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 이유

유지영 감독의 <수성못>

2018-04-30     서성희 | 영화평론가

영화 <수성못>은 지방에서 나고 자란 감독이, 지방 제작진과 함께, 지방에 사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하는 장편영화다. 2018년 3월 통계에 의하면, 20~39세 인구 가운데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사는 청년의 비율은 47%, 100명 중 53명은 지방에 산다.(1) 소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방 청년의 목소리는 영화를 통해 좀처럼 들을 수 없었기에 더 반가운 영화다. 대개 영화에 그려지는 지방이라는 공간은 복잡한 서울에서 벗어나 여유롭고 나른한 삶을 즐기며 재충전할 수 있는 문명화되지 못한 다소 촌스러운 장소다. 그러나 <수성못>은 서울 사람, 그중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거나 다녔던 사람은 잘 모르는, 모를 수밖에 없는 지방대 학생의 자전적 이야기다. 


왜 지방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을까?

영화는 한마디로 얘기하면,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지방대 학생의 좌충우돌 투쟁기다. 희정(이세영)은 지방대 학생이다. 대학생이라고 다 같은 대학생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교실 뒤편에 붙어 있는 수학능력시험 배치기준표가 말해준 학력 자본의 크기가 그것을 말해준다. 학력 서열화로 이미 위축이 된 하위권 학생들, 그들은 지방에 있는 대학에 간다. 지방대 출신, 그것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일종의 낙인 같은 것이다. 

청년 세대가 힘들다지만, 거기다 지방대라는 꼬리표까지 단 경우 더욱 살기가 녹록지 않다. 영화는 그 낙인을 지우려 발버둥 치는 주인공 희정을 그리고 있다. 희정은 그 낙인을 지우기 위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시험을 치려고 한다. 처음 희정의 현실을 멀찌감치 떨어져 볼 때는 코미디 같았는데, 더 깊이 들어갈수록 우울과 절망이 짙게 밴 블랙 코미디가 돼버린다. 한국에 사는 학생들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성적에 의한 서열을 내면화한다. 이후 체화된 서열화 기반 위에 각자 삶의 가치를 세우고 살게 된다. 체념하거나 서열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지방대에 다니는 희정은 수성못에서 오리배(오리 모양의 보트) 매표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력 서열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누가 처음부터 ‘인서울’하지 말라고 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공부를 못해서 성적이 나빠서 지방대를 다닌다. 그러나 성적순으로 서울에 있는 일류대학에서 삼류대학까지 서열을 매기는 시스템에서 누군가는 지방대에 가야 한다. 누군가는 지방대에 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그 서열에 따라 인간의 값어치를 매긴다. 경제적 지원이 부담스러운 부모는 딸이 공부를 잘하더라도, 서울로 유학 보내기보다는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의 지방대에 가는 것을 더 선호한다. 특히 아들도 있을 경우, 부모는 딸을 지방대에 보내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부모에게서 딸로 태어났다면 서울 못 간 게 공부 못한 자신의 탓만은 아니다. 이처럼 자신이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외적 여건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것이 좌절된 경우, ‘존재 이전’의 욕망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 그래서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라는 올림픽 슬로건대로 ‘서울바라기’가 된다. 

희정에게 서울은 희망이자 현재 유일한 목표다. 그런데 희정처럼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서울바라기는 눈물겨운 ‘생존주의’ 전략을 펼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서열화된 학력주의 구조에 대한 회의나 부당함을 생각할 틈이 없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는 편입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서울에 살 방 얻을 돈도 구해야 하고, 생활비도 벌어야 한다. 이제 이들은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전력투구’(2) 한다. 치열하게 사는 희정은 자신의 목표 외에 주위의 모든 것들에 관심이 없다. 본인의 생존이 너무 절박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의 기본 안전수칙도, 남동생의 사정도, 엄마의 고민도 안중에 없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돌보기에도 너무 버겁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살아주지는 못할망정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것 같은 상황이 싫고, 짜증이 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지방대 학생이 고군분투하며 사는 힘겨운 삶이 희정 개인만의 문제인가를 묻는다.  

지방대에 다니는 희정에게 서울 입성은 희망이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서울에 있는 대학(인서울)-지방 국립대-그 외 지방 대학(소위 ‘지잡대’)으로 나누는 한국의 학력 서열화는 은연중에 치열한 자기계발을 통한 서울 입성이 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단계라고 부추긴다. 서열의 본질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도록 욕망하도록 한다. 따라서 학력 서열이라는 위계를 체화한 사람은 서열의 위로 올라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많은 지방 학생들은 서울에 입성하면 출세하는 것, 최소한 한 단계 성장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 일을 마음껏 하고, 생활하고, 꿈을 펼치기에 서울로 가면 잘 될 것 같고, 제대로 값지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지방에서 하기 힘든 일인 경우, 서울로 가야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서울 중심주의와 지방 소멸은 쌍생아다

지방대 문제는 지방 문제와 긴밀하게 엮여있다. 한국 사회는 ‘맏이가 잘 되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서울 중심주의를 낳았다. 서울이 우뚝 나서고 거기에 지방을 거느리게 하는 시스템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경제개발의 가속도를 내고 서울을 중심으로 국가 전체를 하나의 중앙집권 체제로 묶는데 기여했다. 이후 정부 주도의 서울 중심주의는 88올림픽 슬로건인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는 한국 사회 전체를 서울 중심으로 묶는 데 효과적인 상징으로 작용했다. 서울의 성장은 서울과 지방의 구별 짓기를 통해, 차별을 통해 우위를 점령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돼왔다. 서울과 지방의 위계적인 차별구조 속에서 지방대는 서울 중심주의에 철저하게 매몰된 대학체계의 경계에 위치한 하나의 범주다.(3)
서울과 지방, 중심과 주변 그리고 지배와 종속 구도는 21세기 ‘지방 소멸’을 낳고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노령화가 심각해지고, 청소년이 자라지 않고, 청년이 남아 일할 자리가 부족한 곳, 지방은 소멸이 진행되고 있다. 지방 소멸은 공간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화 자원과 공공 자원, 그리고 청년 소멸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지방 소멸을 부추기며 서울로 올라가면 무슨 희망이 있는 걸까. 감독은 서울이 지방대 학생이 꿈꾸는 희망의 땅이 아니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희정은 편입시험을 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 지갑을 빼앗긴다. 소위 뻑치기를 당한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귀싸대기도 몇 대 얻어맞는다. 서울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서울로의 진입이 위계의 한 층을 올라가는 것이고, 그래서 서울로의 편입이 희망이라고 오랫동안 믿었던 희정은 그 믿음이 좌절되자 공황상태가 된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지금까지 치열하게 달려온 그 길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거나, 꽉 막혀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감독은 희진을 다시 ‘수성못’에 앉혀 놓는다. 그리고 이 영화 내내 힘겨운 청년의 삶에 어떤 어른도 도움을 주지도 개입도 하지 않다가 유일하게 어른(강신일)이 희정에게 한 마디 던진다. “사는 게 말이지, 간단치가 않아”

영화는 희정의 사느냐 죽느냐는 선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영화 속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의 존재이자 죽음에 동참하는 많은 사람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희정이 힘들어하는 쪽은 죽음보다 삶이다. 어떤 희망을 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 죽음보다 더 절망적이다. 중 고등학교가, 대학이, 가족의 어른들이 삶의 가치를 가르쳐주지 않고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인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지 않은 채, 학력 위계의 서열화만 내면화한 채 사회에 던져 놓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희정은 절박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역적으로 사고하고, 글로벌하게 행동하라

지방에서 편입을 준비하며 힘든 아르바이트 생활과 서울 생활을 지나온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한다. “희망은 서울로 가는 공간이동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지방에 ‘남은’ 청년이 아니라 지방에서 더 잘 ‘사는’ 청년이 되려면 외부에서 주어진 서열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스스로 주관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이는 내면으로부터 신뢰하는 자신의 가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4) 그러기 위해서는 지방에 있는 중고등학교가 서울로 올라가 출세할 몇 명의 인재를 위한 서열화로 지방 청소년을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지방에서 사는 삶의 가치를 고민할 줄 알고, 추구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일상의 삶에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아는 교육을 해야 한다. 교육은 서울에 가는 학생 수보다 더 많을, 지방에서 잘 살고 싶은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글로벌하게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 지방도시가 ‘교육도시’라는 광고하는 것처럼, 현실성 없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 슬로건이 진짜가 되는 한국 사회를 보고 싶다면.  


글·서성희
영화평론가이자, 오오극장 대표,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지방에 살며 영화관련 일을 하고 있다. 

(1) 전국 연령별 인구, 통계청 자료 참조, http://kosis.kr/index/index.do
(2)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한국사회학』 49(1), 2015, p.186.
(3) 홍석준, ‘한국사회의 차별과 편견의 구조 - 서울 vs 지방, 대학사회의 서울중심주의’, 『당대비평』, 2004.9,
(4) 최종렬, ‘『복학왕』의 사회학-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분석’, 『한국사회학』 51(1), 2017.2,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