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부르주아의 전유물인가?
2018-06-28 브누아 브레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조만간 프랑스에서는 소들이 고통을 최소화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지난 5월 채택된 농업·식품법에 따라 모든 도축장은 동물들이 도축 전 감전이나 가스 마취로 ‘제대로’ 기절했는지 확인할 ‘동물복지전문가’를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동물복지지수’가 개선되기에는 충분치 않을 듯하다. 비정부기구(NGO)들이 50여 개국의 관련법을 비교하기 위해 만든 동물복지지수가 C에 불과한 프랑스는 이 문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벨로루시, 아제르바이잔, 이란보다는 훨씬 앞서있다. 하지만 양계장 밀집 사육, 모피 거래, 원숭이 의학실험, 새끼돼지 거세, 거위 강제 살찌우기를 금지한 오스트리아에 비해서는 뒤처져 있다.
채식인구가 지속해서 늘고 있다!
동물이 겪는 고통의 문제는 각국의 의회 차원에서 다뤄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와 관련한 문제들이 점점 공론화되고 있고, 특히 환경론자들이 앞장서서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도축장과 공장식 축산 환경을 촬영한 영상들이 공유, 확산되면서 참혹한 현실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 들어 관련 단체들의 압력에 굴복해 조제프 부글리온 서커스단(프랑스)과 바넘 서커스단(미국) 같은 대형 서커스단은 더 이상 동물을 출연시키지 않기로 했으며, 배터리 케이지에서 사육하는 닭이 낳은 달걀 판매를 중지한 슈퍼 체인도 있다. 서점에는 비육식 식습관을 찬양하는 도서들이 가득하다.
프랑스, 독일, 스칸디나비아, 캐나다, 이스라엘(‘텔아비브가 전 세계 채식인들의 수도’라고 주장)에서 채식인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연구조사마다 결과가 조금 다르지만, 총인구의 3~6%(독일은 8~10%)가 채식인이다. 그중 1%는 ‘비건’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동물성 식료품의 섭취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동물에서 유래한 성분이 쓰인 제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꿀도 먹지 않고 양모도 사용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인구의 1/4이 고기를 먹되 섭취량을 줄이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도 많아지고 있다. 이 같은 식습관 변화는 동물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고, 식이요법이나 환경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고기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최근 이처럼 동물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고 있는 것은 동물권운동가들의 활약 덕분이다. 이들은 도축장과 돌고래 수족관 폐쇄라는 단기 목표와 ‘동물해방’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연계하면서 정치인들에게 열정적으로 로비를 벌이고 있다. 집권당인 ‘앙마르슈’(전진당) 소속의 질 르 장드르 의원은 “우리 당 의원들이 매일 끊임없이 받는 이메일이 50통인데, 모두 동물 학대 문제에 관련된 것”이라고 밝혔다.(1) 동물권운동가들은 농업 비즈니스 회사들에 불법으로 침투해 업계의 잔인한 이면을 찍은 충격적인 영상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암소의 몸에서 피가 빨리 빠지도록 산 채로 피를 빼내는 장면이나, (쓸모없는) 수평아리들을 수천 마리씩 분쇄하는 영상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동물권 운동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한다.(2)
동물권 운동에 앞장서는 유명 연예인 행렬
뿐만 아니라 동물권운동에 참여하는 수많은 국내외 유명인사들 덕분에 동물권운동이 더욱 언론의 관심을 받는다. 프랑스의 프란츠-올리비에 지즈베르, 이메릭 카롱 같은 언론인이나 밀렌 파르메르(가수), 마티유 리카르(불교 승려), 그리고 해외 스타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코끼리 보호운동),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나미비아 야생보호구역 후원)가 대표적이다. 한편, 페넬로페 크루즈, 파멜라 앤더스, 나탈리 포트만(이상 배우), 저스틴 비버, 모리시, 폴 매카트니, 브라이언 애덤스, 모비(이상 가수)는 모두 ‘PETA(People for an Ethical Treatment of Animals: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우하는 사람들)’의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PETA는 가장 영향력 있는 동물권운동단체로, 여성들이 누드로 포즈를 취하는 충격적이고 강렬한 홍보캠페인으로 유명하다.
할리우드가 이같이 동물권운동의 메카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동물해방’운동은 펑크스타일을 차용해 대항문화의 형태를 취했다. 환경전사로 불리는 동물권운동가들은 직접행동에 나서면서 교통수단 운행을 방해하고 식품산업과 의약회사 시설들에 침입했다. 그 과정에서 감옥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1차 공격목표는 동물을 착취하는 부르주아 행태(사냥개를 이용한 기마 수렵, 그레이하운드 경주)로, 그들은 이것이 인간의 사회적 지배 및 종(種)차별주의적 인식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3)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에서 따온 ‘종차별주의(Speciesism: 인간이라는 종의 이익을 위해, 인간 종 이외의 동물을 다르게 대우해도 된다고 보는 시각-역주)’라는 신조어는 1970년대 초반에 등장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동물해방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대두됐다. ‘카이에 앙티스페시스트(Cahiers antispécistes: 반(反)종차별주의 잡지-역주)’는 “종차별주의는 인종에 따른 차별인 인종차별주의, 성에 따른 차별인 성차별주의와 같은 것이다. 이는 종에 기반한 차별로, 거의 언제나 인간이라는 종을 우선시 한다”고 정의한다. 따라서 예전의 노예해방이나 여성해방처럼 동물이 해방돼야 하는데, 다른 해방운동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관련 당사자들(동물)이 투쟁에 참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먼 옛날에도 채식을 권장하고 동물 살육을 거부하는 이들이 많았다. 기원전 6세기의 수학자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비폭력을 지향하면서 영혼이 윤회(輪廻)한다고 믿으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1천 년 이상이 흐른 후에도 신교도들과 청교도들은 계속해서 육류제품을 금하면서 ‘육신을 이기고 정신이 승리하기를’ 기원했다.(4) 1960~70년대부터 채식주의는 종과 종 사이의 평등으로 정당화됐다. 모든 종의 구성원은 고통에 민감하며 사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다.(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14~15면 기사 참조)
동물권운동가들은 사냥개를 이용한 수렵활동과 모피에서 점차 육류산업으로 투쟁의 노선을 바꿨다.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얻을만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인간의 배를 채우고 입을 즐겁게 하려고 매주 십억 마리 이상의 육상 동물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엄청난 양의 생선과 갑각류는 말할 것도 없다.(5) 점점 더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특히 최빈국에서)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리고 적은 비용으로 동물을 키우고 죽여야 한다. 따라서 동물생산과학기술(Zootechny)은 동물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고안된 사육환경에 동물들을 적응시켰다. 예를 들어, 암소의 젖이 유축기에 보다 잘 적응하도록 말이다. 사회학자 겸 농학자인 조슬린 포르셰는 “사육되는 동물들이 ‘동물 원료’를 이용하는 산업 프로젝트에 쓰이는 ‘동물 기계’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6) 어떻게 보면 동물은 농산물가공산업에 걸림돌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동물을 먹이고 재우고 돌봐줘야 하기 때문이다. 농산물가공산업계는 그보다 더 수익성이 좋은 원료를 발견하면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동물을 저버릴 것이다.
시험관 배양 스테이크, 콩 소시지와 햄
연기금들과 ‘푸드테크(FoodTech: 기술을 이용해 기존 음식을 다른 방식으로 창조하는 것-역주)’ 스타트업들이 투자한 ‘대체 육류(Imitation meat)’ 업계는 고공성장 중이다. 구글의 투자를 받은 미국의 과학자들은 줄기세포를 이용해 시험관에서 스테이크를 배양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PETA가 두 손 들어 반기는 프로젝트다. 채식인용 식품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져, 새로운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완두콩으로 만든 소시지, ‘고기 성분은 없지만, 단백질 함량이 높은’ 햄 등이 출시됐다. 프랑스에서 ‘채식인용 식품’ 매출액이 2015~2016년 약 2배로 늘었다. 외관부터 식감, 맛까지 고기와 흡사한 이들 제품은 대체로 플뤠리-미숑(Côté végétal, 2016년), 에르타(Le bon végétal), 아오스트(Le végétarien), 르 골루아(Le Gaulois végétal) 같은 다국적 육류가공회사들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채식인용 식품에 들어가는 천연 원료는 별 게 없다. 가금류 가공회사인 르 골루아는 ‘코르동 블루 베제탈(동종의 육류제품보다 67%나 비싸게 팔린다)’ 라인 제품에 말토덱스트린(착향료 겸 증량제), 난백분말, 잔탄검(겔화제), 카라기난(농화제 겸 안정제), 수화 콩단백, 구연산나트륨(산도조절제 겸 착향료) 같은 식품첨가물을 40여 가지나 사용한다. 채식주의 열풍은 역설적으로 점점 더 인공적인 식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편 수 세기 동안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고기가 사회학적 진영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노동자와 학위가 없는 사람들이 고위직이나 학위 소지자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는다고 테라 노바는 지적한다. 테라 노바는 ‘육류를 덜 이용한 식품소비 기회를 늘리도록’ 촉구하고 가장 유망한 푸드테크 업종을 지원하면서 ‘진보 좌파의 지적 혁신’에 이바지하고자 설립된 재단이다.(7) 이제 최상류계층은 동물보호와 건강을 위해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차별화하고 채식주의를 표준식단으로 삼고 있다. 프랑스 주간지 <르 푸앵(Le Point)>은 ‘새로운 식이요법 유행’(2015년 6월 13일), 월간지 <엘르(Elle)>는 “육류 없이 잘 먹기, 전례 없어”라고 (2016년 7월 1일) 보도한 바 있다. 프랑스 디자이너, 롤리타 렘피카는 고가의 100% 식물성 원단을 애용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글래머러스하고 비건’한 비즈니스에 자부심을 내보인다.(8) 반(反)육식 전쟁이 새로운 계층 간 투쟁을 불러올까?
채식 레스토랑들은 이미 번화한 구시가지의 부르주아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L214(프랑스의 동물보호단체-역주)의 비디오 영상들은 농업관련 산업의 현실을 일깨우며 도축장 종사자들을 비난하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약 25년이라는 세월, 6~9백만 마리에 달하는 동물을 잡아온 도축업자가 한 마리 한 마리 온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다루기를 기대해도 될까?(9)
따라서 도축장에 감시카메라를 도입하는 방안은 이미 끔찍한 속도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통제만 강화할 뿐이다. 동물의 안녕과 복지는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안녕과 복지를 통해 이뤄지며, 이 둘은 모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건에 달려있다. 속도를 늦추자!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2018년 5월 23일 의회 기자회견.
(2) 대규모 온라인 비디오 플랫폼과 마찬가지로, 영화 ‘지구생명체(Earthlings)’(숀 몬슨 감독, 호아킨 피닉스 나레이션, 2005)에서도 이 같은 영상을 보여준다.
(3) Marianne Celka, ‘Vegan Order. Des éco-warriors au business de la radicalité(비건 오더, 극단적 비즈니스 영역에서 싸우는 환경 전사들)’, Arkhé, Paris, 2018.
(4) 17세기 채식주의 이론가의 표현에 따라, Arouna P. Ouédraogo, ‘De la secte religieuse à l’utopie philanthropique. Genèse sociale du végétarisme occidental(종교집단에서부터 박애주의적 유토피아까지. 서구 채식주의의 사회적 기원)’, Annales Histoire Sciences Sociales, vol. 55, n° 4, Paris, 2000년 7월-8월.
(5) ‘Livestock Primary’, www.fao.org
(6) Jocelyne Porcher, ‘Ne libérez pas les animaux! Plaidoyer contre un conformisme, analphabète(동물해방 말라! 문맹 순응주의에 반대하는 변론)’, La Revue du MAUSS, n° 29, 2007년 상반기.
(7) ‘La viande au menu de la transition alimentaire(식품 전환기 식단의 육류)’, Terra Nova, 2017년 11월 23일.
(8) Patrick Piro, ‘Nouveau REV pour l’écologie(새로운 환경 정당 REV)’, Politis, Paris, 2018년 5월 17일.
(9) Jocelyne Porcher의 계산법에 따라. Cf. ‘Vivre avec les animaux. Une utopie pour le XXIe siècle(동물과 공존하기. 21세기를 위한 유토피아)’, La Découverte, Paris,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