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스타워즈’읽기, “형제여, 도를 아십니까?”
[Spécial 1] ‘나쁜 장르’의 문화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사상가’로 평가받아온 슬라보예 지젝은 미국 자본주의의 현상을 비평한 글을 통해 “<스타워즈> 3부작 중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는 요동치는 세계 금융지배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그 해답을 서구식 도교와 불교에서 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글은 지젝이 2005년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한 것을 <마니에르 드부아>가 2010년 7·8월호 특집에 다시 게재했다.
조지 루카스 감독은 <스타워즈> 일대기(1)를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순간, 즉 ‘선한’ 아나킨이 ‘악한’ 다스 베이더로 변신하는 모습을 새로운 3부작 가운데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개인’과 ‘정치’를 대비해 보였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는 일종의 ‘팝 불교’로 설명할 수 있다. 루카스 감독은 “그가 다스 베이더로 변신한 것은 사물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 어머니, 연인과도 차마 헤어지지 못하며, 물체를 포기하지도 못한다. 이런 집착 때문에 그는 욕심을 내게 된다. 욕심을 낸다 함은 소유한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어두운 쪽 길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2) 그 반대편에는 결연한 남성 공동체의 모습으로 등장한 제다이 기사단(3)이 대원들에게 어떤 집착도 갖지 못하도록 한다. 이들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에 등장하는 ‘그랄의 성배’ 공동체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제국은 공화국의 부패에서 탄생
정치적인 설명은 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어떻게 공화국이 제국으로 변했는가? (동일 선상의 질문은 ‘어떻게 아나킨이 다스 베이더가 되었는가?’) 어떻게 민주정치가 독재정치로 변했는가? 이는 제국이 공화국을 정복해서가 아니라, 제국이 바로 공화국이기 때문이다.”(4) 제국은 공화국에 내재된 부정부패에서 탄생한다. “어느 화창한 날 레이아 공주와 친구들은 잠에서 깨어나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니라 제국이야. 우리는 악인들이야.’ ”(5)
민족국가들이 글로벌 제국으로 변모하는 과정 속에 고대 로마에 빗댄 현대적 암시가 내포돼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영화 <스타워즈>(공화국이 제국으로 이행하는 부분)와 민족국가가 글로벌 제국으로 이행하는 모습을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저서 <제국>(6)에서 묘사한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타워즈>에는 무수한 정치적 암시가 있으며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이들은 작품에 ‘신화적’ 힘을 부여한다. 즉, 악의 제국에 대항하는 자유세계, 팻 뷰캐넌(7)이나 장마리 르펜(프랑스의 극우파 지도자-역자)의 주장을 상기시키는 민족국가에 대한 토론, ‘민주적’ 공화국을 악의 제국에서 수호하려고 애쓰는 귀족계급 인물들(공주, 제다이 기사단 단원)의 모순, 그리고 끝으로 ‘우리는 악인이다’라는 본질적 인식 등이 이런 힘을 구성한다. 영화가 말해주듯 악의 제국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악의 제국 출현은 우리, 바로 ‘선인들’이 제국을 전복시키는 방식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과 관계된 질문이 하나 있다. 이 전쟁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문제다.
정치적 신화는 정해진 정치적 의미를 담은 내레이션이 아니라 모순된 수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빈 용기다.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은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소년 아나킨의 ‘그리스도적인’ 특성(그의 어머니는 ‘동정 임신’으로 그를 잉태했다고 주장한다)과 그가 경주에서 거둔 승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이야기’인 <벤허>의 유명한 전차 경주를 떠오르게 한다.
뉴에이지에 대한 충성 맹세
<스타워즈>의 이데올로기적 세계는 뉴에이지(8)의 이교도적 세계다. 따라서 악의 중심인물이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호응함은 당연하다. 이교도적 시각에서 그리스도의 등장은 최절정의 스캔들이다. ‘디아볼로스’(분리·분열)는 ‘심볼로스’(규합·통일)와 반대라는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 자체가 악마적 인물이다. “평화가 아닌 양날 검”을 가져다주며 기존의 통일성을 뒤흔드니 말이다. 누가복음을 보면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나와 있다.(9) 기독교적 입장은 이교도적 지혜에 비해 불균질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교도적 전통에서 악의 근원으로 비난받던 것을 초기 기독교는 가장 고귀한 행위로 간주한다. 분리하고 분열하며 모두의 균형을 해치는 요소에 의지하는 것이 그런 행위다.
이는 불교(혹은 도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이 다름을 보여준다. 따지고 보면 불교적 입장은 ‘무심함’, 즉 모든 열정이 억제된 상태다. 반면 기독교의 ‘사랑’은 존재와의 관계 질서에 위계를 도입하는 열정이다. 사랑은 폭력이다. 비단 ‘때리지 않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발칸반도의 속담과 같은 의미만은 아니다. 사랑의 폭력은 존재를 맥락에서 떼어내버리고야 만다. 2005년 3월,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가 거짓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릇된 가르침(즉,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후손을 두었다는 내용 등)을 확산시킨다며 <라디오 바티칸>을 통해 강경하게 비난했다. 이런 행보의 우스꽝스러움은 차치하고, 그의 말이 실은 옳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빈치 코드>는 기독교를 뉴에이지의 틀에 놓고 남성적 원칙과 여성적 원칙 간의 균형 측면에서 바라봤다. 다시 <시스의 복수>로 돌아가보면, 이 영화는 혼돈스러운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허술한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뉴에이지의 이러한 주제들에 충성을 맹세한 셈이다. 아나킨이 다스 베이더로 변하는 장면은 <스타워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지만 그에 걸맞은 비극적 위엄에 도달하지 못했다. 개입해 선을 행하고 사랑하는 이들(아미달라)을 끝까지 지켜냄으로써 결국에는 어두운 곳으로 떨어진 아나킨의 오만함에 집중하는 대신에 그저 아나킨을 우유부단한 투사처럼, 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악한 황제의 지배하에 놓인 채 악으로 빠져드는 인물처럼 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 조지 루카스는 공화국과 제국, 그리고 아나킨과 다스 베이더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대조할 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 아나킨을 괴물로 변신시킨 것은 바로 악에 대한 그의 집착 자체다.
자본주의 친구로서 불교·도교
그렇다면 이들 관계에서 어떤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유럽식’ 기술과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승승장구하는 지금, ‘이데올로기적 상층 구조’로서 유대기독교적 유산은 뉴에이지의 ‘아시아적’ 사상의 공격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도교가 세계 자본주의의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의 역동성이 주는 스트레스에 대한 치료약으로 일종의 ‘서구적 불교’가 대두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내적 평화와 평정을 획득·유지하게 도와주면서 현실에서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보완물로 작용할지 모른다. 사람들에게는 기술 발전과 이에 수반되는 사회 변동 속도에 적응할 능력이 이제 더 이상 없다. 세상은 너무빨리 변하고 있다. 도교나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탈출구를 제공받을 수 있다. 변화의 속도를 맞추려 들기보다 차라리 포기하고 ‘스스로를 방임’하는 것이 낫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핵심과는 그다지 상관도 없는 이런 가속화와 내면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이번 기회에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며 지상의 참혹함에 대한 상상 속 대체물일 뿐이라는 마르크스의 전형적 주장을 다시 꺼내들고픈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그만큼 ‘서구적 불교’는 얼마든 외관상 정신건강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의 역동성에 온전하게 동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스타워즈> 에피소드3에 필적하는 것을 찾는다면 알렉산더 오예의 다큐멘터리 <모래성, 불교 그리고 글로벌 금융>(Sandcastles, Buddhism and Global Finance·2005)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경제학자 아르누트 부츠,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 그리고 티베트 불교를 가르치는 종사르 키옌체 린포체의 해설과 함께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상황이 내포한 어려움을 놀랍도록 모호하게 보여주었다.
투기에 동참하되 마음은 저 먼 곳에?
이 다큐멘터리에서 사센과 부츠는 글로벌 금융의 규모와 위력, 영향을 논의한다. 자본시장은 단 몇 시간 만에 회사 혹은 경제 전체의 가치를 높일 수도,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반면 키옌체 린포체는 인간 감각의 본질에 대한 생각들을 내세우며 이들에게 대응한다. “한낱 감각에 불과하며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돼라”고 그는 말한다. 사센은 “세계 금융은 본질적으로 연속적인 움직임의 총체로서, 이는 사라졌다가는 다시 등장하곤 한다”고 단언한다.
불교의 시각에서 볼 때 세계 금융의 넘치는 부(富)는 객관적 현실과 단절된 환상일 뿐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보이지 않는 주식거래소, 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들이 유발한 인간의 고통, 이것이 바로 객관적 현실이다. 몇 시간 안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막대한 재산보다 현실의 비본질적 특성을 더 잘 보여주는 증거가 있을까? 불교 존재론의 근본 원칙에 따르면 ‘객관적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선물시장 투기가 ‘객관적 현실과 단절’됐음을 안타까워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이 다큐멘터리는 이처럼 ‘시스의 복수’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여기에서 기억할 비판적 교훈은 바로 자본주의 놀음에 투신해서는 안 되지만 그 놀음에 투신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내면적 거리만 유지한다면 말이다. 우리를 속박하는 원인은 (존재하지도 않는) 객관적 현실 자체가 아니라 물질적 사물에 대한 우리의 욕망, 욕심, 그리고 과도한 집착임을 우리는 자본주의와의 대면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욕망을 포기하고 내적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와 도교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이데올로기적 보완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내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동참할 수 있게 해주니 말이다. 자본주의자가 되어도 좋다. 그저 거리를 두고 선(禪)한 모습만 유지하면 된다.
<각주>
(1) SF 서사영화인 <스타워즈>는 총 6개 작품이며 2개의 3부작으로 나뉜다. 오리지널 3부작은 <새로운 희망>(1977), <제국의 역습>(1980), <제다이의 귀환>(1983)으로 되어 있다. 이후 3부작은 <보이지 않는 위협>(1999), <클론의 습격>(2002), <시스의 복수>(2005)로 구성된다.
(2) ‘어두운 승리’, <타임매거진>, 런던, 2002년 4월 22일자.
(3)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다이 기사단’은 포스에 대한 믿음과 존경을 공통분모로 지닌 이들의 집단으로서 환경을 파악하고 변화시키는 일종의 초감각적 힘을 대표한다. 제다이의 숙적은 시스다.
(4) <타임매거진>, 앞의 출처.
(5) <타임매거진>, 앞의 출처.
(6) ‘에그질 출판’, 파리, 2000.
(7) 패트릭 J. 뷰캐넌(Patrick J. Buchanan). 가톨릭 극보수주의 평론가, 2000년 미국 대선 후보로 출마.
(8) 198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등장한 사이비 철학의 잡동사니 인생에 대한 질문들에 천사, 외계인, 비교(秘敎), 상징주의, 동양의 지혜, 전생, 심령 경험 등을 닥치는 대로 언급하며 답한다.
(9) 누가복음 14장 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