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왕정 타도’뿐이다

[타이 분쟁 현장 르포르타주]

2010-07-12     데이비 캄루& 필리프 골뤼브&

타이를 뒤흔든 9주간의 민중시위로 88명이 사망하고, 1185명이 다쳤다. 결국 이번 시위 또한 타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시적인 폭력시위 사건의 하나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다. 1932년 절대군주정이 막을 내리고 입헌군주정이 된 뒤, 타이는 지금까지 11차례의 ‘성공한’ 쿠데타로 헌법이 18차례 개정되고, 총리가 27차례 교체됐다.

군대의 폭력적 진압 때문에 폭발한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푸미폰 국왕(라마 9세)이 1973년과 92년 두 차례 개입한 적이 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타이는 견고한 민주화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명백하게 ‘아시아의 5번째 호랑이’(1)로 등극한 타이에서 최근 발생한 몇 차례 폭력시위 사태를 일시적 혼란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와 달리 이번 폭동은 국부의 50%가 집중된 수도 방콕 지역에서 흔치 않은 사건으로, 통상적인 시위 수준을 넘어 수십 년 동안 타이 국민에게 뿌리내린 절박한 심정과 불만을 대변했다. 이번 사태는 ‘평등을 달가워하지 않는’,(2) 즉 권력과 부를 독점하려는 엘리트 집단에 맞서 도시와 농촌 지역 빈민층 집단의 불만이 돌연 표출된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타이의 ‘현대사’를 장식했던 폭동 사태와 현재의 위기가 다름을 보여준다. 최근 일련의 사태로 타이의 왕정체제 몰락이 한층 심화되고 있는데, 이는 입헌군주국이 더 이상 사회 불만을 잠재우는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폭동의 원인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 독점에 맞선 빈민층 저항운동

‘미소의 나라’ 타이에서 정권 말기의 분위기마저 감지되고 있다. 현재 82살로 2009년 9월부터 입원 치료 중인 현 국왕의 뒤를 이을 왕위 계승 문제는 이곳 사람들에겐 가장 큰 두려움이 되고 있다.

16세기 중반 이후 오랜 봉건체제의 전환기에 처한 타이에 위험스러운 새 국면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 메이지 혁명에서 착상한 민족주의 세력들이 몽꿋왕(라마 4세·1851~68)과 쭐랄롱꼰왕(라마 5세·1868~1910)(3) 아래, 국가기구와 경제체제 현대화를 기치로 서구의 간섭을 배제하며 단합했다. 이런 노력은 20세기 초에 들어 구체제에 대한 ‘혁명’(1932)으로 귀결되고, 결국 절대왕정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귀족 중심의 서열화된 사회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혁명세력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타이엔 군부체제와 민간 정부가 교대로 들어서게 된다.

표면적으로 현재의 정쟁은 ‘레드셔츠’(2006년 9월 쿠데타 이후 두 번째 임기 중에 실각해 망명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지지 세력)와 ‘옐로셔츠’(왕정의 색깔을 앞세우며, 군부의 힘을 업고 불법적으로 집권한 아피싯 웨차치와 현 정부 지지 세력) 사이의 대치 국면에서 비롯됐다. 여전히 귀족적 가치를 중시하는 타이 사회에서 대부분 북부와 북동부의 빈곤한 농촌 지역 출신인 레드셔츠는 탁신과 그 추종 세력이 조종하는 교육 수준이 낮은 ‘버펄로’로 묘사되며 경멸받아왔다. 이는 위기의 표면적 해석이다.

탁신 전 총리가 가진 상징적 무게감은 그가 집권 당시 타이 사회의 깊은 상처를 시발점으로 폭발한 시위를 이끄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라고 빠숙 퐁빠이칫 교수(4)는 말한다. 2001년 과반수 득표로 총리에 선출된 탁신은 옛 엘리트 세력과 맞서 싸우는 인민 지도자로 ‘재부상’하게 된다. 탁신 정부는 농촌 지역의 소규모 재정지원 프로그램과 지방의 소규모 수공업체에 대한 장려금 지원, 저소득층에게 무상 의료 서비스 혜택을 부여하는 의료보험 체계를 구축했다.

소외계층 위한 탁신의 정책들

빈민층은 사상 처음으로 그들의 절망감에 관심을 갖고서 변화를 이끌 능력을 지닌 총리를 맞이한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5) 탁신 전 총리는 농촌개발계획 등으로 반세기 동안 귀족이 누린 특권을 위협함으로써 왕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국왕모독죄(형사소송 가능)로 고소됐으며, 공화제로의 체제 전환을 도모한 혐의를 받았다. 2006년 탁신 총리를 면직시킨 푸치파는 군주제를 보호하기 위해 탁신 총리를 축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전 총리이자 섭정위원회 위원장인 쁘렘 띤술라논 장군은 심지어 푸치파를 ‘적극적으로’ 격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질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2007년 치른 선거로 탁신 총리가 이끄는 당은 다른 당명으로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는 타이의 북부와 북동부, 방콕시 주변 소외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다. 옐로셔츠 시위 이후, 2008년 12월 헌법재판소는 아피싯 총리 집권을 위해 이 선거 자체를 무효화했다.(6) 당시 아피싯 총리는 왕당파와 방콕 중산층, 상류층 엘리트로 구성된 연정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옐로셔츠는 시행령으로 의회 내 대규모 파벌과 테크노크라트 내각을 구성하도록 하기 위해 개헌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쟁은 엄격하게 서열화된 사회에서의 지역 간, 그리고 사회계층 간 뿌리 깊은 갈등 구조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레드셔츠를 진압한 군은 오랫동안 타이를 마비시킨 옐로셔츠의 시위를 기꺼이 용인했다. 타이 왕궁은 교묘하게 옹호하기도 했다. 이런 계층 간 적대감은 타이에서 나타나는 일상적 단면이다.

이런 적대관계가 수그러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경제발전으로 거의 모든 타이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간 것은 사실이지만(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사는 인구 비율이 1960년대 57%에서 현재 11.5%로 크게 감소함), 엄청난 불평등(7) 또한 야기됐다. 지니계수가 42.5인 타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 중 하나로 중국(지니계수 41.5)보다 그 정도가 심하고, 필리핀(지니계수 44)보다는 약간 나은 형편이다. 중앙은행에 따르면 타이의 부유층 20%가 전체 국부의 69%를 차지하고 있으며, 빈곤층은 국부의 1%만 소유하고 있다.(8)

옐로셔츠 시위는 비호하더니

대도시 방콕 주민들은 북동부 지역보다 평균 8배, 북부 지역보다 5배 높은 부를 누리고 있다.(9)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 또한 타이처럼 계급 간 충돌은 있었으나, 지금처럼 사회 갈등과 정치 구도가 뒤얽힌 폭발적 시위는 없었다. 탁신은 방콕 지역에 거점을 둔 새로운 정당의 당수가 되었다. 그는 빈곤층에는 언제나 영웅으로 남아 있다. 그가 빈곤층의 운명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2001년 총리로 선출되고 4년 뒤, 그는 다시 재선됨으로써 타이 사회의 발전이 선거를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빈곤층은 거리 청소와 부자들의 접시 닦기, 부자 동네 걸어다니기보다 언젠가는 상가에 진열된 상품을 자신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번 시위대의 마지막 행동도 소비의 상징인 ‘센트럴월드’라는 방콕 최대 규모의 상업시설을 때려부수는 것이었다.

국왕에 대해 커가는 불신

사회학적 관점에서 1973년과 92년 민주화 투쟁은 엘리트 집단 내 갈등이 표출된 것을 의미하며, 당시 신흥 중산층은 좀더 실질적인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원하는 자신들의 희망을 적극 피력했다. 이 중산계급을 통합하기 위해 정치체제가 조정됐으며, 기타 다른 사회계층에 대해서는 민주적 방식으로 또는 폭력이 배제된 시민불복종 운동을 통해 그들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일본·한국·대만처럼 이른 시기에 그리고 실질적으로 현대화된 다른 아시아 국가의 민주주의 체제와 달리, 타이의 민주주의는 일반 민중의 간절한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었고, 들어주기를 원하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1992년부터 민주화 시도는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쳤다. 타이 민주체제 이면에는 3개 핵심 권력이 타이를 이끌고 있다. 첫째는 민간과 군부 출신 관료 집단이고, 두 번째는 승려 계급이며, 세 번째는 모든 계층 간 충돌을 노골적으로 초월하는 온정주의적 군주다.(10) 군주체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네트워크 혹은 강력한 후원 네트워크로 민주체제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지만 현재는 쇠퇴 단계에 놓여 있다.

푸미폰 국왕의 오랜 통치가 막을 내릴 시기가 되면서 왕가의 단합 문제와 푸미폰 국왕의 미래 섭정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나타났다. 방콕 거리에서 유혈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푸미폰 국왕은 레드셔츠 쪽의 기대와 달리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이끌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평화적 해결을 주선할 의사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시위대들은 국왕의 초상화를 거의 내걸지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군주의 역할과 미래에 대해 레드셔츠뿐 아니라 출구를 모색하는 인텔리 계층도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군과 경찰은 분열 양상을 보였다.

방콕은 평온함을 되찾았다. 시위 주동자들은 항복했거나 도피했다. 정부는 직접 비용을 들여 불교사원에 피신 중이던 나머지 시위자들을 타이 북부로 이송했다. 아피싯 총리는 화해를 외치며 앞으로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 겉으로는 현 정부와 군이 관료들의 지지와 함께 상황을 제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언제 내부적 사회 갈등이 표면화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국왕 전복을 목표로 하면서 말이다.

글•데이비 캄루 David Camroux & 필리프 골뤼브 Philip Golub
데이비 캄루는 파리정치학교(시앙스포)의 연구원이며, 필리프 골뤼브는 파리8대학 유럽연구소 및 파리아메리칸대학(AUP) 국제관계학과의 객원교수다.

번역•전지연 junjiyun@y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한 프랑스대사관 통역관 근무.

<각주>
(1) Robert Muscat, <The Fifth Tiger: A Study of Thai Development Policy>, United Nations University Press, 뉴욕, 1994.
(2) 빠숙 퐁빠이칫 교수 인터뷰, <New Mandala>, 2007년 9월 4일.
(3) Chris Baker & Pasuk Phongpaichit, <A History of Thailand>, 2판,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4) Pasuk Phopaichit, <New Mandala>, op. cit.
(5) Pasuk Phongpaichit & Chris Baker, <Thaksin>, 2판, Silkworm Books, 치앙마이, 2009.
(6) Xavier Montheard, ‘옐로 혁명 정점에 선 타이’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9월호.
(7) 아시아개발은행 통계 자료. Zhuang Juzhong (dir), <Poverty, Inequality and Inclusive Growth in Asia>, p.3, Anthem Press, 런던, 2010.
(8) <방콕 포스트>에 인용된 통계, 2010년 3월 22일.
(9) Ibid.
(10) Maurizio Peleggi, <Thailand: The Worldly Kingdom>, Reaktion Books, 런던,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