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운명의 회오리처럼

2018-03-29     자비에 라페루

『끝없는 여름, 어느 진혼곡』은 삶과 죽음, 꿈과 환멸, 도피와 포기를 이야기하는 소설, 운명에 관한 책, 영원의 진혼곡이다. 죽음은 언젠가 다가오므로 화자는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한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이야기마다 나타나는 죽음이니 결국 여기에도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무대배경을 정해야 한다. 덴마크, ‘하얀 농장’. 그리고 “여전히 가능성은 전부 열려 있다. (…) 이미 여러 명 있으니 등장인물을 전체적으로 봐야한다. 주요인물이든 주변인물이든 다른 등장인물들도 중간에 또 나올 것이다….” 

우선, “소년이 있다. 어쩌면 소녀인데 이 사실을 아직 모르는 소년일 수도 있다.” 이 소년은 자전적 소설에 투영된 화자의 분신이다. 1963년생인 클라우스 벡 닐슨은 문학가이자 극작가인 닐슨 부인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다른 주역들이 재빨리 나타난다. ‘귀족적이고 금발에 북유럽적인’ 어머니, 주인공 소년의 여자친구이며 작가 닐슨 부인의 모습을 투영하듯 호리호리하고 섬세한 맏딸,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 질투심이 병적인 계부, 두 남동생, 끝으로 ‘맏딸이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절대로 오지 않을 미래의 화신을 상징하는 늠름한 체격의 소년’ 라르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미래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소설은 가족의 과거 이야기를 찾아가지만 창창하게 빛나는 현재만이 중요하다. 

10대 자녀들은 예술가가 되기로 하고 어머니는 예술가 수업을 듣기로 한다. 공동체가 하나 탄생한다. “하얀 농장에서의 삶은 꿈을 만들어가는 재료와 닮아가기 시작한다. 마치 100년 전 덴마크 윌란반도 북부에 위치한 그 유명한 예술가들의 집단거주 구역인 스카겐(Skagen)에서의 삶과 비슷하다(…), 하나의 중심이고 시간을 완전히 초월하며 세계 그 자체인 삶.” 

계부는 아내(어머니)가 전업주부가 되기를 원하고,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결국 부부관계와 함께 과거의 세계가 무너진다. 이제 어머니는 포르투갈 출신의 젊은 예술가와 연애만 하면서 산다. 두 사람은 자신만의 왕국 한가운데서 왕과 왕비처럼 산다.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조연, ‘군중’이다. 계부는 결국 남편 자리를 양보한다. 신혼여행 후, 어머니는 포르투갈에서 남자처럼 말을 타며 현지의 전통과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면서 현지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다. 

덴마크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포르투갈 예술가 청년이 정해진 틀, 관습과 인습을 뒤흔든다. “홀로 모든 것에 도전한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의 얼굴들, 자급자족, 노동만을 신으로 섬기고 검약을 강조하는 개신교, 끝없는 겨울, 어두움, 모두 도전의 대상이다.”

하지만 어둠과 병, 죽음은 당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마치 오스트리아의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과 비슷하다. 공연 중인 비극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관객 같은 화자는 독자를 붙잡고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글은 마치 가혹한 운명의 회오리처럼 서정적이고 빛나면서 냉정하게 자신을 감싸며 인간들 위에 군림하는 어두운 힘이 승리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마지막 말은 방금 했고 ‘끝없던 여름’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글·자비에 라페루 Xavier Lapeyroux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한불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