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진보인가? 그럼 비디오게임을 즐겨라

[Spécial 1] ‘나쁜 장르’의 문화

2010-07-12     스티븐 던컴

진보주의 운동가이자 비디오게임 애호가인 스티븐 던컴은 “좌파는 게임의 폭력성에 분개하며 검열을 부르짖는 대신, 그 인기의 근저에 자리한 욕구를 읽어내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좌파만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빈티지 로 라이더(1)에 몸을 실은 당신은 시내를 유유히 누빈다.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지만, 아직은 조금 여유가 있다. 이곳은 당신의 세계다. 당신은 이 세계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당신은 상점 앞에 차를 세우고 옷가지를 구입한다. 카지노에서 운을 시험하고, 디스코테크에 들어가 몸을 신나게 흔든다. 그리고 운전대로 돌아와 다시금 거리를 유유히 배회한다. 당신은 흘끗 자신의 검은 근육질 팔뚝을 내려다본다. 셔츠 소매 밑으로 문신한 팔이 보인다. 문득 지난밤 일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가볍게 커피 한잔 하자며 시작된 만남이 뜨거운 밤으로 이어진다. 침대에서 근사한 몸매의 여인이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 최고예요!” 그렇다. 당신은 최고다. 섹시한 매력에, 타인의 인정을 받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당신이다. 바로 그때 낯익은 얼굴 하나가 사정권에 들어온다. 당신은 급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가 쓰러진다. 당신은 그대로 차를 몰아, 쓰러진 남자를 타넘고 지나간다. 차를 돌려 다시 한번 시체 위를 지나간다. 어디선가 앰뷸런스 한 대가 경찰차 호송을 받으며 나타난다. 당신은 얼른 기관총을 집어들고 차 밖으로 뛰어내려 총을 난사한다. 경찰이 총을 맞고 쓰러진다. 순간 등 뒤로 당신의 차가 폭발한다. 당신은 지나가던 세단 앞으로 불쑥 뛰어든다. 운전석 여자의 머리를 가격하고, 차 밖으로 끌어낸다. 피투성이가 된 여자를 길바닥에 그대로 둔 채 여자 차를 탈취해 달아난다. 바로 그즈음, 당신은 ‘레드 불’ 한 캔을 손에 쥔다. 캔을 감아쥔 엄지손가락이 꽤나 얼얼하다. 몇 시간째 게임기 버튼을 누르며 ‘자동차 대탈취 게임: 산안드레스 편’(GTA: SA)을 즐긴 탓이다.

비디오게임의 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찬물을 끼얹거나, 게임의 폐해를 과대포장하며 호들갑을 떠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의 말은 모두 옳다. 그렇다. GTA는 지독할 정도로 폭력적인 게임이다. 게임 안에서의 만남은 대부분 살인이나 그나마 약과인 것이 섹스로 귀결된다. 여기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악몽인 이른바 에로스(생의 본능)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의 탈승화(Non-sublimation·욕구와 충동을 예술과 종교 등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승화’라 하고, 그렇지 않고 직접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탈승화’라고 한다. 여기서는 타나토스의 충동에 더 초점이 맞춰 있다)가 등장한다. ‘억압된 것의 회귀’가 화면이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학부모텔레비전협회(Parents Television Council)의 팀 윈터 회장은 GTA를 일컬어 “어떤 사회적 가치로도 폐해가 상쇄되지 않는 게임”이라고 성토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탈승화

만일 비디오게임이 단순히 폭력성만 있다면, 진보주의자가 비디오게임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데 하등 거리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디오게임이 (GTA의 경우처럼)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는 의혹을 받는다면, 폭력성 이외의 일면에 진보주의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바로 비디오게임의 인기가 상당히 대중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시장조사기관 NPD에 따르면, 2004년 미국의 비디오게임 산업 매출은 99억 달러로, 할리우드 매표 수입을 훌쩍 뛰어넘었다. 같은 해 ‘GTA: SA’는 매출 500만 장을 달성하며, 업계 선두 자리를 차지했다. 2005년 7월에는 매출을 1200만 장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GTA: SA’는 대여점 출시 일주일 만에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불과 일주일 만에 160만 달러 가까이 벌어들였다. 2001년 이후 GTA 시리즈(‘산안드레스’는 5번째 시리즈)는 매출을 2200만 장 달성하며, 개발사인 록스타 게임스에 수익을 9억2400만 달러 안겨주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경이적인 매출액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해적판까지 합치면 규모는 더욱 늘어난다. ‘GTA : SA’는 출시 전 이미 인터넷에 무단 복제본이 유포됐다.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친구 사이에서 정품을 구매한 사람은 필자 혼자뿐이었다.

진보는 대중성을 직시하라

‘GTA : SA’ 같은 비디오게임이 갖는 매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가상세계에서 일정 역할을 수행하며 발산되는 원초적 욕망의 회귀, 일종의 탈승화 때문일까? 이런 해석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일면만 설명할 뿐이다. 오늘날 판매되는 대부분의 비디오게임처럼 GTA도 역할수행게임(RPG)이다. 컴퓨터 프로세서 속도가 향상되고 그래픽 기술이 발전하면서, 게임 사용자는 그동안 상상력에만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현실에 가까운 가상 세계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용자 자신도 완전히 조작 가능한 아바타가 되어 가상 세계 배경 속으로 들어오게 됐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오십줄을 바라보는 중산층 백인이라면 ‘GTA: SA’ 게임을 하며 가장 먼저 깨닫는 사실은 이제 당신이 가난한 흑인 청년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C. J.(칼 존슨)이다. 갱단의 일원으로, 로스앤젤레스임이 분명한 어느 도시에서 범죄자로 살고 있다. 당신은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변신시킬 수 있다. 짧은 헤어스타일로 변화를 주거나 새 옷을 사서 입히거나, 그의 몸에 문신을 새길 수도 있다. 너무 자주 패스트푸드점을 애용하게 만든다면 캐릭터 엉덩이가 금세 펑퍼짐해지면서 상대에게 기동력이 떨어지는 만만한 표적이 되고 만다. 하지만 원한다면 헬스장에 데려가 예전의 근육질 몸매를 되찾게 만들 수도 있다. 당신이 손댈 수 없는 부분은 오로지 캐릭터의 피부색뿐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비디오게임 주인공이 가난한 흑인 캐릭터라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쩌면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C. J.는 진짜 흑인도 아니다. 물불 안 가리는 저돌적 인간의 전형일 뿐이다. 그는 뒷골목 인생을 예찬하는 랩 수백 편에 등장하는 전설의 갱스터다. 그룹 ‘NWA’(Niggaz with Attitude)의 히트곡 <갱스터, 갱스터> 가사처럼 “인생은 오로지 돈과 여자가 전부”라는 게 C. J.의 신조다. 갱스터 랩이 한창 절정에 달한 1990년 LA가 이 게임의 배경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C. J. 캐릭터의 인기는 갱스터 랩의 폭발적 인기를 등에 업고 있다.

왜 흑인 캐릭터가 대박을 터뜨릴까?

인기의 기원은 갱스터 랩보다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갱스터에 대한 환상은 영화 <로빈훗의 모험>에서 시작해,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s)에 등장하는 무법자들을 거쳐, 현재 방영되는 미국 TV 드라마 속 마피아 토니 소프라노로 이어진다. 모두 기득권에 맞선 저항자의 매력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런데 GTA의 주인공은 기존 갱스터 문법의 틀을 깨고 있다. 그는 흑인 갱스터다. 섹스와 폭력에 굶주린 C. J.(더 나아가 게임자까지)는 강렬한 흑인 리비도의 전형을 구현한다. GTA의 C. J.가 되는 상상은 어느 정도 루소의 ‘고귀한 야만인’과 동일시하는 행위가 주는 매력과 유사한 즐거움을 준다. 그것은 사회적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헵캣’(Hepcat·재즈광)이 되는 것이며, 노먼 메일러의 1957년 작으로 유명해진 ‘하얀 흑인’이 되는 즐거움이다. 도시에 사는 가난한 흑인 청년뿐 아니라 교외 지역 출신의 중산층 백인까지 GTA 게임을 즐긴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전형적 이미지를 열광적으로 (욕망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전형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든, 아니면 의미 부여를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2% 부족한 게임의 저항정신 


그런데 ‘피부색’과 ‘저항’이라는 주제가 뒤얽힌 난제 속에서 우리는 진보정치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 저항에 대한 욕망이 널리 퍼져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GTA: SA’ 속 프로그램화한 저항 형태는 진보와 거리가 멀다. 그런 식의 저항은 그다지 혁신적인 것이 못 된다. 갱스터 랩에서 TV 경찰수사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대중문화는 그와 유사한 저항 형태로, 그동안 저항에 명분과 가치를 부여해왔다. 하지만 그런 방식만이 저항을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이제 저항과 자유를 정치로 표현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 진보정치를 저항의 꿈으로 표현해보는 것은 어떨까?

꼭 혁명을 부르짖는 것만이 저항은 아니다. 아주 감동적이고 품위 있는 저항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가령 마틴 루서 킹 주도로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가 주관한 시위를 상기해보자. 말쑥한 차림의 흑인 남성과 여성이 인종분리법 지지자가 풀어놓은 경찰견과 확성기에 맞서 평화적인 피켓시위나 거리행진을 벌이던 모습을. 법을 수호하는 그들의 모습은 평화적이고 고결한 이미지다. 우리가 TV를 통해 미화된 아름다운 시민권 투쟁의 기억이 있는 것도 모두 그런 이미지 덕분이다. 하지만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백인지상주의적 성격의 ‘백인시민평의회’(White Citizens Councils) 맹신자가 흑인 시위자를 극단적 공산주의 폭도로 매도했을 때, 그들은 지금 우리가 감추려는 것을 이미 간파했음이 분명하다. 바로 품위 넘치는 그 시위자들이 다름 아닌 저항자라는 사실 말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2005년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기자회견을 예로 들어보자. 그때 그녀는 여러 시민단체 책임자가 참여한 자리에서 ‘GTA: SA’를 비난하며 정부의 조사와 비디오게임 규제 강화를 요구했다. 이런 힐러리의 행보는 1980년대 낸시 레이건이 벌인 마약퇴치운동 ‘그냥 싫다고 말하라’(Just Say No) 때와 비교해 얼마만큼 퇴치 효과를 불러올지 묻는 일은 잠시 잊어버리자. GTA가 공식적 비난을 받을 때마다 동일한 원칙에 의해 금단의 열매를 구하기 위해 상점으로 달려가는 소비자는 1천 명씩 증가한다.

힐러리의 게임 경멸, 그녀는 기득권

선의의 개혁자가 가져오는 피해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말쑥한 차림에 세련된 매너를 갖추고 우리에게 ‘이것이 좋다, 이것은 나쁘다’라고 코치하는 게 이 엘리트들이다. 그다음 수순은 정부에 규제를 강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파가 좌파에 품는 이미지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인간 경험의 모든 영역에는 정부 도움이 필수라고 여기는 오지랖 넓은 부류,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려 들고, 특권과 권력 유착을 이용해 자신의 사상을 실행에 옮기는 것만 하는 전문가, 그것이 바로 우리 모습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기득세력인 셈이다.

저항의 이미지를 비켜가는 진보주의자와는 달리, 극우파나 좌파는 각기 저항의 이미지를 어떻게 고양하거나 이용할지 잘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복면 차림에 담배 파이프를 문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멕시코 남부 깊은 정글에서 각종 놀라운 메시지를 전해오고, 세계무역기구(WTO)의 타성에 젖은 관료를 규탄하는 시위는 문화행사의 형식을 띠며, ‘생명의 전사들’은 테리 시아보(2)가 입원한 병원 앞에 모여 노래하고 기도한다.

GTA와 마찬가지로 이런 형식의 정치적 표현에는 품위 있는 모습으로 권위에 저항하려는 대중의 환상이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아닌 모습과 우리를 동일시하려는 욕망의 표상인 것이다. GTA는 C. J.라는 인종차별적 캐릭터를 연기하려는 욕망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피부색이나 사회계층, 정치 성향의 차이에 관계없이 타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가상 세계에서나마 타인의 옷을 입고 그를 대신해 살아보는 것은 상호이해의 지평을 넓혀줄 뿐 아니라, 기존의 진보주의적 ‘연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연합을 위한 밑그림이 된다. 이런 식의 동일시는 문화 다양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말하는 일반적인 ‘차이의 존중’과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차이를 끌어안는 행위다. 거리감이 있는 객체를 친밀한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GTA는 타자와의 동일시가 죄의식으로 인한 고통이 아닌 쾌락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대개 진보주의 정치는 추상적 타자의 이름으로, 추상적 타자의 이익을 위해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는 진보 정치가 다른 누군가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 감수하는 희생 정도로 여긴다(반대로 진보 정치의 수혜자는 진보 정치를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강요되는 무엇으로 생각한다). 본래 타자는 이질적이며 불가해한 존재로, 동정이나 무시의 태도로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하는 대상이다. 역할수행게임은 타자와 나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으려는 대중의 욕망, 타자를 ‘다른 누군가’가 아닌 문자 그대로 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타자와의 동일시가 주는 급진적 쾌락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그것은 GTA의 목적이 아니다. 게임자는 GTA 환상 세계에서 타자가 되지만, 그렇게 경험하는 타자는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C. J.는 수세기에 걸친 인종차별과 건달숭배문화가 낳은 전형, 가상 모습으로 재현된 갱스터 랩의 반영웅이다. 심지어는 게임자가 자신의 저항성을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전이함으로써 저항성을 ‘타자화’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사회를 위협하는 악당 캐릭터와 동일시되는 게임이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것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어떤 잠재성을 대변한다. 그것은 인종·계층·이념을 넘어선 정치, 다시 말해 소극적 진보주의가 머무른 존중과 수용(‘타자의 인정’)의 자세를 벗어 던지고, 타자와의 공감과 타자로서 행동에 의거한 좀더 급진적 참여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글•스티븐 던컴 Stephen Duncombe
NYU 갤러틴 스쿨의 미디어문화 역사정치학 부교수로, 이 글에 인용된 <꿈: 환타지 시대에 이미지 변신하는 진보정치>(Dream: Re-imaging Progressive Politics in an Age of Fantasy·더 뉴 프레스·뉴욕·2006)를 저술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로 라이더(Low Rider)는 서스펜션을 개조해 차체가 지면에 낮게 깔리도록 만든 차량이다. 거리를 유유히 ‘활보’하고 다니기에 좋다. 미국 젊은 세대, 특히 라틴계와 아프리카계 미국 청년의 도시문화를 대변한다.
(2) 14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를 유지하다 2005년 사망한 미국인으로 안락사 논쟁에 불을 지폈다.
 

‘팬픽션’이 뜬다

시나리오 작가가 망쳐놓은 스토리 결말을 뜯어고치고, TV 드라마 인물을 새로운 세계로 옮겨놓는다. 서로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한자리에 모아놓거나, 작중인물의 성 정체성을 뒤바꾼다. 베드신 장면을 집어넣거나, 때로는 기상천외한 스토리를 지어낸다. 예전에는 유명한 영화나 드라마, 만화 혹은 비디오게임을 원전으로 하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통로로 ‘팬진’(Fanzine)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에서 팬픽션을 호스팅하거나 분류·비평하는 사이트가 각광받고 있다. 비속어가 넘쳐나는 이야기일수록 원전의 인기가 높을 수 있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는 ‘포터픽션’이라고 부른다. 이와 경합하는 것이 <버피와 뱀파이어> <트와일라잇>이다. 특히 일본에 널리 퍼진 ‘팬픽션’은 대부분 영상에 대한 문자의 반격으로 여긴다. 하지만 요즘은 디지털 도구가 발전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비디오게임의 패치를 사용자가 마음대로 프로그래밍하거나 다른 사용자와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팬에디트(Fan Edit·팬편집)를 통해 영화를 편집할 수도 있다. 팬 사이에서 원전(Canon)으로 통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는 ‘패논’(Fanon)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애교에 가까운 이런 저작권 위반에 대중은 일반적으로 관대하다. 헨리 젠킨스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팬픽션은 신화가 일반 대중이 아닌 기업의 소유가 되는 시스템 속에서 문화가 받은 피해를 보상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1980년대 말, 젠킨스 교수는 이처럼 하위문화 애호가가 타인의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재생산해내는 현상에 처음으로 주목한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어린 시절 <영화 속 유명 괴물>(Famous Monsters of Filmland) 같은 잡지에 파묻혀 지냈고, 친구들과 정원에 모여 TV에서 본 장면을 연기하는 것을 즐겼다. 대학에서는 영화 <스타워즈>에 흠뻑 빠져 지냈다. 그런 그가 지금 팬과 대학교수라는 이중 역할을 맡고 있다. 그의 저서 <텍스트 밀렵꾼: TV 팬과 참여문화>(Textual Poachers: Television Fans and Participatory Culture)는 그에게 끊임없이 “현실감각을 가져라”고 말하는 이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 성격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