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감축 강박감의 오랜 ‘이데올로기’

2018-05-31     에밀리앙 루이즈 | 릴 대학 부교수(현대사 및 디지털

근대국가 이후, 역대 정권은 늘 공무원 수의 감축을 공언해왔으나, 그 이유는 우리의 기대와 사뭇 상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엔 또 어떤 이유에서인가?


5년에 걸쳐 공무원 인력을 12만 명 감축하겠다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계획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정부 규모와 인력 수에 대한 비판은 이미 2세기가 넘도록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들에 의해 계속 이어져 왔다. 지금껏 오랜 기간 이 주제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수도 있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비판을 받아온 것은 공무원의 수라기보다, 공무원의 이미지다.

프랑스대혁명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국가와 행정부에 대한 비판은 주로 ‘관료들의 정치적 권력과 행정부의 과도한 영향력’을 향한 것이었다. 18세기 중반, 중농주의 경제학자인 뱅상 드 구르네는 이를 ‘관료제’라고 불렀다. 1793년 생 쥐스트는 “정부가 고용하는 이들은 모두 나태하다”고 여겼으며, “모든 곳에서 관료 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의 주장은 예산감축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목적이었다. 피에르 로장발롱은 “독립적인 힘을 가진 부서의 구성”과 행정기관에 의한 “정부권력의 몰수위험”에 대해 비판했다. 로장발롱은 정부권력이 몰수될 경우, “일반의지의 직접통치를 방해할 수 있다”고 여겼다.(2) 
나폴레옹식의 “행정 중앙집권화”가 확립되면서, 국가 관료의 수를 비판하는 ‘관료주의’라는 개념이 탄생했다.(3) 관료주의라는 용어는 “대규모 관료의 존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스템”, “사회적 재앙”이 되는 “공공고용에 대한 편집증”이란 의미로 1872년에 피에르 라루스의 『19세기 일반 대사전(le Grand Dictionnaire universel du XIXe siècle)』 제8권에 등재됐다.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라루스는 악의 근원을 군주제에서 찾았고, 악이 확산된 책임은 제국(Empire)에 있다고 생각했다. 라루스는 “1789년부터 1800년까지 프랑스에는 시민이 있었다. 1800년부터는 관료와 피통치자밖에 없었다”며, 관료는 사실상 “전제군주제의 군대”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말했다. 

<르 그렐로>에서 풍자한 
‘세금 축내는 벌레들’

제3공화국(1875~1940) 하에서 제기된 관료 수에 대한 불만은 ‘예산을 축낸다’는 것이었다. 풍자만화가 알프레드 르 프티는 풍자적인 논조의 일간지 <르 그렐로(Le Grelot)>에서 관료의 모습을 공화제를 폐지하는 나폴레옹파, 군인, 사제 등으로 묘사했다.(4)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은 공화국의 순조로운 운영을 위해서 행정기관의 정화작업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정치판의 다른 한쪽에서는 관료주의의 책임이 공화국에 있다고 봤다. 조르쥬 다브넬은 <두 개의 세계에 관한 리뷰(La Revue des deux mondes)>에서 “예컨대, 초등무상교육은 모든 이들의 허기를 공짜 수프로 달래줘야 한다는 주장과 다름없다”며 “이런 식의 업무로 관리를 늘리는 것은 공화국의 무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5) 

그러나 관료주의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이 같은 비판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쯤에야 인원감축정책이 시행됐다. 1920년 봄, 프랑스 재정부 장관은 의회에서 “재정 문제에는 과감한 지출 삭감과 불필요한 모든 공공업무의 폐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6) 양차 대전 사이에 여러 긴축정책이 시행됐지만, 공무원 인력 규모가 1913년 수준으로 되돌아가진 못했다. 특히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이 소멸하면서 도시경찰이 국가관리 하로 편입됐고, 산업관련 부처 신설 등 국가개입이 확대됐으며 공무원의 수가 다시 증가했다.

그러나 독일점령이 끝나고, 새로 등장한 정부가 공무원 수를 줄이려 하자 공산주의자들부터 비시정권을 그리워하는 이들까지 다시금 이구동성으로 비판에 나섰다. 공산주의자들은 긴축재정을 다른 방식의 과거사 청산 작업으로 인식했다. 1947년 12월, 공산당 출신 장관들은 이미 8개월 전에 정부직에서 배제됐으나, 공산당 서기를 지낸 자크 뒤클로(1896~1975. 2차 세계대전 중에 레지스탕스 지도자를 지냈고 해방 후 제4공화정 헌법제정의회 부의장으로 활약했다)는 정부가 추진하는 인원감축 정책을 계속 지지했다. 뒤클로는 의회 토론에서 심지어 “과감한 감축”을 요청하기도 했다.(7) 사실상 1948년까지의 인사정책은 주로 “비시정권에서 생겨난 기생 기관”(8)에 채용된 공무원들을 정리하는 대신에, 비시정권의 인사정책으로 피해를 보거나 축출된 인력들을 구제하는 것이었다.(9)

비시정권의 수반이었던 필리프 페탱에 향수를 가진 사람들은 프랑스 해방(1944년) 이후 공공분야 인력이 증가하는 것을 규탄했다. 특히 국영기업과 사회보장 관련 일자리의 신설을 공격 타깃으로 삼았다. 1949년, 피에르 에티엔 플랑댕(1934년 11월 8일부터 1935년 6월 1일까지, 그리고 1940년 12월 13일부터 1941년 2월 9일까지 짧은 기간 2차례 총리직을 위임받음)은 정기적으로 기고했던 극우성향 잡지에 “체제의 왕이라 할 수 있는 공무원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공무원 조직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확대되는 것은 녹슨 기계가 점차 기능이 정지하는 것 같은 병적인 과정이 프랑스 경제 조직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비난했다.(10)

예산절감은 없고, 
공공업무 혼란만 부른 인원감축

프랑스의 대규모 공무원 인력 감축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당시 인원 감축에 대한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15만 명가량의 공무원을 감축하기 위해서 ‘도끼 위원회(la commission de la Hache)’와 ‘단두대 위원회(la commission de Guillotine)’가 제안한 조치가 시행됐고, 실제로 6만 3,000명(재정부 기준)에서 14만 명(프랑스 국립 통계경제연구원 기준)이 감축됐다. 하지만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열렬하게 인원감축정책을 장려했던 예산담당국장도 “다소 과격하고 너무 단순한 감원 조치들 때문에 행정 서비스가 원활하게 기능하는 데 방해가 됐다”고 말했다.(11) 여러 감독기관의 감독관들은 정말로 국가 인력을 감축하고 긴축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이행하고자 하는 목표 중에서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12)

좀 더 최근의 예를 보면, 2007년부터 2012년 사이에 공무원 퇴직자 2명 중 1명은 충원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들 수 있다. 니콜라스 사르코지는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일자리 100만 개를 감축함으로써 보다 더 효율적이고 비용이 적게 드는 국가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공무원 현황에 대한 연간보고서를 보면, 실제로 (15만개가 아니라) 9만 4,000개의 상근직이 사라졌다고 한다(이 점을 두고 사르코지에 찬성하는 이들은 사르코지를 옹호한다). 하지만 국가가 실시한 대규모 감사 보고서에 의하면, 해당 정책에 따른 예산절감 효과는 미미한 채 공공업무에서 큰 혼란이 야기됐다고 한다. 2012년에 작성된 해당 보고서는 “일자리 감축 이후 국가행정에서 현저한 예산절감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13)

인원감축에 대한 약속이 계속 있어왔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시행됐던 조치들을 보면 예산절감 효과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의회와 정부 내부의 토론을 보면, “공무원이 너무 많다”는 주장은 행정업무의 공공성과 완전히 괴리된 채 언급되고 있다. (경쟁력과 효율성을 내세운) 21세기형 ‘관료주의’를 주창하는 이들은 국가발전을 그 정당성으로 내세우면서 모순적이게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경제정책이 초래할 부작용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글·에밀리앙 루이즈 Émilien Ruiz
릴 대학(IRHiS) 부교수, 현대사 및 디지털 휴머니즘 전공.

번역·이연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Saint-Just, 『Œuvres complètes(전집)』, Gallimard, coll. ‘Folio’, 2004.
(2) Pierre Rosanvallon, 『L’État en France de 1789 à nos jours(1789년부터 현재까지의 프랑스 내 국가)』, Seuil, coll. ‘L’univers historique’, Paris, 1990.
(3) Pierre Legendre, 『Trésor historique de l’État en France. L’administration classique(프랑스 국가의 역사적 보물. 전통적인 행정)』, Fayard, coll. ‘Les savoirs’, Paris, 1992.
(4) ex. 1880년 1월 25일 자 <Le Grelot>(Paris)의 만평.
(5) Georges d’Avenel, ‘L’extension du fonctionnarisme depuis 1870(1870년 이후 관료주의 확장)’, <La Revue des deux mondes>, vol. 86, Paris, 1888년 3월.
(6)  1920년 3월 29일자 회의, ‘Débats parlementaires(의회 토의)’,  Journal officiel(관보), Paris, 1920년 3월 30일.
(7) 1947년 12월 19일자 제1차 회의. ‘Débats parlementaires(의회 토의)’, Journal officiel(관보), Paris, 1947년 12월 20일.
(8) 1946년 2월 15일자 회의. ‘Débats de l’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제헌의회에 대한 토의)’, Journal officiel(관보), 1946년 2월 16일.
(9) 1947년 1월 4일자 공문 n°1/1 B/4. Journal officiel(관보), 1947년 1월 7일.
(10) Pierre-Étienne Flandin, ‘Le problème financier français(프랑스의 재정문제)’, <Écrits de Paris>, n°51, 1949년 1월.
(11) 인원감축에 대해 예산담당국장이 장관에게 보내는 의견서 n°11305, Paris, 1949년 10월 28일, CAEF, Fonds Budget, PCM 산하, B57035.
(12) Gabriel Ardant, 『Problèmes financiers contemporains(현대의 재정문제)』, Hatier, Paris, 1949.
(13) ‘Bilan de la RGPP et conditions de réussite d’une nouvelle politique de réforme de l’État(프랑스공공정책검토팀(RGPP) 평가 및 신규 국가개혁정책의 성공조건)’, 프랑스 행정감독기관, 재정감독기관, 사회감독기관(Inspection générale de l’administration, de l’Inspection générale des finances et de l’Inspection générale des affaires sociales)의 보고서, La Documentation française, Paris, 2012년 9월.
 

 
반혁명을 성공시키다

1989년 11월 28일 신자유주의의 요람인 몽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èlerin Society)가 재결성됐을 당시, 뉴질랜드 노동당 출신의 전직 재무장관(로저 더글러스)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다음과 같이 전수했다.
“정부는 일을 미루면서 나타나는 결과로 평가받지 말고, 결정한 사항들을 과감하게 실행해 고통을 즉시 해결해야 한다. (…) 한 걸음씩 나아가려 하지 마라. (…) 모든 이들이 고통을 겪을 때는 당신의 전문분야에 쏟아질 비난들에 항의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 속도가 관건이지만 지나치게 빠른 것은 없다. (…) 특권을 유지하려는 욕구로 결성된 조직은 언제나 일의 속도를 늦추라고 요구한다. 속도를 높이면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의견을 모으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 여러분이 계속 움직이면 적들은 과녁을 정확히 조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리듬의 문제


2007년 6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정책 전략가인 파트리크 뷔송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로드맵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 로드맵은 1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엘리제궁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하다. 개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듬이다. 밀턴 프리드먼(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한 미국의 경제학자-역주)은 사르코지 정부를 사례로 들며, 개혁안을 통과시키는 데는 3개월이 걸린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한편,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또 정치적인 목적아래 야만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기득권의 현상 유지를 위한 횡포다. (…) 개혁은 사회 부조리를 거르는, 사회 선순환을 위한 일종의 장치다. 그리고 여론이 인지하는 선한 개혁은, 저마다 다른 개혁으로 곧장 이어질 수 있는 개혁이다. 하지만, (사르코지가 추진하는) ‘선발’ 개혁에 이은 후발 개혁은 이중적이다. 즉 선발 개혁에 지위 및 합법성을 부여하고, 그 뒤를 이은 논쟁상황에서는 이것이 ‘미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코지가 실행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전략이다.

출처: 세르주 알리미, 『Le Grand Bond en arrière. Comment l’ordre libéral s’est imposé au monde(대후진운동. 자유주의 질서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나)』 Agone, Marseille, 2012(초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