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코빈의 주문에 부활한 영 노동당

2018-04-30     알랑 포플라르 & 폴 바니에 | 언론인

분열이 보수당의 문제로 인식되는 국가? 좌파가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는 국가? 새로운 정복에의 희망이 진보주의자들을 흥분시키는 국가? 그런 국가가 실제로 존재한다. 바로 영국이다. 2015년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 대표직에 오른 뒤 전통적인 사회민주계열 정당인 노동당 내부에서부터 좌파 구도의 재정비가 이뤄지면서, 영국이 그런 국가가 됐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죽는지 알고 싶다면 그렌펠 타워로 오세요.” 2017년 9월 노동당 전당대회의 폐회사에서 제레미 코빈 노동당 당수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벤 오크리의 작품 속 이 문구를 인용했다. 공공임대주택이었던 그렌펠 타워는 2017년 6월 14일 화재가 발생해 주민 79명이 목숨을 잃었다. 런던의 부촌 중 하나로 꼽히는 켄싱턴 북부에서 그렌펠 타워 주변은 유일한 서민거주 구역이었다. 그렌펠 타워의 주민들은 극도로 불평등한 정책에 의해 방치된 상태였다. 

영국에서 상위 1%의 소득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0년 전, 4%였던 데 비해 지금은 8.5%로 2배가 넘게 증가했다. 코빈은 전당대회에서 그렌펠 타워 참사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렌펠 타워는 실패한 시스템, 고장 난 시스템의 증거입니다. 노동당은 이를 바로잡아야 하고, 또 바로잡을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좌파 노선 포기

1970년대부터 보수당의 텃밭이었던 켄싱턴 선거구에서 노동당은 2017년 6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거뒀다. 노동당은 영국을 대표하는 좌파 정당의 정치적 노선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계속해서 내세웠다. “블레어 총리 시절 많은 사람이 노동당을 떠났습니다. (1) 저는 나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노동당에 남았습니다.” 켄싱턴 선거구의 의원으로 당선된 에마 덴트 코드가 말했다. “그때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왔고, 많은 젊은이가 노동당에 가입했습니다. 당에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선거운동을 지지해주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켄싱턴에 탄탄한 지지 기반을 확보한 덴트 코드 의원은 열성적인 활동가들(켄싱턴 구역의 노동당 지부 가입자 수는 2년 만에 300명에서 1,000명으로 증가)과 “브렉시트 이후 보수당으로부터 등을 돌린 유권자들” 덕분에 당선될 수 있었다. 

영국의 EU 잔류를 지지하는 이들이 절대다수인 켄싱턴에서, 덴트 코드 의원은 전통적인 노동당 유권자 수를 훨씬 더 넘어서는 지지를 받았다. “우파 지지자들도 저를 뽑아 주셨고 그 외 노동당과는 거리가 멀었던 분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투표하지 않았던 분들,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없던 분들도 저를 뽑아 주셨습니다. 많은 분이 저에게,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 처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015년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 당수로 지명된 이후 켄싱턴뿐만 아니라 많은 선거구들에서 변화가 감지됐다. 아직 다수당이 되지는 못했지만, 웨스트민스터에서는 2017년 6월 조기 총선에서 노동당이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수인 350만 표를 얻어 30개의 추가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사회민주계열의 오래된 정당들이 현재 위기에 빠진 것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의 경우 사회당의 당원은 2007~2016년 14만 명, 독일의 사회민주당(SPD) 당원은 7만 명 감소했다. 

반면 영국 노동당의 당원은 현재 57만 명으로 2015년보다 무려 30만 명이 늘어났다.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처럼 영국에서도 최근에 여러 개의 신설 정당들이 등장하면서 정계 구도에 변화가 있었지만, 노동당이 주도하는 분위기를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노동당은 철도의 재(再)국영화와 대학 등록금의 폐지를 제안하면서, 국제사회주의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도 결별을 선언했다. 양당체제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영국의 선거방식(2) 외에, 노동당이 다른 나라들과 대비되는 세 가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코빈 등장 이후 노동당원 급증

“변화가 필요한 것은 비단 영국 정부만이 아닙니다. 정계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레이터 런던 주의 변두리에서, 영국 좌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칼럼니스트인 오웬 존스는 150명의 활동가들 앞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들은 노동당 색깔로 꾸며진 억스브릿지 지구의 한 사무실에 모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재정정책, 고용, 보건, 주택, 그리고 브렉시트에 대한 노동당의 입장을 요약해 놓은 자료집을 나눠줬다. 그들은 먼저 이 지역의 현안들을 살펴본 뒤, 극우파 정당인 영국독립당(UKIP) 유권자와의 만남과 같이 다양한 예시 상황들을 예행연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동안 해당 지역의 집들을 방문할 30여 개의 활동가 그룹을 조직했다. 

알고 보니 이 사무실의 위치도 그냥 정해진 게 아니었다. 런던 시장을 거쳐 지금은 외무부 장관이 된 보리스 존슨이 바로 이 선거구의 의원이다. 이 지역에서 그의 입지는 2015년만 해도 확고했지만, 이제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노동당은 이처럼 영국 내에서 좌파세력이 커지고 있는 60개 구역을 선정해 집중공략에 나섰다. “존슨이 없어지길 바라십니까? 한번 해봅시다! 존슨을 밀어냅시다!” 오웬 존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집을 방문하는 한 팀을 따라 카울리 로드와 펀데일 크레센트를 걸었다. “Never trust the Tories(토리당/보수당)을 믿어서는 안 된다)”라고 창문에 쓰여 있는 집도 있었다.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히드로 공항의 항로 아래에 위치한 이 빌라촌의 거리를 담당하는 팀은 4명의 남성과 2명의 여성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들 중 단 한 명만이 해당 지역의 노동당 지부 소속이었다. 그는 은퇴한 음대 교수였다. “저는 1980년대 초반에 노동당에 가입했습니다. 블레어가 당수가 되고 난 다음 탈퇴했습니다. 블레어 정부의 교육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코빈이 노동당 당수가 된 후 저는 노동당에 재가입했습니다.”

시머스 맥콜리는 41세로 홍보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블레어의 노동당에는 절대로 표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2015년 코빈이 당수가 되자 그는 노동당에 가입했다. 50대 여성 케티 웹도 같은 해에 노동당에 가입했다. 그 이전에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반대로 데이비드 카는 오랜 기간 공산당을 지지했다. “저는 코빈이 저와 비슷한 부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코빈 역시 노조활동 경험이 있으니까요.” 카는 덧붙였다. “코빈은 페미니스트, 환경보호론자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족을 지지하고, 이라크전에 반대합니다.” 아미르 N은 2개월 전에 노동당에 가입했다고 밝혔고, 데보라 올주스키는 여성평등당(Women's Equality Party) 소속이지만 코빈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 작은 유권자 그룹의 다양한 면모들(사회적 다양성 포함)만 보아도 노동당의 대중적 인기를 한눈에 알 수가 있다. 이보다 연령대가 높은, 한번 탈퇴했다가 재가입한 경험이 있는 오래된 활동가들 외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노동당 합류를 결정했다. 청년노동당(Young Labour)의 당원 수는 보수당의 전 연령층 당원 수를 합한 것만큼이나 많다. 고학력에 중산층 출신인 새로운 활동가들은 노조 활동 경험은 부족하지만, 코빈이 현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줄 적임자라고 믿고 있다.

이제 집권준비를 마친 노동당

2015년 5월 에드워드 밀리반드가 노동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코빈이 대표가 되자,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많았다. 코빈의 반대파들은 1983년 선거참패의 기억을 소환했다. 당시 노동당은 집권을 위해 우경화 노선을 선택했고, 이 때문에 당내 좌파 세력은 힘을 잃었었다. 비방가들은 노동당이 내세운 프로그램을 “역사상 가장 긴 자살골”이라며 비웃었다.

북이즐링턴(런던)의 의원이었던 코빈은 59.5%의 득표율로 노동당 당수가 된 뒤 공개경선(Open primary) 제도를 택하면서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다.(3) 코빈과 당내 코빈의 지지자들은 긴축정책과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덕분에 신자유주의로 돌아섰던 엘리트 노동자들까지 포용할 수 있었다.(4) 2016년 코빈은 61.8%의 득표율로 다시 한번 노동당 대표가 됐다. 노동당의 약진은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억스브릿지 주민들에게 배포된 전단의 제목도 ‘집권할 준비가 된 노동당’이었다.

노동당이 노리고 있는 보리스 존슨의 선거구는 정치단체인 모멘텀(Momentum)이 기획한 ‘Unseat(자리에서 몰아내자!)’ 캠페인의 대상이기도 하다. 코빈의 측근들이 2015년 결성한 모멘텀은 노동당 대표직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설립됐다고, 모멘텀 지도부의 국내관리팀 일원인 야니스 거트소야니스는 설명한다. “코빈이 당수로 선출된 뒤로 모멘텀은 경계 대상이 됐습니다.” 경계 주체는 ‘의회 의원들’이고 그들의 대부분은 블레어파 의원들이다.

약 3만 6,000명의 활동가들로 구성된 모멘텀은 날로 성장하고 있다. 가입자가 매주 수백 명씩 늘어난다. 다른 좌파 단체들에 비해 영향력과 활동성이 월등히 뛰어난 모멘텀은 노동당의 지침과 상관없이 자체적인 도구, 즉 디지털 플랫폼과 온라인 애플리케이션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우리는 언제나 캠페인 중입니다.” 거트소야니스는 설명한다. 국립병원의 의사로 재직 중인 그는 새로운 총선이 “언제든지 치러질 수 있으며” 준비는 항상 돼 있다고 자부했다. 테레사 메이의 정부는 부패 스캔들과 브렉시트로 인해 지지율이 대폭 하락한 상태다. 특히 브렉시트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메이 정부는, EU가 실속 없는 허울뿐이라는 이유로 탈퇴를 주장한 기업인들도, 영국을 싱가포르처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발판으로서 EU 탈퇴를 주장한 기업인들도,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170개 지부를 두고 있는 모멘텀은 현재 구조화 작업에 한창이다. 소셜 네트워크를 담당하는 ‘Master class'는 과거 미국의 민주당 경선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의 홍보 담당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공청회를 기획하고 유권자들의 집을 직접 방문할 것을 조언했다. 모멘텀의 국내 회의(National conference)는 활동가들의 사례를 공유하는 소규모의 아틀리에 형식으로 진행됐다. “우리는 싱크탱크가 아닙니다. 우리는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아요. 우리가 하는 일은 노동당의 정책이 고위 관료(Technocrat)가 아닌 일반 당원들의 열망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모멘텀은 보건, 국방 산업, 이민 정책에 관련된 노동당의 입장을 바꿔보려고 노력 중이다. “현재 노동당의 프로그램은 40년 전 이래로 가장 좌파적인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들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우유부단한 모습입니다.”

40년 이래 가장 좌파적

서민층 출신이 대부분인 노동당 유권자의 37%가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멘텀은 2016년에 영국의 EU 잔류를 지지하는 강도 높은 캠페인을 벌였다. 모멘텀은 노동당의 지지층 일부와 의견차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멘텀의 활동은 브렉시트에 대한 코빈의 소극적인 입장에 만족하지 못했던, 도시에 사는 고학력의 젊은 유권자 층에 일종의 균형점을 제공해줬다. 모멘텀은 노동당의 주요 축의 하나로 점차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모멘텀의 설립자인 존 랜스먼을 비롯한 모멘텀의 회원 3명이 노동당의 전국집행위원회(NEC)의 위원으로 당선됐다. 모멘텀의 회원들은 이제 명실공히 노동당 당원이다. 모멘텀의 노동당 합류가 위장 가맹(Entryism)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소송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 이제 모멘텀을 철없는 젊은이들의 소집단 정도로 치부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노동당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회 의원들과 그 외 당원들이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거트소야니스는 말한다. 많은 의원들이 코빈의 당대표 입후보에 반대했던 탓에, 코빈은 후보 등록에 필요한 최소한의 추천 서명 35개에 자신의 서명까지 총 36개의 추천 서명을 마감 시간 직전에 간신히 채워 겨우 서류를 제출했다. 노동당 대표 입후보 등록에는 동료의원 15%의 지지 서명이 필요하다. 모멘텀은 코빈이 당수가 되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의원들이 늘지 않도록, 당내 지지율을 10% 이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

또한 커트소야니스는 “무엇보다 긴축정책, 전쟁, 국립병원의 폐지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5) 많은 정당들이 외부를 향한 눈과 귀를 닫고 관료주의와 기회주의에 젖어 선거 기계가 돼버린 현실 속에서, 모멘텀은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기를 원한다.

사우스요크셔주에 있는 셰필드시. 이 도시는 1920년부터 노동당이 장악하고 있다. 로우어 돈 밸리(Lower Don Valley) 공장은 영국 철강업계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1866년 노동조합총협의회(TUC)의 전신이 탄생한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 단체에는 현재 550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입돼 있다. TUC를 구성하는 49개의 노조들 대부분은 노동당에 ‘가입’돼 있고, 노동당의 재정과 의사결정에도 참여한다. 영국 노동자 운동의 독특한 역사는 노동당과 노조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00년 노동당의 창당을 이끈 것도 노조였다. 

셰필드 TUC의 대표인 마틴 메이어는 2017년 여름까지 노동당의 정책 지도부인 전국집행위원회(NEC)의 위원이었다. “지난 2년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코빈은 끊임없이 공격을 당했어요.” 그는 말했다. 2016년 6월 노동당 의원 172명이 코빈의 불신임을 결의했으나 노조가 똘똘 뭉친 덕분에 코빈은 당 대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블레어(1994~2007)와 고든 브라운(2007~2010)이 당수였던 신노동당 시절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던 노조는, 오늘날 노동당의 핵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소방관노조(Fire Brigades Union) 등 몇몇 조직들이 신노동당의 정책에 반대하며 탈퇴했던 2004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노동당 대표가 마가렛 대처의 반노조 법안을 그대로 따르기도 했고, 연례 전당 대회에서 노조들의 발언권을 축소해버리기도 했다.(6) 

“코빈이 당수가 되기 전에는 많은 노조들이 노동당 탈퇴를 고민했습니다. 노조원들은 지도부에게 묻곤 했어요.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왜 노동당에 남아있나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실 공산당을 비롯한 다른 좌파 정당들은 지지 기반이 워낙 약해서 집권당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그래서 노동당에 남은 겁니다.”

서로 간에 완벽한 의견 일치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노조들은 코빈의 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회원 수가 140만 명에 이르는 영국 최대 노조 유나이트(Unite)의 런던 본부에서, 사무총장인 앤드류 머레이는 유나이트가 “제레미 코빈과 특별히 더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설명했다. “코빈이 총리직에 당선돼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노동계와 근로자들이 더 많은 권리를 누리게 되기를, 민간 분야 대비 공공 분야의 범위가 더 확대되기를, 유럽연합의 범 대서양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외교정책이 수립되기를, 중동지역에 평화가 정착되기를 우리는 기대합니다.”

오늘날 노동당의 행보를 보면, EU관련 문제는 보수주의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을 뿐, 노동당의 정계개편 의지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EU의 대서양주의에 순종거부

EU에 대해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던 영국 노조는 1975년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존속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가 실시됐을 때도 반대 입장이었다. 그러나 1979년 대처가 집권하면서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몇몇에게 EU는 ‘신자유주의의 확대를 막아줄 수 있는 소중한 방패막이’나 마찬가지였다.(7) 2016년 들어 보수당이 추진한 브렉시트 캠페인은 노조 내부에 다시금 논쟁의 불을 지폈다. 셰필드에서 메이어는 말했다. “보수당과 노동당 양 진영의 의원들과 노조 위원들이 공청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합의점을 찾지 못한 문제들이 많아 통일된 결론을 도출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현재 영국의 27개 주요 노조 중 13개는 결국, 영국의 EU 잔류를 지지하는 쪽으로 뒤늦은 결정을 내렸다. 11개는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3개는 ‘Left’와 ‘Exit’를 합친 ‘Lexit’라는 이름의 캠페인으로 EU 탈퇴를 주장하고 있다.(8)

노동당 재정의 절반을 부담하고 있고 전국집행위원회(NEC) 구성원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노조는 당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다. 그들은 다량의 우편과 SMS 전송을 통해 당 내부의 캠페인에도 관여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유나이트의 사무총장인 렌 맥클러스키가 리차드 레오나드의 지지를 선언했다. 레오나드는 코빈의 측근으로 스코틀랜드 노동당의 대표직을 노리고 있다. 사실 여기에는 노동당의 전략이 숨어있는데, 노동당은 레오나드를 대표로 내세워 스코틀랜드국민당(SNP)에게 빼앗겼던 지지율을 되찾겠다는 심산이다.

코빈지도부의 두 기둥, 모멘텀과 유나이트

노동당과 노조를 연결하는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회복하기 위해 코빈은 진보주의적 노선을 강화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드디어 민주적인 정당을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멘텀과 유나이트는 제레미 코빈의 새로운 지도부를 지지하고 있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습니다.” 머레이는 기뻐하며 설명했다. 그러나 그 기둥들이 지지하는 건물이 그리 튼튼하지는 않은 듯하다. 3월 초, 모멘텀의 설립자인 랜스먼은 노동당 사무총장직에 도전장을 내밀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랜스먼의 상대 후보는 제니 폼비로, 유나이트 출신인 동시에 코빈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랜스먼이 결국 사퇴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이 에피소드는 추후에 전략적 정치적 이견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노동당 사무총장직은 전통적으로 노조 대표가 맡는 것이 관례였음에도 불구하고 랜스먼은 후보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랜스먼은 사무총장이 노동당 내 조직들의 수장이 아니라 모든 당원의 의견에 따라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원들의 권리를 확대”하고 “서열화되고 계급화된 오래된 모델을 현대적이고 개방적이고 다원적이고 참여적인 민주주의 체제로 바꾸고” 싶었다고 밝혔다.
영국 북동부에 위치한 더럼. 200여 개의 광산과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있는 이 도시는 오랫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광산지대였다. 탈공업화를 앞당기기 위해 대처 총리가 초토화 정책을 펼치면서 광산 노동자들의 수는 급감했지만, 그중 일부는 여전히 광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곳에서 매년 6월에 개최되는 광부 축제는 1871년부터 영국 좌파의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가장 최근에 열린 축제의 경우 무려 20만 명이 모였습니다.” 광부협회 회장인 앤드류 커밍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노조의 상징과도 같은 이 행사는 영국 전역의 노동당 활동가들과 지지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다. “제레미 코빈은 단골손님입니다. 이곳에서는 모두들 코빈을 잘 알고 있어요. 코빈이 노동당 대표직에 도전한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우리와 비슷한 부류이지요.” 코빈의 승리 소식을 접한 광부들은, 오랫동안 신노동당 세력이 지배해왔던 이 지역에 드디어 반격의 시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블레어는 노동당의 탈을 쓴 토리 (보수당)”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의 탈을 쓴 토리(보수당)였습니다. 블레어가 총리이던 시절에 그는 우리 축제에 단 한 번도 와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블레어는 더럼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세지필드의 의원이었고, 블레어의 오른팔인 피터 만델슨 역시 같은 지역에 위치한 하틀풀의 의원이었다. 그러나 이 ‘근대주의자들’은 노동자 운동의 전통과 역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연달아 네 차례나 선거에서 패배한 뒤(1979년, 1983년, 1987년, 1992년) 그들은 노동당의 색깔을 바꿔 보수당의 유권자를 공략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계급 없는 사회, 적이 없는 정책을 내세우면서 ‘Essex Man’으로 대변되는 유권자층을 포섭하고자 했다.(9) 반면 코빈은 노동자계급의 역사를 기꺼이 존중했고, 극중주의(Radical centrism)를 지향한다는 명목으로 노동당을 신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어버린 이데올로기적 사회학적 재정비 작업과 결별했다. 
기세등등하던 신노동당 세력은 이제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코빈의 새로운 지도부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자 현재 블레어의 뒤를 이어 웨스트민스터 의원직을 맡고 있는 필 윌슨도 자신의 지역구에서 코빈 효과를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2016년 선거에서 우파 노선인 오웬 스미스에게 패배한 것이다. 

“노동당으로 되돌아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피터 브룩스는 설명했다. “2015년에는 400명이었지만 지금은 그 두 배가 됐습니다.” 더럼 주의 의원인 브룩스는 블레어가 한때 거주하기도 했던 트림던 구역의 대표다. 그는 1983년 선거에서 토니 블레어가 첫 번째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 ‘Famous Five' 중 한 명이다. 브룩스는 오늘날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흔쾌히 인정하면서, 시민들, 특히 젊은 시민들이 코빈을 “단순하고 변함없는 사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하고 또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블레어가 이와 같은 열정을 일으켰었다고 브룩스는 회상했다. “노동당 지부의 활동가 수는 최근 2년 동안 200명에서 2천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제는 소수파로 전락한 신노동당 파는 “기존 선거구를 유지하고 신노동 노선의 의원이 노동당 대표직에 입후보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네트워크가 그들에게는 없다. 노동당 내 대표적인 블레어파 그룹인 ‘프로그레스(Progress)’도 영국의 거부 중 한 명이자 오랜 기간 후원자였던 데이비드 세인즈베리가 2017년을 마지막으로 후원을 중단하자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게다가 프로그레스는 당과 사회에 뿌리를 둔 그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싱크탱크로서 운영돼 왔다. “우리는 조직을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브룩스는 인정했다. 한때 프로그레스는 “온건파”와 함께 노동당을 떠나 새로운 정당을 설립하기를 원했었지만, 이제는 “모멘텀에 맞서기 위한 비책”을 찾는 데 고심하고 있다.

유럽 최대정당의 수장이 된 코빈은 노동당의 얼굴을 바꿔 놓았다. 이 거대 정당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코빈은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나 프랑스의 라 프랑스 앵수미즈(La France insoumise)처럼 기존 정치인들과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으면서, 노동당에 활기를 불어넣고 또 새로운 판을 짜고 있다.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For the many, not the few)‘ 코빈은 물러서지 않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글·알랑 포플라르 & 폴 바니에 Allan Popelard & Paul Vannier
언론인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 총리였던 블레어는 노동당의 우경화를 이끌었다(신노동 노선(New Labour).
(2) 영국의 현행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에 따라, 투표일에 가장 많은 득표를 한 후보가 당선된다.
(3) 그로부터 5년 전, 노동당 내 좌파 노선을 대표하는 후보였던 다이앤 애보트의 득표율은 7.2%에 불과했다.
(4) 알렉스 넌스, ‘정통 좌파로 돌아온 코빈의 영 노동당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5년 10월호.
(5) 그 예로, 노조 지도자들, 활동가들, 기자들이 2013년에 결성한 긴축에 반대하는 만민 공동회(People’s Assembly Against Austerity)가 있다. 영국 내 80개 그룹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2015년 6월 20일에는 25만 명의 시위대를, 2016년 4월에는 5~10만 명의 시위대를 집결시켰다.
(6) 발언권의 비중이 90%에서 50%로 낮아졌다.
(7) Houcine Msaddek, ‘Des anti-Marketeers aux Brexiteers : la rhétorique eurosceptique des syndicats britanniques d’un référendum à l’autre(시장제도 지지자부터 브렉시트 지지자까지 : 영국 노조의 EU 회의론과 국민투표)’, <Revue française de civilisation britannique>, vol.XXII, n° 2, Paris, 2017.
(8) Stefano Fella, ‘Should I stay or should I go?’, <Labour Research>, London, 2016년 6월.
(9) 영국 남동부 에섹스 주에서 따온 용어인 ‘Essex Man’은 중위 투표자(Median voter)를 의미한다. 1990년대 토리당의 집중 공략 대상이었던 이들은 블레어가 노동당 당수가 되면서 노동당으로부터도 주목 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