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우드’의 힘, 신화로 빚은 인도 오락의 열정

[Spécial 1] ‘나쁜 장르’의 문화

2010-07-12     엘리자베스 르케레

오락성에 놀라우리만치 의미를 부여하고, 인도의 우주 생성 이론과 신화에서 소재를 따오며, 이미 존재하는 모든 예술을 하나의 독창적 형태로 녹여내는 등 인도 영화는 사람의 굉장한 열기를 불러일으키며 ‘귀족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서구적 구분을 산산조각 낸다.

인도 동남부에 위치한 첸나이의 한 서민 동네, 어느 평범한 영화관이다. 인도의 다른 2만여 개 상영관과 다름없이 이 영화관 또한 1천 석 이상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며 사람들로 붐볐다. 모든 좌석이 만석이고 제일 끝줄에서는 보조의자가 삐걱거렸다. 그날 오후, 영화 <어느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다>를 놓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주 전부터 타밀나두의 주도 첸나이 거리 곳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정도로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극장 안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몇몇 그림자가 화면을 가린다. 남자 두 명은 앞 층계에 담배를 태우러 나간다. 인도의 한 영화관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일요일의 풍경이다. 

인도 사람이 영화와 맺는 관계를 고려할 때, 단순한 일화를 넘어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영화에 대한 인도 사람의 열기는 다소 경박하게 보일 수도 있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뭄바이, 첸나이, 방갈로르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영화관 안에서의 인상 깊은 경험을 잊지 못한다. 주인공이 헌신짝을 집어던지며 ‘나쁜 놈’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대목에서는 관객이 완전히 몰입해버려, 수군거림이 들려와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이 없다. 모욕당한 아버지가 결국 버릇없는 딸의 뺨을 후려칠 때는 박수가 터져나오고, 춤과 노래가 흘러나오면 감정과 열기가 고조돼 사람들은 따라 부르기에 여념이 없다. 관객은 배우에게 호통을 치고, 찬사를 보내며, 질책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시끌벅적한 영화관, 몰입의 절정

영화가 인도 문화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은 영화의 잡다한 속성 덕분이다. 3시간 만에 많은 것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며 춤과 노래, 은밀한 로맨스, 깊은 시름 등을 한데 뒤섞어놓은 영화는 대번에 인도인에게 선택과 사랑을 받는다. 꼭두각시 인형극, 카타칼리(무용극), 슬라이드 극 등 전통 예술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연장으로 인식됐다.

케랄라 출신 감독 아도르 고팔라크리시난과 함께 일하는 제작자 조엘 파르주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로부터 인도는 언제나 이미지가 엄청나게 혼재하던 곳이다. 자이나교 불화에서 괘불, 그림자극에서 바라트나트얌(인도 남부의 전통 춤)에 이르기까지, 원시시대 이후 신화적 존재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지거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1)

1894년부터 이미 슬라이드 극인 <해질 무렵 어릿광대의 램프>는 그림자극과 꼭두각시 인형극에 착안한 애니메이션 영상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작품을 만들어낸 마하데오 팟와르드한은 기계장치를 움직이고,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 등장인물의 행동을 내레이션과 노래로 설명한다. 그로부터 2년 후, 인도에서 가장 서구화된 도시 뭄바이에 영화라는 장르가 상륙한다. 1896년 7월 7일, 뤼미에르 형제의 촬영기사인 모리스 세스티에는 초호화 호텔인 왓슨호텔에서 첫 상영회를 연 뒤, 이어 도심의 노벨티 극장에서 상영회를 조직한다. 의자는 고급스럽고 푹신했으며, 좌석 가격은 저렴했고, 남성 관객 시선에서 여성 관객을 보호하기 위한 베일도 마련됐다. 웅장한 관현악단은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영화는 즉각 성공했다. 제작자 슈레시 진달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영화 산업이 인도의 국내 산업과 많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발명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인도 국민은 결코 영화를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2)

우주의 불가사의가 대중화의 원천

영화가 인도 사람이 선호하는 여가 수단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인도 우주 생성 이론의 불가사의를 영화화하면서, 이를 나름의 방식대로 고치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상영 시간이 대개 3시간을 넘어가고, 2시간은 항상 넘어서기 때문에) 영화는 시간이 많이 드는 여행처럼 여겨지고, 신화나 전설의 내용을 주저 없이 베끼는 허구 세계 속에 저마다 즐겁게 빠져든다. 실제로 인도 영화 산업에서 맨 처음 대중적 성공을 거둔 작품은 대부분 신화적 내용을 다루었으며, 대표작은 인도 최초의 픽션 영화 <하리샨드라 왕>(다다사헤브 H. 팔케·1912)이었다.

서구에서 잘된 시나리오의 첫 번째 덕목인 독창성은 오히려 인도 관객의 마음을 떠나게 할지도 모른다. 1917년 벵골 소설가 사랏 찬드라가 쓴 <데브다스>는 자민다르(지주)의 아들이 천한 신분의 여인과 나누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인데, 문학계 고전이 된 환상의 멜로 드라마가 영화로 각색된 건 (비말 로이가 제작한 최고의 <데브다스> 1955년 작, 1994년 미스 월드 아이쉬와라 라이를 주연으로 기용해 산제이 릴라 반살 리가 제작한 2002년 작 등) 모두 17편밖에 안 되나, 그 줄거리를 기본 골조로 한 작품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인도에서 영화는 끊임없이 전통 문화에서 소재를 끌어오는 반면, 전통 문화 또한 영화에서 폭넓은 영감을 얻고 있다. 지역의 전통 문화와 서구의 현대 문화가 아무렇지 않게 서로 녹아드는 융합 공간에 대해, 정신분석학자 수디르 카카르는 “신생하는 범인도적 문화의 주된 주형틀”이라고 설명한다.(3)

“영화는 많은 대중에게 영향을 주어 사회적·지리적 범주를 넘어선다. (중략) 전통 가곡 등 지역의 민속춤이나 특별한 음악적 형태가 첸나이 스튜디오 문턱을 넘어서면, 여기에 서구를 포함한 다른 지역의 음악 또는 안무적 모티브가 추가되어 영화 무용으로 변모한다. 테크니컬러 기법과 입체 음향술을 거치며 새로운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난 오리지널은 원래 형태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상황, 대사, 장식 등도 인도의 서민 극장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인도 사람에게는 영화가 일종의 아편인 것일까? 인도인들이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개인적 근심과 불행을 잊어버릴 정도로 영화 속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점은 분명하다. 이것은 ‘상영’이라는 현상을 ‘다르샨’에 접목시키려는 이론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다르샨은 상호적이고 유용한 보는 행위인데, 나 자신도 다르샨에 의해 보이는 동시에, 신성성 혹은 중요한 인물의 신성한 이미지를 보는 행위만으로도 유익하다. 이런 가설로 인도 영화의 엄청난 성공이 설명되기는 하나, 인도 사람과 영화의 열정적 관계를 설명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체제와 제도에 대한 순종 내면화

수디르 카카르는 영화계의 ‘카스트 제도’를 기억한다. 그가 어린 시절, 펀자브에서는 모험영화나 (쿵후의 현지 버전 같은) 액션영화를 가장 하위에 두는 반면, 신화나 역사를 다룬 영화를 최상위 작품으로 분류했다. 게다가 해피엔딩으로 끝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지막 순간의 반전 등) 결국 비열한 사기꾼에 대항해 과부와 고아가 승리하도록 만드는 작위적 개입이 이뤄지는데, 이는 과도한 설정이라도 전통적 위계질서를 뒤집지 않는 한 모두 허용하는 굳건한 문화적 측면을 보여준다. 인도 영화가 국민에게 ‘아편’ 같은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다. 종종 ‘발리우드’의 병폐로 지적받는 키치적 성향의 흔적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그보다는 사물이든 존재든 각자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자리를 부여해주는 제도적 속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질서를 전복하려는 모든 것은 그만큼 사실 ‘왜곡’으로 여겨진다.

‘상상력과 우상’이라는 제목의 글(4)에서 바스카르 고즈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청렴함, 부정의, 카스트 제도에서 비롯된 차별 등을 소재로 다룬 영화 가운데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성공을 거둔 것은 사회적 조건이나 인간관계를 연구하고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적 조건을 이용해 대중의 관심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불가촉천민>(프란츠 오스텐·1936)이라는 작품도 카스트 제도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다만 이 제도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매력만 이용할 뿐이다. 이 영화들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작품에서 나타나는 비극과 비애에 동참해달라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가난과 빈곤, 그 밖의 다른 사회적 고통의 정서적 매력을 이용하는) 인도 영화가 상정하는 공정성이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반대로 사회적 현상의 가장 효율적인 매개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메부브 칸>(1957)의 여주인공은 평생을 한 고리대금업자에게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대지, 보석, 심지어 남편까지 빼앗아간 그에게 어떤 반항도 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데, 그 이유는 아들이 그 사기꾼을 암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족의 명예를 구해야 한다. 국립동양언어문화대학 올리비에 보세 교수는 “서양에서 대중 영화는 순전히 오락에 불과하지만, 인도에서는 이를 종교와 결부시킨다”고 지적한다. “인도 사람은 현실과의 상관관계를 찾기 위해 영화관에 가지 않는다. 이들이 영화관에 가는 것은 효율적 방식으로 신과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다. 일종의 성지순례 차원에서 영화관을 찾는다. 영화가 가진 최고의 효율성은 세상의 질서를 재확인시킨다는 점이다. 따라서 선과 악의 대립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학자인 엠마뉘엘 그리모도 다음을 확인시킨다.(5) “영화 <사랑의 서>(라지브 H. 카푸르·1996)에서 여주인공은 영화 시작 후 20분 지점에서 강간을 당한다. 여자가 당한 강간은 (그 여자에게 손댈 정당한 권리를 가진 유일한 존재인) 남자 주인공을 만나기 전 시점에 발생했다. 결국 많은 관객이 이러한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떠버렸다.”

영화와 삶의 극단적 상호침투성

이처럼 관객은 자신이 알아서 ‘컷’을 한다. 영화가 자신의 문제, 자신의 딜레마와 갈등에 대해 답을 찾게 하는 만큼 개인적 관점에서 편집이 되는 것이다. 관객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상황에 과감히 맞서기 위한 이야기는 시나리오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이처럼 개인적 삶과 영화가 상호 전이되는 상황은 비단 시나리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의 의상과 장식은 물론 배우에게도 해당된다. 그리모는 차를 파는 영세 상인 라캉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라캉은 스타인 살만을 광적으로 숭배했다. “살만이 보호 지역에서 불법 수렵을 하다 체포되자 라캉은 즉각 이에 대응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는 자기만의 영화 금식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영화적 요소를 이용해 자신에게 일종의 시련을 부과하는 방식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살만이 겪을 시련에 대응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게다가 중학생 무리는 학급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듯 친근하게 영화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와 실제 삶 사이의 극단적 상호 침투성을 인도만큼 발전시킨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정계와 쇼비즈니스계가 뒤섞이는 타밀나두의 정치가 이를 증명해준다. 슈퍼스타 M. G. 라마찬드란(6)은 타밀나두주 총리가 되었다. 1987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미망인이 총리직을 승계하려 했으나, 고인의 젊은 정부인 배우 자야랄리타가 이를 저지했다. 이후 결국 타밀나두를 통치한 건 자야랄리타였다.

글•엘리자베스 르케레 Elisabeth Lequeret
RFI(Radio France International) 기자. 저서로 <아프리카 영화: 자신만의 시각을 추구하는 대륙>(Paris, 2003)이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각주>
(1) 총서, <인도 영화: 그 기원에서 현재까지>, Cinémathéque française, Paris, 1997.
(2) 브뤼노 필리프, ‘영화의 세기’, <르몽드> 권외 특별호, 1995.
(3) 수디르 카카르, <인도에서의 에로스와 상상력>, Des femmes, Paris, 1980.
(4) Indomania, op. cit.
(5) 엠마뉘엘 그리모, <발리우드 필름 스튜디오 혹은 봄베이에서 영화가 어떻게 제작되는가?>, CNRS Editions, Paris, 2004.
(6) 1930년대부터 1970년대 말까지 배우로 활동한 M. G. 라마찬드란은 2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