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은 있으나, 『자본주의 선언』은 없다!
2018-04-30 슬라보예 지젝 | 철학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초판은 1848년 런던에서 출간됐다. 그 이후에는 이 짧은 글에 대한 재판(再版)도, 번역서도, 서문도 출간된 것이 없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오늘날의 탈근대화 사회에서도 이 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공산당 선언』 초판 출간 150주년이었던 1998년, 다니엘 벤사이드는 이 ‘선언’의 영원한 시의성에 관한 글을 <르몽드>에 기고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상황주의자 라울 바네겜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끝없는 논쟁의 불씨가 된 장 조레스의 1901년 논고에 맞서, 『공산당 선언』에 대한 발문(跋文)을 Mille et Une Nuits 출판사를 통해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교양 있고 ‘자유주의적인’ 현대의 독자라면 단순히 『공산당 선언』이 틀렸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현재의 사회적 상황을 보여주는 통계들을 고려할 때 경험적인 관점에서나, 현대사회가 수호하고 또 널리 퍼뜨리고 있는 혁명적인 관점에서나 그렇다. 그러나 이제껏 후대의 역사적 현실에 의해 이토록 명백하게 반박된 정치적 선언이 있었던가? 긍정적으로 보면, 『공산당 선언』은 19세기의 눈에 띄는 경향들을 극단적으로 일반화시켜 보여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세계화되고, ‘탈’근대화되고, ‘탈’산업화된 사회다. 단일화된 세계시장을 강압적으로 추진하면서 지역별·문화적 전통과 국가 형태를 위협하는 ‘세계화’에 대한 담론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된 부르주아 계급의 사회적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자신들의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끊임없이 판로를 개척해 나간 부르주아 계급은 이제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나 진출하고, 어디에든 건물을 짓고, 어디에서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1)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의 상황 아닌가? 에릭슨 휴대폰은 더 이상 스웨덴 브랜드가 아니고, 도요타 자동차는 60%가 미국에서 생산되고, 할리우드 문화는 지구상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에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생산의 물질적 과정을 ‘정신화’한다는 변증법적 ‘반명제(Antithesis)’를 『공산당 선언』에 결합시키면 우리의 현실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사회생활의 극단적인 세속화를 야기한다. 고귀함, 성스러움, 명예 등의 ‘진정성’이 지닌 후광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
“성스러운 떨림, 경건한 열정, 기사도적인 열의, 무지한 우울, (부르주아 계급은) 이 모든 것들을 이기적인 계산이라는 차디찬 물속에 빠뜨려버렸다. 그들은 인간의 품격을 교환 가치로 와해시켰고, 인간 고유의 자유를 수없이 많은 프랜차이즈와 부(富)로, 그것도 뻔뻔하게도 자유무역의 형태를 빌어 대체했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환상으로 포장된 개발 대신 그들은 공개적이고, 파렴치하고, 직접적인 개발을 표방했다.”(2)
그러나 『공산당 선언』 이후 마르크스가 좀 더 나이가 든 후에 발표한 <정치 경제학 비판>이 주는 근본적인 교훈은, 모든 경이로운 환상을 혹독한 경제적 현실로 축소해 이해하는 것 또한 또 다른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자본 순환의 무분별한 증가 및 자가 증식을 묘사하면서, 인간과 환경을 위협하면서도 계속해서 그 여정을 이어가는 ‘자본’이라는 자가수정 된 괴물이 이데올로기적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너무 단편적으로 치부해버렸다.
거대한 기생충
그러나 이런 추상 뒤에는 생산력과 자원에 해당하는 실제 인간과 자연 물질이 자본 순환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본은 거대한 기생충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추상’에는 사회 현실에 대한 (금융 투자자들의) 잘못된 인식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추상은 사회적 및 물질적 과정의 구조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실제적’이기도 하다. 모든 인구 계층의 운명, 때로는 한 국가 전체의 운명이 자본의 투기적이고 유아론적인 움직임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자본의 움직임이 사회적 현실에 미치게 될 영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익률이라는 목표만을 추구할 때 그렇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가진 본질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으로, 이는 직접적이고 전자본주의(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폭력보다 더 불가사의하다. 자본주의의 폭력은 특정 개인이나 개인의 ‘나쁜’ 의도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익명으로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일어난다. 이에 에티엔 발리바르는 현대 사회 속의 비정상적인 폭력을 서로 반대되면서도 보완적인 두 가지 폭력으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초객관적인(구조적인)’ 폭력으로, 세계자본주의의 사회적 조건(소외된 개인, 노숙자, 실업자들의 ‘자동적인’ 생성) 때문에 발생한다. 두 번째는 윤리적 그리고/또는 종교적 ‘원리주의자’(한마디로,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한 ‘초주관적인’ 폭력으로, 최근에 발생 빈도가 높아졌다. 이 두 번째 폭력은 첫 번째 폭력에 대한 단순한 반감이 원인이기 때문에 더욱더 ‘비정상적’이고 ‘근거가 없다’.
‘익명’의 두 번째 폭력이 존재하는 덕분에 반(反)공산주의를 향한 보다 폭넓은 음해가 가능해졌다. 반공산주의에 관한 고찰이 즐거운 이유는, 공산주의로 인해 범인 찾기 놀이가 쉬워졌을 뿐만 아니라 수백만 명의 죽음, 테러, 강제노동수용소의 원인을 공산당, 스탈린, 레닌, 마르크스에게서 찾게 됐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익명의 메커니즘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결코 덜 파괴적이지도 않고, 인적 및 환경적 비용을 덜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원주민 문화의 파괴가 그 예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공산주의는 현실화에 실패한 사상이라고 인식되는 반면 자본주의는 ‘자발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자본주의 선언』은 없다!
글·슬라보예 지젝
슬로베니아 류블랴냐에서 1949년 출생. 정신분석학과 영화에 열정을 가진 이색적인 철학자인 지젝은 전(全)세계의 비판적 젊은이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플라마리옹, 2012년), <폭력>(오 디아블로 보베르, 2012년), <라캉과 침묵의 파트너들>(누, 2012년), <우리의 구원자들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자>(스렉코 호르바트Srecko Horvat와 공저, 포스트, 2013년)등이 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Karl Marx & Friedrich Engels, 『공산당 선언』(1848, Oeuvre 1, Paris Gallimard), 1963, pp. 164-165
(2) Karl Marx & Friedrich Engels, ibid., pp. 163-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