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주의 '겉과 속 다른 위선?'

비아프라 전쟁서 한계 노출… 관련국 이해 얽혀 '순수성' 의심

2008-10-29     피에르 미셸레티 | 의사

특집 - 인도주의를 해부하다Ⅲ

  현대 인도주의 운동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으로 여겨지는 비아프라 전쟁(1967~1970) 이면엔 인도주의 단체의 모호한 실체가 감춰져 있다. 특히 외부의 관련 국가들과 인도주의의 단체들은 각기 나름의 외교 정책 및 경제적 과제의 차이로 인해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다. 비아프라 전쟁은 인도주의 운동단체들에게는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대다수가 기독교나 토착 종교를 신봉하던 이보족이 나이지리아의 동부 지역을 분리하며 비아프라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자, 연방정부는 이보족을 상대로 1967년 5월부터 1970년 1월까지 전쟁을 벌였다. 30개월 이상 살육전이 계속된 뒤, 과거에 비해 불안정하고 말도 많은 새로운 국제 연대조직이 탄생했다. 이들 조직은 여론을 이용해 관련 국가의 외교 정책에 영향을 주려고 했던 점에서 남달랐다. 한 나라의 국제 관계가 더 이상 외교관과 군부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종족 갈등, 그리고 석유자원 쟁탈전
 1967년 5월 26일 동부 지역의 자문평의회가 투표를 통해 분리를 결정함으로써 내전이 시작됐다. 5월 30일 동부 지역 군정 장관 오드메구 에메카 오주쿠 중령은 이 지역을 비아프라 공화국이라 칭하며, 에누구를 수도로 삼았다. 군부가 집권한 연방정부는 곧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반격에 나섰다.
 7월부터 나이지리아 군대와 비아프라 군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68년 5월, 오니차와 포트 하커트가 함락되면서 동부 지역은 바닷길을 차단당했다. 바닷길이 봉쇄되면서 극심한 기아가 닥쳤다. 1969년 12월에는 1만 2,000명의 연방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고, 수개월 간 포위 공격을 시도한 끝에 최후의 방어선까지 무너뜨렸다. 훗날 '비아프라의 고립'이라 일컬어진 포위 공격이었다. 1970년 1월 12일 오주쿠는 코트디부아르로 망명하면서,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정전을 위한 서명권을 측근에게 넘겼다. 비아프라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33개월간의 전투로 이보족은 수십만 명이 주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고, 3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고향을 등졌다.1)
 정치 투쟁과 종족 분쟁이란 면이 부각되면서 경제적 요인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석유의 80% 가량이 비아프라 지역에 매장돼 있다. 1966년의 석유 생산량은 하루 40만 배럴에 달했다. 따라서 강대국들과 석유 회사들은 비아프라 전쟁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앞서 프랑스가 사하라에서 원폭 실험을 했을 때 나이지리아는 거세게 항의한 바 있다. 따라서 나이지리아와 프랑스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비아프라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무기 금수 조치만 취했다.
 또한 나이지리아 정부에게는 비아프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하지만 비아프라 반군은 드골 정부로부터 물적 지원과, 용병을 활용한 인적 지원을 은밀하게 받았다.2) 프랑스는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된 옛 영국의 식민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상실해 가고 있었다.
 
 국제사회, 전쟁 지원과 구호 활동'두 얼굴'
 탄자니아, 가봉, 코트디부아르, 잠비아 등 아프리카 4개국과 아이티만 비아프라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3) 이에 반해 영국과 소련은 나이지리아 연방정부를 지지하며 무기까지 지원했다. 미국은 나이지리아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연방정부와 반군 모두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데는 반대했다.
 그 후 발발한 내전에서 발견되는 특징들, 예컨대 극단적인 폭력, 정체성의 동원4), 무용지물로 전락해 버린 전쟁 관련 국제법, 민간 무장단체의 활용, 이해집단 간의 경쟁, 종교적 성격, 석유를 둘러싼 이해관계 대립, 외국의 대대적인 간섭 등이 나이지리아 내전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역사학자 다니엘 도메르그 클로아렉은 "아프리카를 피로 물들인 폭력의 역사를 살펴보면 1955~1969년의 기간이 1990~1995년의 기간보다 2.5배나 잔혹했다. 추정된 희생자의 수로 분류하면 나이지리아가 첫 번째를 차지하고, 르완다가 다섯 번째를 차지한다"고 말했다.5)
 한편 봉쇄와 공격으로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한 국제 연대 조직이 전쟁의 와중에 결성됐다. 그 결과 나이지리아는 2차 대전 이후 가장 대규모로 신속하게 결정된 구호단체, 즉 'SOS 비아프라'의 무대가 됐다. 그러나 바이프라 사람들을 구조하겠다고 나선 단체들을 조율하는 상급 기관이 없어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아일랜드,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많은 단체가 1차 필수품과 식량을 앞 다퉈 보냈다. 대부분 가톨릭이나 개신교 계열의 단체였다. 구호 물품 인도는 항공기가 운 좋게 마련되면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더구나 연방 정부가 구호 물품 인도에 협조하지 않아 이보족의 '집단 학살'을 조장한다는 비난까지 일었다. 라고스의 연방 정부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방해했지만,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약 300만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매달 1만 톤의 생필품과 약품을 전달했다. 그러나 이런 국제 원조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급증했고, 비아프라의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적십자 깃발 아래 군수품 전달도
 1968년 9월, 의사 몇 명이 나이지리아 분리주의자들의 지역에 들어갔다. 그 지역이 연방군에게 폭격을 받은 뒤였다. 그들은 그 무렵 본격적인 난민 구호에 나선 프랑스 적십자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당시 그 의사 조직의 회장은 군의관인 레이몽 드베네데티였다.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에서부터 생필품과 의약품이 공수됐지만, 무기와 군수품까지 적십자 깃발을 달고 비아프라 반군 세력에게 전달됐다. 당시 리브르빌에 주재한 프랑스 적십자 대표는 프랑스 대사관 무관, 메를 대령이었다.6) 당연히 나이지리아 정부는 항공기를 이용한 인권 단체의 구호 활동을 비난하며, 군대를 동원해 국제적십자위원회의 항공기를 공중에서 격추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 의사 베르나르 쿠슈네와 그의 동료들은 언론을 통해 기아와 전쟁을 비난하며,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일관되게 추진하던 '침묵의 규칙'에 제동을 걸었다.7) 이는 수 년 후에 공법학자 마리오 베타티 교수가 '간섭의 권리'를 옹호하고 나서는 계기가 됐다.8)
비아프라 주민을 위한 구호 활동에서 자극받아 프랑스에서는 '국경없는 의사회'가 처음 탄생했고, 그 후로도 '세계 의사회'를 비롯해 많은 인도주의 단체가 결성됐다. '국경 없는 인도주의 단체'가 활동하는 세대가 시작된 셈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젊은 의사들은 언론을 통해 전쟁 상황을 전달하며 해당 지역의 처참한 상황을 고발하고, 여론과 정부까지 끌어 들였다.

정부·비정부기구 인도주의, 구분돼야
 1968년 이후 인도주의 단체는 언론과 손잡고 비아프라에서 중국해까지, 소말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르완다와 보스니아, 동티모르와 다르푸르, 코소보와 이라크 등에 이르기까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현장을 세계인에게 알렸다. 최선과 최악의 결합이었다. 이처럼 현대적 개념의 인도주의를 선보인 단체들이 언론과 손잡은 의도를 비난하거나, 그 혁명적 발상의 순수성을 의심해선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갑자기 언론을 끌어 들이면서 프랑스 외교에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석유 확보가 당면 과제였다. 따라서 비아프라의 분리주의자들에게 '동정적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간 보여준 인도주의의 동기도 불분명하고 모호했다. 1994년 르완다 사태 당시 프랑스군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위임을 받아, 투치족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던 지역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티키옥 작전을 펼쳤다. 인접국인 자이르로 탈출하던 대량 학살자 후투족을 보호하기 위한 간섭이었다.9) 그러나 이는 외교 정책과 인도주의적 행동의 경계를 뒤죽박죽 뒤섞어 버린 새로운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이로 인한 불신과 의혹은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인도주의를 표방하는 비정부 기구가 폭력의 표적이 되는 실정이다.
 또한 인도주의 단체 자체가 서구 세계에 속해 있어 본국이 개입된 갈등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비난받기도 한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정부 차원의 인도주의와 비정부 기구의 인도주의는 각자의 행동 역량을 극대화하고,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서로 뚜렷이 구분돼야 한다. 지난 40년 동안, 세계의 역학 관계는 크게 변했다. 현대의 인도주의 운동이 발원한 서구 세계 역시 인식이 변했다. 이제 인도주의 단체의 면책특권도 결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레지스 드브레가 말했듯이 "진실이 겉모습과 다르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10)라는 물음이 인도주의 운동에 주어지고 있다. 인도주의 단체로서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질문이다.

  번역 | 강주헌 2nabbi@ilemonde.com

 


 

* 세계 의사회 회장, <인도주의 : 적응 과정인가 포기인가> (마라부 출판사, 파리, 2008. 9)의 저자. 

1) 사망자가 100만, 때로는 200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실정이다.
2) 제 5공화국의 대통령들도 용병의 활용을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묵인했다. 드골과 조르주 퐁피두는 카탕가와 비아프라에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코모로와 베냉에서, 또 프랑수아 미테랑은 차드와 가봉에서 용병을 활용한 군사작전을 묵인했다. 자크 시락 대통령 시절에도 자이르(1997), 콩고(1997~1998, 2000), 코트디부아르(2000, 2002)에서 용병을 동원한 군사 작전이 용인됐다.
3) 네 국가의 결정으로 국경의 불가침성이란 원칙을 천명하며 갓 출범한 아프리카 통일기구가 크게 흔들렸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국가의 사분오열이 촉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4) 비아프라 전쟁에서는 종교적인 문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비아프라의 주민들은 대다수가 기독교인이거나 토속 종교를 믿었다. 반면에 연방 정부의 군사 정권은 무슬림 세력이 주도했다. 이런 종교적 갈등에 요루바족과 이보족 간의 갈등이 더해졌다.
5) 다니엘 도메르그 클로아렉(Danielle Domergue-Cloarec), '갈등의 형태가 변하고 있는가? 냉전에서 새로운 형태의 갈등까지, 1947년부터 현재까지의 형태론적 접근. 비아프라는 현대적 갈등의 서막이었다'(Des conflicts en mutation? De la guerre froide aux nouveaux conflits: essai des typologie: De 1947 ㅤㅁㅐㄻ nos jours. Biafra: prelude aux conflicts actuels), <콩플렉스>(Complexes), 파리, 2003년, pp, 137-150.
6) 프랑수아 그자비에 베르샤브(Franㅤㅁㅒㅀois-Xavier Verschave), <프랑스 아프리카, 비아프라의 석유와 인도주의(La Franafrique, Biafra petro-humanitaire)>, 스토크 출판사, 파리, 2001년, p.150.
7) 막스 레카미에(Max Recamier)와 베르나르 쿠슈네(Bernard Kouchner), '비아프라, 두 의사의 증언'(Biafra, Deux medecins temoignent', <르몽드>, 1968년 11월 27일.
8) 마리오 베타티(Mario Bettai)와 베르나르 쿠슈네, <간섭의 의무(Le Devoir d'ingerence>, 드노엘 출판사, 파리, 1987년. 마리오 베타티, <간섭의 권리(Le Droit d'ingerence)>, 오딜 자콥 출판사, 파리, 1996년.
9) 자이르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콜레트 브래크만(Colette Braeckman), '콩고 공화국의 승리자가 없는 전쟁'(Guerre sans vanqueurs en Republique du Congo),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1년 4월을 참조할 것.
10)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 <성지의 순진한 사람(Un candide en Terre sainte)>, 갈리마르, 파리, 2008년, p.149.

국제적 미완의 과제 '간섭의 권리' 
재앙·전쟁 구호 위한 
인도주의적 간섭 어디까지…

카롤린 플뢰리오 | 사회학자

 국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도우려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은 먼 옛날부터 있었다. 네덜란드의 법학자인 데 흐로트가 1625년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그런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그러나 유엔헌장 2조 7항은 국내 문제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국제 관계의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국제법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를 구호하려 할 때도 관련국의 승락을 받거나, 관련국의 반대가 없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불간섭 원칙의 예외는 엄격히 제한적으로 적용되어 집단안전보장이 위협받는 경우로만 한정되며, 그 결정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위임된다.
 인도주의적 간섭이란 개념은 비아프라 전쟁 이후에 등장했다. 적십자 소속의 의사들이 침묵의 규칙에도 불구하고 비아프라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정하고, 1971년 '국경없는 의사회'를 설립했다. 그 후 인도주의를 표방한 비정부기구들이 우후죽순처럼 결성됐다. 1977년엔 국제적 무력 충돌에 따른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1949년의 제네바 협약에 제1추가 의정서가 더해 졌다. 이는 공정한 인도주의적 성격을 띤 구호 활동은 간섭이나 악의적 행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명확히 규정했다(70조 1항과 2항). 그러나 간섭의 권리까지 특별히 규정되지는 않았다.
 
 유엔, 인도주의적 간섭의 권리 인정 안해
 한편 '간섭의 의무'라는 개념은 1987년 베르나르 쿠슈네와 마리오 베타티 법학 교수가 '인도주의에 관련한 법과 도덕'을 주제로 열린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됐다. 일부 학자의 평가에 따르면, 간섭의 권리를 이미 인정하는 문헌이 있기도 하다. 실제로 쿠슈네와 베타티는 유엔 총회의 두 결의안을 근거로 삼았다.1) 하나는 '자연 재앙과 그에 버금가는 긴급한 상황의 피해자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에 관련된 1988년 12월 8일의 결의안(제43/131호)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호 물자를 긴급히 공급하기  위한 운반로의 확보를 허락한 1990년의 결의안(제45/100호)이었다.
 그러나 유엔 총회 결의안은 회원국에게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을 지원하라고 요구할 뿐, 인도주의적 지원을 강요하는 것까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긴급한 운송로를 확보하는 문제도 관련국의 정부와 인도주의 단체 간의 긴밀한 협조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국가도 인도주의를 이유로 다른 국가에 간섭하는 권리를 일방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 심지어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이유로도 그런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법학자는 자국민 보호라는 명목 하에 파생될 수 있는 불공정한 일방적 간섭을 염려하며, 자국민 보호라는 이유로 자행되는 간섭을 극히 경계한다.
 
 '간섭의 권리', 아직은 막연한 개념
 엄밀한 의미에서 인도주의적 간섭의 권리는 유엔에게도 유리할 것이 없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90년대부터 인도주의적 간섭을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에 국한시켰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런 목적을 위해 평화유지군을 창설했고, 소말리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파견했다.2) 그러나 평화유지군의 목표는 집단안전보장에 있을 뿐, 파견국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과 사법적 권한까지 위임받진 않았다. 르완다에서 일어난 투치족의 대량 학살이나 스레브레니차에서 자행된 대량 살상에 대해 보여주었던 평화유지군의 무력한 태도가 그 좋은 사례다. 그러나 이런 폭력적 사태에 직면해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2000년에 '국제 공동체의 이름으로 반인권적 범죄에 대처하기 위한 도덕적 책무를 안전보장이사회에 부여하는 법'을 제정하자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3)
 1977년의 제네바 협약 제1추가 의정서는 두 가지 상황을 구분한다. 전쟁 범죄를 억제하고 제재하는 권한은 회원국과 유엔에 위임한 반면에, 구호 활동의 책임은 공정한 인도주의 단체에 위임했다. '국경없는 의사회'의 법률 담당 국장, 프랑수아즈 부셰 소니에는 "인도주의 법의 중대한 위반이 국제 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험에 빠뜨려, 7항에서 허락한 군사 개입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해당 지역 안보 기관의 몫이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 유엔이 해당 지역의 국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보호 장치를 결정하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4) 법으로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 한 간섭의 권한은 관련된 당사자들, 즉 관련 국가들이나 국제 구호 단체들, 유엔 모두에게 막연한 개념일 뿐이다.

 


 

1) 유엔총회의 결의안은 법적인 강제력을 띠지 않는다.
2) 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를 확인한 경우, 유엔헌장 제 7항에 근거해 무력을 통한 해결을 결정할 수 있다.
3) 코피 아난, '우리 민족들, 21세기 유엔의 역할(Nous les peuples, Le role des Nations unies au XXIe siecle)', 뉴욕, 2000년 3월,
http://www.un.org/frecnh/millenaire/sg/report/
4) 프랑수아즈 부셰 소니에(Francoise Bouchet-Saulnier), <인도주의 법의 실용사전(Dictionnaire pratique du droit humanitaire)>, 라데쿠베르트 출판사, 파리, 2006년, p.313.

 탄압받는 인도주의… 중미 분쟁지역
 정부군·미 행정부
'반군 간접 지원' 비난, 협박·살해

미셸레티

 1970년대 말, '미국의 뒷마당', 중앙아메리카 지역이 마침내 불바다로 변했다. 산디니스타가 1979년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았고, 과테말라는 테러와 폭동의 늪에 빠졌다. 1932년부터 직·간접적으로 군부의 지배하에 있던 엘살바도르에서도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 해방 전선(FMLN)의 전투원들은 "니카라과가 승리를 거두었다면 엘살바도르도 승리할 것이다!"는 외침에 용기를 얻었다.
 얼마 후 로널드 레이건은 "엘살바로드는 내전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지적했다.1) 냉혹한 대량학살 계획이 세워졌다. 군부와 FMLN은 치열한 전투 끝에 서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군인들과 암살단의 손에 희생당한 민간인만도 3만 명을 헤아렸다. 50만명 가량의 남녀노소가 이웃 국가로 피신했다. 사르디니아 섬보다 작은 지역에서 벌어진 참상이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로 피신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대주교가 나섰다. 전국의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기독교 민주당 당수 호세 나폴레옹 두아르테는 "피난민 수용소가 '게릴라 훈련소, 무기와 군수품의 은닉처'로 전락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인도주의 정신에서 그 곳으로 달려온 선의의 자원 봉사자들과 기독교인들 및 의사들에게도 위협이 가해졌고, 구금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80년 12월에는 산살바도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이타 포드, 모라 클라크, 도로시 카젤, 진 도너번 등 네 명의 미국 여자 선교사가 마침 작전 중이던 5명의 방위군 병사에게 고문당하고 강간당한 후에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의 하얀 트럭은 현장에서 새까맣게 탄 채로 발견됐다.
 
 정부군, 자원 봉사자·선교사 등 구금·살해
 1980년 3월부터 1982년 가을에 걸쳐 죽음의 땅에서 탈출해 온두라스로 넘어가는 엘살바도르인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그러나 국경에 세워진 두 곳의 난민 수용소, 라비트투드와 콜로몽카과에서 온두라스 군은 엘살바도르 군에 긴밀히 협조하며, 난민들을 가둬두고 감시했다. 심지어 난민들을 억압하며 긴장된 분위기를 조장했다.
 온두라스 군의 억압과 엘살바도르 군의 기습에 시달리던 난민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국제기구의 지원이었다. 처음에는 '세계 의사회'가 그들을 찾아왔고, 그 후로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 '국경없는 의사회'의 프랑스 의료진 등이 차례로 찾아왔다.
 엘살바도로의 오를란도 세페다 대령은 이런 국제조직의 일부 회원이 FMLN을 지원해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시스템을 정상화시키는데 개입했다고 비난했다.2) 1981년 12월에 서둘러 발표된 레이건 정부의 백서는 한술 더 떠, "인도주의적 지원의 50%가 게릴라 조직에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규탄하고 나섰다. 터무니없는 수치였지만, 정치적으로 참여한 외국계 의사와 간호사의 의도된 행위였든, 난민들의 행위였든, FMLN을 지원하는 움직임과 그런 사실을 묵인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엘살바도르 정부군과 미국으로선 국경에 세워진 이런 난민 수용소의 존재 자체가 골칫거리였다. 인도주의 단체의 회원들도 그 못지않은 골칫거리였다. 그들에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주기를 기대했지만,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따라서 그런 조직을 향한 비난과 협박이 증가했고, 그런 억압이 심해질수록 인도주의 조직들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잔혹 행위를 격렬하게 규탄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와 근본주의자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 조직체, 즉 '월드 비전'처럼 유순한 기관으로 인도주의 기관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친미 CIA 앞잡이 '월드 비전'이 전면에
 온두라스에서 '월드 비전'의 목표는 분명했다. 수용소 난민들과 인도주의 조직을 정탐하고, FMLN에 실제로 협조하거나, 협조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골라내는 역할이었다. 물론 정보를 CIA에 전달하는 역할도 빼놓을 수 없었다.
 오랜 갈등 끝에, 많은 비정부 기구의 역할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던 엘살바도르 국내 조직인 '전국 복음주의 협의회'의 역할도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월드 비전'이 본연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그 조직을 향한 비난이 거세지자 이 단체 역시  그 지역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1984년, '국경없는 의사회'를 모태로 한 '국경 없는 자유'가 창립되면서, 이 단체는 진보주의적 체제와 단체에 호의적이던 '제 3세계주의자'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레이건의 자유주의 노선과 함께 하는 길동무가 되어버렸다.
 번역 | 강주헌 2nabbi@ilemonde.com

 


 

1) 이 기사에서 인용된 말은 모두 <중앙 아메리카, 에스퀴풀라스의 난민들(Amerique centrale, Les naufrages d'Esquipulas)>(라탈랑트 출판사, 낭트, 2002)에서 발췌한 것이다.
2) 훗날 국방부 차관이 된 세페다는 1989년 11월 16일 이냐시오 엘라쿠리아 신부를 비롯해 6명의 예수회 신부를 중앙아메리카 대학교에서 암살한 사건에 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