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과의 독립을 표방하는 아미앵노동헌장
2018-05-31 미셸 피주네 | 파리2대학 명예교수
어떤 이들은 ‘다시 살펴보자’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냥 넘어가자’고 주장한다. 아미앵헌장은 노조가 정당·정파로부터 독립된 것임을 표방한 탓에 시시때때로 노동자들의 단합된 투쟁에 걸림돌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1906년 노동총동맹(CGT)이 채택한 이 아미앵헌장은, 결코 노동과 정치를 철저히 구분 짓고 있지는 않다.
지난가을 노동법 개혁반대 투쟁이 많은 난관에 부딪히면서, 또다시 노조와 정당의 관계에 관한 해묵은 논쟁이 가열됐다. ‘굴복하지 않은 프랑스(FI)’당 대표, 장뤽 멜랑숑은 1906년 체결된 아미앵헌장을 주야장천 들이대는 노조를 향해 날 선 비난을 했다. 사실상 그는 아미앵헌장이 ‘단합된 투쟁’에 걸림돌이 된다고 간주했다. 멜랑숑 대표는 FI당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노동법 개혁도, 사회보장제도 해체도 노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극도로 정치적인 내용을 포함한,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다.”
1906년 10월 8~16일, 당시 프랑스의 유일한 노조동맹이던 노동총동맹(CGT)은 아미앵에서 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바야흐로 운동가들이 5월 1일 절정으로 치달았던 격렬한 노동투쟁(총파업)을 이제 막 끝낸 시점이었다. 노동자대회에서 다뤄야 할 의제는 수두룩했다. 특히 섬유산업연맹의 요청에 따라 주요 의제로 ‘CGT와 정당의 관계’가 거론됐다. 격렬한 토론 끝에 이날 대회에서는 노조 활동을 정당, 국가, 경영자의 활동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아미앵헌장이 채택됐다.
사실 노정 분리는 비단 어제오늘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노동계급은 자신들만의 특수한 성격과 독자적 이익, 계획 등을 주장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정치적 자율성 획득을 위해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니었다. 19세기 초부터 많은 노동운동가들의 끈질긴 노력이 필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는 직종별로 노동자 간 이질성이 커서 하나의 노동집단에 희석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고, 영국, 벨기에, 독일처럼 도시 안에 프롤레타리아 지역이 따로 형성된 것도 아니었다. 그로 인해 물론 노동계급은 ‘고립’이라는 위험으로부터는 보호받았지만, 문제는 노동자들만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지지 기반으로밖에는 기능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처음으로 노조 자율성에 대한 요구가 명확하게 제기된 것은 1830년대였다. 왕정복고에 종지부를 찍은 ‘영광의 3일’ 사건(7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의 혁명전투) 이후, 한 임시 정기간행물(노동계급의 신문, <라르티장>)이 “가장 다수이자 가장 유용한 사회계급”을 향해 절절히 호소했다. 이어 1832년에는 금도금공연맹이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나아가 노동하지 않는 자까지 먹여 살리기 위해 노동하는 이들이 계층사다리의 맨 아래”에 머무르는 현실을 개탄했다. 사회적 지지기반이 절실했던 공화주의 야권 세력은 노동자와 결집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내 세월과 탄압의 시련 앞에 무릎을 꿇었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싹튼 형제애로 잠시 달콤한 꿈에 젖었던 노동자들은 6월에 이르러 환상이 산산조각 나는 비극을 맞이했다. 제2제정은 노동자들이 친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실망스러운 비극은 노동계급이 독자행보를 결심하며 1860년 선거에 ‘여러 노동자 후보’를 입후보시키게 되는 단초가 됐다. 한편 1871년 런던에서 “노동자 스스로의 힘”에 의한 해방을 요구한 국제노동자협회의 호소 속에도 이런 독립사상이 반영됐다.
당시 초기에 탄생한 여러 조합들은 본래 노동자와 고용주 간 협의의 장이 되기를 기대하며 설립됐지만, 고용주의 악의적인 행태로 인해 결국 노동자들만의 모임으로 국한됐다. 노동자들의 든든한 지지대인 조합은 좀 더 대국적인 관점에서 신용·상호·협동·직능조합의 기능까지 폭넓은 관심을 보였다. 1871년 파리코뮌이 무참히 진압되면서 파리에서는 조합이 유명무실화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부활했다. 1876년 이후로는 매년 조합과 ‘스터디서클’, 공제조합, 협동조합 등이 한 데 모인 ‘노동자 대회’가 개최됐다. 1879년 마르세유에서 열린 노동자 대회에서, 프랑스사회주의노동자당연맹(FPTSF)이 결성됐다. 이로써 하나의 다중적인 노동자 운동이 형성됐다.
“노동총동맹(CGT)은 정치의 밖에 머물 것”
1884년 노동조합의 활동이 합법화되면서 노조와 정당이 일부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온건 공화주의 세력은 노사평화에 역점을 둔 생디칼리슴(정치와 정당 개입을 거부한 노조운동)에 기대를 걸며, 법적으로 노조의 활동 영역을 “산별 이익의 보호”로 제한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노조와 정당이 완전하게 결별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많은 노조가 FPTSF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또한 당시 사분오열돼 탄생한 각종 사회주의 정당조직에도 가입했다. 쥘 게드가 이끄는 프랑스노동당(POF)은 독일 사민주의 모델을 좇아, 노조의 전략을 정당이 주도적으로 통제하려한다는 점에서, 다른 정당조직과는 차이를 보였다. 이것은 훗날 체결될 1906년 아미앵헌장에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아미앵헌장의 내용은 사실상 당시 영국식 해법에 반대됐다. 영국에서는 유력 노조들이 노동당 창설을 주도하며, 노동당 소속의 의원들이 의회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대변하게 만들었다.(1)
아미앵 대회 때 CGT와 정당 간의 관계가 의제로 설정되자, 처음 아미앵에 모인 대표들의 머릿속에는 앞선 언급된 선례가 떠올랐다. 논쟁의 포문을 연 것은 섬유산업연맹의 대표이자 확고한 게드주의자인 빅토르 르나르였다. 그는 사회당 의원들이 노동조건의 개선에 관한 법률을 지지하게 만들자는 주장을 펼쳤다. 다시 말해 “주요노동개혁을 더욱 쉽게 관철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임시 혹은 상임대표단을 통해, CGT가 사회당과 함께 협의”를 해나가는 방안을 제안한 것이다.
1895년 창설 이후로 줄곧 CGT는 사분오열을 거듭하던 사회주의 세력의 정치적 투쟁터가 될 것을 우려했기에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노리는 게드주의자들의 입장과는 거리를 두기를 원했다. 그런 만큼 CGT는 처음부터 “모든 정파의 밖에 머물 것”을 정관에 명확히 규정해왔다. 더욱이 1902년에는 “선거라는 정치적 활동에 CGT 회원의 이름이나 CGT의 지위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추가규정까지 넣었다. 아미앵 대회 때 많은 이들은 르나르의 제안을 국제노동자협회프랑스지부(SFIO)에 CGT를 종속시키려는 새로운 시도로 해석했다. SFIO는 당시 1년 전쯤 사회주의 세력의 통합으로 탄생해 새롭게 부상 중인 정당이었다.
1906년 아미앵 대회 때 노정 분리 문제와 관련해 모두 7가지 안이 발의됐다. 개량주의 성격이 강한 오귀스트 쾨페와 그가 속한 출판산업연맹은 겉보기에는 노조연맹의 반군국주의와 반애국주의에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빅토르 르나르와 가까워 보였지만, 노정문제를 두고 서로 결집할 만큼 가깝지는 않았다. 사실상 그들은 의회와 노조활동의 공조를 놓고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반면 정당에 대해 “철저한 중립성”을 지킬 것을 주장하는 쾨페의 견해는 CGT의 서기장인 빅토르 그리퓌엘이 표방하는 반정치주의와 오히려 전략적으로 더 잘 맞아떨어졌다.
더욱이 그리퓌엘이 발의한 안은 사후 합의를 원활히 하는 데 역점을 뒀다. 그리퓌엘의 안은 노조원들이 또 다른 종류의 투쟁에 마음대로 참여할 수 있는 “전적인 자유”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며, 노조원들의 정치적, 철학적 다양성을 존중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호원칙에 따라”, 모든 가입자는 “노조 밖에서 주장한 의견을 노조 안까지 끌어들이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노조동맹들에게 “정당이나 정파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말라며, 그들은 저 나름대로 충분히 노동조직과 별도로 자유롭게 사회변혁을 추진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CGT의 주요 설립 원칙과 맥을 같이 하는 이 법안, 일명 “그리퓌엘 의제”는 보다 더 야심 찬 목표를 겨누고 있었다. 계급투쟁의 현실에 기초한 이 법안은 “모든 형태의 착취와 탄압에 반기를 들고 저항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타도”를 통해 “완전한 해방”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제시했다. 혁명의 수단으로 간주되는 ‘총파업’의 관점에서, 노조는 ‘이중의 임무’를 지닌 독자적 기구로 간주됐다. 즉, 노동자의 “일상적인 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사회 변혁”을 준비하는 활동을 함께 병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르나르의 동료들은 순식간에 패배를 직감하고 투표에 불참해버렸다. 투표 결과 CGT와 사회주의 세력의 공조를 권고한 르나르의 발의안은 34표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반면 그리퓌엘의 안은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총 994표 중 찬성 834표, 반대 8표, 기권 1표)됐다. 물론 이것은 매우 놀라운 득표율이다. 그러나 사실상 CGT 내부의 견해 차이는 언제나 아미앵헌장에 나오는 내용처럼 명쾌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는 보통, 노동자들의 입장이 저마다 힘의 관계나 산업별 노동문화에 의해 좌우됐다. 가령 출판산업연맹의 개량주의자들은 파업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 파업을 결행하면 놀랄 정도로 결연한 태도로 투쟁에 임했다.
반면 혁명정신을 이어받은 벌목노동자들은 오히려 최대한 유리한 산재법을 얻어내기 위해 직접 벌목투쟁을 하면서도 동시에 의원들의 지원에도 기대는 능란한 모습을 보였다. 어떤 정파적 경향을 띠는가는 물론 유용한 잣대이기는 해도 그렇다고 완벽하게 각 노조의 입장을 규정짓지는 않았다. 금속노동자 장 라타피는 다음과 같이 아주 적절하게 지적했다. “노동자 대회 안에는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순수 생디칼리스트도 있다.” 그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이든 간에, 결국 아미앵대회에서는 ‘생디칼리스트’라는 정체성이 중요시됐다. 아미앵헌장은 모두가 함께한, 몇 년간의 경험과 희망을 녹여낸 헌장이었다.
“견해가 아닌 이익을 조율하라!”
사실상 아미앵 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진정한 ‘노동당’을 위한 조합주의의 초석을 닦았다. ‘노동당’이란 말은 1905년 에밀 푸제가 발간한 소책자의 제목이기도 했다. CGT의 기관지 <인민의 목소리>의 책임자이기도 한 에밀 푸제는 그들의 목표를 한 마디로 표현했다. 그것은 바로 “견해가 아닌, 이익을 조율하자”는 주장이었다. 푸제는 “세세한 견해의 차이는 결코 같은 이익을 지닌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기초로 결집한 노동자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아미앵헌장은 제3공화정의 절차나 관행에 의해 탄생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노동정책의 밑그림을 그려 보였다. 사실상 제3공화정은 의회정치체제여서, 대부분의 입안자들은 오로지 법률 공부로 다져진, 개념을 다루는 데 능숙한, 유창한 말솜씨를 뽐내는 데 관심이 많은 이들이 대다수였다. 이 얼마나 노동자 문화와는 동떨어진 문화인가. 사실상 노동자 문화는 좀 더 생활과 밀착한, 실질적이고, 친근하며, 일상적인, 직접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정책에 기초한 ‘행동하는’ 공동체로서의 문화에 더 가깝지 않은가. 1789년 과격공화주의 시대, 혹은 파리코뮌 시대와 같은 짧은 격동기는 이런 정책에 기초할 때 행동하는 시민, 공화국의 제도적 기반에 대한 민중의 종속을 거부한 시민이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보여줬다.
사실 정파적 사회주의가 처한 딜레마도 바로 거기에 있다. 공화주의의 계보를 잇는다는 점에서, 정파적 사회주의는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상황에 따라 연대해야 한다는 제약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의 기반이 되는 노동계급의 이익에는 위배되는 길을 걸을 수 있다. 우리도 잘 알듯이, 때로는 과거 조제프 프루동이 말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20세기 초에는 사회당 의원이나 지도부 내에, 교수나 언론인, 변호사의 비중이 얼마나 높았는지 모른다. 결국 오로지 노동자만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의 완전한 해방과 단기적 요구 충족이라는 이중의 목표와 직접 행동을 지향하는 아미앵의 생디칼리슴은 다시금 지난 과거의 끊어진 ‘노동정책’과 맥을 이을 수 있다.
그것은 기우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련을 통해 확인했다. 당시 CGT는 총파업에 나서기를 포기하고 신성동맹(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에 맞서기 위해 좌, 우가 협력했던 일종의 좌우 합작-역주)에 동참했다. 1929년, 공산당 계열의 통일노동총동맹(CGTU)이 “모든 영역에서 공산당과 긴밀히 단결해 움직이겠다”고 선언한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게드주의와 볼셰비즘의 혼종인, 공산주의적 생디칼리슴은 결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는 해방 후에도 조용히 계속 이어졌다. 가령 공산당 당원들은 CGT와 여러 노조연맹, 혹은 도 단위 노조들을 대거 장악했다. 또한 반세기 동안 노조연합의 역대 서기장들은 프랑스공산당(PCF)의 정치국에 주재했다. 그 결과 1919년 설립된 프랑스기독교노동자연합(CFTC)이 중도 우파인 인민공화운동(MRP)에 합류한 1948년에 이르러, SFIO는 노동자의 힘(FO)이라는 분파 조직이 떨어져 나가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프랑스민주노동총연맹(CFDT)의 책임자들이 사회당과 가깝게 지내거나 혹은 사회당의 일원이 됐다.
아미앵헌장은 프랑스 노조 문화가 남긴 유산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 현 노조연합들의 규정은 아미앵헌장에 근거하거나 아미앵헌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오늘날 민주주의나 진보, 자유, 반인종주의 등 과거 아미앵헌장에서는 불필요하게 여기던 사안들에 관심을 갖기를 호소하고 있다. 지금 같은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다각화되고 분열되는 현상은 이제는 노조도 노동 외의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사회, 정치 운동과 노조의 전략적 공조 문제는 전혀 시의성이 없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로 시의성이 매우 큰 시급한 문제라고 도 볼 수 있다.
글·미셸 피주네 Michel Pigenet
파리2 팡테옹소르본 대학 현대사 명예교수. <빅토르, 에밀, 조르주, 페르낭 등 혁명 생디칼리슴에 관한 시선. 아미앵헌장 100주년 기념 네락 심포지엄 발표 논문집(Victor, Emile, Georges, Fernand et autres. Regards sur le syndicalisme révolutionnaire. Actes du colloque de Nérac pour les cent ans de la charte d'Amiens)>(Editions d'Albret·Bouloc·2007)을 피에르 로뱅과 공동 저술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Allan Popelard, Paul Vannier, ‘Renaissances des travaillistes au Royaume-Uni(영국 노동당원의 부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4월호·한국어판 2018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