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볼경기의 트럭광고에 등장한 마틴 루터 킹의 연설

2018-03-29     실비 로랑 |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교수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은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한 인종 차별주의자의 총에 암살당했다. 50년이 흐른 지금, 공식적인 역사는 그를 시민권을 위해 투쟁한 흑인 목사이자 국민적 화해에 헌신한 애국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가 한평생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평등을 위해 몸 바쳤다는 점에는 정작 침묵하는 분위기다.


몇 주 전 뜻밖에도 미국에서는 집집마다 마틴 루터 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확히는 50년 전, 마틴 루터 킹의 비교적 덜 알려진 연설 ‘드럼 메이저의 본능(Drum Major instinct)’(1)의 한 대목이었다. 혁명적 지도자와 TV 시청자들의 이 즉흥적 만남은 슈퍼볼 경기의 하프타임에 방송된 RAM 트럭 광고에서 이뤄졌다. 광고주의 소유물인 ‘광고’라는 공간은 경기 결과만큼이나 해석이 분분한 곳이다. 사륜구동 트럭의 강인함을 과시하는 이 광고는 배경음으로 킹 목사의 설교를 깔고, 국기와 군대, 평범한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일상의 영웅주의를 찬양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전율케 했다. 

킹 목사는 ‘정의를 위한 반란, 저항, 희생’ 정신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현실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주장을 편 킹 목사의 연설이, 대량 소비되는 광고라는 형식을 통해 TV로 전파됐다는 사실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그는 연설 뒷부분에서 조국의 물질주의를 과감하고 신랄하게 풍자했다. 광고는 사람답게 살려면 그래도 ‘이 정도의 차’는 타야 한다며 우월함의 상징을 구매하라고 부추긴다. 사실, 그는 이런 광고에 현혹된 동포들을 조롱했다. 킹 목사는 “사람들이 오로지 과시하기 위해 캐딜락을 타고 다니며, 욕망을 조장하는 산업은 미국을 서서히 죽음의 늪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며 포효했다. 

무엇보다 올해 4월은 마틴 루터 킹 서거 5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1983년, 사회주의 혁명가를 기리는 뜻에서 마틴 루터 킹 탄생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인물은, 바로 보수주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공휴일 지정 이후, 왜 미국 사회에 온갖 술책과 속임수가 난무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적 분란을 줄이고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려면, 킹 목사가 지닌 ‘반체제 인사’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없애야 했다. 대신 애국자를, 건국의 아버지를, 특히 특출한 미국인을 창조해내야 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은 실제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흑인과 백인의 구분 없이 ‘동포’라는 믿음 속에서 인종 평등을 꿈꿨다. 또한 민주주의의 메신저 역을 자처함으로써 인종 평등이 실현된 미국만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천명했다. 

2011년 워싱턴에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마틴 루터 킹 동상 건립 기념식을 열었다. 동상 초석에서는 ‘인종주의’, ‘인종’, ‘차별’ 중 어떤 단어도 찾아볼 수 없다. 워싱턴의 ‘위인들의 길’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에서 킹 목사가 이야기한 ‘꿈’을 떠올리며 그가 이룩한 업적을 되새겨볼 것이다. 롤랑 바르트 이후 우리는 ‘신화’가 우리에게 역사를 감추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롤랑 바르트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신화는 현대의 신화 곧, 부르주아라는 신화다. 신화는 표면적인 의미만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는 의도를 그 속에 감추고 있다. 뒤에서 거론되는 수많은 ‘기표’들은 마틴 루터 킹이라는 신화가 그의 실제 비판 정신이 감춰진 채 표면적인 의미들로 소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역주). 

킹 목사는 우표에, 중고등학교 건물 박공에, 워싱턴의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 어린이 그림책에, 해외에서 유통되는 교훈적인 이야기에, 대통령 집무실에, 그리고 트럭 광고에도 등장한다. 이처럼 그에게 공식적으로 경의를 표하든 상업적으로 이용하든, 그의 비판적 사상은 어마어마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곳곳에 숨어 있다. 이렇게 킹 목사와, 1950~60년대의 수많은 이름 모를 흑인 혁명가들이 지닌 의미를 ‘다시 쓰기’하는 행위는, 이 혁명을 형식적인 평등에 대한 요구로 축소해버렸다. 이를테면 남부의 주들이 모략과 공포를 이용해 막았던 투표권이라든가 법률상의 차별 종식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평등에 불과했다. 1965년 흑인들에게 제안된 평등(이 해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흑인 투표권법에 서명한다-역주)은 고의적으로 다듬어지고 생략된 킹 목사의 발언처럼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평등하지 않은 ‘평등’의 의미
 
이런 눈속임에 경악한 그는 1967년의 마지막 책에서 “문제는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흑인과 백인은 평등을 서로 다르게 정의한다. 흑인은 애초에 ‘평등’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백인도 이에 합의해 약속한 대로 자기들이 한 말을 지킬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백인들은,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평등’을 기껏해야 ‘개선’의 의미로 받아들일 뿐이다. 백인의 국가인 미국은 불평등을 줄여나갈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생각만 하고,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궁리만 한다”(2)고 썼다. 

시민권은 미국 흑인이 범접할 수 없으며, 킹 목사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등이란 사회구조적인 것이고, 부는 재분배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이제 흑인은 실업, 게토, 경찰의 괴롭힘, 저임금, 낮은 교육수준, 착취, 제국주의의 희생양 등 모욕적인 2류 시민의 상황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이런 부정적 표현들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마틴 루터 킹의 해방 윤리는 단순히 인종평등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만약 흑인이 물려받을 것 없는 핍박받는 인간의 표상이자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선구자라면, 취약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해방됐을 것이다. 이를테면 빈곤층의 백인들, 보조금을 받는 여성들, 고향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인디언들, 치욕을 당한 치카노(멕시코계 미국인)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민주적 숙의에 참여하고 권력을 가질 능력이 있으므로, 이 국가의 가치에 대해서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은 ‘가난한 자들의 캠페인(Poor People’s Campaign)’을 그의 마지막 투쟁으로 삼았다. 1968년 봄, 미국 전역의 극빈자들과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합법적 혁명을 쟁취하기 위해 수도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한 권리장전 채택, 최저임금의 법적 보장, 빈곤층의 입법과정 참여, 부의 대대적 재분배, 공공 일자리와 공공주택의 획기적인 창출 등을 요구했다. 1968년 2월, 킹 목사는 원래 백인 특권층이 받기로 돼 있던 공적원조와 ‘보조금’ 혜택을 가난한 흑인들이 일부 받은 것이라고 폭로하며, 구호의 이중성을 비난했다. “부자에게는 사회주의 시스템을 적용한 반면, 빈자에게는 야만적인 자본주의를 강제한다!”(3)

1968년 봄에 시작된 ‘가난한 자들의 캠페인’에서 (대개 흑인인) 사회복지 권리수호협회 여성들은 계급, 성별, 인종과 관계없이 뒤얽혀 있는 억압의 양상을 밝히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억압은 서열화돼 있지 않고 마구 뒤섞여 있기 때문에, 킹 목사는 ‘연대’에 호소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이런 연대를 ‘동포애’라고 불렀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자들의 권리탈환은 ‘계급투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허심탄회하게 답변했다. 그러나 그는 이 기사가 발표되기 한 달 전 암살당하고 만다. 

물론 킹 목사가 국가적인 사안에서 때에 따라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베트남과 관련해서 그러했다. 그러나 사망하기 전 외로움과 괴로움에 지쳐 그가 ‘급진적’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1963년에 그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역사적 연설로 만인의 찬사를 받았으나, 조용한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분노에 굴복함으로써 여론의 지지를 잃고 만다. 그러나 이 역시 완전히 날조된 사실이다. 무엇보다 킹 목사는 196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때를 포함해 그의 조국에서 결코 여론의 지지를 받은 적이 없다. 오늘날 국민적 화해의 상징이라고 추앙받는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은 실제로 전체 미국인의 1/3만이 지지했을 뿐이다. 진보주의를 대표하는 뉴요커들조차 대부분 킹 목사를 ‘극단론자’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시민권 요구를 ‘과도하다’고 판단했다.(4) 결국 그런 상식을 넘어선 신념은 제대로 표출되지 못한 채, 그의 삶은 저물고 말았다. 

“자본주의는 이제 역사적 효용을 다했다”

마틴 루터 킹은 23세에 이미 칼 마르크스와 모핸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탐독하고,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인 노먼 토머스 목사를 존경했으며, 라인홀트 니부어(Reinhold Niebuhr) 같은 인물에게서 사회적 기독교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소수의 손에 부가 집중되는 경제시스템에 불신을 표했다. 1953년에 아내 코레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본주의는 이제 역사적 효용을 다했다”고 쓰면서, 마르크스와는 의견 차이가 있지만 자신은 뼛속까지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비관론자 킹 목사는 조국의 비극적인 모습을 상상한다. “기계, 컴퓨터, 이윤 추구를 인간보다 중요시할 때 물질주의, 군국주의, 인종주의라는 이 삼총사는 천하무적이 될 것이다.”(5) 그는 사회를 철저하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백인들은 ‘가치의 혁명’을 통해 비로소 진짜 평등이 가치를 얻게 될 것임을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1967년 8월 킹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특권집단은 가진 것 중 일부를 내놓아야 한다. 남부의 차별을 철폐하거나 우리에게 투표권을 준다 해도 한 푼의 예산도 들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 왜 이 국가에 4천만 명이 넘는 가난한 자들이 존재하는지 물을 때, 부의 재분배에 관한 또 다른 질문들이 뒤따라올 것이다. 누가 석유를 소유하고, 누가 철광석을 소유하는가?”(6)

마틴 루터 킹은, 지배계급의 투표권 불허와 차별만으로는 그들의 정치경제학적 논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거기에 미리 계획하고 조직한 경제적 종속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게토나 스페인어권 거주지역에 빈곤층이 밀집되는 현상, 실업과 부적절한 임금, 빈곤의 문화화, 개혁주의자들의 온정주의적 양심 등은 경제적 종속을 겨냥한 것이다. 흑인들이 백인들만 사는 교외에 정착하겠다고 요구하기까지, 소위 개혁주의자라고 불리는 집단에는 도시에 거주하는 민주주의자 및 진보주의자, 인종 평등 옹호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마틴 루터 킹을 무시하는 측에서는 그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비판했다는 사실과, 미국이라는 국가의 구조적 불평등을 고발했다는 사실들은 슬쩍 빼놓는다. ‘이슬람국가(이슬람교에 입각한 미국의 흑인해방조직. 블랙 무슬림이라고도 한다-역주)’의 지도자 말콤 X처럼, 킹 목사는 인종주의가 백인들의 국가 미국이 품고 있는 선천적 결함이고, 미국의 정체성에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가 얽히고설킨 재앙의 씨앗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리를 빼앗긴 자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이 시민 불복종과 혁명적 공조를 통해 민주주의 정신을 되찾지 못하면, 평등에 저항하는 세력을 도저히 타파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명명한 ‘사랑의 정치학’은 본질적으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대결을 추구하기도 했다. 결국 가장 소외당하는 계층이 발언권을 얻고 정치적 주체성을 지닌 지위를 획득하려면 ‘비폭력 직접 행동’으로 공공질서, 즉 세상의 질서를 깨트려야 했다. 그저 참고 견디며 폭력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은 분노의 부정이나 그리스도의 자세가 아니라, 파괴적인 금욕이다. 1965년 이후 킹 목사의 비폭력 전략은 그 어느 때보다 흑인 저항세력의 극심한 비판에 시달렸지만, 그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그는 1964~1968년 게토를 불태운 혐의로 도시의 반란자 10여 명이 법원의 판결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폭력이란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외침이며, 이를 멈추려면 실업, 차별, 경찰의 가혹 행위에 맞서 투쟁하는 방법을 제안할 수밖에 없다.”

1967년 커너 위원회(Kerner Commission, 당시 여러 대도시에서 발생한 흑인 소요의 원인과 실태, 재발방지 대책 연구를 위해 린든 존슨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회-역주)를 통해 백악관이 수집한 독자적 전문가들의 보고서는 킹 목사의 진단을 인정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이 보고서를 은폐했다. 킹 목사가 사망하고 7개월 후, 린든 존슨의 후임으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닉슨은 마틴 루터 킹의 바람과는 다르게 평등 대신 ‘흑인 자본주의’의 발전을 제안했다. 오랫동안 미국은 스스로 계급 없는 국가이자, 그 어느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 유동성을 지닌 존재로 상상해왔다. 미국은 이제 겨우 이런 환상에서 빠져나왔다. 

미국은 인종주의가 이제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며, 시민권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마침내 흑인과 백인 사이의 불평등이 막을 내렸다고 여전히 확신한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이 살아 있다면, 이 동화 같은 소리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가며 반론을 펼칠 것이다.  

<<원문 보기>> Le dernier combat de Martin Luther King

글·실비 로랑 Sylvie Laurent
하버드 및 스탠퍼드대학교 객원 연구원이자 파리정치대학교(시앙스포) 교수. 주요 저서로 『마틴 루터 킹 일대기』(Seuil, 파리, 2015)가 있다.

번역·조민영
서울대 불문학과 석사 졸업. 번역서로 『지도로 읽는 아시아』 등이 있다. 


(1) Martin Luther King, ‘The drum major instinct’, 1968년 2월 4일의 연설.
(2) Martin Luther King, <Where Do We Go from Here: Chaos or Community>, Beacon Press, Boston, 1967.
(3) Martin Luther King, ‘To Minister to the Valley’, 1968년 2월 23일 마이애미 연설.
(4) <뉴욕타임스>가 실시하고 발표한 조사, 1964년 9월 21일. 
(5) Martin Luther King, ‘Beyond Vietnam: a time to break silence’, 1967년 4월 4일 뉴욕 연설.
(6) Martin Luther King, ‘Where do we go from here?’, 1967년 8월 16일 애틀랜타 연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