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다른 아이디어를 가진다는 것

2018-04-30     프레데리크 로르동 | 경제학자

때로는 가장 강력한 폭발물이 가장 쉽게 검색대를 통과하기도 한다. 유럽연합(EU) 비판을 위해 쓰인 모든 저서들 중 즉각적인 파장을 일으키는 것들이 없지 않지만, 가장 큰 파괴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장 잔잔한 것일 수 있다. 또한 현실과 가장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의 매우 혁신적인 출판부에서 출간된 베르나르 브룅토의 『신유럽의 ‘협력자들’』은 역사학자의 세심한 작업으로, EU의 정당성에 충분히 타격을 입힐만하다. 모순어법을 사용한다면, 섬세하게 타격을 입힐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통합’이 ‘협력자들’(독일 나치즘과의 협력을 도모한 사람들을 의미-역주)이라는 단어와 결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 결합을 추구하는 몇몇 방식들이 만들어 낼 무분별함에 문제가 없는 지 말이다(예를 들어 유럽통합에 나치 부역자들의 과거까지도 포함시킬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런 결합이 우리에게는 비논리적으로 여겨지지만, 역사적으로는 증명이 됐기 때문이다. 유럽의 성스러운 역사에 의해 가려진 이야기가 있다. 아리스티드 브리앙(1862~1932, 프랑스의 정치가로 전후 국제연맹을 거점으로 국제협조주의와 집단안전보장체제의 노선을 추진했으며, 유럽연방안에 대한 각서를 발표했다-역주)의 유럽연방안을 따라 그에 동조한 1930년대의 많은 유럽통합주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정치체제인 통일된 유럽의 재건을 위한 선결조건으로서 국민국가의 틀을 없애는 역사적 기회를, 다름 아닌 나치의 침략 속에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상당수 지식인들은 유럽 대륙의 혼란과 독일의 점령을 사심을 갖고 열렬히 환영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일부는 ‘저항운동’에 합류하는 한편 대독협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신유럽’이 바로 그곳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브룅토의 저서를 조목조목 힐난하고 싶지는 않다. 작품이 지나친 해설적 일반화에 빠지는 것을 그 스스로 자제한 만큼, 역사학자로서 그의 작업, 놀라울 정도로 깊이 있게 파고든 거의 500쪽에 달하는 텍스트를 모욕하고 싶지 않다. 우선, 유럽통합을 지지하는 모든 지식인들은 독일점령에 물러서지 않았다. 설혹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나치에 호의적이었다고 해도, 그들이 잠재적인 파시스트였다거나 활동파였던 것은 아니다. 브룅토의 작업은 이 같은 일련의 특징과 반향들이 낮은 소리로 작용하도록 완벽하게 배치돼, 책 속에서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더라도 독자 스스로 그 반향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유럽통합주의의 구체적인 역사는 1920년대 말에 시작됐다. 그 전에 유럽 유토피아들이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리하르트 쿠벤호베칼레르기의 『범유럽 사상』(1923)과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유럽연방안에 대한 각서』(1929)가 각각 출간된 때가 유럽통합주의의 정치사조가 구체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상당수 지식인들은 1차 대전이후 국제연맹이 유럽통합이라는 아이디어를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각 국가들이 맺을 상호적 관계에도 결함이 생기리라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대륙의 평화문제가 초국가적인 방식을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게 일부 지식인들의 인식이었다. 
 
나치가 일으킨 전쟁을, 유럽평화의 기회로 삼다?
 
헤겔의 ‘이성의 간계’(헤겔 철학에서, 반이성적인 정열이 세계사를 진행하는 힘이 되지만, 실상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이성의 간계에 이용되고 만다는 것을 이르는 말-역주)까지 조롱해 버리는 최고의 역설은, 바로 나치가 일으킨 전쟁이 이 사람들에게 미래 유럽평화의 위대한 기회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193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위기 진단가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격동을 관찰했지만, 이들 모두에게 이 격동은 변화의 순간으로 나타났다. 그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파괴의 순간을 겪더라도 국가주의, 즉 국가와의 관계를 끝내야만 평화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영미세계의 정체성과는 상이한 유럽 대륙의 정체성을 마침내 유럽통합의 가능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페탱 원수(프랑스의 군인‧정치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국민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나치에 협력해 사형선고를 받음-역주)의 ‘민족혁명’ 지지자들은 그 시기를, 자본주의와 볼셰비즘의 불행의 길에서 벗어난 계급들 간의 위대한 화해의 시기로 봤다.
 
그러나 ‘경제현실주의자’들은 경제문제를 들어 유럽통합의 당위성에 무게를 둔다. 이들은 1930~1940년대의 독일점령을 충분히 고려할 만한 기회로 보게 된다. 실제로, 브룅토의 저서에서 주목할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바로 경제현실주의의 관점에서 초기 유럽 신자유주의의 모든 내용, 심지어 부작용까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경제현실주의자들 중 X-Crise 집단(1931년 만들어진 경제토론과 고찰을 위한 모임-역주)의 이공계 그랑제콜 출신들, 비시정권시절 엘리트양성학교였던 에콜 위리아주(Uriage) 출신들, 프랑수아 페루 또는 프랑시스 드래지 같은 경제학자들을 거론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현실’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닌 경제라는 각별한 ‘자각’을 한 활동가들이었다. 이 경제는 거대한 인류 집단들의 행위를 정하는 유일한 원칙을 만들어내는데, 이 원칙은 ‘현실’의 불가피성을 강제하는 만큼 배타적이기도 한 원칙이고, 이 인류 집단의 행위는 전문가들에게 중립적인 이성을 부여할 만큼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가오는 ‘독일의 유럽’은 갑절 이상의 이익이 있다고 믿었다. 첫째, 합리성이 자리 잡기 이전의 정치가 고착화한 오랜 국민국가들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불합리한 국경을 무너뜨리면서 통합된 유럽대륙의 공간이 도래하는데, 그 공간에서는 분업이 보다 확장된 차원에서 재편될 수 있으며, (개발을 위한) 자본할당 최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오늘날의 독자가 1986년 유럽단일시장과 그 필연적 결과로 예측된, 1940년대에 이미 검토됐던 단일통화의 논거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또한 기술적인 정치무관심을 초래하는, 이른바 포스트 주권 국가의 행정에 대한 부정적인 예측도 이미 들어봤을 것이다. 
 
독자가 놓칠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이런 사상들이 나치가 일으킨 전쟁을 달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이 전쟁을 좋은 환경으로 고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 시대 유럽통합주의의 결점이 드러난다. 바로 단 하나의 아이디어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유럽을 만들다”가 유일한 아이디어이며, 이를 위한 수단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제공할 두 번째 아이디어가 전무하므로 모든 수단들은 적절한 것이 된다. 역사는 나치 독일을 신유럽 출현에 필수적인 타불라 라사(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라는 뜻. 일체의 경험 이전의 인간의 정신상태를 말함-역주)의 역사적 집행자로 만드는 것일까? 그대로 이뤄질지어다. 
브룅토의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놀라움에 멍해지는 부분은 바로 거대한 지성의 일탈을 나타낸 표, 즉 극단적인 역사상황 안에서 대대적으로 파괴된 분별력, 모든 외부고찰에 무지하도록 만든, 눈먼 추구가 야기한 파괴를 나타낸 표다. 이런 일탈은 좌파를 포함한 모든 가장자리에서 생긴다. 노조원들, 사회주의자들, 평화주의자들 그리고 열광적인 국제주의자들, 이들에게 국가들의 주권을 해체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목표다. 또한, 여기에서 급진 좌파 이론가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60년 후, 국민국가를 끝내려는 동일한 목표를 위한 흥미로운 동맹을 세계화된 자본주의 안에서 찾았으며, 그리하여 2005년 유럽헌법조약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논리적인’ 설득을 펼쳤던 것이다.
 
브룅토는 그가 세심하게 수집한 사건들에서 명백한 정치적 교훈을 얻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물론 매우 보편적인 교훈은 하나 있다. 바로 하나의 아이디어를 더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역사가 우리를 시험하러 올 때는 그렇다. 이 교훈은 완벽한 현실 과제다. 이는 현재의 유럽을 지지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반대하는 이들과도 연관된다. ‘탈유로’라는 단일관념편집증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탈유로가 필요하다고 해도, 협상의 방식이나 대상은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아무하고나 협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일통화 지지자들은 다행히 파시즘 전쟁을 마주하지 않았지만,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피하는 행운을 얻지는 못했다. 어느 누구도 이 두 가지를 같은 계획안에 두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필요하다. 유럽통합주의의 유럽에서는, 시대가 희생가능하다고 결정하는 범주 안에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유럽에서 불평등, 불안정, 고통스러운 노동, 자살 등이 그러하다. 자기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유럽통합주의는, 자신의 시대에 있는 어제의 유럽통합주의보다도 더 이런 연쇄적인 작은 손실들에 대해,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럽통합주의에는 그 어떤 두 번째 아이디어도, 특히 사회정의에 대한 두 번째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전임자처럼, 이 결함은 유럽통합주의를 역사 속에 잘 자리 잡게끔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프랑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 최근 저서로 『Les Affects de la politique(정치의 정서)』, (Seuil, Paris, 2016)가 있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