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나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어’ 외

2018-04-30     마르크스

나는 너무나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어 


1850년 말, 친구 엥겔스는 부모님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맨체스터로 떠난다. 엥겔스는 그곳에 20년을 머물면서 마르크스와 종종 서신을 주고받는다. 마르크스의 편지는 주기적으로 빚에 허덕이는 한 가족의 삶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맨체스터의 엥겔스에게  
1852년 9월 8일, 런던

엥겔스, 오늘 날씨가 무척 안 좋았는데 자네 편지가 도착했다네. 아내와 딸 예니가 아프다네. 가정부 헬렌은 일종의 신경성 열병을 앓고 있네.(1)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지금도 의사를 못 부르고 있어. 열흘 가까이 우리 가족은 빵과 감자로 연명하고 있어. 중요한 것은, 오늘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는 거야.
 
내가 자네 집에 있을 때 자네가 이야기했지. 8월 말 전까지 내게 돈을 조금 줄 수 있다고. 아내를 안심시키려고 그 이야기를 했어. 3~4주 전에 자네가 편지에서 큰 기대는 하지 말라 했지만, 난 9월 초까지 우선 내 모든 채권자들에게 기다려 달라고 해 놓은 상태라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아주 조금씩 상환해 가고 있을 뿐이야. 이젠 그들이 나를 정면으로 압박하고 있지. 

이것저것 시도해 봤지만 소득이 없었어. 우선 그 몹쓸 웨이데이메이어는 내게 15파운드를 사기 쳤어. (…) 난 브록하우스를 통해 <Gegenwart>지에 기사를 쓰겠다고 제안했는데 그 내용이 맘에 안 들었던 것 같아. 무척 예의 바른 편지로 거절을 하더군. 결국 지난주, 다나에서 발행한 어음을 할인해 주겠다는 어떤 영국인을 따라 종일 뛰어다녔어. 아무 소득이 없었지. 

그나마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의 상황은, 내가 바라는 바 이기도 한데, 집주인이 나를 내쫓는 거야. 적어도 그렇게 되면 22파운드를 안 내도 될 테니까. 하지만 집주인에게서 그런 호의를 바랄 수는 없겠지.(…)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지난 1주일에서 열흘 동안 머저리들한테 몇 실링, 몇 펜스를 빌렸는데,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지만 굶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네.(2)

늘 그렇듯, 내 편지는 내가 얼마나 거지 같은 상황에 처해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뿐이군.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집은 병원이나 다름없고, 위기 속에 모든 것이 대혼란이고, 지금 내가 가장 많이 신경을 써야 하는 존재는 자네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지금도 고에그씨는 미 대륙에서 특급 유람선을 타고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고, 프루동씨는 반 나폴레옹 운동을 위해 10만 프랑을 받았네. 그러나 내게 돌아오는 건, 건강이 악화되고 주머니가 탈탈 털리는 상황뿐이라네.(3) 

친구 카를 마르크스로부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서한』(1852-1853,1973) 

번역·유정은
(1) Luchen (Hélène) Demuth. 
(2) 마르크스가 ‘머저리들’이라 지칭한 이들은 독일망명자들로 짐작된다.
(3) P.J.Proudhon, La Révolution sociale démontrée par le coup d'Etat du 2 décembre. 



박스 기사 2

부인, 당신을 사랑합니다

비밀결혼 후 20년이 흘러서도, 카를 마르크스는 여전히 트리어의 무도회 여왕인 아름다운 예니 폰 베스트팔렌을 마음 속 깊이 사랑했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도무지 헤어날 길이 없는 마르크스의 생활고로 인해 아내 예니는 희생을 감내 해야 했다.

마르크스가 트리어의 예니 마르크스에게(1)
맨체스터, 1856년 6월 21일

내 사랑, 소중한 사람이여, 
당신에게 또 편지를 씁니다. 나는 외롭고, 생각으로만 당신과 대화를 하고,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내 말을 못 듣고, 내게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견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그대의 초상화는 아주 유용합니다. <검은 성모>, 성모 마리아의 가장 혐오스러운 초상화인 그 그림에 왜 그토록 많은 열렬한 애호가들이 있는지, 잘 그린 초상화보다 더 많이 사랑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성모 그림 중의 그 어느 그림보다 당신의 초상화는 가장 많은 입맞춤을 받았고, 사랑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두운 모습은 당연히 아니지만 잘못 그린 그림임에도, 그토록 소중하고, 부드럽고, 입 맞추고 싶은 당신의 달콤한 얼굴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음에도 말입니다. 

나는 당신을 잘 나타내지 못한 빛의 명암을 고쳐 그리고, 전등과 담배 연기로 내 시력이 많이 나빠졌어도, 꿈에서나 깨어 있을 때나 아직 그대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앞에 실제로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대가 보입니다. 당신을 두 팔로 안고, 발끝부터 머리까지 입맞춤하며, 그대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부인,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오델로(사랑에 눈먼 셰익스피어 작품의 노인)도 결코 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더 많이,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카를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서한』(1853~1857,1973)

번역·유정은
(1) 예니 마르크스는 세 딸과 함께 트리어에서 1856년 5월 22일부터 7월 23일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병상을 지킨다. 그녀는 9월 10일까지 더 머문다. 마르크스는 1856년 6월부터 7월까지 맨체스터의 엥겔스 집에서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