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게이트’는 미국 좌파를 어떻게 현혹시켰나?
2018-04-30 아론 마테 | 기자, 특파원, 제작자
2016년 대선에서의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당은 미국 선거제도의 불공정성, ‘거짓 뉴스’, 트럼프 진영과 러시아의 공모 의혹 등 온갖 이유들을 가져다 붙였다. 그러나 대선 패배의 원인을 러시아에서만 찾으려 들면서, 진짜 이유들, 예를 들어 ‘혁신’에만 초점을 둔 민주당의 경제 계획 등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러시아 출신의 전직 스파이 부녀에 대한 암살시도 사건이 영국에서 발생한 데 이어 프랑스, 미국, 영국이 시리아 공습에 나서면서, 러시아와 서방국가들 간의 관계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일부는 이런 긴장국면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다. 지난 3월 26일,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 타임스>는 영사관을 폐쇄하고 60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기로 한 미국 정부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반겼다.
“이번 결정은 그동안 (블라디미르) 푸틴이 미국과 기타 동맹국에 가한 위협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가 드디어 반격에 나설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해당 기사에서 유일하게 부정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푸틴의 비겁한 행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트럼프 대통령이 한 발 더 앞서나갈 필요가 있다.”(1)
그로부터 몇 주 뒤, 다마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마에서 시리아 정부군이 또다시 화학무기 공격을 감행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러시아, 이란”이 “짐승 같은 바샤르 알아사드를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뉴욕 타임스>는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푸틴을 지목해 공격한 것은 대통령 당선 이래 최초”라면서 놀라움을 표했다.(18년 4월 8일)
정보기관들이 2016년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을 폭로한 이후, <뉴욕 타임스>의 ‘희망’은 이제 진보주의자들도 함께 바라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초반이었던 2009년에만 해도 민주당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리셋’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화당이 여전히 냉전 시대의 담론에 연연하고 있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러시아와 푸틴과 관련해 강경한 정책을 펼칠 것”을 촉구하고, 전 부통령 조 바이든이 “러시아의 도발로부터 미국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등, 민주당도 신보수주의자들 및 공화당 강경파와 같은 노선을 취하게 됐다.(2)
즉 존 볼턴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지명한 것도, 꼭 공화당을 의식해서만은 아니었다. 미국 국가이익센터의 해리 J. 카지아니스는, “볼턴의 존재는 러시아에 있어서 최대 악몽”이라면서 “볼턴은 언제나 반(反)러시아 강경파였다”고 설명했다.(3) 볼턴은 보좌관이 된 지 몇 주 후인 지난 2월,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은 “미국 헌법에 대한 공격”이라고 못 박았다. 이에 “사이버 공간과 기타 곳곳에서” 러시아에 대한 강경 대응에 나설 것이라 밝혔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러시아에 대한 대응이 반드시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적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2016년 우파 방송인 폭스 뉴스에서 언급했던 바와 비슷하다. “러시아에 고통을 줘야 합니다.”
볼턴은 핵위기가 고조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모든 형태의 협상과 교류를 거부해왔다.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 차관 시절(2001~2005)에는 부시 행정부가 30년 전 소비에트 연방과 체결한 ‘탄도요격 미사일 제한 조약(Treaty on the Limitation of Anti-Ballistic Missile Systems)’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방어 시 공격의 범위를 제한하는 이 조약은 핵무기 개발을 제한하기 위한 취지에서 체결됐으며, 이후 등장한 군비규제 조약들의 초석이 됐다.
지난 3월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의 새로운 핵무기를 공개하면서, “미국이 ABM 조약에서 탈퇴한 덕분에 개발할 수 있었다”고 특별히 강조했으며, “미국이 파기한 군비 규제 시스템으로 되돌아가자”고 제안했다. 볼턴은 이에 대해 “선전용 발언”이며,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볼턴은 3월 2일 자신이 고문으로 있는 폭스뉴스에 등장해, 푸틴의 진짜 목적은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또 핵 강대국으로 다시 만들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볼턴은 의중을 전혀 감추지 않고 있다. 우선 군비규제를 보장하는 각종 조약에서 미국을 탈퇴시키고자 한다. 2017년 보수주의정치행동회의(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에서 볼턴은 “러시아와 양자 관계에서의 다음 단계는 전략무기감축협상(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의 폐기”라고 밝히면서,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라고 표현했다. 전략무기감축협상은 2010년 미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조약으로, 각국이 보유한 핵탄두 개수의 감축이 주목적이다.
그러나 이 발언의 전략적 의미를 분석하기에 앞서, 진보 언론들은 5년 전 볼턴이 러시아 총기 소유권 옹호 단체의 비디오 동영상에 도대체 왜 등장했는지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4) 당시 볼턴의 발언이 미국의 외교적 이해관계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 아니다. ‘러시아게이트’를 주장하는 이들이라면, 러시아와 트럼프 대통령 간의 커넥션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요소들은 다 공개하고, 이에 방해가 될 만한 정보들은 다 무시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세계 안보에의 위협, 두고 볼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골수 반러시아 강경파인 볼턴의 국가 안보 수장직 지명은 그들이 무시하고 싶어 하는 여러 사건들 중에서도 최신 사건이다.(5) 기록적인 수의 외교관들을 추방한 것 외에도, 최근 미국은 푸틴의 사위를 포함한 여러 인사들과 13개 기업들에 제재를 가하고 해군 군함 2척을 흑해에 배치했다. CNN은 “흑해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 평했다. 미국의 한 고위 공무원은 “미국이 흑해에 군함을 파견하면서 위협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라며 동의했다.(6)
사실 단순히 지도만 보면 러시아 영토를 둘러싸고 있는 흑해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을 미국이 왜 경계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리고 외교관 추방과 금융제재가 과연 적절한 전략이었는지도 의문스러워진다. 그러나 러시아와 트럼프의 관계를 둘러싼 의혹을 떠올려보면, 그리고 트럼프의 적들조차도 이런 조치들에 동조하는 만큼, 이를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러시아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호전적인 태도를 간과하는 것은, 세계 안보에 대한 위협이 커지는 것을 방관하는 셈이다. 안토니오 구테헤스 UN 사무총장은 오늘날의 상황과 “냉전 시대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미국과 러시아 양측이 “대화와 통제의 메커니즘”을 재정립해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막고 상황이 통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줄 것을 촉구했다. 핵과학자회보(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에 의하면, “미국과 러시아 간의 관계는 최근 협력보다는 갈등이 대부분이고, 양측 간의 조율은 거의 사라진 상태이며, 현재 진행 중인 군비 규제 관련 협상도 전무함에 따라, 핵 위협은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7)
러시아의 전직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 율리아가 영국 솔즈베리에서 독극물에 노출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국 사이에 긴장이 완화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영국의 외무부 장관 보리스 존슨은, 영국 정부 산하의 군사연구시설 ‘포튼 다운(Porton Down)’의 연구원들이 암살에 사용된 신경작용제의 출처가 러시아임을 “분명하게” 밝혀냈으며, 여기에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포튼 다운 연구소장은 이에 반박했다. 그는 해당 독극물을 제조하는 데는 “국가적 주체의 개입이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연구원들이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존슨 외무부 장관이 EU와 NATO의 20개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총 150명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러시아 외교관들을 추방해줄 것을 요청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이 사건이 터진 직후 영국의 노동당 당수 제레미 코빈은 “야만적이고 무책임한” 사건이라고 혹평을 내리면서, “러시아 당국에 증거 자료를 요청”하고 영국 정부는 화학무기금지기구의 지원을 받아 독극물 샘플을 러시아 측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증거를 요청한다? 국제기구에 호소한다? 이와 같은 순진한 발언 때문에 코빈 당수는 영국 언론들, 정치적 반대세력, 심지어 같은 노동당 당원들로부터 “러시아의 호구”라 불리는 굴욕을 당했다.
솔즈베리 독극물 사건과 ‘러시아게이트’의 공통점은, 공식적인 증거가 없고 장기적으로 세계 안보를 위협할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러시아를 배후로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건의 규모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미국의 경우, 고위 정치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영국의 코빈 당수처럼 증거가 필요하다고 대놓고 주장하거나 혹은 신중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발언하지 않았다. 반러시아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민주당 측과 진보주의자들은 트럼프에게 대러 정책을 강경화할 것을 권고했을 뿐이다.
여기에 볼턴의 행보는 이런 경향을 부추기는 데 일조하고 있다. 2월에 발표된 한 기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푸틴의 야심이 전 세계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러시아가 미국에 호의를 베풀 의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러시아도 가능한 한 빨리 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볼턴은 또한 러시아 측에 “형사 고발”과 “금융 제재”를 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불만을 충분히 전달될 것”이라는 믿음은 순진한 발상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반대로 우리는 푸틴에게, 우크라이나군과 협력을 확대하고 있는 NATO의 포병과 탱크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려줘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푸틴의 관심을 끄는데 효과적일 것이다. 러시아 측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있는 중동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치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값진 기회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이런 기회는 사라지기 전에 얼른 붙잡아야 한다.”(8)
현재 볼턴이 붙잡고자 하는 이 ‘기회’를 만들어준 이들은, 다름 아닌 민주당 엘리트들과 자유주의 좌파의 저명한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된 지금, 이들은 과연 앞으로도 계속 같은 입장을 고수할 수 있을까?
글·아론 마테 Aaron Maté
<The Real News>의 기자, 특파원, 제작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Tough action on Russia, at last, but more is needed’, <The New York Times>, 2018년 3월 26일.
(2) Serge Halimi, ‘Donald Trump débordé par le parti antirusse 반(反)러시아 세력에 포획된 트럼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7년 9월호.
(3) Cindy Saine, ‘Trump’s pick for National Security Adviser advocates tough response to Russia‘, <The Voice of America>, 2018년 3월 28일, www.voanews.com
(4) Cf. Tim Mak, ‘John Bolton’s curious appearance in a Russian gun rights video‘, <National Public Radio>, 2018년 3월 22일, www.npr.org
(5) Aaron Maté, ‘Ingérence russe, de l’obsession à la paranoïa 러시아의 개입에 대한 서구 엘리트들의 망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7년 12월호.
(6) Ryan Browne, ‘US show of force sends Russia a message in Black Sea’, <CNN Politics>, 2018년 2월 20일, www.edition.cnn.com
(7) ‘The get-tough-on-Russia consensus is escalating the crisis in Syria’, <The Nation>, New York, 2018년 4월 11일.
(8) <The Hill>, 2018년 2월 19일, http://thehi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