년 10월 31일, 러시아 여객기 한 대가 휴양지인 샤름 엘-셰이크에서 이륙해 시나이반도 상공 위를 지나던 중에 폭발해 224명이 사망했다. 이슬람국가조직(IS)은 해당 사고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5) Aziz El Massassi, ‘La presse égyptienne mise au pas 거짓을 강요당하는 이집트 언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11월호·한국어판 2015년 12월호.
(6) Actes Sud 출판사에서 불어로 번역돼 출간됨, Arles, 각각 2009년과 2012년.
(7) Pauline Beugnies의 영화 <Rester vivants>(2017, 110분) 참조, 타흐리르 광장 시위에 참여했던 4명의 각기 다른 인생 여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8) Actes Sud 출판사에서 불어로 번역돼 출간됨, 2017년.
(9) ‘Le pouvoir égyptien dans l’imbroglio de l’affaire des îles Tiran et Sanafir(티란 섬과 사나피르 섬의 관할권 문제로 혼돈 속에 빠진 이집트 정부)’, OrientXXI.info, 2017년 1월 25일 (2017년 1월 17일 카이로에서 발표된 아랍어 기사의 번역본).
(10) ‘Exclusive: Egyptian police detained Italian student before his murder’, Reuters, 2016년 4월 21일.
(11) Hélène Sallon&Philippe Ridet, ‘L’Italie doute de la version égyptienne de la mort de l’étudiant Giulio Regeni(이탈리아는 대학원생 줄리오 레제니 사망 사건과 관련된 이집트 정부의 발표를 의심한다)’, <르몽드>, 2016년 3월 26일.
(12) L’Aube 출판사에서 불어로 번역돼 출간됨, Avignon, 2013년.


박스기사

끔찍할 정도로 치솟은 카이로의 물가

카이로 거리의 노점 상인이든, 정부 소속 공무원이든, 타흐리르 광장 근처의 초호화 아파트에 거주하는 유명 작가이든, “2011년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요?”라는 질문에는 모두들 주저 없이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1) “물가가 너무 많이 올랐습니다. 끔찍할 정도로요.” 물가 인상의 조짐은 2014년 대선 직후, 군부 출신의 압델 파타 엘시시가 IMF로부터 연간 120~150억 달러의 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구조개혁’을 감행하면서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국민 대부분에게 생필품 보조금을 지급해주던 시스템에서 재정 지원을 저소득층에게 집중하는 방향으로 점차 바뀌면서 생겨난 일입니다.”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연구원으로 현재 이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카이로에 머물고 있는 마리 바네첼은 설명한다.

기존 시스템에서는 빵, 설탕, 기름, 강낭콩 등의 주요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휘발유, 가스, 전기에까지 상당액의 보조금이 지급됐다. 예를 들어 혁명 전에는, 이집트의 주식인 에이슈(Aishu: 속이 텅 비어있는 둥글고 작은 빵) 하나가, 이 보조금이 지급되는 빵집에서는 5피아스터(0.22유로센트), 일반 시장에서는 36피아스터였다. 모든 사람들이 보조금 지급 빵집을 이용할 수 있었고 빵 구매량도 무제한으로 허용됐다.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감당할 여유만 있다면 말이다. 다른 식료품을 구매할 때는 수첩이 필요했는데, 판매자는 그달 내의 할당량을 확인하고 무엇을 판매했는지를 수첩에 적었다. 이 수첩은 이론적으로는 저소득층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이집트 국민의 85%가 소지하고 있었다. 오늘날 가구당 하루 살 수 있는 빵의 양은 20개로 제한됐다. 이 20개의 빵은 1EGP(2018년 1월 기준으로 0.45유로)이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들의 수가 많은 이집트의 특성상 하루에 빵 20개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특히 빈곤층이 늘어나는 요즘 같은 때는 빵의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에 빵값은 20개당 20EGP(0.9유로)까지 치솟았다. 다른 기본 식료품들의 경우 스마트카드가 수첩을 대체했다. 이 카드를 통해 정부는 매월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4인 가족당 200EGP(9.13유로)이다. 카드 소지자의 수는 기존에 수첩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수와 거의 비슷하지만, 지원대상 물품들의 가격들이 훌쩍 올랐다. 2014년과 2017년 사이 “설탕 1kg의 가격은 4.5EGP에서 10EGP로, 기름 1리터의 가격은 6.5EGP에서 14EGP로 올랐다”고 마리 바네첼은 말한다. 이집트의 경우 월급 기준으로 의사가 1,300EGP, 공공기관장이 4,500EGP, ‘잘 번다’고 하는 노동자가 1,200EGP를 받는다. 현재 9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는 최빈층은 가족 당 약 700EGP를 추가로 수령할 수 있다.

에너지의 경우 정부는 모든 이집트 국민들이 혜택을 보고 있던 보조금의 지원 규모를 갑작스럽게 축소했다. 3년 만에 휘발유와 가스의 가격은 3배, 전기세는 4~5배가 올랐다. 상황이 이러하니 세계은행에서 집계한 이집트 내 빈곤선 이하의 인구가 2010년 25%에서 2015년 28%로 증가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지금은 아마도 30% 선을 돌파했을 것이다. 게다가 2016년 11월 이집트 파운드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물가가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반면 월급의 상승분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사회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이집트 국민들이 경제위기로 고통 받고 있는 만큼, 특히 지방을 중심으로 시위에 대한 의지는 많이 꺾인 상태다.(2) ‘엘시시가 대통령이 된 후 국고 상태를 확인했더니 형편없었다’거나 ‘엘시시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을 것’이라는 설을 대부분은 그대로 믿고 있다. 관광, 건설, 산업 등 이미 많은 분야를 장악하고 있고 또한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 이후 ‘우리 없이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며 경제의 모든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벌이고 있는 군부는, 완충재 역할을 하는 척하면서 민생에 가까운 조직이라는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마리 바네첼은 “오전에 빈민가에 가보면, 군 트럭이 고기를 잔뜩 싣고 와서는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기를 판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빈민가에서는 빵과 감자만으로 10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엄마들이 목멘 소리로 외친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모두들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군인들이 총을 쏜다 해도 상관없어요!” 

정치학자 카리마 H.는 설명한다. “엘시시 대통령은 전임자인 엘 사다트와 무바라크가 과거에 시도했다가 민중들의 분노에 밀려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개혁들을 강행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엘시시 대통령은 안와르 엘 사다트의 재임 시절, 1977년에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가 또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2017년 3월 이집트 국민들은 빵값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정계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언론은 통제하고, 야당은 없애버리고, 리비아, 시리아, 이라크 내전이 진행 중인 복잡한 주변 정세를 내세우면서, 이집트 정부는 국민들을 단단히 붙잡아두고 있는 듯하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1) 인구 2천만 명의 대도시 카이로는 수많은 구역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공공권력의 개입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이 ‘비공식 구역’의 거주환경은 대부분 열악하다.
(2) 무스타파 바슈니, ‘이집트 노동운동을 막을 수 있을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4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