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자본주의’라는 알쏭달쏭한 거짓말

2010-07-12     이봉 키누

“자본주의를 좀더 도덕적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왔는가?” 경제위기가 심화되자 각국의 정치 지도자가 던진 질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사의 (행복한) 종말’ 운운하며 침이 마르도록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던 이들이다. 그러나 질문부터 잘못됐다. 도덕적 자본주의를 만들자는 말은 현재 자본주의가 비도덕적이라는 뜻이다. 자본주의를 더 도덕적으로 만드는 게 가능하려면 자본주의의 내재적 구조가 비도덕적이지 않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과잉이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경제가 도덕과 분리돼 있다고 보는 이들의 관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비도덕적 기초 위에 구축된 체제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지난 세기 이미 경제와 도덕 간 문제를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1) “개인의 의지에 의한 행동만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의지와 무관한 사회 체제를 두고 그 자체로 정의와 불의를 판단할 수 없다.” 하이에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정의’라는 개념은 판단 불가능한 것을 판단하려는 데서 온 잘못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것이 ‘사회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 불의를 행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2) 그는 이 개념적 오류가 인간의 의지를 비인칭적 현실에 투사(의인화)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산된 부와 생산수단을 좀더 정의로운 방식으로 분배하려는 사회주의자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하이에크는 한 사회의 경제적 체제에 완전한 무(無)도덕주의를 적용한다. 이는 ‘사회적 불의’라는 개념의 이론적 기초를 제거함으로써 생기는 불편함을 외면하려는 냉소주의적 태도다.(3)

 

하이에크 “경제에 도덕 따윈 없다”

하이에크의 관점은 최근 앙드레 콩트 스퐁빌의 저서 <자본주의는 도덕적인가?>(4)에서 다시 힘을 얻는다. 이 책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경제위기로 빛이 바래긴 했지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강한 호소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콩트 스퐁빌은 사회적 삶이 과학·기술적 질서, 법적·정치적 질서, 도덕적 질서, (사랑으로 정의되는) 윤리적 질서에 포섭된다고 본다. 경제는 이 중에서 과학·기술적 질서에 포함된다. “과학·기술적 질서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데 도덕은 전혀 개입할 자리가 없다. 특히 이 질서에 포함되는 경제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5) 따라서 도덕의 자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외부로 밀려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는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단지 무도덕적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도덕이 경제체제에 개입할 가능성은 사라진다. 이보다 더 급진적인 이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정치적 냉소주의’의 다른 말

한편 도덕은 법적·정치적 질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제체제에 개입한다. 그러나 간접적 개입은 체제의 폐해를 줄일 수는 있을지언정 근본 원인은 제거하지 못한다. 또한 경제적 행위의 주체가 부재한다면 주체적 행위에 적용되는 기준으로 체제를 판단할 가능성 역시 사라지게 된다. 사회적 정의와 불의에는 도덕적 의미가 내포됐고, 경제체제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관점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반면, 콩트 스퐁빌은 자본주의가 ‘부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회구성원이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른 데서 오는 불평등이 그 예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가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필요성은 사라진다.(6)

이런 식의 관점은 현재 우리가 겪는 엄청난 폐해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수행한다. 또한 정치로부터 모든 종류의 도덕적 의지를 제거해 냉소주의를 조장한다. 콩트 스퐁빌이 기대는 잘못된 이론적 기초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다른 이들의 관점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과학·기술적 질서의 관점에서 본 경제는 중립적일 수 있다. 그러나 기술과 경제가 근본적으로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학과 기술은 ‘수단’일 뿐이며(물론 경제는 과학기술과 유기적으로 연관된다), 그것의 ‘사회적 사용’만이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가령 새로운 생산기술의 발달로 인한 생산력 향상이 실업자 발생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향상된 생산력은 필요 노동시간을 단축해 인간을 노역에서 해방시킨다. 같은 수의 노동자들이 시간을 덜 들이면서 같은 양을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생산성 향상으로 얻은 이득은 임금 인상을 통해 재분배될 수 있다. 따라서 과학과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기술이 아니다”

경제는 사회의 특정 구성원(자본가)이 다른 구성원(임금 노동자)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하는 실제적 방식으로 조직된다. 가령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가혹한 노동 강도를 강요하고, 경쟁력을 구실로 노동자를 해고한다. 성과나 새로운 경영 방침을 내세워 노동자끼리 경쟁을 부추긴다. 이 때문에 이미 힘든 노동에 지쳐 있는 노동자는 정신적 고통까지 감내해야 한다.(7) 과학과 기술은 이 모든 일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다. 이윤 추구 원칙에 기초한 노동의 사회적 조직 방식이 문제며, 이것만이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체제가 인간적인가 비인간적인가,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경제학은 기술이 아니다.”(8)

더 넓은 관점에서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권력이다- 경제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수정되어야 한다. ‘현실’이란 (사람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서 독립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현실, 자연 상태처럼 절대적 법칙에 지배되는 현실을 말한다. 경제 현실이 이렇게 정의되면 도덕적 판단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진다. 가령 사람의 몸이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걸 보고 중력의 법칙을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사 그 사람이 심하게 다쳤을지라도 말이다. 이런 식의 지적 오류를 우리는 ‘경제주의’라고 부른다. 이 관점은 경제적 가치를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으로 내세우며, 모든 경제활동이 근본적으로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법칙이 실은 사적 소유에 기초한 생산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산관계가 바뀌면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법칙 또한 바뀌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 법칙은 특정 경제 체제(따라서 자본주의는 역사의 끝이 아니다)에서 특정 형식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일종의 ‘기능적 규범’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전세계적으로) 제도화됨에 따라 그것을 변형하는 일도 가능하다. ‘경제 법칙’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른 모든 사회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모든 가치판단에서 자유로운 순수과학으로 여길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경제학은 다른 사회과학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한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따라서 현실 분석은 가치판단에 따라 방향을 달리할 수 있다. 그것에 동의하는지 안 하는지는 선택의 문제다.

사람의 일인 한 중립은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앨버트 오토 허시먼은 도덕이 경제학 속에 무의식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지적한 후 이렇게 말했다.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깨어 있을 때만이 도덕성은 연구의 중심에 놓일 수 있다.”(9) 사회과학자들이 명료하고 의식적인 방식으로 도덕적 고민과 대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1844년 수고>에서 한 말과 같은 맥락이다. “경제학은 도덕에 관한 실질적 과학이며 과학 중에서 가장 도덕적인 학문이다.”(10)

그렇다면 정치가 배제된 경제적 현실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순간 어떤 도덕이 경제에 개입하는 것일까? 우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지 개인적 덕행과 악행이라는 관점으로만 파악하는 식의 관점을 버릴 필요가 있다. 나와 타자의 관계에 천착하는 윤리학적 관점(11)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정치적(좁은 의미로 정치제도), 사회적(역시 좁은 의미로 사회적 권리), 경제적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도덕적 관점이 요구된다. 이 중 정치적·사회적 영역은 이미 도덕적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1789년 인권선언과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이런 진보는 경제라는 문턱 앞에 멈춘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것이 도덕적 정치·경제를 통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지점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가치를 경제 영역까지 확장할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가치, 어떤 정치를 추구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칸트의 보편적 도덕관념에서 찾을 수 있다. 타인을 존중하고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이성의 명령이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보편성은 개인의 자율성을 촉구한다. 또한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적·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정치적 지배(민주적 제도 덕분에 부분적으로 해방이 되었다), 사회적 억압(19세기부터 시작된 노동운동 덕분에 몇 가지 권리가 보장되었다), ‘경제적 착취’를 종식하도록 촉구한다. 경제적 착취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를 해결해야만 다른 영역에서 이미 쟁취한 도덕적 성과를 보존하고 심화할 수 있다.

도덕적 자본주의는 곧 자본주의 철폐

단적으로 말해 도덕적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정인의 이익에 봉사하고 노동자를 도구화함으로써 그들의 자율성을 빼앗는 체제는 이미 비도덕적이다. 따라서 좀더 도덕적 자본주의를 만들자는 요구는 결국 자본주의를 철폐하자는 요구가 될 수밖에 없다. 설사 그 과정이 지난할지라도 말이다.

글•이봉 키누 Yvon Quiniou
주요 저서로 <정치의 도덕적 야망: 인간을 개조한다?>(L’Harmattan·‘세계화된 이성’ 시리즈) 등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각주>
1) 하이에크, <법, 입법, 자유>, Presse universitaire de France(PUF), 1980~83.
(2) 같은 책 v.2, p.94.
(3)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인간적 피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이에크에게 질문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저런, 안됐군!”
(4) Albin Michel, 파리, 2004(2009년 개정판).
(5) 같은 책 개정판, p.78.
(6) 같은 책, p.238~239.
(7) Christophe Dejours, Jean-Pierre Durand, ‘새로운 소외’, <Actuel Marx>, PUF, Paris, n°39, 2006년 5월호 참조.
(8) 카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Editions sociales, p.151.
(9) 앨버트 오토 허시먼, <정치적, 도덕적 과학으로서의 경제학>, Gallimard/Seuil, p.109.
(10)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 이후, 이 문제의 이론화가 진전되지 못했다. 그의 이론에 공백처럼 남아 있는 부분이다.
(11) 필자식으로 표현하면, 윤리학은 개인적 삶을 대상으로 하며 지혜의 차원에서 조언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실천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