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인도농업을 구한다

2018-04-30     잭 페러데이 | 언론인

인도의 한 농촌에서 가뭄과 빚 때문에 수천 명의 농민들이 자살했다. 이제 여성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연대와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농법을 부활시키고 있다.


주황색 사리(Sari, 인도 여성들이 입는 민속 의상) 차림의 샤일라 쉬크란트(38)는 작은 황토집 그늘에서 이웃들과 빙 둘러앉아 곡물과 말린 채소를 그릇에 담는다. 쌀, 보리, 옥수수, 완두콩, 땅콩, 참깨, 병아리콩, 렌틸콩, 호로파 씨앗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녀가 미소 짓는 것을 보면, 아마도 노동의 결과물인 듯하다. 이는 작은 혁명의 결실이기도 하다. 

이곳은 800여 가구가 사는 ‘마슬라’ 마을이다. 마하라슈트라주(州)의 주도인 뭄바이로부터 500km가량 떨어진 마라트와다 중심에 있다. 극도로 더운 열기가 기승을 부리는 이곳은 심각한 농업위기의 발원지였다. 최근 2년간 잇따른 가뭄과 만성적 채무로 궁지에 몰린 나머지 자살을 택한 농민들이 이 지역에서만 6,000명을 넘었고, 이 현상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인도 정부가 2017년 5월 대법원에 넘긴 자료에 의하면, 2013년 이후 매년 1만 2,000명의 농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문가들은 비능률적인 농업정책을 원인으로 든다. 10년 전부터 식량 작물을 포기하고 상업 작물을 재배하는 사례가 꾸준히 증가했다. 수익성이 보장되지만 막대한 양의 물을 소비하는 사탕수수도 상업 작물의 일종이다. 인도 정부에 의하면, 사탕수수 경작지가 2004년 30만 헥타르(3,000㎢)에서 2014년 100만 헥타르(10,000㎢)로 증가해 현재 이 지역 관개 수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5헥타르(50,000㎡)의 영토에서 고작 이것밖에 생산하지 못했어요. 물이 부족해지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어요. 이제 식료품을 살 돈도 없어요.” 

쉬크란트는 그릇에 담긴 곡물들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낱알들을 떼어내며 토로했다. 주위에 앉아있던 다른 여성들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2014년 이 지역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자살 파동 이후, 그녀들은 지속가능한 농법을 선도한 쉬크란트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남편에게 물 소비가 적은 작물 20종을 심을만한 밭을 1헥타르(10,000㎡)만 내달라고 부탁했어요. 사탕수수 경작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천연비료를 사용해 전통농법으로 지은, 우리 가족을 위한 식량을 비축해두고 싶었어요. 남편은 초반에 회의적이더니 결국 허락해줬어요. 그리고 1년 뒤 결과물을 보더니, 토지의 절반을 내어줬죠.”

수확량은 그녀의 예상치를 빠르게 넘어섰다. 가족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는 작물들을 팔았더니, 가족의 연 수입이 두 배로 늘어났다. 현재는 마하라슈트라주(州) 농민의 평균수입 1,600유로의 4배에 달하는 6,000유로(약 790만 원)를 벌어들인다. 그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활동을 다각화했다. 거름을 제공하는 가축을 들이고, 뭄바이에 종자를 판매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명의로 된 농업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전부 제 이름으로 돼 있어요.” 쉬크란트가 이렇게 말하자, 이웃 여성들이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들 역시 쉬크란트의 조언 덕분에 가정 내에서 새로운 지위를 얻었다. 한 여성이 경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직접 토지 일부를 관리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남편과 시집 식구들은 우리를 비웃었죠.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남편보다 잘 벌어요. 이제 우리를 보는 눈들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마하라슈트라 주(州)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다른 지역들도 여성이 농업 인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운영은 남성이 하며, 경작지의 약 80%를 소유한다. 쉬크란트와 그녀의 친구들은 이런 가부장적 관행을 뒤엎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NGO단체인 ‘스와얌 쉬크샨 프라요그(SSP)’에 의하면, 마라트와다에 거주하는 230만 가정 중 4만 명의 여성들이 최소 1헥타르의 토지를 직접 관리하고 있으며, 남자들이 포기해버린 식량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SSP를 포함한 NGO 단체들과 협력관계에 있는 인도 정부의 농업기술관리국(ATMA)에서 교육을 받았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여성들의 힘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수많은 여성농민단체들의 설립과 함께 스스로 확산된 것이다. 이들은 지식과 자금을 공유한다. 우타르프라데시 주(州)의 채소경작자부터 타밀나두 주(州)의 벼 농사자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인도 전역의 지역발전 주역으로 우뚝 섰고, 대학·NGO 단체·정부지차제의 지원도 증가했다. 마슬라에서 40㎞ 떨어진 치부리 마을의 델타사키 농민단체는 2년 만에 공동계좌에 1,300유로(약 171만 원) 이상의 자금을 모았다. 이들 25명의 회원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다. 과거에 남편들이 금리 12%를 요구하는 위험한 대부업자들을 만나 빚을 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프로젝트 대금이 필요하면 농민단체에 도움을 청하면 된다. 그러면 단체가 지역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준다. 대부업자들은 조용히 사라진 지 오래다. 

“남자들은 상대적으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요. 그들은 각자 자기 밭에서 일하지만, 우리는 팀으로 일해요.” 농민단체 주간 모임 때 우리를 집으로 초대한 바니타 발브힘 단체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옆에 있던 라크미 브리라자르가 “우리가 돈 관리를 더 잘해요!”라며 입을 열자, 옆에 있던 모든 동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10루피(약 167원)라도 흥정해요. 그리고 목이 마르면 집에서 차를 마시지, 절대 밖에서 술 마시는 데 돈을 탕진하지 않아요!”

치부리 마을은 텅 빈 광활한 밭 사이에 있는 진흙길을 통해 세상과 이어진다. 비쩍 마른 소 떼들이 밟고 다녀서 울퉁불퉁해진 진흙길이다. 양철지붕들 한가운데 원뿔꼴의 힌두교 사원이 우뚝 솟아있고, 카테큐나무가 노인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문이 없는 작은 건물에서 알파벳을 외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민의 30%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사는 이 외진 마을에서 여성 농민단체들이 지역경제를 살리고, 식량 자립과 마이크로크레디트(영세민의 자활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 사업-역주)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이 둘은 경제위기에 반드시 필요한 지렛대 같은 요소다. 

2년 전, 발브힘 단체장은 유기농 과일·채소 재배를 시작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당시 온 가족의 연 수입이 780유로(약 103만 원)였는데, 그녀 혼자서 1,000유로(약 132만 원)를 벌어들였다. 덕분에 지붕을 교체하고 냉장고를 사고, 무엇보다 네 딸의 교육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IT 학과를 전공 중인 장녀 수프리야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엄마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엄마는 세상 밖으로 나가 직접 밭을 경작하기로 결심했고, 현재 자신의 농업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어요. 여기서 이런 일을 해낸 여성은 저희 엄마가 최초랍니다!”

남자들이 대도시로 대거 이주하면서 여성들이 인도 농업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여성농민의 권익을 장려하는 ‘마힐라 키산 아드히카르 만츠(Makaam)’의 창립멤버 소마 파르타사라티는 격분하며 말했다. “남편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도 사실상 여자들은 이미 자립한 상태예요. 하지만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은행대출, 담보, 정부 지원 등 필요한 자금에 접근하지 못하는 실정이에요.” 

2005년 개정 상속법에 따라 인도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를 획득했지만, 실제로 적용된 사례는 드물다. 60대의 페미니스트인 소마 파르타사라티는 뉴델리의 북적이는 한 카페에 앉아 말했다. “사회적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부모 재산을 남자 형제에게 양보하라고 권장하는 분위기라서 딸들이 자신의 상속분을 주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우리는 남편이 부인을 통제하기 위해 자금을 통제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머물러 있어요. 여기서 벗어나려면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요.” 

MAKKAM(Mahila Kisan Adhikar Manch의 준말, 여성 농민의 권리를 위한 포럼)은 인도 ‘녹색혁명’의 아버지 몬콤부 삭바시반 스와미나탄 박사가 2012년 5월에 발의한 법안을 채택시키기 위해 국제 NGO 옥스팜과 함께 투쟁하고 있다. 이 법안에 의하면, 여성이 시 당국으로부터 농민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춰서 여성도 토지를 임대 및 경작하고, 남편 명의 없이도 부동산등기를 무효화할 수 있게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17년 11월 20일, 전국 각지의 여성 농민들이 의회 앞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농사를 짓던 남편이 자살한 여성들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여성농민 해방의 최고수혜자는 남성?

그동안 여성 농민 해방운동도 각 주의 특성에 따라 빠르게 진전됐다. 특히 농업위기로 남편들이 대도시로 이주하거나 자살로 내몰린 지역의 경우에는 이러한 변화가 불가피해 보였다. “재앙 하나하나가 발전의 기회라고 생각해요. 이곳 여자들은 장기간 계속된 가뭄을 기회 삼아 가족들을 설득해서 리더의 역할을 차지했어요.” 마하라슈트라 주(州) 오스마나바드의 사무실에서 만난 나심 샤이크 SSP프로젝트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SSP는 정부 지자체와 여성농민단체 사이의 다리가 돼, 여성 농민들의 교육과 재원확보에 힘쓰고 있다. 

이 지역 행정관인 아눕 쉔굴와르(Anup Shengulwar)도 자신의 열정을 공유했다. “여자들은 노동의 결과로 말해요.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협상력이 생기죠. 일단 은행 계좌를 열면,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 않아도 토지가 자연스럽게 뒤따라올 거예요. 텔랑가나 주(州), 안드라 프라데시 주(州) 등 인도 남부에서 여성이 소유한 부동산은 다른 지역보다 아직 적지만, 상황은 계속 바뀌고 있어요. 장기간 가뭄에 시달린 끝에 남성들은 농업에 흥미를 잃은 반면, 여성들은 여전히 토지경작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최대한 그녀들을 교육하려 노력 중이고, 이미 이곳 경제 수준이 높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SSP가 조사한 여성 농민들의 1/3이 가족 소유의 토지를 일부 갖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사회적 존재감을 가지게 됐다. 힌글라즈와디 마을의 레크하 쉰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에는 아무도 나를 존중하지 않았어요. 닷새를 구걸해야만 10루피(약 167원)를 얻을 수 있었죠. 집 밖으로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했어요. 지금은 내가 가족에게 매달 1만 루피(약 17만 원)를 벌어다 줘요. 그리고 40여 명의 여성들에게 회사를 차릴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어요.” 레크하 쉰드가 이끄는 여성농민단체에 시장이 마을 중앙의 회의실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공동체에서 그녀들의 중요성이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 새로운 균형의 최초 수혜자는 다름 아닌 남성들일 것이다. 현재 여성이 주도권을 잡은 가정에서 자살 사건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랜 밭일로 주름이 자글자글한 50대 남성, 비슈누 쿰브하르도 “가뭄이 계속될 때는 정말 막막했다”고 털어놓았다. 매달 700유로(약 92만 원)를 버는 그의 아내 카말은 국가로부터 소규모 창업주 상을 받고 오스마나바드 지역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일용직 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녀는 힌글라즈와디 초입에 위치한 6헥타르(60,000㎡)의 땅을 실험적 농장으로 탈바꿈했고, 현재 스쿠터로 통근하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카말에게는 저수지, 전기부화기, 가축 사료용 해초 재배 등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가장 최근에는 마디야 프라데시 주(州)에서 영양가가 높다고 소문난 ‘카다크나트’라는 인기 품종의 닭 500마리를 사들였다. 쿰브하르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내가 아내의 고문 역할을 해요. 제 아내는 내가 지지해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글·잭 페러데이 Jack Fereday
저널리스트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