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키를 쥔 사우디의 딜레마

2018-03-29     질베르 아슈카르 | 런던대학교 교수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지역에서 정권 안정을 위협하는 민주화 운동의 개화를 막고 주적, 이란의 영향력을 억제하기를 원한다. 사우디의 신임 집권 세력은 이를 위해 여러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실패로 끝나고 있다. 사우디는 시리아 내전에서 알아사드 정부군을 제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멘 내전에 끼어들고, 카타르의 굴복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동 지역의 핵심적 관건은 이슬람교가 아니라 석유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걸프(페르시아만-역주) 지역에 매장된 엄청난 원유 매장량을 노리고, 아랍 국가들을 인위적으로 분리해 서로 반목하게끔 했다.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들의 또 다른 특징은 노동자의 대부분이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쿠웨이트,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카타르 등 이 지역 대부분의 국가에서 외국인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에서는 인구의 90%가 외국인이다! 

영국은 걸프 지역의 풍부한 석유자원을 노리고 현대사회에서 가장 구시대적인 군주제를 중동 국가들에 강화하거나 확립시켰다. 영국은 원유가 고갈되는 날까지 중동을 신탁통치하고자 부족사회의 잔재를 되살리고 권력 세습을 인정함으로써 씨족집단들을 ‘지배 왕가’로 만들었다. 미국도 사우디아라비아를 사실상 가장 오래된 보호령으로 만들어 석유를 갈취하려 했다. ‘자유 세계’의 리더인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반민주적, 여성 혐오적이며 교조주의적인 국가를 입맛대로 유지시킨 것이다. 사우디는 코란과 순나(이슬람교의 전통 율법으로, 모하메드의 언행에 관한 기록에 바탕을 둔 것. 오늘날엔 ‘수니’라고 함-역주)를 헌법으로 간주하는 유일한 국가다. 

사우디 권력층은 ‘합리성’ 따위에 종속되지 않아

원유 및 가스 판매수입으로 재정자립도를 높인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기관과 자본주의 경제가 접목된 구시대적인 체제를 항구화했다. 사우디에서는 권력이 훨씬 집중된 탓에, 권력이 자본가나 관료의 이익을 위한 통상적인 사회경제적 ‘합리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국가의 천연자원을 자신들의 사유재산으로 여기는 지배집단의 수가 적을수록, 지배집단은 구조적인 제약을 덜 받으며 운신의 폭도 훨씬 커진다. 그런 상황에서, 지배집단의 결정은 불규칙하고 변덕스러운 변화의 인상을 주는, 갑작스러운 반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극도로 집중된 국가권력은, 국가라는 대형 함선이 천천히 방향을 트는 지점에서 모터보트처럼 급격히 방향전환을 하는 경향이 있다.  

걸프만에 인접한 이란과 이라크는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사회정치적 특성을 보여준다. 매우 오래된 도시 문명과 수많은 인구, 더 발전된 사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이 두 국가에서만 왕정체제가 무너졌다. 그 결과 이라크에서는 향후 미국의 공격으로 2003년 국가가 전복되기 전까지 전제왕권의 모순을 답습한, 지배 가문이 철권통치를 통해 세습하는 ‘공화국’ 체제가 들어섰다. 이란은 세계에서 유일한, 엄격한 신정일치 국가가 됐다(바티칸 제외). 여타 걸프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은 가족이 아닌, 기구와 법에 의한 통치가 이뤄진다. 비록 최고지도자가 과도한 권한을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1) 그러므로 이란은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전략에 따라 행동하는 국가다. 이란혁명수비대(1979년 이란혁명 이후 체제 수호를 위해 창설한 최정예 부대)의 팽창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지역 간 긴장 고조로 그들이 행사하는 권력의 합법성이 강화된다.(2)  

1979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출범으로 걸프 지역의 현 지정학적 틀이 정해졌다. 베트남전쟁 패전으로 미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같은 해 일어난 여러 사건들(니카라과 혁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로 미국의 기가 한풀 꺾인 상태였기 때문에, 이란 혁명은 인접한 아랍의 전제군주국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980년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과 걸프의 동맹국들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라크와 이란이 서로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8년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은 엄청난 학살과 함께(가장 최근 추산에 의하면 1백만 명 가까이 사망했다고 한다) ‘무승부’로 끝났다. 아랍국가들로부터 채무를 탕감받지 못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이렇게, 미국으로서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는 기회가 마련됐다. 우선, 나세르 통치하의 이집트의 압력에 굴복해 미국이 1962년 사우디 다란에 주둔해있던 부대를 철수시킨 이후 처음으로 걸프 지역에 부대를 재파견한 것이다. 또한 소련이 붕괴했을 당시 냉전체제 이후의 (‘필수불가결한’ 또는 필연적인) 패권 국가는 미국이라는 점을 동맹국들과 경쟁국들에 확인시켰다.

1991년 미국이 군사 개입을 통해 공공연한 적대국인, 바트당이 집권한 이라크를 궤멸하자 이란의 지도자들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이란 때문에 불안해하던 사우디 왕가는 안정을 되찾았으며, 대이라크전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1990년)을 환영하고 미국의 개입에 반대하던 이들을 모두 처단했다. (사우디에서 일하는) 예멘 출신 이주 노동자들을 추방했고,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 대한 식량 지원을 끊었다. 무슬림형제단과는 관계를 단절했다. 그전까지 사우디 왕가는 1928년 이집트에서 설립된 무슬림 형제단의 주요 후원자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과 손잡고,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무슬림형제단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가말 압둘 나세르(1954~1970)의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운 이집트 정부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걸프전(1991년)이 일어날 당시 무슬림형제단은 많은 조직원을 잃지 않고서는 사우디 편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슬림형제단에 물자 및 재정 지원을 중단하면, PLO가 그랬듯 이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 것이라고 기대했다.

1995년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 카타르 왕세자가 부왕을 몰아내고 카타르 왕위를 차지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신임 국왕은 아마도 라퐁텐의 우화 <황소처럼 커지고 싶었던 개구리>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중동지역의 정치에서 중추 역할을 하길 원한 빈 칼리파 알 타니 국왕은 (재계의) 거물들이나 왕족들이 축구단을 사들이는 것과 조금은 비슷하게 무슬림형제단에 재정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무슬림형제단의 기반이 된 알자지라 위성 방송을 시작했다. 알자지라는 아랍 세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의 반대파를 제외한 자들)에게 발언권을 주며 신속하게, 많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두 가지 정치적 수단에 힘입어 자신감을 얻은 알 타니 카타르 국왕은 사우디 국왕의 분노에 직면하자 ‘자산을 다변화’하면서 ‘위험 회피(hedge)’ 정책을 전개하게 된다. 즉, 이 지역에서 중요한 모든 세력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하여 알 타니 국왕은 카타르가 비용을 부담해 비밀리에 미국 공군기지를 주둔시키고(도하 근처 알 우데이드), 이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지원하는 동시에 이스라엘과 교역 관계를 맺는 성과를 거뒀다.  

시리아에서 개입, 리비아에 압력, 예멘과 전쟁

그러나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중동 전 지역의 판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전략적 쟁점을 고려해볼 때,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미국의 오만한 정책 중 가장 중대한 실패라 할 수 있다. 미국은 근본 목적을 조금도 이루지 못한 채 2011년 이라크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최악의 상황은 미국의 주적인 이란이 이라크 지역을 장악하게 됐다는 점이다. 같은 해, 미국은 중동지역 패권 유지에 있어 주요 국가들이 분열되는 것을 목도했다. ‘아랍의 봄(반정부 시위)’를 진압하고자 하는 GCC의 성향을 바탕으로, 반(反)혁명에 대한 두 개의 경쟁적인 선택안이 등장했다. 하나는 사우디가, 다른 하나는 카타르가 지지하는 안이다.(3)
전통적으로 극보수적인 성향의 사우디아라비아는 기존 정권들을 옹호하는 쪽이다. 2011년 3월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 개입해 반정부 시위 진압에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사우디는 바레인에서 반정부 봉기가 일어나자 사우디아라비아군 약 1,000명을 보내 대규모 시위를 진압한 바 있다-편집자 주). 예멘 내전에서도 반대파인 야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협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냈다. 한편, 카타르는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에 힘입어 반정부 세력을 회유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며 중동지역의 반정부 봉기를 지지하는 주요세력으로 우뚝 섰다. 무슬림형제단은 이 상황을 이용해 카타르의 재정 및 방송 지원의 도움을 받아 전면에 나서려고 했다. 카타르와 사우디는 튀니지에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을 때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카타르 국왕은 무슬림형제단의 튀니지 파트너인 에나흐다(Ennahda, 튀니지의 이슬람주의 정당으로, 무슬림 형제단이 모체)를 지원함으로써 민중 봉기와 함께했다. 반면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축출된 독재자,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에게 망명지를 제공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현상유지를 바라면서 득실을 저울질했다. 미국은 2012년 5~6월 이집트 대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승리하여 첫 이슬람 정권이 탄생하자(그러나 2013년 이집트 군부의 쿠데타로 무슬림형제단은 다시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역주), 회유카드를 내밀었다.(4) 반면에 리비아에서  프랑스, 영국 같은 유럽 동맹국들에 이끌려 카다피 정부군에 폭격을 가했다. 리비아 공격에 대해 카타르는 적극적으로 참여한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를 거부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결과이지만, 혼란스러운 리비아의 상황을 목도한 오바마 대통령은 이 지역에서 또 다른 국가가 붕괴되는 일에 일조하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그는 항공 수단과 영공통제를 독점 확보한 시리아 정권의 군사적 우위를 무력화할 수단을 반정부군에 제공하길 거절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한 리비아 영공에 대한 ‘비행금지구역’의 재선포를 거부했으며, 더욱이 반정부군에 대공(對空)무기의 인도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은 이렇게 영공 통제를 확보함으로써, 헬리콥터를 통한 치명적인 배럴폭탄(barrel bomb) 투하를 막을 수 있었다. 동시에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개입하기 보다는) 걸프의 동맹국들과 터키에게 시리아 반군에 대한 지원을 위임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란과 동맹을 맺고 있는 시리아의 알아사드 편을 들 수 없었다. 그러나 사우디는 카타르처럼  국경너머에서 벌어지는 세속적인 민주화 운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따라서 사우디는 시리아에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기로 하고, 카타르 및 터키와 경쟁적으로 이슬람 교조주의 성향(살라피스트, 지하디스트)의 수니파 시리아 무장단체에 자금을 조달했다. 2011년에 시작된 시리아 혁명은 한편으로는 시리아 정부, 이란의 지시를 받은 시아파 교조주의 민병대, 이어 2015년부터는 러시아의 군용기와 미사일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터키,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은 교조주의 무장단체들에 의해 짓밟혔다. 이슬람국가조직(IS)의 득세, IS에 의한 이라크 모술 함락, 칼리파 제국 수립 선포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사우디, 카타르 양국에서 신뢰받는 수니파 무장 세력을 믿고 갈 수는 없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미국 점령군이 IS에 확실한 승리를 거두는 방법은 아랍 부족으로 구성된 수니파 민병대를 신뢰하고, 이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은 대(對) 이라크전에서 사우디의 주적인 이란에 종속된, 시아파가 주류인 정규군과 비정규 병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시리아에서는 터키가 탄압하는 쿠르드 민병대에 의존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의 개혁 성향의 온건파에 기대하며 핵 협정에 기초한, 일관성 있는 대(對)이란 완화책을 취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핵 합의에 우선순위를 두고 러시아, 중국, 독일, 프랑스가 참여한 길고 긴 협상 끝에 2015년 7월 핵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이 이라크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후 2013년부터 시리아에 보충병력을 투입해 군사개입을 강화하면서 이란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음에도 이 방법을 선택했다. 이란의 두 주적인 이스라엘과 사우디 왕가는 미국의 냉담한 태도에 격노했다.
 
이란과 이념적 방향성을 공유하며 알리 압둘라 살레 전 예멘 대통령과 손잡은 시아파 후티 반군이 2014년 9월 예멘의 수도 사나를 함락하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우려가 극에 달했다.(5) 사우디 지도자들이 매우 우려할 만한 이 같은 상황에서 살만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자가 2015년 1월 23일 별세한 이복형의 뒤를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 취임했다. 80세에 왕위를 계승한 살만 국왕의 우선적인 목표는 30세도 채 안된, 가장 사랑하는 무하마드 빈 살만(MBS) 왕자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살만 국왕은 무하마드 왕자에게 우선 국방부 장관직을 맡겼고, 2년 후인 2017년 6월에는 왕세자로 임명했다.(6) 살만 국왕과 MBS는 이란의 위험에 맞서 강력한 대응책을 취했다. 그들은 예멘에 대한 직접 개입과 카타르와의 관계 개선 및 대(對)무슬림형제단 유화책을 추구하는 단일 수니파 정책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MBS의 감독 하에 사우디아라비아가 2015년 3월부터 예멘에서 전개하던 군사 작전에 카타르가 포함된 아랍 동맹군이 동원됐다. 사우디 왕가는 예멘의 무슬림형제단 분파가 참여하는 연합의 대표격인 예멘의 ‘합법적인’ 정부를 지지했다. 예멘의 무슬림형제단 분파는 알 이슬라(Al-Islah, 예멘 개혁을 위한 연합이자 예멘의 정당)의 구성원들로, 신임 사우디 국왕은 이전 국왕이 파문했던 알 이슬라와의 관계를 회복했다. 그렇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새로운 방침은 무슬림형제단 척결을 주장하는 강경파, 압델 파타 엘시시 장군(이미 무슬림형제단을 타도했었다)이 이끄는 이집트와의 관계에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사우디의 강경한 입장에 대한 논의를 위해 이집트는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하게 내비치는, 아랍에미리트의 실세,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MBZ) 왕세자를 만났다.(7)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또다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트럼프 신임 미 대통령의 주변에는 무슬림형제단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무슬림 혐오 자문관들이 득실거렸다. 아랍에미리트연합과 적극적인 미국 주재 아랍에미리트 대사가 이들을 부추겼다. 이들은 아랍에미리트와 손잡고 카타르가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2017년 5월 사우디 왕가가 첫 번째 해외 순방에 나선 트럼프 미 대통령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카타르에 무슬림형제단과의 관계를 끊고 알자지라 폐쇄를 요구하게 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미국 대통령 방문 후 15일도 채 안 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몇몇 속국이 카타르와 단교했다. GCC 회원국 3국은 교통수송과 교역까지 중단했다.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던 이 사태는 완전한 실패로 귀결됐다. 예멘 사태에 함께 개입한 동맹들로부터 외면당한 카타르는 일방적인 결정을 거부했다. 카타르는 터키의 상업적,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막대한 재원을 들여 상황에 적응해나갔다. 터키는 ‘아랍의 봄’ 초기부터 카타르의 동맹국이며 무슬림형제단을 공동 후원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반대 주장을 펴고 있다 할지라도, 러시아가 이란 군대와 연합군을 시리아에서 몰아내 주기만 한다면 러시아의 비호를 받으며 알아사드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러시아-시리아-이란-이라크는 IS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 주도의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문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두 개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 2017년 10월 초 살만 국왕은 사우디의 국왕으로서 최초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양국 지도자들을 포함한 고위급 대표단 협상으로 파격 행보라고 평가된 이번 방문의 목적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하는 것이었다. 한 달 후 미국과 러시아의 정상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베트남 다낭에서 시리아 사태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제네바에서 진행되는 UN 시리아 평화회담에 대한 지원과 시리아에서 새 헌법이 채택되고 선거가 치러지기 전까지는 알아사드의 권력 유지를 암묵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아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를 불러 2017년 11월 4일 사우디에서 총리직 사임 의사를 밝히도록 터무니없이 압력을 행사했다. 하리리 총리의 가족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긴밀히 연계돼 있다.(8) 2016년 12월 하리리가 이란과 연계된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연합 정부를 구성했는데, 이란과 헤즈볼라를 맹렬히 규탄한, 하리리의 사임 발표는 시아파 정당과의 모든 협력에 종지부를 찍었다(사우디 체류 중 하리리는 헤즈볼라의 암살 위협을 이유로 갑작스럽게 사임 의사를 밝혔다-편집자 주). 이번 사태는 지난 7월 하리리 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 뜰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하리리 총리가 옆에 서 있는 가운데) 발표했던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헤즈볼라를 ‘레바논 국가, 레바논 국민, 모든 중동지역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하면서 ‘신(神)의 당(黨)’(헤즈볼라-역주)이 하리리 총리와 연정을 구성한 사실과 상관없이 헤즈볼라를 IS 및 알카에다와 같은 부류로 치부하며 오랫동안 헤즈볼라를 비난해왔다. 

한편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하리리 총리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빼내자 하리리 총리는 사임 발표를 철회했다. 그렇지만 레바논 연정은 여전히 깨지기 쉽고 반복적인 위기에 노출돼 있다. 게다가 시리아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와 사우디 간에 긴장이 고조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시리아 정부와 반군의 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러시아의 시도를 돕는 것처럼 행동한 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시리아 반군이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권고할 정도로 입장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리아의 운명은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 변화에 달려 있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반(反) ‘러시아게이트’ 캠페인을 벌이고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발표했으며,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인도하는 등 러시아에 상당히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 정책이 전에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에서의 군사 개입이 난관에 봉착했고 시리아 사태보다 훨씬 더 심각한, 현대판 인도주의적 재난을 촉발했기 때문에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알리 압둘라 살레 전 예멘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며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한 사우디아라비아의 희망은 지난 17년 12월 살레 전 대통령이 등을 돌린 옛 동맹, 후티 반군에 의해 암살을 당하면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살레 전 대통령은 후티 반군과 함께 연대해 2년 동안 만수르 하디가 이끄는 현 예멘 정부와 맞섰지만, 17년 12월 후티 반군과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편집자 주). 설상가상으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주축이 된 (수니파) 연합군 소속 예멘군 간에 분쟁이 발발했다. 일부 분파는 이제 아랍에미리트의 지원을 받고 다른 분파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하기 때문에 더욱 난처한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교사를 받고 사우디 지도자들이 시도한 모든 작전(카타르, 레바논, 시리아, 러시아 관련)은 실패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자, 이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희망에 따라 사우디 지도자들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에게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기 시작했었는데 이를 번복해야 했다(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예루살렘에 대한 미국의 최근 결정에 유감을 표했다). 이란 사안과 관련해 트럼프 미 대통령이 국제 사회에서 고립됨에 따라 이들은 더욱 씁쓸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5월 트럼프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휘두른 칼춤은 이미 머나먼 옛일이 돼버렸다.  


글·질베르 아슈카르 Gilbert Achcar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학부(SOAS) 교수. 주요 저서로 『Les Arabes et la Shoah. La guerre israélo-arabe des récits, Sindbad(The Arabs and the Holocaust: The Arab-Israeli War of Narratives)』(Actes Sud, 2009)등이 있다.

번역·조승아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Philippe Descamps&Cécile Marin, ‘Une mollahrchie constitutionnel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5월.
(2) Bernard Hourcade, ‘L’Iran se réinvente en puissance régionale(중동지역의 강국으로 떠오른 이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각각 2018년 2월호/3월호.
(3) 1980년에 출범한 GCC의 회원국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가 있다. 그러나 카타르와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이후, GCC의 기능은 사실상 중지됐다. 
(4) Gilbert Achcar, ‘Les Frères musulmans pour <une transition dans l’ordr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3월.
(5) Laurent Bonnefoy, ‘Enlisement saoudien au Yémen(예멘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사우디아라비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12월.
(6) Nabil Mouline, ‘Petits arrangements avec le wahhabisme(사우디왕국 내 ‘탈(脫) 와하비즘’의 열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각각 2018년 1월/3월.
(7) 1990년대에 아랍에미리트 안보국의 수장이 된 ‘MBZ’(1961년 출생)는 해외에 파견된 이집트 장교들로부터 훈련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중 무슬림형제단이 출신국가들의 주요 표적이었다. 무슬림형제단이 권력 장악을 위해 술수를 부린다고 비난한 ‘MBZ’는 무슬림형제단의 조직원과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는 아랍에미리트 국민에 대한 탄압을 지휘했다.
(8) 사드 하리리의 부친인 라피크 하리리 레바논 전 총리는 2005년 2월 암살당했는데, 파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비호를 받으며 재산을 축적했다. 


박스기사

양보하지 않는 카타르

2017년 6월 5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바레인, 이집트가 카타르와 단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카타르의 유일한 육상 국경을 폐쇄해 버렸다.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카타르의 테러리스트 지원’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중동지역에서 사우디가 전개하는 전략만큼이나 불명확하다(본 기사 참조). 아랍 언론에 따르면, 카타르의 옛 동맹국들은 카타르에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지원 중단, 알자지라 방송 폐쇄, 이란과의 원유-가스 프로젝트 동결, 단교사태에 따른 소정의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타르 관계자들은 단교 사태의 배경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토후국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한 아부다비가 카타르의 정권교체 의도, 혹은 타밈 빈 하마드 알타니 카타르 국왕이 자신들이 다루기 쉬운 부왕(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에게 왕위를 양도하도록 만들기 위한 노림수가 숨어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 카타르 외교관은 “봉쇄는 실패했다. 최악의 상황은 지났고, 이웃 국가들도 이를 알고 있다. 향후 걸프협력회의(GCC)의 틀 안에서 외교 협상이 재개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아마도 향후 수개월 내에 군주들 간에 ‘조정’이 이뤄질 것”이라고까지 덧붙였다.
 
신중하면서도 낙관적인 이 같은 견해를 넘어, 카타르 외교당국은 인접 국가들에 대해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신경 쓰고 있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육상 국경 봉쇄를 피해 특히 이란과 터키를 통해 식량(카타르는 식량의 95% 수입)과 물자를 공급받고, 카타르항공 소속 비행기들이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의 영공을 통과하지 않도록 먼 거리를 돌아 우회하고, 카타르 화폐인 리얄의 환율 방어를 위해 시장에 반복해서 개입하는 일은 카타르에 상당한 비용 부담을 안긴다. 중동지역의 여러 은행에 의하면, 카타르는 현재 국경봉쇄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3천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카타르의 고립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동맹국들에도 엄청난 비용을 쓰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보자면, 시리아 내전으로 몇 년간 러시아와의 관계가 경색됐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타르는 러시아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 S-400을 곧 도입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국경 봉쇄에 따라, 수많은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의 진행이 더뎌졌는데, 2022년 월드컵 경기장 건설 현장만은 예외다. 카타르는 가능한 한 빨리 월드컵 준비를 마쳐서 다른 나라에 월드컵 개최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카타르 지도자들은 올여름 러시아 월드컵이 끝나면 카타르의 국제적 성공을 상징하는 월드컵 개최를 둘러싸고 공격이 더 거세질 것으로 보고 있다. 

글·아크람 벨카이드 Akram Belkaï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