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조세프 카빌라에 대항하는 콩고의 마지막 보루

2018-04-30     프랑수아 미셰 | 언론인

2017년 12월 31일 이후 가톨릭 신도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2018년 말까지 자유 선거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있다. 경찰은 시위 참가자들을 무작위로 체포하고 성지를 훼손하고 있으며 정확히 집계하기는 어렵지만 사망자는 수십 명에 달한 상황이다.


조세프 카빌라의 임기는 2016년 12월 31일에 공식적으로 종료됐지만, 그는 여전히 콩고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다. 정부와 야당이 2016년에 생 실베스트르(Saint-Sylvestre) 합의안을 통과시키며 향후 대선 일정을 확정했지만, 조세프 카빌라는 선거를 이미 두 차례 연기했다. 먼저 그는 2016년 10월 4일 선거를 연기했다. 이유는 ‘성년이 된’ 젊은 유권자들이 선거인 명부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2017년 7월 7일, 조세프 카빌라의 측근 코르네유 낭가(Corneille Nangaa) 독립선거위원회장은 선거를 또 한 차례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내세운 이유는 카사이(Kasai)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야당은 카사이에서 폭력 사태가 잇따르고 있는 것은 경찰이 2016년 8월 12일에 지역의 지도자인 장-프랭스 음판디를 살해한 탓이라며 정부의 개입을 비판하고 나섰다. 선거를 요구하는 집회는 평신도연합위원회(CLC)가 주축이 돼 수도인 킨샤사 외에 키상가니 등 지방에서도 잇따르고 있다. 시위자들은 지난 1월 21일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2016년 12월 31일 통과된 생실베스트르 합의안을 완전무결하게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고 쓰여 있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을 하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됐으며, 진압 과정에서 생테스프리 본당 소속 신자 여러 명의 부상사고가 있었다. 같은 날, 또 한 건의 시위가 루붐바시에서 예정돼 있었지만, 대규모 무장병력의 출현으로 취소됐다. 당국은 ‘테러’ 의혹을 주장하며 이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장병력을 배치했다.

콩고인들은 일부 시민들과 시민단체를 주축으로 2016년과 2017년 내내 SNS에서 카빌라 대통령 퇴진 운동을 벌이다가,(1) 이제 가톨릭계가 주도하는 시위를 최후의 방편으로 그의 연임을 막으려 하고 있다. 이에 가톨릭계는 여당과 야당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생실베스트르 합의안을 도출했으나, 카빌라의 합의안 이행 거부로 배신감을 맛봐야 했다. 가톨릭은 야당의 핵심인물인 에티엔느 치제크디가 2017년 2월 사망한 이후 분열된 당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에티엔느 치제크디가 주도한 ‘죽은 도시’(야권연합이 정부 및 여권에 대한 경고로 총파업 투쟁을 함-역주)라는 투쟁은 참혹한 실패로 끝난 바 있다.

가톨릭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데는 그만한 배경이 있다. 인구의 절반이 가톨릭 신자인 이 나라에서 가톨릭은 교구, 자선단체, 공동체, 평신도 운동을 통해 국민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 개신교에서 비롯된 콩고 그리스도 교회(ECC)의 전 신도회장이었던 피에르 마리니 보도가 정치권력과 결탁해 여당의 상원 의원직을 수락했다가 교회신자들의 반발을 산 후 가톨릭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현재 가톨릭이 주도하는 시위에는 개신교, 킴방구주의자 교회,(2) ‘부흥교회’의 수많은 신자들이 동참하고 있다. 

콩고 가톨릭주교위원회(Cenco)와 그의 분과인 정의와 평화위원회는 권력층이 자행한 천연자원 약탈, 광산채굴 불법계약, 환경오염을 규탄하고 있다. 카탕가 주에 있는 킬와 카장가 구역의 풀장스 무트바 주교는 삼목나무 밀거래에 대통령 일가가 연루돼 있다고 비판했다. 풀장스 무트바 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구를 해치는 인간의 행위는 죄”라고 규정한 <찬미 받으소서> 회칙(3)이 투쟁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가톨릭주교위원회는 2011년 대선 당시 개표에 참관해, 2001년부터 집권한 카빌라가 대규모 부정 개표를 통해 재임한 사실을 밝혀냈다. 가톨릭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유례없이 높은 독립성을 발휘한 사건이었다.

가톨릭교회는 1548년 콩고에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파견해 가톨릭을 전파했다. 그 후 벨기에 식민지 시절, 가톨릭은 벨기에 정부 및 면허기업(벨기에 국왕은 민간기업에 광산채굴권을 줘 콩고에서 세금을 징수함)과 함께 삼위일체를 이뤘다. 콩고 독립 당시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가톨릭은, 카탕가 주가 콩고에서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에 카탕가 주의 탈환을 요청한 ‘대역 죄인’, 파트리스 루뭄바(콩고 민주 공화국의 초대 총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1985년에야 마리-클레멍틴 아뉘마리트 넝가프타(Marie-Clémentine Anuarite Nengapeta) (1964년에 콩고 심바 폭동에 참여한 반군에 의해 ‘순교’함)를 성녀로 시복하기로 한 것은, 당시 콩고의 가톨릭 교계가 정치와 거리를 뒀음을 보여준다.

이후 가톨릭은 아프리카의 ‘진정성’과 차츰 대립한다. 진정성은 조제프-데지레 모부투 대통령(1965~1997)이 아프리카의 정체성 회복을 주창하며 대두된 이데올로기다. 1970년대 초반 콩고 정부는 진정성 정책의 일환으로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 세례명을 주민 등록 이름에서 삭제했다. 이후 국가와 가톨릭은 빠르게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콩고민주공화국의 전신인 자이르 시절, 교회가 바티칸에 항상 순종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콩고 가톨릭은 미사에 춤을 접목한 자이르 의식을 만들어 1986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바캉비’라는 평신자 목회자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며 공교회 내에서 아프리카 정체성을 추구했다.

모부투 독재 시절 국가와 종교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해방 신학에 깨어있는 지역 사회의 자극을 받아, 교회는 자유와 사회 정의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대변했다. 1978년 발간된 『자유의 길』의 저자 마르탱 바콜 카낭가 대주교는 모부투 정권을 비롯해 식민지 시대 교회의 역할과 콩고의 경제모델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4) 아모스 단체를 창설한 조제 음푼두 신부는 이 시대적 조류에 합류하는 또 다른 중요인물로,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현실에 비폭력적으로 대응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가톨릭의 이런 변화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에콰도르 지역 출신으로 가톨릭 신자였던 모부투는 (개신교였던 카빌라와 달리) 한때 그 지역 주교의 지지를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5)

가톨릭 주교들은 1990년 3월 9일 성명을 발표하며 정권에 결정타를 날렸다. 당시에 이 일은 대역죄와 다름없는 일이었다. 주교들은 이 성명서에서 “당은 국가가 아니다”라고 천명하며 “소수당이나 한 단체가 권력을 가로채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에게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모든 법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모부투는 양당제를 발표했다. 로렁 몽센궈 킨샤사 대주교가 주재한 국민주권회의(1990~1992)에서 지도층은 민주화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정권이 이 회의를 강제적으로 폐회시키려 하자, 가톨릭 신자들은 1992년 2월 16일 시위에 나섰다. 행진은 유혈사태로 번졌고, 당국은 시위에 떠밀려 회의를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5년 후, 시위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사망자가 최소 17명(당국 집계), 최대 49명(국경없는의사회 집계)에 이르자 정권을 타도하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모부투 정권의 힘이 흔들리자 가톨릭은 다시 한번 ‘해로운 정권’을 규탄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가톨릭은 국가를 대신해 교육과 보건을 책임지고 은행이 파산하자 예금업무까지 도맡은 유일한 단체인 만큼, 그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카빌라 퇴출이 가톨릭 지상과제

이 현세적 임무의 일환으로, 가톨릭주교위원회는 카빌라 대통령이 2016년 12월 19일 퇴임을 거부하며 촉발된 위기를 생실베스트르 합의안을 통해 봉합한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들로 이뤄진 시위대를 진압하는 것은 카빌라의 끝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지를 훼손하고 어린이 성가대원들을 체포한 일이 알려지면서 커진 공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로마 교황청을 주축으로 한 가톨릭계는 ‘국경을 뛰어넘은’ 연대를 표명하게 된다. 콩고 등지의 가톨릭 신자들은, 콩고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카빌라가 무고한 이를 괴롭히는 헤롯이나 파라오와 같다고 말한다. 이는 과장된 비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이 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은 유효해지고 이는 전술로 이어진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번지고 있다. 카빌라를 사임시키는 것은 시위대에게 시민의 의무이자, 종교적 요구이기도 하다. 78세인 몽성궈(Monsengwo) 대주교는 지난 1월 2일 담화에서 “진실이 반복되는 거짓에 승리를 거두고, 구태가 물러나고, 콩고민주공화국에 평화와 정의가 머무를 때”라고 일침을 가하며, “모든 자유의 토대가 되는 종교적 자유를 무시하는 자들”과 “스스로 용맹하다고 자부하며 야만을 일삼는 경찰들”을 겨냥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루이스 마리아노 몬테마요르 교황대사는 1월 5일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시민들은 지난 12월 31일의 행진에 높은 지지를 보냈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향후 수개월 내에 다른 시민운동이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어서 그는 주교들에게 앞으로 예정된 시민운동을 가급적 지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여세를 몰아서 “평신도연합위원회 측에서도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말고 저항해달라”고 그는 촉구했다.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에 위치한 부카부 대주교는 지난 1월 8일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기원하는 기도를 시작했다. 이후 전국의 사제들은 매주 목요일 저녁 9시 타종 후 생실베스트르 합의안 이행을 위한 청원 기도를 올리고 있다. 시위 참가자는 끊임없이 늘고 있다. 2017년 12월 31일에 열렸던 시위에는 다른 종교나 종파의 신도들도 합류했으며 종교계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예컨대 킴방구주의자 교회 설립자의 손자인 시몽 킴방구 키앙가니는 신도들에게 지난 1월 21일 행진에 구역별로 참여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이슬람교 지도자인 체익 알리 음윈이 음쿠는 당국에 생실베스트르 합의안을 이행하고 헌법을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가톨릭은 아프리카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콩고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치에 크게 관여했다. 예컨대 르완다에서 가톨릭은 1994년 투치족 대학살 이전에 영적으로, 현세적으로 비중이 큰 종교였다. 투치족 대학살은 가톨릭이 방관했던 사건이다. 당시 가톨릭은 후투족 우월주의자였던 두 대통령(그레구아 카이반다와 쥐베날 하비야리마나나)과 결탁해 있었다. 그 근거로 뱅상 은센기윰바 키갈리 대주교가 1990년까지 일당중앙위원회 소속이었다는 것과, 일부 신부들이 대량학살에 관여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르완다에서는 후투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투치족을 핍박했다면, 부룬디에서는 투치족이 후투족을 탄압했다.) 부룬디에서 당국은, 투치족 정권이 후투족을 차별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던 교회 공동체 ‘이마나 사완야’를 박해하고, 후투족과 연대한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이는 1987년 투치족 출신의 피에르 부요야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를 수용하는 배경이 됐다. 

아프리카에서 가톨릭교회는 국민회의를 개최하며 일당제를 종결시키는 데 기여했다. 일례로 베냉에서 이지도르 드 수자 대주교가 1990년에 국민회의를 주재했다. 가톨릭의 이런 역할은 이후 콩고민주공화국 외에 부룬디에서도 이어진다. 2017년 9월 부룬디에서 개최된 주교 회의는 정부와 망명 중인 야당 대표가 대화를 재개할 것을 촉구했다. 부르키나파소의 필립 우에드라오고 추기경은 2014년, 30년째 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는 블레즈 콩파오레의 연임을 금지하는 헌법에 지지를 표명했다. 

세네갈의 테오도르-아드리앙 자 추기경은 카자망스(Casamance)에서 평화를 향한 집회에 참여했다. 나이지리아의 앤소니 올루번미 오코기 추기경은 2016년 “국민이 식량과 국정관리에 굶주려 있다”고 세계에 알렸다. 또한 40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앨버트 놀란 성 도미니크회 수도사는 개신교 목사들과 함께 카이로스 문서를 작성하고 1985년에 이를 출간해 인종차별정책에 경종을 울렸다. 앨버트 놀란은 종교가 독재자의 횡포에 맞서는 선지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콩고의 가톨릭이 부르짖는 소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콩고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톨릭과 정권과의 힘겨루기는 아프리카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세 번째 시위 2일 전인 지난 2월 23일, 마다가스카르와 부르키나파소, 그리고 니제르의 주교들은 콩고 가톨릭주교위원회와 연대를 표명했다.  


글·프랑수아 미셰 François Misser
언론인

번역·권경아 petitnoel@naver.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수료.

(1) Sabine Cessou, ‘Transition à haut risque en République démocratique du Congo 콩고민주공화국, 예정된 반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6년 12월호.
(2) 콩고를 식민 지배했던 벨기에 지도자들이 투옥시켰던 시몽 킴방구(Simon Kimbangu)가 1921년 설립한 개신교의 일파. 킴방구주의자 교회는 2004년까지 개신교 세계교회협의회 소속이었으며, DR콩고에서 신도는 수백만 명에 이르고 있다.
(3) Jean-Michel Dumay, ‘Le pape contre le fumier du diable 악마의 배설물에 맞서는 교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5년 9월호.
(4) Bakole Wa Ilunga, 『Chemins de libération(Paths of Liberation 자유의 길)』, Éditions de l’archidiocèse de Kananga, Zaïre, 1978.
(5) Ignace Ndongala Maduku, 『Religion et politique en RD-Congo. Marches des chrétiens et paroles des évêques catholiques sur les élections(DR콩고의 종교와 정치. 가톨릭 신자들의 행진과 주교들의 선거에 대한 발언)』, Karthala, Pari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