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부의 격차는 한층 심화될듯

신뢰가 무너진 야만의 세계 그 이후

2008-10-29     김성민 | OTC파생상품 및 크레디트 애널리스트

토마스 홉스(T. Hobbes)가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남긴 저 유명한 말은 350여 년 전의 유물이 아니다. 홉스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상태를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라고 규정하였다. 그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신뢰가 없어진 상태'가 곧 '전쟁'임을 간파한 그의 혜안은 현재에도 빛을 발한다.
금융 산업은 '신뢰'를 전제로 하여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신뢰가 충분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금융업이 발달할 수 없다. 그리고 존재하던 신뢰가 사라진다면 금융 산업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많은 거대 금융회사가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연명하게 된 지금의 현실은 모두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리하여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 전장과 다르지 않다.

 전 지구적 금융위기 시작 '서브 프라임 모기지 론'
2008년 9월 15일은 역사에서 중요한 날로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다. 세계 5대 투자은행 중 하나인 리먼 브러더스가 미국 뉴욕남부지방법원에 파산 보호 신청을 제출함으로써 온 세계에 본격적인 금융 위기를 선포한 날이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상 파산 보호를 신청한 최대 채무 규모는 2002년 월드컴(World Com)이 신고한 410억 달러이지만, 리먼 브러더스는 약 6천130억 달러의 채무를 신고함으로써 종전 기록을 가볍게 갈아 치웠다.
1995년 파산하여 ING그룹에 단돈 1달러에 팔린 베어링스 은행 이후 최대 금융 회사의 몰락으로 기록될 이번 사건의 원인과 파장은 그 유래가 깊고 범위도 넓다.
리먼 브러더스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위험의 근원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주택 가격은 1997년부터 큰 폭으로 상승하기 시작하여 2007년 초에 절정에 달했다. 미국 주택 가격 상승은 전 세계적인 과잉 유동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과잉 유동성 창출 이유 중 하나가 아시아발 금융 위기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아시아의 금융 위기로 인해 시중의 자금은 안전 자산으로 이동하게 되고, 신흥 시장에 투자하던 투자자들은 미국과 유럽의 자산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특히 미국으로 많은 자금이 유입되었다.
시중에 넘치는 돈의 운용처를 찾던 금융 기관들은 주택을 사고자 하는 구매자들에게 대출을 해줌으로써 수익을 얻고자 하였다. 전세계적인 호황 속에서 시장 참여자들은 주택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부동산 대출을 확대함으로써 초과 수익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면서 서브 프라임 모기지 론을 상환하지 못하는 대출자가 생겨나게 되고, 대출자 외에도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을 실행해준 은행, 서브 프라임 채권을 매입한 금융 기관, 그리고 서브 프라임 채권의 신용 위험을 떠안은 투자 은행들이 주택 가격의 하락과 대출 미상환 위험의 증가에 따라 함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들의 위험은 거의 전적으로 '신뢰'의 붕괴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믿음,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신용도가 낮은 대출자들도 대출금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어려움 없이 높은 이자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위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대출 채권이 부실화되자 모기지 론 회사들이 파산하기 시작하였고, 모기지 채권을 바탕으로 발행된 부채담보부증서를 거래한 금융 회사와 뮤추얼 펀드 등이 잇따라 도산하거나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지난 2007년부터 시작된 서브 프라임 위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와는 달리 온갖 첨단 금융 기법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전 세계에서 거래된 서브 프라임 론은 그 규모와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조차 없다. 서브 프라임 사태의 수습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잔치는 끝나고 계산만 남았다
2008년 들어서부터 모기지론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금융 기관의 위기설이 전 세계 금융계를 떠돌았다. '예언의 자기실현'처럼, 위기설이 오르내린 금융기관은 모두 인수 합병되거나 청산의 길을 걸어야 했다.
리먼 브러더스와 비슷한 시기에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린 메릴 린치(Merrill Lynch)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에 인수되었고, 이보다 앞서 투자은행 베어 스턴스(Bear Stearns)는 상업은행인 JP 모건에 인수되었다.
자본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전 세계에 전파된 결과, 서브 프라임 위기의 안전 지대로 분류되던 유럽 지역의 금융 기관들도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네덜란드·벨기에의 포르티스(Fortis), 영국의 노던 록(Nothern Rock), HBOS, 스코틀랜드 왕립은행(RBS), 독일의 히포 리얼 에스테이트(HRE) 등 유수한 금융 기관들이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리먼 브러더스의 몰락을 지켜본 각국 정부는 자국 금융 기관에 대한 구제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유럽 주요국들이 발표한 전체 구제금융 규모는 총 2조 5천억 달러에 달한다(2008년 10월 16일 기준). 정부의 개입에 소극적이던 미국마저도 7천억 달러 규모의 유동성 공급 법안에 이어, 미국의 9대 금융기관에 대한 구제금융(recapitalization)을 통해 이들 금융 기관을 사실상 국유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의 시장 만능주의적 금융 정책의 포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각국 정부의 노력으로 금융 위기는 일단락된 듯 보였으나, 지난 10월 16일부터 전 세계 증권시장이 동반 폭락하며 아직 위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웅변하는 듯 하다.

 금융위기의 태풍에 놓인 한국
한국도 금융위기의 태풍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 10월 10일, 금융통화위원회는 기준금리를 5.25%에서 5%로 0.25% 전격 인하하였다. 자금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여 금융 위기를 조기에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였지만 성과는 그리 좋지 않다. 기준 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회사채 금리와 채권 수익률, CD 금리는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 10월 15일 신용평가사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국내 7개 금융 기관의 신용 전망을 '부정적'으로 지정하였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주식시장뿐만 아니라 자금 시장과 실물 경제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린스턴 대의 폴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실물 경제가 절박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며 총수요 진작을 위해 적극적인 재정 확대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
레이건 정부 시절부터 미국 경제를 지배해온 통화주의 경제 정책을 버리고 케인즈 경제 정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충고다.

 신뢰의 회복이 관건
그러나 크루그먼의 주장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해도, 정부의 재정 지출 확대가 총수요 진작에 기대 만큼의 효과를 가져올 지는 사실상 의문이다. 현재의 금융 위기가 실물 경제에까지 타격을 준 나머지, 고용·생산지표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이자율과 물가는 가파르게 오를 기세다.
과거 외환 위기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반될 경우 승자는 보다 부유해지며 패자는 보다 가난해지는 강한 경향성을 보였다. 따라서 금번의 외환 위기가 어느 시기에 수습된다 할지라도 빈부의 격차가 전 세계적으로 심해질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이번 금융 위기에서 특히 미국과 한국의 정부는 적기에 과감한 조치를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시장의 참여자들은 강력한 유동성 위기 앞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현재의 금융 시장에서 사라진 신뢰를 언제 어떻게 회복할지, 그리고 그때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변해있을 지가 작금의 금융 위기가 주는 무서운 과제다.

미국의 부동산 대출 제도와 서브 프라임 위기

 미국의 주택담보대출(Mortgage Loan)은 대출자의 신용등급에 따라 프라임(Prime), 알트-에이(Alt-A), 서브프라임(Sub-prime)으로 나뉜다. 서브 프라임 론은 신용 조건이 가장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출을 해주는 대신 금리가 높은 대출 프로그램이다.
서브프라임 론은 주로 서민을 위해 주택을 담보로 장기간 대출해주는 제도로 규제가 상대적으로 덜하였다. 서브 프라임 론은 대출 절차가 간편하고 주택가격의 100%까지 대출이 가능하며 대출업자들의 마케팅 활동도 활발하였기 때문에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들도 서브 프라임 론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용 우수자가 서브 프라임 모기지를 이용한 비율은 2000년 41%에서 2005년 55%, 2006년에는 61%까지 증가하였다.
서브프라임 론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금융 기관들은 대출이 상환되지 못할 위험에 대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서브프라임 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보통 우대 금리로 돈을 빌리지 못하는 사람들이거나 투기적 목적으로 주택을 구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미상환 위험이 프라임 론 대출자보다 컸다. 그래서 금융 기관들은 서브 프라임 론을 재매출하고자 했다.
재매출의 방법은 다양했다. 대출 채권 자체를 재매각하기도 하였고, 서브 프라임 론 여러 개를 묶거나 다른 채권과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채권을 만들어서 매각하기도 하였다. 또는 대출 채권 자체는 그대로 둔 채, 채권의 부도 위험만을 따로 떼어서 팔기도 하였다. 서브 프라임 론의 미상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타인에게 위험을 매각한 것이다.
이러한 위험의 매각은 첨단 금융기법으로 개발되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 아시아 등 금융 시스템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위험의 매매가 이루어졌다. 이 와중에서 매매되는 위험은 형태를 달리하거나 그 규모를 점점 늘려나갔다.
서브 프라임 론의 규모가 절정에 달한 2006년부터 미국의 부동산 가격은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서브 프라임 론의 상환은 전적으로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 상승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미상환 위험이 증가하게 된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금융 기관은 모기지 론을 회수하게 되고, 대출자가 론을 제때 갚지 못하면 이 대출 채권은 부실 채권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서브 프라임 론이 '눈속임 금리'로 실행되었던 것이 부실을 가속화하였다. 눈속임 금리란, 처음 1~2년간은 낮은 이율을 적용하되 그 이후부터는 이율이 급격하게 높아지게 되도록 설계된 금리를 말한다. 부동산 경기가 호황일 때는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낮은 금리까지 어우러져 호경기를 만끽했던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불황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1) 토마스 홉스·진석용, <리바이어던 1>, pp171~172
2) <May 2008 U.S. Monthly House Price Index>, 미국 연방주택기업감독청, 2008.7.22
3) Paul Krugman, 'Let's go Fiscal', The New York Times, 2008.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