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룩의 나라, 쿠바
2018-03-29 르노 랑베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18년 4월 의장직을 내려놓을 예정이다. 이제는 1959년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붕괴 뒤에 태어난 쿠바혁명 이후 세대의 인물들이 쿠바 정부를 이끌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앞으로 이어질 변화 속에서도 쿠바의 군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취임 수개월 만에 쿠바와의 협정 폐기를 결정했다. 지난 2016년 6월 16일 버락 오바마 전임 대통령이 맺은 협정 내용이 “전적으로 불공정”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군사개입, 엠바고, 외교단절 등의 압박 정책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미국-쿠바 간 관계 정상화를 통해 쿠바의 ‘개방’에 박차를 가하는 편을 선택했다.(1)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반박하며 오바마 정부의 포용 정책으로 쿠바 내 미국인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쿠바 군부의 입지를 다져준 꼴이 돼 “억압을 가중”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쿠바가 ‘공산주의 독재’를 지나 이제는 군사정권의 손아귀에 놓이게 됐다는 것이다. 쿠바의 최고권력기구인 쿠바공산당(PCC) 중앙정치국 위원 17명 중 8명이 장군급 인사라는 사실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라틴아메리카 내 군사정권 출현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일관적이지 않았다. 2009년 군부에 의해 마누엘 셀라야 온두라스 대통령이 축출됐을 때는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고, 1973년 칠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모네다 궁전에 폭격을 쏟아 부었을 때는 열광했다. 그러나 붉은 베레모를 쓴 베네수엘라 군부나 시가 담배를 문 쿠바의 혁명군에 대해서는 격분을 드러냈다. 미국은 유독 이 경우에만 무력과 선거 표심이 늘 동행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적에게 겨눈 군부의 총구가 때로는 국민들을 향하기도 한다는 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강조하곤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쿠바의 상황은 어떠할까?
쿠바의 군부는 신중하면서도 엄격하고 실용주의적이며 단호한 한 인물을 닮았다. 군사령관이자 2008년부터 국가평의회 의장을 맡은 라울 카스트로가 그 주인공이다. 1959년 종신직 국방장관에 오른 뒤 이제는 국가의 수장이 된 그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펼쳤던 게릴라 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과 꼭 닮은 국가 제도를 형성해왔다.
‘바르부도스’(털보)라고 불리던 게릴라 반군이 쿠바 영토에 상륙했던 1956년, 이들을 이끌던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의 아우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동부 지역 내 무장 반군 지휘를 맡겼다. 곧 이 지역은 학생 혁명 지도자였던 프랑크 파이스의 이름을 따 ‘제2의 프랑크 파이스 동부전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저널리스트 페르난도 라프스베르크는 “피델이 야망이나 원대한 이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펼치는 동안, 라울은 체계적인 제도화를 진행하고 있었다”면서 그 예로 “라울은 대원들에게 이름에 걸맞은 복장을 갖출 수 있도록 신발을 만들어 보급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대원 모집 및 물자 보급을 위해 동부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토지개혁을 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으며 이를 위한 재정 마련을 위해 세금 제도를 수립하기도 했다.
1958년 9월, 당시 나이 27세의 젊은 청년이었던 라울은 지역주민들이 직접 진정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농민의회도 개최했다. 할 클레팍 교수는 “그해 말 라울은 반군 대원만이 아닌 국민 모두를 위한 정부 형태의 기반을 마련했다. 전쟁, 사법, 선전, 보건, 재정, 토목, 통신, 교육을 담당하는 일종의 정부 부처들이 만들어졌고, 토지나 노동 문제를 다루는 전담 부서도 생겨났다”고 설명했다.(2)
1961년 12월 2일에 공식적인 막을 올린 지금의 쿠바 군부는 혁명무장군(FAR)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게릴라군에 원형을 두고 있다. 이 군 조직은 국가 수호보다도 독재 정권으로부터의 국민 해방이라는 목적을 두고 탄생했다. 군부임에도 정치적 사명을 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의 당초 계획이 민족주의에서 ‘쿠바식’ 사회주의의 형성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이러한 사명은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붕괴를 경험한 국민들에게 혁명무장군의 영향력은 막대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있어 혁명무장군은 곧 과거의 게릴라 전사이면서, 자신에게 첫 신발, 첫 교과서, 첫 승리를 안겨주었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쿠바 국민들이 다른 국가에 비해 정치화 정도가 높고 스스로 미국의 위협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만큼, 쿠바군이 펼쳐온 국제적인 활동 역시 이들에게 군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쿠바군은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알제리, 에티오피아 등지의 게릴라 활동을 지원했으며,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철폐를 위해 앙골라에 수만 명을 파병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군사학교 입학생 중 빈곤층(주로 피부색이 검은)에 해당하는 노동자 또는 농민 가정 출신의 비중이 절반 이상이 돼야 한다는 조건을 법으로 규정하기도 했다.(3)
한편 쿠바 국민들이 군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데에는 비교적 최근의 사건이 미친 영향도 존재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이른바 ‘특수’한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1994년 쿠바의 GDP는 1991년 대비 약 35% 폭락했다. 그 여파가 거세게 몰아치자 반(反)카스트로 진영은 득의양양해 했다. 미국 마이애미 지역 언론의 유명 논설위원인 안드레스 오펜하이머는 『카스트로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책을 발표하기도 했다.(4) 카스트로의 시대가 끝나리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어느 날 갑자기 라울에게 ‘더 이상 줄 수 있는 돈이 없으니 군에서 재정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당시 상황에 대한 페르난도 라프스베르크의 설명이다. 할 클레팍 교수 역시 “라울은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군 규모를 절반으로 줄였고 군 예산 역시 급격히 감소(11억 4,900만에서 7억 3,600만 쿠바 페소로 줄어들었으며 쿠바 페소의 가치 자체도 폭락하고 있었다)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쿠바 정부가 경제난으로 거의 마비돼가고 있었던 상황―게다가 피델 카스트로는 당장 굶주리고 있는 국민들에게 그저 위엄, 긍지, 명예 따위를 약속하고만 있던 상황―에서 군부는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주며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1995년 제작한 혁명무장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들이야말로 쿠바 내에서 “여전히 제 기능을 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5)
군 역시도 소련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었던 재정, 연료, 부품의 부족난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울 카스트로는 “우리의 사명은 국가의 수호지만, 이는 광의적 차원에서의 수호를 의미한다. 지금으로서는 국민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도 포함한다. 이제는 총보다 콩이 더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6) 결국 쿠바군의 손에는 총 대신 삽과 칵테일 도구가 쥐어졌다.
혁명무장군은 소련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락시설이었던 ‘가비오타’(Gaviota)를 통해 1980년대부터는 관광업에서도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후 외국인 관광객 대상의 체인 상점을 운영해 국내에 유입되는 달러화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일부 군인들은 전투복을 벗고 쿠바 고유의 복장인 ‘구아야베라’ 셔츠를 꺼내 들었으며, 어떤 이들은 경영학을 배우기 위해 해외로 떠났고, 또 다른 이들은 호텔 운영을 맡았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여객기 기장이 됐고 해군들은 요트를 지휘했다.
그 결과 1990년대 중반 쿠바 국민이 소비하는 음식 중 1/3에서 절반 가까이가 군부의 활동을 통해 생산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군부의 재정자립 요구와 함께 군 예산은 계속해서 줄어들었지만 교육과 보건 분야 예산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쿠바에 거주하고 있었던 페르난도 라프스베르크는 “어떤 시기에도 발레 학교는 결코 문을 닫지 않았었다”고 회상했다.(7) 미국이 대 쿠바 제재를 강화하는 상황에서도 쿠바군은 자국 영토에 대한 보호를 계속해서 확립해가고 있음을―나름의 방식으로―입증해 보인 셈이다. 안드레스 오펜하이머의 책이 출간되고 4년이 지난 어느 날, 라울 카스트로는 열병식에서 수준 높은 지대공 미사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물론 미사일을 견인하는 데에 자전거 바퀴가 사용되긴 했지만 말이다.
혁명무장군은 라울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이후 여러 개혁 정책들을 추진해온 일종의 실험실과도 같았다. 성과연동형 임금제 도입도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8) 때로는 현저한 차이가 두드러질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피델 카스트로는 만약 부유층만이 이용할 수 있는 호텔 시설이라면 아예 아무도 쓸 수 없도록 했다. 이런 ‘변질된 평등’을 지양한 라울 카스트로는 친형과 반대로 이러한 시설을 전체에 개방해 시장에 맡기고자 했다. 그러면 집안에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모아둔 이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이들은 지금껏 애써 만족하며 이용해야 했던 민박 시설을 떠나 호텔(물론 군부 소유의)에서 돈을 소비할 것이며 자연히 민박 시설의 가격은 내려가리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하는 선택일까? 라울이 단상에 설 때마다 피델의 ‘비전’을 이어가겠노라고 약속하고 있긴 하지만 그는 오로지 이념만으로도 대중들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 피델의 이상주의적인 개념에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피델과 달리 청년 시절부터 공산주의를 표방해온 라울이, 오히려 피델이 오랜 세월 쌓아온 계획을 ‘파괴’하려고 하는 현 상황에 대해 역설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어쩌면 라울은 구체적인 상황 분석이 정치전에도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쿠바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들은 일국사회주의를 출현시키기에 그다지 유리한 것들은 아니다.(9) 분명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수익이 가져오는 위협은 군부보다는 쿠바공산당에게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은 없지만 쿠바군의 병력은 1980년대 당시 20만 명에 달했던 데 비해 2000년대 들어서는 남녀 포함 약 8만 명 수준으로 줄어든 상황이다. 군부 운영 기업들―가비오타, 시멕스(Cimex), 테레데(TRD) 등―은 라울의 사위이기도 했던 루이스 알베르토 로드리게스 로페스-카예하스가 회장으로 있는 국영 지주회사 가에사(GAESA)에 묶여 있다. 가비오타의 경우 객실 수 기준으로 볼 때 쿠바 내 호텔 업계의 40%를 차지할 뿐이고, 미국 아메리칸 대학의 윌리엄 레오그란데 교수(의심의 여지 없이 친 카스트로주의자인)도 마이애미 지역 언론이 내놓은 추산치는 전부 근거 없이 부풀려진 것이라고 반박하며 가비오타의 2016년 연 매출은 17억 달러에 그쳤다고 정정한 바 있다.(10) 또한 시멕스―소매 체인업, 렌터카 사업 등을 담당―의 같은 해 연 매출도 13억 달러 수준이고, 일반 대중 대상 유통업체(관광객 대상의 기념품부터 비누, 가전제품 등을 취급)인 테레데는 4억 4천만 달러를 벌어들였을 뿐이다. 가에사 전체로 보더라도 매출 총액은 약 34억 달러로, 쿠바 내 외화 유입의 20%, 2015년 GDP의 4%에 그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군부가 운영하는 쿠바 기업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의 수입이 곧 관광업계의 수입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쿠바 간 관계 정상화가 군부의 생존에 도움을 준다는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포용 정책이 어쨌든 쿠바 군부의 “국민 억압을 가중”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 세계 관찰자들은 카리브 지역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마다 어째서 쿠바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보다 손쉽게 난관을 타개해낼 수 있었는지를 물을 것이고, 이에 대해 쿠바 국민들은 두 가지 요소를 들어 답할 것이다. 먼저는 가진 자가 문을 열고 가지지 못한 자를 맞아들이게끔 하는 연대성 덕분이며, 국민의 보호를 도모하는 군부의 배급제도 덕분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쿠바 정부를 부분적으로 타락시키고 있는 부패 현상을 모른 체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군부의 이미지가 경찰보다도 더 낫다고 해도 이 문제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또한 다른 국가(예를 들어 베트남)에서도 이미 유사한 전개가 나타나고 있듯이, 국영기업의 수입이 많아질수록 수만 가지 재주를 부려서라도 개인의 부를 축적하게 하는 유혹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 쿠바에서는 다른 나라에서라면 으레 에어컨을 갖춘 고급 세단을 소유했을 법한 군 고위직 간부가 길에서 차를 얻어 타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글·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파괴적 혁신』 등이 있다.
(1) Patrick Howlett-Martin, ‘Dégel sous les tropiques entre Washington et La Havane(해빙 분위기 감도는 워싱턴과 아바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4년 11월호.
(2) Hal Klepak, 『Raul Castro and Cuba. A Military Story』, Palgrave Macmillan, New York, 2012.
(3) 남성은 2년의 병역 의무가 있고, 여성도 자원할 경우 동일하게 이행할 수 있다.
(4) Andrés Oppenheimer, 『Castro’s Final Hour』, Touchstone, New York, 1992.
(5) Larry Rother, ‘In Cuba, army takes on party jobs, and may be only thing that works’, The New York Times, 1995/06/08.
(6) Larry Rother, op.cit.
(7) Fernando Ravsberg, ‘¿Quién paga la salud y la educación en Cuba?’, Cartasdecuba.com, 2017년 3월 30일.
(8) ‘Cuba veut le marché… sans le capitalisme(쿠바, 카스트로의 작은 혁명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10월호·한국어판 2017년 12월호.
(9) ‘Les enfants ont vieilli(아이들은 늙었다)’, <Manière de voir> no.155: Cuba, ouragan sur le siècle(쿠바, 세기에 걸친 폭풍우), 2017년 10~11월.
(10) ‘¿Cuánto de la economía cubana controlan las empresas militares?(쿠바에서 건강과 교육을 위해 누가 돈을 지불하는가?)’, 『Resumen Latinoamericano』, Buenos Aires, 2017년 0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