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찾아 배회한 청년 마르크스

2018-04-30     루이 알튀세르 | 전 파리 8대학 교수(1918~199

1960년대, 파리 에콜 노르말(고등사범학교)의 교수였던 공산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접근법은 마르크스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마르크스 초기의 저술과 후기의 저술 간에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나는 여기서 ‘시작(Commencement)’에 대해 다시 다뤄보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날에 어떤 곳에서 태어나 ‘주어진’ 세계 안에서 생각을 하고 글을 쓴다. 사상가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곧 당대에 현존하는 사상들의 세계, 그 사상들이 태어난 이데올로기적 세계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경우 이 세계는 1830~40년대 독일 이데올로기의 세계로, 독일 이상주의 세계의 문제와, 추상적 용어로 ‘헤겔 분석(Decomposition of Hegel)’이라고 일컬어지던 것에 의해 지배되던 세계다. 그 세계는 ‘평범한 세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반적인 진실로는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독일 이데올로기의 세계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 어떤 세계와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데올로기에 가장 심하게 짓눌려있던 세계’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제 역사적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꽃피던 당시 유럽에서도 이데올로기에 ‘가장 현혹돼 있고 가장 미쳐있는 세계’였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태어난 세계이자 마르크스가 생각을 하기 시작한 세계였다. ‘마르크스의 시작의 우연성’은 바로 그가 태어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층위(Layer)’, 그가 벗어나려고 했던 그 압도적인 층위에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그 세계의 영향으로부터 ‘비켜나’ 있었다는 이유로, 그가 엄청난 노력과 결정적인 만남들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자유가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고, 또한 당시의 모든 문제들은 어쨌거나 ‘생각’을 필요로 했다고, 우리는 너무나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젊은 마르크스의 의식도 결국에는 당대의 비현실적인 속박과 환상에 기반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채, 우리는 그의 의식을 너무도 당연하게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1843년 마르크스가 드디어 ‘프랑스행’을 결정했을 때, 몇 년 전 식민지국의 학생들이 프랑스의 ‘신화를 찾아’ 떠났던 것처럼 마르크스 역시 신화를 찾아 떠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본질에 대한 ‘발견’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그들이 꿈꿔왔던 신화에 부합하지 않았고’, 그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현실, 순수 정치의 허상, 계급투쟁, 몸소 겪은 자본주의,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를 발견했다. 또한 엄격한 분업 행태는 마르크스가 프랑스의 현실을, 엥겔스가 영국의 현실을 발견하도록 해줬다. 여기서 우리는 (‘지양(Aufhebung)’이 아닌) ‘회귀’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데,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둘러싸고 있던 환상의 장막이 그들 고유의 ‘시작’에 의해 파괴되는 ‘실제적 경험’, ‘환상에서 현실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에서 현실로의 회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철학서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극단적으로 새로운 현실’을 발견함과 동시에 시작됐다. 마르크스가 프랑스에서 ‘발견’한 것은 ‘조직된 노동계급’이었고, 엥겔스가 영국에서 ‘발견’한 것은 ‘발달된 자본주의, 철학과 철학자들이 배제되고 그들만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계급투쟁’이었다. 

젊은 마르크스의 지적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음 두 가지의 발견이었다. 첫 번째는 현실을 왜곡되게 반영한 이데올로기에 미치지 못하는 ‘실제 현실’의 발견이고, 두 번째는 ‘현실을 무시한’ 당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현실’의 발견이다. 마르크스는 이 두 가지 현실을 정확한 이론으로 만들고, 요소들을 바꾸고, 새로운 요소의 통합과 현실을 구상했다. 물론 이런 발견들은 마르크스의 개인적 경험과 그가 속해있던 독일 역사와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 ‘독일에서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약한 울림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건들이 국외에서만 일어난다는 믿음은 독일 내의 절망과 불안감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실패하고 제자리걸음하고 또는 반복되는 역사 또한 엄연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앞서 언급한 모든 이론적 및 실제적 경험들은 사실 독일 현실에 대한 실험적이고 단계적인 발견의 일환이었다. 

1840년 가짜 ‘자유주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면서 청년 헤겔파의 희망이 담겨 있던 모든 이론적 시스템이 무너지고, <라인 신문(Rhenish Gazette)>이 시도했던 ‘이성’이 주도하는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전까지는 자신을 지지해왔던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박해받고 추방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마르크스는 그 유명한 ‘독일의 불행’이라 할만한, ‘도덕적 분노’에 의해 비난받는 ‘속물근성’, 그리고 도덕성 자체에 숨겨진 모습들을 알게 됐다. 

절대로 오해라고 할 수 없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고착화된 계급관계의 타파를 위해 노동착취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도 ‘이성’을 가장 중시했던 시위대보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에서 불안감 수준이 더 높게 나타났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이 흔들렸고, 그동안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불투명한 현실을 드디어 발견하게 됐다. 이에 마르크스는 독일의 신화를 해외의 현실에 투영하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독일의 신화가 외국의 실정에 부합하지 않고 심지어 독일 자신의 상황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외국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가 마르크스 사상의 극적인 기원이 무엇이었는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지양’의 관점에서 기원을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발견’의 관점에서 기원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진실의 내재성’이라는 허상 속에서 결론 없는 공허한 예측에 불과한, 순수하지만 은밀한 개념인 ‘지양’에 내포된 헤겔의 논리를 거부하고, ‘이데올로기적 내재성’의 허상에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는 ‘실제 경험과 현실적 출현의 논리’를 생각해야 한다. 
한 마디로, 이데올로기 안에서 실제 역사가 출현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현실과 마주할 때마다 마르크스에게 확신과 새로운 발견의 힘을 선사했던, 현실에 대한 의식화 과정에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관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자, 경험에 대한 마르크스의 ‘개인적인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다.(…)

청년 마르크스의 경험은 마르크스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출신 배경에서 자유로워지고자 각고의 노력을 들이고, 조국인 독일의 역사가 만들어낸 허상들에 맞서 영웅적인 투쟁을 벌이고, 이 허상들이 감추고 있던 현실을 예리하게 주시한 덕분에 가능했다. 만약 ‘마르크스의 여정’이 모범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배경이나 삶의 사소한 부분들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한 신화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악착같은 의지와, 이 신화들을 뒤엎고 제거해버린 실제 역사에 대한 경험 덕분이다.  


글·루이 알튀세르
철학자이자 구조주의자로, 마르크스와 스피노자를 폭넓게 아우르면서 유물론을 재조명할 것을 제안했다. 대표 저서로 <Pour Marx(마르크스를 위하여)>(Maspero, 1965)가 있다. 1960년 12월에 작성된 루이 알튀세르의 기사 ‘Sur le jeune Marx(청년 마르크스에 대하여)’는 <La Pensée> 1961년 3-4월호와 저서 <Pour Marx(마르크스를 위하여)>(Maspero, 1965년)에 실렸고, 2005년 La Découverte coll.의 La Découverte/Poche로 출간되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