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가스와 황금눈물
2018-05-31 안나 파이겐바움 | 영국 본머스대학 연구원
1968년 5월 혁명부터 최근의 노트르담데랑드 지역의 신공항 건설 문제, 낭테르의 대학입학 선발문제와 관련된 시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 시위 현장에는 ‘최루가스’라는 공통된 요소가 있다. 그리고 비공격적인 무기로 여겨져 온 최루가스는 한 세기 만에 치안유지를 위한 보편적 도구로 자리 잡았다.
다른 산업 분야와는 달리, 치안유지 산업은 사회문제나 정치적 위기 상황을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2011년 ‘아랍의 봄’을 비롯해 세계 각국을 뒤흔든 각종 시위가 이어지면서 최루가스와 진압 장비의 판매량이 매우 증가했다. 업자들은 계약서를 손에 쥔 채 전 세계를 종횡무진으로 활동하고 있고, 전문가들은 생산업자와 판매업자들에게 그날의 거래처를 추천하기 위해 작은 시위도 놓치지 않으려 호시탐탐 눈을 밝히고 있다. 이들의 주력 상품은 단연 최루가스다. 각국 정부로부터 고통 없이 사회분쟁을 해소해줄 가장 믿을만한 특효약이자 무질서를 해결해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고 있는 최루가스는, 이에 대적할 경쟁자도 없이 국경을 초월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최루가스는 어떤 피해를 유발할까? 공중보건의 개념에서 볼 때 어떤 문제를 일으킬까? 그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한다. 아무도 이를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루가스의 피해자 집계를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있는 국가는 없다. 뿐만 아니라 최루가스의 이동과 사용, 또한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이나 환경에 미치는 유해성에 대해 데이터를 제공해야 할 의무도 없다. 인체에 무해하며, 단순히 눈을 따갑게 하는 연기에 불과하다는 설명만이 한 세기째 반복되고 있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Human Rights, PHR)’의 발표에 의하면, 지난 2011년부터 2012년까지 바레인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총 34명이 최루가스 때문에 사망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단순 사고’로 일축하고 있다.
사실 최루가스는 가스가 아니다. 눈물을 흐르게 만드는 최루작용을 가진 이 화학물질은 CS(2-클로로벤즈알말로노나이트릴), CN(클로로아세토페논), CR(디벤조옥사제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성분들은 자극성 물질로 기체, 고체(겔 형태), 또는 액체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합물은 오감 전체에 동시다발적인 영향을 미치고 신체적, 정신적 외상을 유발한다. 최루가스는 눈물, 화상, 시각장애, 코막힘, 비강 또는 구강 내 염증, 연하장애, 타액분비촉진, 폐 압착, 기침, 질식감, 구역질 및 구토 등의 복합적인 피해를 일으키며, 유산이나 장기적인 근육 손상 또는 호흡기 이상을 유발하기도 한다.
화학무기는 관대한 무기?
화학무기의 역사는 고대시대부터 시작됐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는 교전군이 포위한 도시에 유황가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과학의 발달과 함께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윤리 논쟁이 시작됐다. 1899년과 1907년의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최초로 화학 및 생물학 무기 사용을 저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관련 내용이 모호하게 규정된 탓에 결국 협정은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결국 몇 년 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신형 독극물 발명을 위한 연구의 장이 공공연히 펼쳐지게 됐다.
최루가스(브롬화크실릴렌)의 경우 1914년 8월 프랑스 국경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당시 프랑스군은 브롬화크실릴렌로 가득 찬 수류탄을 상대편 참호로 던졌다. 브롬화크실릴렌은 무능화 및 자극 작용을 하지만 실외에서 사용할 경우 치명적이지는 않은 물질이다. 이듬해인 1915년 4월 독일에서는 보다 치명적인 물질인 이페리트 가스, 이른바 ‘머스터드 가스’가 사용되기 시작했다(겨자 냄새가 나서 붙은 별명이다-역주). 이는 염소가스 화학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한 역사상 최초의 사례였다.
미국의 경우, 초기에는 이 분야 경쟁에서 다소 뒤처진 듯했으나, 곧 따라오기 시작했다. 미국 당국은 전쟁 시작과 함께 전쟁용 독가스 및 해독제 개발을 위한 연구위원회를 신설했고, 화학전연구국(Chemical Warfare Service, CWS)을 만들어 재원과 인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1918년 7월 당시 관련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과학자의 수만도 2천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후 전쟁이 끝나면서 화학전에 대한 군부의 입장은 둘로 나뉘었다. 화학무기에 따른 참혹한 피해를 목격한 이들은 화학전의 비인간성을 규탄했고 특히 화학무기가 퍼뜨리는 공포와 불안이 그런 특성을 더욱 가중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포탄 사격에 비해 인명 손실이 적다는 점에서 화학무기가 어떤 면에서는 “관대한 무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화학자인 존 버든 샌더슨 홀데인은 전쟁용 독가스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감상적으로 비판하는 이들에게 “어째서 칼은 되고 머스터드 가스는 안 된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장 파스칼 잰더스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진 이런 논쟁이 우리에게 이중적인 유산을 물려줬다고 봤다. 먼저는 전쟁이 일어난 1914~1918년 개발된 신형 화학무기들과, 오래전 헤이그 평화회의(1899년)에서 다뤘던 ‘독가스’의 개념을 분리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런 구별논리는 다수의 국제조약 속에서 재등장하고 있다. 일부 화학무기는 금지하지만 치명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무기들은 승인할 수 있도록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다른 독성 물질에 비해 최루가스가 합법적인 경로로 보다 쉽게 유통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 화학전 논쟁이 물려준 또 하나의 유산은 화학공업의 확대와 상업적 이윤을 집중적으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화학 연구의 창의성을 군사 분야의 틀 안에만 가둔다면 심각한 폐해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인데, 이런 주장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서로 손을 잡은 강대국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베르사유 조약(1919)과 제네바 의정서(1925)를 시작으로 국제법 안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전쟁은 과거의 일이 됐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자국 국경 내부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국경 외부로는 식민통치의 종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 결과 최루가스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고, 그중에서도 미국 화학전연구국과 그 수장이자 다수의 훈장을 받은 장군이기도 했던 에이머스 프라이스 국장은 최루가스의 열정적인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20년대, 최루가스의 황금기
192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최루가스의 황금기가 도래했다. 프라이스 국장은 전쟁 중 이루어진 화학무기의 발전을 기회 삼아 최루가스를 일상적 사용이 가능한 정치적 도구로 바꿔 놓았다. 치열한 로비 활동을 통해 최루가스는 독성 무기가 아닌 치안 유지를 위한 비(非)공격적인 도구에 가깝다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변호사와 경찰을 양옆에 거느린 채 수많은 광고업자, 과학자, 정치인들을 끌어들여 각종 매체를 통해 ‘전쟁용 가스가 평화의 시대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홍보하도록 했다.
당연하게도 “평화의 가스”라는 말을 반복해서 싣는 데 가장 열심을 보인 것은 경제 전문지였다. <가스 에이지-레코드(Gas Age-record)>는 1921년 11월 6일 자 신문에서 프라이스 국장의 사진을 실으며 화학전연구국의 “역동적인 수장”이 “폭도와 야만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가스와 연기를 이용하는 것을 면밀히 연구했다”면서 “그는 경찰과 식민당국이 질서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비로소 사회 무질서와 야만적인 폭동이 점차 줄어들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 최루 가스는 개인을 군중 심리로부터 격리하는 데 놀라우리만큼 적합하다. (…) 전투용 가스를 완화해 만든 이런 형태의 가스를 폭도 통제용으로 사용할 때의 장점 중 하나는 경찰이 무기 사용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초기의 홍보물들은 최루가스가 통증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뛰어난 진압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반목을 해소할 가능성 덕분에 곤봉과 소총뿐이었던 기존의 진압 장비 시장에서 최루가스가 열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 게다가 가스는 증발해 사라지기 마련이다. 경찰은 출혈이나 타박상을 남기지 않고도 “부정적 여론을 최소화”한 채 시위단을 해산시킬 수 있다. 결국 최루가스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고문이라기보다, 국가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형태의 폭력으로 자리 잡는다.
프라이스 국장과 그 세력은 라디오와 신문에서 그치지 않고 공개 시연의 자리를 마련해 최루가스를 본격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1921년 7월의 어느 날, 필라델피아 중심가로부터 멀지 않은 공터에 프라이스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스티븐 J. 드 라 노이가 다량의 최루가스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최루가스의 장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필라델피아 경찰관들을 초대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수많은 기자들은 제복을 입은 200명의 경찰관들이 직접 최루가스를 맞아 보이는 이 광경을 기록으로 남겼다.
최루가스가 실험에서 벗어나 실제 상황에서 사용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다. 수천 명이 넘는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든 1932년 7월 29일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이른바 ‘보너스 군대’라고 불렸던 이 퇴역병들은 정부가 누락시킨 추가수당 지급을 요구하기 위해 가족들까지 대동한 채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한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이들 위로 최루탄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갑작스러운 피난 소동 속에서 3명이 사망하고 5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임산부 한 명은 유산하기도 했다. 사망자 중에는 어린이도 포함돼 있었는데 최루탄 발포 이후 수 시간 만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질병에 의한 사망이었지만 병원 대변인 측은 독가스를 마신 것이 “결코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식민지, 최루가스의 유망한 판로
이렇게 쫓겨난 퇴역 군인들은 최루가스를 ‘후버의 배급품’이라고 불렀다. 시위 행렬에 군부대를 보낸 허버트 후버 대통령(1929~1933)의 이름을 딴 이 표현은 점점 깊어져 가던 당대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꼬집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경찰 상층부와 관련 업계에는 오히려 호재가 됐다. 그날 사용된 최루가스를 생산한 ‘레이크 이리 케미컬(Lake Erie Chemical)’은 유혈로 얼룩진 당시의 장면을 망설임 없이 제품 카탈로그에 포함시켰다. 얼마 후에는 연기 속에서 도망치는 오하이오와 버지니아의 파업 노동자들의 모습도 포함됐다. “화학무기 가스를 손에 든 한 명은 무장한 1천 명과도 겨룰 수 있다”는 슬로건도 당당히 홍보 책자를 장식하고 있었다. 생산 업체들은 최루가스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고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이 폭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영구적인 손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장담했다. 당시에도 줄타기 마케팅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를 거치며 미국 정부는 사회적 분쟁을 통제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최루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 상원의 한 위원회의 발표에 의하면, 1933~1937년 “파업이 일어나거나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 주로 판매된 최루가스의 양이 125만 달러(현재 가치 기준으로 약 2,100만 달러)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시야를 가리고 숨을 막는’ 최루가스 산업이 발견한 또 하나의 유망한 판로는 바로 식민지였다. 1933년 11월 영국의 팔레스타인 최고 감독관이었던 아서 워쇼프 경은 이 놀라운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영국 식민성에 보내는 서한을 통해 “팔레스타인 내 경찰이 최루가스를 사용한다면 불법 집회나 폭도들을 해산시키기에 매우 유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시내 구시가지의 좁고 굽은 골목길에서는 총기류가 과도한 인명 피해를 낳을 수 있는 만큼 가스 사용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다른 식민지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이어졌다. 1935년 시에라리온의 식민당국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마찰을 빚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란(지금의 스리랑카)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영국의 신임 식민지 국무장관이었던 말콤 맥도널드에게는 최루가스에 대한 종합적 정책을 내놓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를 위해 그가 조사한 각국의 최루가스 이용 사례들은 다음과 같았는데 독일의 경우 1933년 함부르크 파업 시위에서, 오스트리아에서는 1929년 공산당 세력을 탄압하는 데 최루가스가 사용된 바 있었고, 이탈리아는 최루가스를 기동대의 기본 지급품으로 포함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이미 가스 사용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 각국 정부에 있어 최루가스는 변화에 대한 요구를 억압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로 떠올랐다. 최루가스가 물리적 효과(군중 해산)와 심리적 효과(사기 저하)라는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는 만큼 정책에 대한 저항 시도를 진압하기에 이상적인 수단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평화 시위 또는 소극적 시위에 대해서도 합법적으로 가스를 분사할 수 있으므로 비폭력 시위의 진압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최루가스는 시위를 중지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든 형태의 시민 불복종을 무너뜨릴 수 있는 다기능적 무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런 최루가스의 정치적 기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각종 국제 협약을 통해 전쟁 중에는 어떤 형태의 화학무기도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돼 있지만, 각국 기동대에서는 여전히 개인 또는 행렬에 대한 임의적인 독가스 사용이 허용되고 있다. 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경찰은 보란 듯이 최루탄 발사기를 허리에 차고 있다. 결국 치안 유지 산업이 지금과 같이 번창하게 되고 전 세계의 시위대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된 것은 이런 모순을 거의 만장일치로 받아들인 데 있다.
글·안나 파이겐바움 Anna Feigenbaum
영국 본머스 대학 소속 연구원. 저서로는 <Tear Gas: From the Battlefields of World War I to the Streets of Today>(Verso, London, 2017)가 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파괴적 혁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