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 행정3과, 외무고시… '선망의 대상'

엘리트 외교관의 등용문

2008-10-29     김승웅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회장

한국외교 60년

한국외교의 인맥 <2>

 독자들께서는 혹시 반다일(潘多一)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가? 66~67년 한국일보에 연재된 소설 '대야망'(大野望)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던 주인공 이름이다. 소설 '대야망'의 이름은 잊혔다 해도 주인공 반다일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 이유는 뻔하다.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일생도 그렇지만 그의 직업이 당시의 독자층에게는 생소한 외교관이라는 점, 그리고 주인공의 활동 무대가 도쿄(東京)의 아까사카(赤坂)나 서독의 본 (Bonn) 등 국제 무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낙타의 바늘귀 통과처럼 어렵기만 했던 외국여행이었다. 그 외국을 이웃집 드나들듯 왕래하며 온갖 화제를 뿌리고 다닌 외교관 반다일을 독자들은 곧잘 자신들의 모습으로 환시(幻視), 탐독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대야망'은 극작가 한운사 씨의 극화소설로서 주인공 반다일은 외교관 출신으로, 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고 엄영달 씨(1928~2003)가 그 모델이다.
 외교관이란 직업은 48년 건국 이래 줄곧 선망의 직업이 돼왔다. 자신의 용모나 실력 특히 외국어에 자신 있는 젊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 쯤 도전해보고 싶은 직업이기도 했다. 이러한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험한 관문을 여러 차례 통과해야 했다. 외교관이 되기 위한 등용문(登龍門), 소위 신진 엘리트들이 대형(大型) 외교관으로서 성장하기까지 겪어야하는 발자취를 일별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 수립 이후 오늘에 이르는 '한국외교 60년'은 어찌 보면 이들 외교 엘리트들의 역정(歷程)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지난 호에 거론한 한국외교의 인맥(人脈)을 짚는 데, 그리고 외교 총책(總責)인 외교부 장관의 외교 스타일을 규명하고 이해하는 데도 외교 등용문을 한번 쯤 돌아보아야 할 듯 싶다.
 우리나라에 첫 외교관 시험이 있었던 것은 1948년 가을이다. 그 해 11월 4일자로 외무부직제가 제정 공포되고 외무부 국장급 인사의 진용이 갖춰지자, 장택상 초대 외무부 장관은 서기관 급 이하의 직원을 공개시험을 거쳐 채용키로 결정한다.
 첫 시험은 서울 종로 수송초등학교에서 실시됐다. 이 시험에는 당시 구미(歐美) 유학파는 물론 일본 유학파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성적들도 대개 출중했던 덕분에 150명이 합격했다. 외교관의 채용과 관련, 외교관이 갖춰야 할 실력과 덕목(德目)이 무엇이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외교관 채용 기준은 멀리 중세 유럽으로까지, 더 멀리는 비잔틴문명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외교관이라는 직업 자체가 서구식 생활 패턴에서 비롯된 직업이었던 만큼, 그 채용 기준 역시 서구 문명의 변천과 틀을 같이 해왔다.
 1596년 오타비아노 마기가 쓴 '사절론'(使節論/De Legato)에 따르면 이상적인 대사(大使)는 수학, 건축학, 음악, 물리학, 법률, 시민법, 교회법에 통달해야 했다. 외국어로는 프랑스어 이외에 그리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터키어에 두루 능통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 근대 외교관의 개념이 정립된 13~14세기의 이탈리아 도시국가 시대부터 외교관은 문필가를 겸해야 한다는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 살던 <신곡>의 저자 단테나 <나의 비밀>을 쓴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 <군주론>을 저술한 마키아벨리 등 당대의 유명한 문필가들이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교관, 건국이래 가장 인기있는 직업 부상
고시제도, 독선·불협화음의 씨앗되기도


 우리나라에서 외교관을 정규로 공모한 첫 등용문으로는 정부 수립 다음해(1949년)에 실시된 제1회 고등고시를 들 수 있다. 사법과와 행정과로 나뉘어 실시된 제1회 고등고시는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서구(西歐)형 고시제도와 일본 고등문관(文官)시험을 상당 부분 답습한 것이었다.
 시험 결과 사법과에 16명, 행정과에 5명이 합격했다. 5명의 행정과 합격자 가운데 외교관 입문(入門) 코스인 행정 3부(1부는 행정, 2부는 재정, 3부가 외무) 합격자는 단 두 명으로, 훗날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김학렬 씨(작고·1923~1972)와 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차장과 주 말레이지아 대사를 역임한 전상진 씨이다.
 그리고 이 고시 행정 3부는 그 후 우리나라 엘리트 외교관을 정선(精選)해내는 요람이 된다. 같은 외교관이지만 고시파냐 아니냐, 'DJ사단'(김동조 외무장관의 이니셜 DJ 휘하의 외교관 그룹)에 끼느냐 탈락되느냐를 결정지어 주는 가늠자 역할을, 이 고시 행정 3부가 맡게 된 것이다. 소수 정예의 우월 의식을 고취시켰는가 하면 독선(獨善)과 불화의 외교로 치닫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외교관 대부분이 타 부처의 일반 공무원들보다 우월하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다. 이런 자의식은 같은 외교관 사이에도 나타나 보완협력보다는 경쟁 대립관계로 치닫게 했다. 따라서 고시 출신 외교관이냐 아니냐는 당시 외무부 내의 이러한 경쟁 대결관계를 심화시키는 승수(乘數)로 작용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고시파 대 비(非)고시파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불협화(不協和) 관계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글 서두에 소개한 '반다일'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 후 고시 5회에 합격, 외무부에 첫발을 들이며 10년 남짓의 외교관 시절동안 본부 아주(亞洲)과장과 주일(駐日) 1등 서기관, 주 서독 영사를 역임한 후 외교계를 떠난다. 직위나 직급으로 미뤄 소설에서처럼 그토록 화려했거나 막강한 포스트는 아니었으며, 당시 외교 풍토로 미뤄 볼 때도 우리나라 외교관에게 그런 여건이 갖춰져 있던 것도 아니었다.
 '반다일'의 공적은 따라서 외교관의 진상을 알렸다기보다는, 외무부를 '노크'하려는 외교관 지망자의 수효를 늘리는데, 그리고 이왕이면 외교관을 남편으로 갖고 싶어 하는 혼기 찬 여성의 허영을 부풀리는데 기여했다고 말 할 수 있다. 각 횟수별 고시 3부 합격 외교관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2회(51년)=문철순 전 터키대사, 외무부기획관리실장 역임
*3회(52년)=송광정 전 독일대사
*4회(53년)=노신영 전 총리, 안전기획부장, 외무부장관, 제네바대사 역임/정순근 전 서독대사, 외교안보연구원 대사 역임/소진철 전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제네바 공사 역임/연하구 전 덴마크 대사, 국가경영전략연구원 고문 역임/박창남 전 가나대사, 본부대사 역임
*5회(53년)=이남기 전 이탈리아 대사, 한국해외개발공사 이사장 역임/이원호 전 덴마크 대사, 본부대사 역임/엄영달 전 국회의원
*6회(54년)=김동휘 전 상공 장관(아웅산 사태로 작고), 외무 차관 역임/노재원 초대 주중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외무 차관 역임
*7회(55년)=오재희 전 주일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외무차관 역임/이경훈 전 오만대사/채의석 전 스웨덴 대사, 튀니지 대사 역임/신정섭 전 쿠웨이트 대사,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이상진 전 터키대사/한우석 전 프랑스 대사, 2002월드컵 대회조직위 부위원장 역임/최호중 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외무부 장관, 벨기에 대사 역임/장기하 전 호주 공사/권태웅 전 태국 대사/신기흠 전 본부 대사
*8회(56년)=이상옥 전 외무 장관/신동원 전 외무부 차관, 멕시코 대사 역임/지성구 전 핀란드 대사/김태지 전 일본대사
*9회(57년)=행정 3부 합격자 없음
*10회(58년)=유종하 현 적십자총재, 서강대 정외과 교수, 외무부 장관, 벨기에 대사 역임/이기형 전 요코하마 영사
*11회(59년)=김석규 전 일본 대사, 러시아 대사 역임/이정빈 전 외무부 장관/노창희 전 외무 차관, 유엔 대사, 주미 공사 역임
*12회(60년)=행정 3부 합격자 없음
*13회(61년)=박수길 유엔한국협회 회장, 전 외교안보연구원장, 외무부 조약국장 역임/홍순영 전 통일원 장관, 외무부 장관, 청와대 제1 정무비서관 역임/정경일 아주국제대학원 교수, 시카고 총영사 역임/배병승 전 외무부 경제국장/장선섭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이사회 의장, 프랑스 대사 역임/손일동 전 쿠웨이트 대사/이장춘 전 싱가포르 대사, 오스트리아 대사 역임/정창 전 로스앤젤레스 총영사, 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역임/김봉규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베트남 대사 역임/권인혁 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프랑스 대사 역임/선준영 전 외무부 차관, 유엔 대사 역임
*14회(62년)=권병현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중국 대사 역임/이승곤 전 오스트리아 대사, 주미 공사 역임/김경철 전 네덜란드 대사, 싱가포르 대사 역임/박건우 경희대학교 사이버대 총장, 주미 대사, 외무 차관, 캐나다 대사 역임/민형기 전 한국국제협력단(KOICA) 총재, 아일랜드대사 역임/한창식 전 싱가포르 대사, 수단 대사 역임/신기복 전 한국국제협력단(KOICA) 총재, 인도 공사 역임/김석현 전 한국국제협력단(KOICA) 총재, 이탈리아 대사 역임/박송택 전 토론토 총영사 역임/장만순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오스트리아 공사 역임/최근배 전 외무부 본부 대사 역임/김세택 전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역임/박영철 전 호남신문 사장, 토론토 총영사 역임  
 
 이 가운데 6회 합격동기인 고(故) 김동휘 상공 장관(서울문리대 정치학과 졸)과 노재원 전 외무 차관(서울 법대 졸)은 단 2명의 합격자로 고시 수험번호마저 나란히 등재, 앞뒤에 앉아 시험을 치렀다. 외무부에 함께 근무하던 시절 두 사람은 곧잘 농담을 주고받았다. 김동휘 씨가 장신의 노재원 씨를 향해 시비를 걸었다.
 
 "자네, 내 뒷자리에 앉아 나의 고시 답안지를 전부 컨닝해서 합격했지?"
 "맞다 맞아!"하고는 둘이서 호탕하게 웃어 제켰다.
 
 8회 합격자인 김태지 전 일본 대사는 경기고, 서울 법대 출시의 수재다. 그는 당초 7회 째 고시에 응시했으나 국사 시험 문제 가운데 "고려(高麗)의 xx을 논하라"를 "고구려(高句麗)의 xx..."으로 잘 못 읽어 낙방, 다음 회(8회)에 재응시해서 합격을 따냈다. 모두 수재형답고 또 가장 외교관다운 '조크'들이었다. 
 고시파(高試派)는 이렇게 14회(62년)로 끝난다. 고시파가 끝난 이유는 한 해 앞서 발생한 5.16 덕분에 영어에 능통한 장교들이 낙하산타고 외무부로 대거 진출했기 때문이다. 고시 대안으로 등급을 한 단계 낮춘 (당시)직제로 4급을(乙)류에 해당하는 주사파(主事派) 외교관을 뽑기 시작했다.
 이 주사파는 6년 동안 계속되다 1968년 외무 고시(考試)가 부활되면서 고시파(考試派) 외교관을 등장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고시파(考試派) 3회(70년), 유명환 외교통상장관은 7회(73년)이다. 올해로 환갑을 맞는 '한국외교 60년'의 역정,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다음호에 계속>

 


 

*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시사저널·워싱턴 특파원을 지냈으며, 주요 저서로 <파리의 새벽, 그 화려한 떨림>, <모든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DJ를 평양에 특사로 보내시오>, <실록 김포국제공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