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경험한 혁명의 나라, 프랑스

2018-04-30     앙토니 뷔를로 | 유럽사회정치학센터(CESSP) 박사과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 남서부 트리어 시에서 태어났다. 현재 트리어 시는 이 독일 사상가의 200주년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반면 프랑스는 그저 마르크스에 관한 서적 출간과 대학 행사가 전부다. 이 공산주의 이론가의 생애와 저술에서 프랑스라는 나라가 정치적 투쟁의 장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너무나도 조촐한 대우가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에게 프랑스는 정치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또한 안락한 피난처이자 쾌락의 공간이었고, 소명과 이론, 실천의 전장이었으며, 따뜻한 보금자리이자 기회가 될 때마다 그의 진가를 빛내준 곳이었다. 이 독일 사상가에게 프랑스라는 나라는 ‘혁명의 역사’, ‘유서 깊은 노동자 문화’ 등 많은 성찰거리를 선사했다. 또한, 다양한 정치체제가 무수히 등장한 국가라는 점에서도 프랑스는 그에게 의미가 깊었다. 오래 존속했던(제2제정, 제3공화정), 혹은 임시적으로만 존재했던(파리코뮌) 프랑스의 다양한 정치체제는 철학자 마르크스에게 놀라움을 안겼으며, 그가 자신의 이론을 재정립하고 풍요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데 널리 기여했다.

따뜻한 망명지, 혁명의 열기를 전염시키는 용광로

사실 마르크스는 프랑스 출신이 될 뻔했었다. 그가 태어난 도시 트리어(Trier)는 1797년 프랑스 공화국에 귀속된 데 이어 집정정부(프랑스 대혁명기에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의해 성립된 정부, 1799년부터 1804년까지 존속) 때 자르(Sarre)로 불리기 시작했다. 철학자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불과 4년 전인 1814년까지도 자르로 계속 불렸던 것이다. 프랑스가 점령했던 20년의 세월은 이 지역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가령 ‘보편권이라는 말’(1)과 근대적인 시민법 사상이 이 지역에 유입됐다. 어린 마르크스에게 프랑스는 계몽사상과 혁명의 나라, 위대한 대국, 상당한 영향력을 누리는 나라로 비쳤다.

마르크스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외에, 히브리어가 아닌 프랑스어(그는 평생 프랑스어로 읽고 말하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를 가르쳤다. 베를린 대학 시절에도 그의 스승 가운데 프랑스 대혁명의 신실한 추종자들이 많았다. 일찍부터 프랑스 혁명 사상을 교육받은 것을 계기로 마르크스는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혁명의 주역인 부르주아에 깊이 매료됐고, 드니 디드로나 볼테르 등 프랑스 사상가들의 저서를 탐독했다. 한 마디로 프랑스에 관한 조기 교육이 그가 프랑스혁명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던 것이다. 첫 파리 체류는 마르크스에게 놀라우리만치 강렬한 정치적 경험을 선사했다. 

1840년대 이미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자랑하던 파리는 유럽 정치의 구심점이자 “세계역사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거대한 마법의 주전자”로 자리했다. ‘영광의 3일’(2) 이후 대혁명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제의 혁명가들이 전해주는 생생한 증언을 밑거름 삼아 신흥 자코뱅주의 조류가 형성됐다. 몇몇 위대한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고 유토피아에의 강렬한 소망이 꿈틀대면서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가 등장했다. 파리는 7월 왕정기 동안 폴란드, 러시아, 게르만 세계 등지에서 찾아온 여러 자유주의 세력과 급진주의 세력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며, 유럽의 정치적 망명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덕분에 파리의 정치적 열기는 끊임없이 달아올랐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에게 파리는 공산주의 조직과 그들의 목소리가 돼줄 언론, 회합 장소를 제공했다. 그들은 주로 카페에서 모였는데, 그 때문에 카페 주변에서는 늘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다. 파리의 용광로 속에 몸을 담근 뒤로 마르크스는 급격히 진화했다. 특히 1844년 8월 말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만남은 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팔레 루아얄이나 볼테르가에 자리한 카페들을 오가며 계속 글을 쓰고, 술을 마시며, 토론을 즐기는 등 열정적이고도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자들의 저서는 물론, 소설가(외젠 수, 조르주 상드), 경제학자(피에르 르 프장 드 부아길베르, 중농주의 학자, 안토니오 데스튜트 드 트라시, 장바티스트 세이), 자유주의 역사가(프랑수아 기조, 오귀스탱 티에리)의 저서까지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프랑스 경제학자들이 저술한 책에 대해서는 훗날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자세히 다뤘으며, 자유주의 역사가들에 대해서는 ‘계급투쟁의 발견자’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3) 

이런 독서편력은 1845년 “프랑스 최고의 사회주의 작가들을 모아놓은 서가”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로 발전할 만큼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령 마르크스는 샤를르 푸리에, 생시몽주의자들, 에티엔-가브리엘 모렐리 등의 글을 번역해 소개했다. 첫 파리 체류 동안 ‘프랑스’의 서적들은 마르크스의 개인 서가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가령 1849년 쾰른에서 추방될 때 마르크스가 친구 로란트 다니엘스에게 맡긴 책을 보면, 총 400~500권 중 절반 이상이 프랑스어로 된 책이었고, 1/41은 프랑스에 관한 책이었다.(4)

브뤼셀로 망명, 프루동과의 우정과 논쟁

마르크스의 첫 파리 체류는 1844~1845년 겨울 막을 내렸다. 프로이센 정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프랑수아 기조(7월 왕정 총리) 정부가 결국 그를 추방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1845년 2월 파리를 떠나 브뤼셀로 향했다. 추방 대상에서 제외됐던 엥겔스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마르크스에게 합류했다. 엥겔스는 프랑스의 수도, “아름다운 잿빛”에 잠긴 이 매혹적인 파리를 떠나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브뤼셀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마르크스는 새로운 인물에 사로잡혔다. 그가 바로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었다. 『소유란 무엇인가?』의 열렬한 예찬자이자, 이 책이 지닌 격렬함과 현실성을 무척 사랑했던 마르크스는 1844년 10월 마자린 가에 있는 자택에서 이 브장송 출신의 사회학자와 처음 만난 후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프루동은 이 만남에 그다지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루동을 프랑스 사회주의자 중 “가장 중대하고 예리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며, 『신성가족』에서도 그를 널리 옹호했다. 

1846년 브뤼셀에 머무르던 두 친구는 파리에 공산주의 연락위원회를 설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프루동에게 그들의 조직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서한을 띄웠다. 프루동은 연락위원회가 보내오는 회람은 기꺼이 수신하면서도, 조직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겠다는 매우 친절하면서도 신중한 답변을 남겼다. ‘불확실한 형식’의 애호자이자, ‘거의 절대적인 반 경제 교조주의’의 신봉자인 프루동은 결코 그 무엇에도 결박당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도 한발 더 나아가 마르크스의 급진주의를 반박하고(“나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마냥 소유자들을 말살하느니, 차라리 소유지를 불태우는 쪽을 택하겠다.”), “이미 독일사회주의 진영 내에 존재하는 듯한 작은 분열들”을 비판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하는 듯한 말투로 쓰인 프루동의 회신은 마르크스와의 결별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됐다. 같은 해, 프루동이 『경제적 모순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프루동의 추종자들조차 한목소리로 그 모호성을 지적했다)을 출간하자 마르크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계기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이란 제목의 팸플릿을 직접 프랑스어로 작성해, 엄격하면서도 거친 필치로 프루동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다지 큰 반향을 낳지 못했다. 이 책에 나오는 프루동을 향한 비판(경험주의, 이론적 빈약함, 협잡, 과장, 프티 부르주아적인 교활함, 진정으로 기득권 세력과 결별하지 못하는 태도 등)은 훗날 마르크스의 정신세계 속에서 단순히 프루동 개인만이 아닌 전체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생각으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2월 혁명이 “모든 유럽 내 민주주의의 승리”를 예고하는 징조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직후, 독일에서 일어난 3월 혁명의 후속 운동에 직접 동참했다. 그들은 프랑스를 논한 논설이나 서한을 통해, 현존세력을 종류별로 구분 짓고, 혁명 휴지기의 특징에 주목하며, 혁명의 프로세스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했다. 1848년 6월 민중항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들은 한때 공고했던 부르주아 공화정이 “기조 정권 때보다 훨씬 더 경솔한 왕당파의 대응”으로 인해 와해돼 가는 과정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분석했다. 1949년 고국에서 추방된 마르크스는 6월에 다시 프랑스를 찾았고, 이어 8월에는 최종적으로 런던에 정착했다.

계급투쟁과 보나파르티즘에 관한 미스터리

1850년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발간되던 <뉴라인 신문>에 3편의 연재 기사를 싣고 제2공화정에 대한 견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훗날 이 글들은 『프랑스의 계급투쟁』이란 책으로 출간됐다. 이 중요한 저술에서 이론가 마르크스는 혁명과 혁명 이후의 사건들을 계급의 관점에서 분석하며, 분기점마다 게임을 주도한 사회집단(‘노동자’, ‘프티 부르주아 공화주의자’, ‘공화파 부르주아’, ‘왕당파 부르주아’ 등)이 누구인지를 밝혀냄으로써, 혁명의 역사적 흐름을 설명하고자 했다. 민중혁명과 임시정부 수립, 타협적 성격의 해법 도출에서부터 시작해, “사회적 제도들로 둘러싸인” 부르주아 공화정의 수립, 1848년 봄 항쟁 이후 5월 선거를 통한 질서 회복 및 ‘6월 봉기’, 노동 운동의 말살에 이어, 마지막으로 명백한 승리 이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선출과 질서당의 1849년 선거 승리로 인해 위상이 약화된 부르주아 공화정에 이르기까지, 그는 공화정이 본래의 의미에서 점차 멀어져 가는 정치적 과정을 단계별로 고찰했다.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는 마르크스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이에 대한 사상적 대응의 한 방편으로, 1852년 뉴욕에서 발간되던 <혁명>지에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얼핏 이 글은 <프랑스의 계급투쟁>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가령 기간만 더 길게 잡았을 뿐이지, “프랑스의 계급투쟁이 어떻게 그런 기괴하고 보잘것없는 인물이 영웅이 되는 환경을 조성하게 된 것인지” 설명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글을 단순히 전작의 재탕쯤으로 여기거나, 혹은 빅토르 위고가 <소인배 나폴레옹>에서 보여준 것 같은 왕위찬탈자에 대한 신랄한 인물 비평 정도로 여긴다면 오산이다. 마르크스가 1848~1850년의 시대를 배경으로 극좌 분자의 점진적 숙청이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는 여기에 두 가지 새로운 성찰을 보태고 있으니 말이다.

먼저 국가기구에 관한 문제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프랑스에 대해 “행정권력이 50만 명이 넘는 관료집단을 보유하고 있는 탓에, 끊임없이 사람들의 모든 이익과 삶이 절대적으로 행정권력에 종속”되는 특징을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시민사회를 옥죄고, 통제하고, 규제하고, 감시하며, 감독”하고 있다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이런 관료집단의 힘이 절실했던 부르주아는 결국에 이들의 융성을 도모하며 자신들이 손에 넣은 의회에 불이익이 오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행정권력에 가공할 힘을 부여”했다고 분석했다.

마르크스는 이 첫 번째 의문에 또 하나의 의문을 추가했다. 다름 아닌 보나파르티즘에 관한 것이었다. 즉, 보나파르티즘의 성격과 그것이 계급과 관련해 수행한 역할에 관한 미스터리였다. 한 마디로 어떻게 그런 도량 없는 인물이 떠올랐으며, 정치적 딜레마 속에서 어떻게 협잡꾼들에 둘러싸인, 협잡꾼들이 이끄는 통치체제가 “유일하게 가능한 정권의 형태”로 등장하게 됐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또한 어떻게 그토록 타협이 힘들 듯한 여러 사회집단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내고, 부르주아와 맞선 상황에서, 부르주아의 주요 이권을 보전할 수 있었는지 해명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의 열정을 재점화한 파리코뮌

제2제정 시기, 프랑스는 마르크스의 주요 관심사에서 점차 멀어졌다. 그러나 1871년 3월 28일 파리코뮌은 또 다시 마르크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정보를 전해 들었고, 국제노동자협회(인터내셔널) 운동가이자 자신이 그동안 조언자 역할을 해주던 레오 프랑켈과도 서한을 주고받았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 운동의 한계와 결점을 잘 알면서도, 부디 이 운동이 성공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4월에 보낸 편지에서 “파리 항쟁은 우리당의 가장 영예로운 업적”이라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파리코뮌을 비호하고, 그와 관련된 각종 헛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마르크스에게 파리 봉기에 관한 연설문 작성을 부탁했다. 이 글은 통렬한 풍자와 분석이 한데 어우러진 가히 마르크스 최고의 저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먼저 ‘정치 사기술의 대가’로 통하는 ‘흉악한 난쟁이’, 아돌프 티에르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이서 “부르주아의 분별력을 혹독하게 시험한 스핑크스”로 표현되는 이른바 파리코뮌에 대해 면밀히 고찰했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프랑스의 계급투쟁>, <프랑스 내전>과 함께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중 하나로, 마르크스가 1851년 뉴욕의 <혁명>지에 발표한 글)이 국가기구에 대해 제기했던 의문들에 답을 제시하며, 파리코뮌을 “제정의 정반대 명제”이자 보나파르트 정권의 기초가 됐던 “근대국가 권력”의 모든 제도적 장치들을 깨부수는 데 앞장선 “사회적 공화국이라는 긍정적 정치체제”라고 규정했다.  

파리코뮌과 <프랑스 내전> 덕에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반면 <철학의 빈곤>은 일부 독자들에게만 은밀히 배포됐고, 프랑스에 관한 그의 주요 저작들 중 상당수는 아직 번역이 되지도 않았다. 인터내셔널의 수장이자 파리코뮌의 은밀한 선동자라는 명성은 마르크스 일개인에 대한 관심을 함께 불러일으켰다. 신문지상에는 그에 관한 글이 실렸고, 유력매체에까지 그의 얼굴이 장식됐다. 그러나 동시에 경찰도 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쟈닌 베르데스가 1871~1883년 경찰청 자료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관련한 신문 스크랩 자료와 문건은 165건이나 됐다.(5) 그러나 허황된 정보들도 많았다. 가령 그가 인터내셔널을 창설하기 전에 프리메이스단을 배후 조종하려 했다거나, 혹은 티에르(Adolphe Thiers)나 에스파냐왕의 암살을 획책했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 가득했다.

제3공화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논란의 대상이었다. 제3공화정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자들이 기초를 닦고, 처음 몇 해 동안 극도로 반동 세력이 다수를 이루던 부르주아 정권이었다. 그런 한편, 다른 유럽의 군주제와 비교해보면, 시민의 자유를 보장한 정치체제이기도 했다. 가령 제3공화정은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언론과,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허용했다. 엥겔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제3공화정은 물론 부르주아의 지배를 완성한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적 공화국으로서 계급투쟁의 최후 걸림돌을 제거하며 미래 투쟁의 발판을 마련한 국가체제이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랑스 정치상황에 매우 정통했다. 마르크스의 세 딸은 모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가와 사랑에 빠졌다. 로라와 예니는 각각 폴 라파르그(1868), 샤를르 롱게(1872)와 결혼했고, 엘레아노르도 1880년까지 프로스페 올리비에 리사가레와 약혼자 사이였다.

처음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급진주의 세력, 그 중에서도 특히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희망을 걸었다. 훗날 클레망소는 사회주의로 입장이 돌아섰다(샤를르 롱게의 영향을 받은 이후이거나 혹은 『자본론』을 읽은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클레망소식 공화정을 거치지 않은 채, 강베타(Léon Gambetta) 식의 공화정에서 곧바로 사회주의로 넘어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두 인물이 급진주의 세력보다 훨씬 강력하게 지지한 것은, 당연히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마르세유 프랑스노동당(POF) 창당 대회가 끝난고 난 1880년, 마르크스는 쥘 게드를 만나 프랑스노동당 강령의 이론적 틀을 강요했다(쥘 게드는 사회주의자로, 게드주의라는 집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이다. 마르크스의 협력으로 노동당 기본강령을 작성하고 프랑스 노동당을 성립시켰다). 

마르크스는 프랑스노동자당의 강령에 비록 “게드가 그토록 좋아하는 몰지각한 내용들”이 담긴 점을 애석해했지만, 그럼에도 “모호한 미사여구의 안개 속에 잠겨 있던 프랑스 노동자들을 진실의 땅으로 이끌어내는 큰 전진”을 이뤘다며 높이 평가했다.   


글·앙토니 뷔를로Antony Burlaud
유럽사회정치학센터(CESSP) 박사과정. 그는 공저 『프랑스를 사랑한 마르크스(Marx, une passion française)』(La Découverte·2018)에서 본지에 실린 것과 비슷한 주제를 다뤘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Gareth Stedman Jones, 『Karl Marx. Greatness and Illusion』, 하버드대학출판부, 캠브리지(매사추세츠), 2016년.
(2) 3일(1830년 27~29일)에 걸친 프랑스 혁명 사건으로 새 정권인 ‘7월 왕정’이 수립됐다.
(3) Jean-Numa Ducange, ‘Marx, le marxisme et “le père de la lutte de classes”, Augustin Thierry(마르크스와 마르크시즘, 그리고 ‘계급투쟁의 아버지’, 오귀스탱 티에리)’, <Actuel Marx>, n°58, 파리, 2015년.
(4) 『Marx-Engels Gesamtausgabe, IV/32, Die Bibliotheken von Karl Marx und Friedrich Engels』, De Gruyter, 베를린, 1999년.
(5) Jeannes Verdès, ‘Marx vu par la police française, 1871~1883(1871~1883년, 프랑스 경찰이 본 마르크스)’, <Cahier de l'ISEA>, n°176, 그르노블, 19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