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를 중시한 생태사회주의자

2018-04-30     존 벨라미 포스터 | <먼슬리 리뷰> 편집장

카를 마르크스에 대해, 그가 환경문제를 등한시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의 사회 분석이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에서 무용지물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이런 비판의 근거는, 마르크스를 내세운 체제들 중 생산지상주의(Productivism)가 뒷받침하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에콜로지카(정치적 생태주의)’를 주창한 앙드레 고즈나 미국의 지성 존 벨라미 포스터 등의 연구자들은 사회주의와 생태학이, 계획이 동일한 ‘양쪽 날개’라고 말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생태학적 문제에 점점 무게가 실리면서, 플라톤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상가들의 생태학적 프리즘을 통해 이 문제를 ‘다시 읽기’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풍부하고도 논쟁적인 문헌들을 생산해낸 인물은 분명 카를 마르크스일 것이다. 가령 앤서니 기든스는 마르크스가 주로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생태주의 성향을 분명히 보여줬음에도, 자연에 대해 ‘프로메테우스적 태도(인간의 자연 정복을 긍정하는 친기술주의적, 반생태학적 태도를 말함-역주)’를 택했다고 주장했다.(1)

생태주의와 사회주의는 ‘양쪽 날개’

마찬가지로 마이클 레드클리프도 마르크스에 대해 “환경이 만사를 형통하게 해주지만, 모든 가치는 노동력에서 나온다고 봤다”(2)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알렉 노브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생산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연합한 생산자들(associated producers)이 살게 될 풍요로운 미래사회는 희소한 자원의 사용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사회주의가 “생태학적 인식”(3)을 가져봐야 소용없다는 뜻이다. 

과연 이런 식의 비판은 정당한 것일까?
1830~1870년대 내내 영양분 소실로 인한 토양의 생산성 감소는 유럽은 물론 북아메리카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한 생태학적 관심사로 자리 잡았다. 토양의 생산성 감소에서 촉발된 불안은 도시의 오염 증가, 전 대륙에서 자행되는 산림 파괴, 인구과잉에 대한 멜서스주의자(산아제한론자)들의 두려움이 불러일으키는 불안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1820~1830년대 영국에서, 그리고 얼마 후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퍼져나간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척박해진 토양을 둘러싸고 널리 퍼진 이런 불안감은 비료 수요의 폭증으로 이어졌다. 

페루산 구아노(Guano: 페루 해안에 서식하는 바닷새의 배설물이 퇴적돼 만들어진 천연비료-역주)를 실은 배가 1835년 처음으로 리버풀에 닻을 내린 뒤 1841년에 1,700톤, 1847년에 22만 톤의 구아노가 수입됐다. 이 시기 내내 농민들은 워털루나 아우스터리츠 같은 나폴레옹 전쟁의 격전지였던 땅을 갈아엎어, 그곳에 널려 있던 유골들을 필사적으로 찾아 나섰다. 미국의 상황에 관심이 있었던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곡물의 생산지와 시장의 거리가 수백에서 수천 km까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부식토의 구성요소들이 원산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대륙들로 보내졌고, 강제로 비옥해진 토양은 감당하기 힘든 생산물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로 인해 원산지나 수입지(地) 모두 결과적으로는 비옥해질 수 없었다. 

유물론과 자연, 과거로부터의 사유

마르크스는 생태학에 무지하지 않았다. 무지하기는커녕, 1850년대 말과 1860년대 초에 리비히가 행한 연구에 영향을 받아, 땅의 양분을 약탈하고 토양의 재생(복원)을 보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본가는 토양을 ‘착취’하고 있다고 이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농업을 논의한 두 가지 주요 분석을 끝맺으면서, 대규모 산업과 대규모 농업이 결합해 어떻게 토양과 노동자들을 빈곤하게 만드는지 설명했다. 여기서 그의 분석의 핵심은 『자본론』제3권의 ‘자본주의적 지대의 기원’에 대한 부분의 끝자락에 잘 요약돼 있다. 

“대규모 토지재산은 농업 인구를 대폭 축소시켜, 이 농업 인구는 대도시로 몰려들어 끊임없이 증가하는 산업인구 앞에서 끝도 없이 추락한다. 이런 면에서 대규모 토지재산은 생명의 자연법칙이 만들어낸 사회적 신진대사의 복잡한 균형에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을 야기하는 조건들을 조성한다. 그 결과 토양 활력을 낭비하게 되며, 해당 국가의 국경을 훨씬 넘어서는 상업거래에도 이런 낭비가 전이된다. (…) 대규모 산업과 산업적으로 착취당한 대규모 농업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대규모 산업이 노동력 즉 인간의 자연적 힘을 유린하고 고갈시킨다면, 대규모 농업은 토양의 자연적 힘을 직접 짓밟는다는 점에서 (파괴대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두 부문이 구분되기는 한다. 결국 두 부문은 서로 발전하면서 상호 협력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산업체계는 농업에 파고들어 노동자들을 약화시키고 산업과 상업 거래의 측면에서 농업에 땅을 착취할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모든 이론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만능열쇠는 바로 ‘사회생태학적 신진대사(독일어로 Stoffwechsel)’라는 개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을 포괄적으로 정의하면서(노동과정이 역사 속에서 특수하게 나타난 것과는 반대로) ‘신진대사’라는 개념을 활용해 노동을 통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묘사했다.

“무엇보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어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 즉 노동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신진대사를 규제하고 통제한다. 노동은 자연의 힘 그 자체로서 자연물 앞에 존재한다. 인간은 자연물을 자신의 생명에 유용한 형태로 알맞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몸 즉 팔, 다리, 손, 머리와 같은 자연의 힘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움직임을 통해 외적 자연에서 활동하고 외적 자연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의 본성도 변화시킨다. (…) 노동과정은 (…) 인간의 생명에 영구히 작용하는 천부적 조건이다.”(4)

리비히나 마르크스는 토양의 양분이 복원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견줄 만한 것은 도시 오염 및 근대의 불합리한 하수처리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예를 들어 런던에서 템스강을 오염시키는 450만 명의 시민들이 배출한 어마어마한 양의 배설물 처리법으로는 배설물을 비료로 만드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리학적 교환의 결과인 배설물”은 산업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생겨난 쓰레기와 함께 완전한 신진대사 사이클로 되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5)
도시와 농촌의 대립, 그로 인한 신진대사의 붕괴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즉 전 세계 식민지 주민들이 식민국의 산업화를 지원하기 위해 조국의 자원과 토양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마르크스는 “한 세기 반 전부터 영국은 아일랜드 땅을 일구는 농부들과 토양의 성분을 대체할 수단을 두고 어떤 합의도 없이, 아일랜드 토양을 간접적으로 반출했다”(6)고 기록했다. 

자본주의 농업과 토양의 양분(그리고 특히 도시의 유기적 배설물)을 복원해야 한다고 분석한 마르크스는 생태학적 지속성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개념에 이르렀다. 그는 이 개념을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극히 제한적으로만 실천할 수 있는 지속성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즉 당연히 그런 합리적이고 일관된 행동은 불가능하지만, 연합한 생산자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에서는 반대로 이 지속성이 필수적인 개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작물을 재배할 때 시장가격의 변동에 의존하면 재배 품종을 끊임없이 바꿔야 하는 일이 생기며, 자본주의 생산정신은 가장 직접적인 이윤을 추구한다. 이런 사실은 인류 세대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는 조건 전체를 감안해 작물을 생산해야 하는 농업과는 모순된다.” 

마르크스는 ‘미래 세대’를 위해 토양을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현대적인 개념의 핵심을 잘 포착했다.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해서는 브룬틀란 보고서(Brundtland report)(7)가 가장 널리 알려진 정의를 제시한다. 즉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8)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토양을 영구적인 공동의 재산으로서 의식적이고 합리적으로 다뤄야 하며, 이것은 인류세대를 지속해나가고 재생하기 위한 양도할 수 없는 존재조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그는 『자본론』에 “사회의 상류 경제조직의 관점에서 볼 때 전 세계의 일부분인 특정 개인들의 재산권은 미래에 한 개인이 가질 재산권만큼이나 비논리적으로 보인다”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우리는 흔히 마르크스가 가치 창출에서 자연이 하는 역할에 무지했다는 식으로 비난하곤 한다. 즉 “마르크스가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나오고, 자연은 자본가에게 주어진 ‘선물’로 간주하는 이론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오해의 소산이다. 토양은 자연이 자본가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은 마르크스의 창작품이 아니다. 이것은 토머스 맬서스와 데이비드 리카르도가 처음 제시했으며, 그들의 경제 관련 저서들에서 중심 이론이 되는 개념이다. 마르크스는 이 개념들이 사회생태학적으로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경제학초고 1861~1863』에서 그는, 맬서스가 자본이 형성한 특수한 사회관계 전체와 관련된 방식을 고려하지 않은 채, 환경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관점에 의존한다고 여러 번 비판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가치 법칙에 따라 자연은 어떤 가치도 인정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물론 마르크스는 이에 동의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된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밀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런 노동가치설이 교환가치를 중심으로 구축된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관계들의 핵심인 부의 협소하고 제한된 개념을 반영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부는 사용가치에 있는데, 가치란 자본주의적 형태를 넘어 일반적 생산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용가치 생산에 기여한 자연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부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에서 노동을 부의 유일한 원천으로 보고 자연의 역할을 중시하지 않은 사회주의자들이, 그가 ‘초자연적인 창조력’이라고 부른 것을 ‘노동’이라고 단정 지어버렸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글·존 벨라미 포스터
<먼슬리 리뷰> 편집장. 이 기사는 『Marx écologiste(생태학자 마르크스)』(Éditions Amsterdam, 2011, 불역판, 원서는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Monthly Review Press 2000)에서 발췌한 것임.

번역·조민영
서울대 불문학과 석사 졸업. 

(1) Anthony Giddens, 『A Contemporary Critique of Historical Materialis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y, 1981.
(2) Michael Redclift, 『Development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Red or Green Alternatives?』, Methuen, New York, 1984.
(3) Alec Nove, ‘Socialism’, in John Eatwell, Murray Milgate and Peter Newman(under the direction of), <The New Palgrave Dictionary of Economics>, vol. 4, Stockton, New York, 1987.
(4) Karl Marx, 『Le Capital(자본론)』, 제1권, Éditions sociales, Paris, 1978.
(5) Karl Marx, 『Le Capital』, 제3권, Éditions sociales, Paris, 1978.
(6) Karl Marx, 『Le Capital』, 제1권, Éditions sociales, Paris, 1978.
(7) ‘우리 공동의 미래’, 1987년 UN의 ‘환경과 개발에 관한 세계 위원회’가 노르웨이의 총리 그로 할렘 브룬틀란의 지휘 아래(편집 기안) 작성한 보고서.
(8)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Brundtland Commission), 『Our Common Future』,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