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선 더이상 북한이 금단의 나라가 아니다
2018-04-30 앙트완느 펙퀴에르 | 언론인
수십 년 전 프랑스에서는 기이한 북한 열풍이 일어났다. 오늘날 소규모의 적극적인 학자, 작가, 정치인 집단이 이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프랑스와 북한이 비록 비정치적이기는 해도 문화적으로나마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물밑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북한 합동연주회, 교환학생 프로그램, 고고학 발굴 프로젝트, 작가 초청회 등이 대표적인 예다.
더욱이 북한은 최근 프랑스에서 논란이 무성한 각종 인사들의 관심도 한 몸에 받고 있다. 가령 클로드 랑즈만은 북한에서 영화를 제작했으며, 디외도네와 알랭 소랄은 반제국주의 선전을 목적으로 방북했다. 작가 장 예슈노즈 역시 최근작에서 북한문제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몽파르나스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슬린 가에는 유독 눈에 띠는 건물이 한 채 있다. 전 층 창문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감시카메라가 곳곳에 돌아간다. 워낙 조용하기로 유명한 파리 14구에서 감시 카메라를 보는 일은 흔치 않다. 이 건물은, 다름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총국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곳이다.
북한은 프랑스와 정식 수교를 맺지 않아서 프랑스 주재 대사가 따로 없다. 이 볼품없는 건물이 프랑스 내에서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북한을 대표할 뿐이다. 우리는 총국이 개최한 한 저녁모임을 기회로 건물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나눠주는 전통한식 몇 가지를 맛보고, 문화 고문을 비롯한 프랑스에 주재하는 몇 안 되는 북한 대표들을 만나보기 위해(대개 엄격한 통제 속에 최소한의 교류만 이뤄진다) 30여 명의 사람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특히 참여객들 중에는 정치인 등을 상대로 친북 로비 활동을 벌이기 위해 1969년 창설된 프랑스북한친선협회(국내에는 프랑스코리아친선협회라고 소개-역주)의 회원들도 눈에 띄었다. 현 협회 회장이자 상원 보좌관인 브누아 켄느데는 종종 <프랑스24> 등 언론매체에 ‘전문가’로 초대받곤 한다. 로베르 샤르뱅 부회장은 대학교수이자 전 니스법과대학 학장을 지낸 인물로, 북한정권을 찬양하는 서적을 다수 출간했다. 『어떻게 하면 북한인이 될 수 있을까?』란 제목의 저서가 대표적인데, “언론인, 정치인,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들의 교본”을 자처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내부 발코니에서 취재진은 우연히 얀 무악스와 마주쳤다. 행사절차에 따라, 그는 상의에 북한 지도자의 얼굴이 박힌 배지를 달고 있었다. 작가가 본업인 그는 어눌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북한에서 찍기로 한 차기 다큐멘터리 영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얀 무악스는 이미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파리마치>의 의뢰를 받아 북한의 여러 스키장과 워터파크에 관한 르포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일하는 그라세 출판사의 한 관계자는 이 작가가 본래는 북한에 관한 책도 출간할 계획이었는데, 나중에 마음을 바꿨다고 귀띔했다. 이날 우연한 만남 이후로 얀 무악스는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다. 대체 북한 체류비용은 누가 부담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던 취재진에게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금단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불편함
연구가나 예술가들에게 북한 문제에 대해 질문하면 금세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대개 그들은 매혹과 혐오, 금단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이념적 불편함 사이를 오락가락하곤 한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클로드 랑즈만은 최근 북한에 관한 영화 한 편을 제작했다. <네이팜>이란 제목의 영화인데, 1950년대 말 한 북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담았다. 당시 그는 아르망 가티, 크리스 마르케르 등과 함께 프랑스 지식인 관광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랑즈만은 영화에서 “비록 부시가 악의 축으로 지목했으나, 실은 훌륭한 교양을 갖춘 관대한 사람들”이라며, 북한인들을 널리 칭송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이것은 한낱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선전용 영화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1950년대 초 미국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한 나라에 대한 정확한 분석인가? 고정관념을 벗겨내더라도 이 문제는 상당히 논란이 분분한 사안이다.
프랑스국립동양언어문화어연구소(INALCO)의 전 연구원, 파트릭 모뤼스는 북한문제, 그 가운데서도 특히 북한문화 부문에 정통한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악트쉬드 출판사에서 북한 작가들의 글을 발굴해 출간해오고 있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주관하기도 한다. 최근 졸업생이 배출된 시기는 2017년 여름이 끝날 무렵이다.
한편 조금 다른 차원이지만, 인종차별 발언과 증오심 조장 혐의로 여러 차례 유죄판결을 받기도 한 코미디언 디외도네 역시 알랭 소랄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북한과 아프리카의 전통악기 연주자들과 함께 ‘평화의 찬가’를 녹음하고, 참가자들에게 크넬(Quenelle: 고기나 생선, 채소를 갈고, 달걀이나 크림을 넣어 부드럽게 만든 후 작은 타원형 모양으로 빚어 끓는 물에 삶은 프랑스 음식-역주) 요리법을 가르쳐줬다.
사실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관심부터 반제국주의적 강박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기로 북한을 방문하곤 한다. 때로는 경제적 실리주의가 한몫 보태기도 한다(가령 디외도네 방북의 경우, 극우성향의 온라인 매체 <불르바르 볼테르>에서 일하는 닐스 볼로가 경영 중인 여행사 ‘노코 레드스타’가 주관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바로 북한 문제와 관련해 그들이 모두 언론사에 극도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취재진은 이메일을 통해 파트릭 모뤼스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여러 가지로 사안이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는 취재진의 요청을 거절했다.
당연하다.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악의 없이 순수한 목적의 방문임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예술가와 학자들이 북한 땅을 밟으려면 북한 정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대체 그들은 어느 정도 선까지 타협을 하고 있을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작가 장 에슈노즈에 이르기까지, 지금처럼 북한이 이토록 많은 프랑스 인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거나, 이토록 깊은 영감을 준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장 에슈노즈는 최근작 <특파원>에서 북한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문화는 때때로 기대하지 않았던 정치적 공명 상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최근 북미 갈등에 대해, “프랑스는 분명 제 몫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프랑스는 북한에 대해 정신적인 영향력이 있다”고 자크 랑이 말했다. 자크 랑은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요청으로 대북 외교 사절단을 꾸려 북한을 방문했다. 그리고 2011년 평양 주재 프랑스협력사무소를 개설하는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어떻게 문화부 장관 출신의 인사가 외교사절단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북한과 남한 양쪽에 모두 밉보이지 않은 덕분이다. 특히 19세기 말 프랑스군이 가져간 조선의 외규장각 의궤 반환 운동에 앞장선 일이 주효했다.” 말하자면 또다시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프랑스와 북한의 경우 경제교역이 거의 (2016년 820만 유로) 전무한 상황인데 과연 예술은 정말 대화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제2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저술하기도 한 바르텔레미 쿠르몽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소장은 “북한의 체제 선전은 유독 일본과 미국의 영향력을 적대시한다. 그런 만큼 오히려 프랑스 문화에 대해서는 정권에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관대하게 인식한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최근 여행 가이드북 <프티 퓌테> 북한편의 집필을 맡기도 했는데, 사실상 북한을 다룬 서양의 첫 가이드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브누아 켄느데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북한은 자국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소프트파워를 갖춰야 할 필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은 문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 문화에 무분별하게 물든 남한과 달리 자국은 여전히 순수 북한 문화를 구현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프랑스-북한 예술과 정치의 긴밀한 연계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프랑스와 북한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예술과 정치가 긴밀하게 연계돼 왔다. 1968년 드골 장군이 승인한 사업의 일환으로, 1972년 마침내 프랑스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가 설치됐을 때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예술단인 평양만수대예술단이 2월 프랑스 샹젤리제극장에서 축하공연을 열었다. 취재진이 입수한 당시 관객 배포용 공연프로그램을 보면, 소개 책자가 온통 김일성 문화정책에 대한 주례사로 도배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민족 예술인의 수는 기껏해야 50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무려 1만 명 이상의 전문 예술가들이 존재한다. (…) 예술인 모임이나 지역예술인이 없는 마을과 촌락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정작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어디에서도 일절 찾아볼 수 없다. 장군님에 대한 찬가로 막을 연 공연은 <나의 조국 무한히 좋아라>, <우리는 붉은 심장을 간직하고 있어라> 등 상당히 의미심장한 제목의 노래와 춤이 한데 어우러졌는데, 가히 진정한 체제선전공연이라 부를 만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프로그램 설명 어디에도 정작 노래를 만든 사람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에서 창작자로 인정될 수 있는 인물은 ‘지도자’, 즉 김일성 단 한 명이었다. 그런 연유인지, 음악가들은 대부분 악보도 없이 곡을 달달 외워 연주했다. 북한의 음악원이 얼마나 혹독하게 음악가들을 교육하는지 여실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2년, 파리에서 또 다른 북한 음악가들의 공연이 열렸다. 자크 랑 사절단이 맺은 소중한 결실인 평양 주재 프랑스협력사무소 개설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연주회였다. 은하수 관현악단 소속의 북한 단원들과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 소속의 프랑스 단원들이 합동 연주를 선보였다. 당시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팀파니 독주자이자 유일하게 북한 말을 할 줄 알았던 프랑스 단원, 아드리앵 페뤼숑은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
“북한 단원들과는 조금도 접촉을 할 수 없었다. 첫 리허설 때, 북한의 동료 연주자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부리나케 경호원들이 손짓으로 저지했다. 리허설 때 외에는 북한 단원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었다.”
이런 전방위 감시는 물론 단원들의 탈주를 막으려는 조처였다. 자유시간에 은하수 단원들은 시민들과 일절 접촉을 하지 않은 채 유람선을 타고 센 강을 둘러보거나, 베르사유궁을 방문했다.
프랑스와 북한의 합동공연을 진두지휘한 것은 이북 태생의 어머니를 둔 남한출신 지휘자, 정명훈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었다. 남북이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종전협정을 맺지 않은 교전 상태에서, 그가 미국 귀화인이라는 점은 합동공연을 맡는 데 큰 보탬이 됐다. 남북통일 운동에 적극적인 정명훈은 언젠가 남과 북이 함께 연주하는 합동오케스트라단을 창설하는 것이 꿈이다. 그런데 통일의 여명이 채 밝기도 전에 이미 북한 오케스트라 조직과 서양 결사대 조직 간에 화합을 실현해낸 것이다. 당시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의 사무국장이었던 베레니스 라바슈는 이 특별한 연주회의 재정문제를 다시 떠올렸다.
“당시 연주회 비용은 24만 유로에 달했다. 보통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회 비용, 20만 유로보다 훨씬 높은 액수다. 돈은 대개 북한 연주자들의 항공료와 숙박비, 경호비로 지불됐다. 반면 연주자에게 따로 보수를 지급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대체 이 어마어마한 비용은 누가 부담한 것일까? 그는 “예술문화후원클럽 프로필(Prophil)이 20만 유로를 지원했다”고 전해줬다. 이 클럽에는 아문디, 로랑 페리에, 삼성 등 다양한 기업이 참여했다. 베레니스 라바슈는 남한 기업인 삼성은 연주회 개최에 도움을 주고도 정작 프로그램 소개 책자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바르텔레미 쿠르몽은 “어떤 남한의 재벌기업들은 단순히 남한이 아닌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앞세워 북한문제에 적극 참여하려고 한다. 때로는 북한개성공단 설립 등 경제적 이권이 작용하기도 한다. 특히 개성공단 사업 투자에는 현대 등 많은 한국 기업들이 참여했다”고 말했다. 당시 연주회 저녁 만찬은 전적으로 민간의 지원으로 개최됐지만, 플레이엘 홀에 참석한 관객들 중 대부분은 자크 랑, 프레데릭 미테랑 당시 문화부 장관 등 정치인 일색이었다. 한편 한국대표단과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도 함께 자리를 빛냈다.
파리 공연 후 몇 달이 지난 뒤, 은하수 관현악단은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프랑스북한친선협회측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인을 보냈다. 브누아 켄느데는 “북한에서는 문화단체가 이름을 바꾸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언론에 의하면, 현실은 그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과거 김정은의 현 부인과 성관계를 가졌던 사실로 인해, 바이올린 독주자를 비롯한 은하수 관현악단의 단원들이 정권의 손에 살해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는 확인할 수 없었다. 베레니스 라바슈는 “북한 정보원들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단 한 명에게서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문화와 섹스, 그리고 외교까지. 가히 첩보 소설에나 나올 법한 조합이었다. <르몽드>의 도쿄특파원인 필립 퐁스가 저서 『북한, 변화 중인 게릴라 국가』에서 아주 정확하게 지적했듯, 북한은 분명 ‘스펙터클 국가’였던 것이다.
명문 건축학교들에 북한 간부 자녀들 학업
사실 프랑스-북한의 예술교류는 음악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03~2008년, 그리고 이어 2012~2017년 9월, 평양의 대학생들은 파리 라빌레트, 벨빌 등 프랑스 명문건축학교에 초청돼 수업을 들었다. “건축은 많은 독재정권이 항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라고 한 건축학교의 교육 담당자가 말했다. 더욱이 평양은 미국 폭격의 폐허를 딛고 재건된 현대적 도시의 완벽한 예를 구현한다. 가령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북한관의 전시를 보면, 이런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사실 교환 학생 프로그램은 전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한과 북한이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한창 관계증진에 힘을 쓰던 시점과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흔치 않게 남북관계가 상당히 완화된 시기였다. 더욱이 2000년 유럽연합 국가들도 북한과 수교를 맺었다. 단, 두 나라, 에스토니아와 프랑스만은 예외였다. 자크 랑은 “유럽연합 국가들은 모두 같은 날에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토니 블레어가 집권한 영국과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집권한 독일이 제멋대로 날짜를 앞당겼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결국 유럽연합의 공동 행보에서 발을 뺐다”고 설명했다.
사실 북한 입장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981년 대선 후보 시절 프랑수아 미테랑은 평양을 방문해 문화 교류와 외교 관계 수립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쿠르몽은 “2000년대 프랑스는 좌우동거 정부 체제가 한창이었다. 그런 만큼 외교 부문에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복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자크 랑은 “이후 북핵위기가 고조되면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 가장 좋은 해법은 북한을 온전하게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협력사무소 개설이라는 타협안으로 만족했다. 오늘날 파리에 대표단이나 대사가 주재하지 않는 나라는 오로지 팔레스타인과 북한뿐이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북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초청 유학 프로그램은 북한과 수교를 맺지 않는 데 대한 문화적 보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시행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당시 한 건축학교의 교육담당자는 “북한의 학생들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교수들이 곤욕을 치렀다. 있는 그대로 점수를 줬다가는 북한 측에서 보복을 해올까 전전긍긍했다. 북한 유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따로 살았다. 다른 학생들과 거의 혹은 전혀 접촉하는 법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2014년 라빌레트 건축학교에서 공부하던 한 북한 유학생이 정권 요원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던 여러 학교의 교장들은 함께 나서서 학생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헛수고였다. 당시 유학생 피랍사건은 김정은 집권 후 자행된 숙청 과정에서 벌어졌다. 사실상 유학생 전원이 북한고위층의 자제들이었다. 이번에도 문화가 북한의 실정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 셈이다.
한편 북한의 학생들은 뇌이 시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겸 성악코치, 엘리자베스 쿠퍼의 매스터클래스 강의에도 초청됐다. 뇌이 시가 이런 사업을 벌이는 이유는 쉬이 이해가 간다. 북한 대표단이 아셀린 가로 옮기기 전까지 뇌이 시의 한 호화스러운 별장에 상주했기 때문이다. 북한 유학생의 환송을 기념하기 위한 연주회에는 그다지 많은 손님들이오지 않았다. 그러나 자크 랑을 비롯한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정치인들은 전원 참석했다.
한편 반대로 매우 드물기는 해도 프랑스인이 평양 유학을 떠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남북한 언어를 배우는 학생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유학 프로그램은 그동안 파트릭 모뤼스가 개인적으로 운영해왔는데, 최근 그가 몸담고 있는 프랑스국립동양언어문화어연구소(INALCO)측은 안전 문제를 들어 프로그램 운영에 반대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프로그램의 성과에 대해서는 학생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어떤 학생은 매우 특별한 체험의 기회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또 다른 학생은 유학생활이 우울했다고 평가한다. 한편 학생만이 아니라 일반인이 북한의 여러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오랫동안 파리에 자회사를 소유하기도 했던 평양의 만화영화 촬영소 ‘SEK 스튜디오’다. 취재진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 회사는 지금은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이후 프랑스는 유일한 북한 주재 외국인 고고학자 엘리자베스 샤바놀(프랑스국립극동연구원)을 주축으로 고고학협력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발굴지는 남한 국경에서 단 7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개성이었다. 개성에는 한국 기업들의 투자로 설립된 산업단지도 위치하고 있다. 개성은 10~14세기 옛 고려 왕조의 수도였다. 따라서 발굴 성과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자극할 기회다. 엘리자베스 샤바놀 팀은 북한의 고고학 발굴 성과를 가지고 2014년 평양 민속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쾌거를 올렸다. 사실상 서방국가 출신 외국인이 북한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던 만큼 일대 사건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프랑스 외교계는 종종 자신들의 소관 밖에서 이뤄지는 민간사업들을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가령 대표적인 피해자가 크리스티앙 라베르델이다. 프랑스실내악단(프렌치챔버오케스트라)을 이끄는 바이올리니스트 라베르델은 파리시(Parisii) 4중주단의 단원들과 트럼펫연주자 기 투브롱을 초청해 평양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열었다. 그런데 “2년 전 봄 축제(북한정권이 2년마다 여는 대대적인 예술 행사)에 참가하기 전, 외무부에서 전화를 걸어와 연주 계획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냥 강행했다”고 전했다.
그는 오로지 소프트파워에만 관심이 있는 한 마리 외로운 늑대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현장을 방문한 그는 북한 정권의 검열에 맞닥뜨려야 했다. 주최 측은 미국과 일본, 남한의 음악은 단 한 편도 연주할 수 없다고 금지했다. 오케스트라는 결국 프랑스 음악만 연주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바이올리니스트에 의하면, “일부 곡은 프랑스 음악인데도 연주가 금지됐다. 식민주의를 환기한다는 이유로 북한 당국이 장 필립 라모의 오페라곡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페르시아, 페루, 북미 원주민 세계를 배경으로 다양한 플롯이 전개되는 오페라)의 연주를 금지”했다는 것이다.
축제를 기획한 북한 측은 연주자들을 위해 베이징발 항공료와 숙박비를 부담했다. 그러나 파리-베이징 간 항공료는 실연예술인저작권분배단체(Spendidam) 측이 지불했다. 외무부가 원치 않는 공연, 예술인저작권을 관리하는 시민단체가 재정을 지원한 공연, 참으로 모순투성이인 방북 공연이었다.
학계의 상황을 보면, 지난 수십 년 현저한 변화가 감지된다. 20여 년 전만 해도 북한 연구가들은 철저히 흑백논리로 의견이 양분됐다. 먼저 프랑스북한친선협회와 가깝게 지내며 북한정권을 필사적으로 비호하는 친북학자들 진영이 있는가 하면, 친미노선을 표방하며 북한정권을 맹렬히 비판하는 진영이 있었다. 특히 북한정권에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 피에르 리굴로였다. 사회역사연구소 소장인 리굴로는 『불량국가, 북한』이란 제목의 책을 저술하기까지 했다. 한편 필립 그랑주로를 필두로 한 언론인들은 북한을 매우 이국적인 나라로 묘사하며, 때로는 ‘공산주의의 쥐라기 공원’이라는 조롱 섞인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바르텔레미 쿠르몽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북한 정권을 정당한 국가로 여기지 않음에도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제3의 길을 걷는 연구가들”이 나타났다. 이처럼 중도 노선을 표방하는 대표적 인물이 필립 퐁스나 줄리에트 모리요다.
바르텔레미 쿠르몽은 “요즘처럼 북한 관련 서적이 널리 출간된 적이 없다. 10년 전만 해도 내가 쓴 책이 거의 유일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북한연구가들은 방북 성사를 위해 때로는 직업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꼼수마저 불사해야 한다. 가령 줄리에트 모리요는 입북을 위해 프랑스북한친선협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한편 재방북을 원하는 연구가들은 교묘하게 글을 써서 최대한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종종 북한에 대한 글들이 철저히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검열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학문과 외교의 경계는 때때로 불분명하기 그지없다.
문화가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할수 있을까
문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북한 정권과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는 프랑스가 유일한가? 그렇지는 않다. 2010년 오스트리아 빈의 응용미술관도 북한미술 관련 전시회를 개최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스타일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실물 느낌이 짙은 그림들이 대거 전시됐다. 그런가 하면 빌 클린턴은 물론 조지 W 부시 시절의 미국 역시 예술을 통해 대화를 활성화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가령 2008년 지금은 고인이 된 로린 마젤이 이끄는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평양 공연을 개최했다.
그러나 가장 이런 행보에 적극적인 나라는 중국, 러시아, 쿠바 등 북한의 전통적인 우방 국가들이다. 이 국가들은 봄 축제가 열릴 때마다 정기적으로 자국의 예술인들을 평양에 파견하곤 한다. 평양에 주재 중인 한 유럽연합국가의 외교관은 “이런 문화 교류는 훗날 북한이 개방됐을 때를 대비한 경제적 차원의 정지작업이다”라고 넌지시 귀띔했다. 2017년 10월 TV 연설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은 이렇게 선언했다. “북한을 보라. 우리는 북한과 모든 협상을 중단했다. 그런데 몇 년 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어떻게 됐는가? 핵무기 보유를 목전에 둔 북한과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마크롱 대통령의 5년 임기 동안 과연 우리는 프랑스가 북한과 수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까?
이란의 경우처럼, 프랑스는 어쩌면 대화 카드를 흔들며 북한과 막후에서 물밑 협상에 나설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문화는 또다시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글·앙트완느 펙퀴에르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르몽드>에 오랫동안 문화예술 관련 글을 써왔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