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황소, 들쥐들을 법정에 세워라!

2018-06-28     로랑 리첸뷔르거 | 로렌대학교 연구원

요즘에는 개가 어린아이를 물면 개 주인이 형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개 주인이 법정에 설 수도 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해당 동물이 직접 판사 앞에 출두해야 했다. 


1408년 프랑스 왕국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상당히 독특한 두 건의 재판이 열렸다. 노르망디 공국의 퐁 드 라르슈와 바르 공국의 생미옐에서 돼지들이 아동살해 혐의로 기소돼 교수형을 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년 전인 1386년 팔레즈에서도 암퇘지 한 마리가 아동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사람의 모습으로 분장을 시킨 이 돼지는 그 고장의 다른 돼지들 앞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했다.(1)

중세를 거쳐 현대까지의 동물재판

이런 동물재판들은 13세기 중반부터 현대까지 서구 기독교 사회 전역에서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알려진 사례들은 대부분 16세기에 발생한 것이고, 이후 마녀재판이 등장했다가 계몽사상이 출현하면서 점점 자취를 감췄다. 여하튼 이런 사례는 드물었는데,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은 동물재판이 고대 사법제도의 흔적에 불과하다고 해석해왔다. 그러나 동물재판을 선구적으로 연구해온 에드워드 페이슨 에번스는 중세시대와 19세기 사이에 유럽 대륙을 통틀어 200여 건의 소송이 있었음을 밝혀냈다.(2) 한편 역사학자 미셸 파스투로가 집계한 바로는 1266~1586년 프랑스 왕국에서 60여 건의 동물 관련 소송이 있었다. 

범위를 좁혀 자세히 살펴보면, 로렌 공국과 바르 공국의 문서들 중 14~18세기에 있었던 34건의 소송 기록이 발견됐다. 이 문헌자료들에는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것을 발견한 연구자들이 임의로 수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동물재판은 대체로 공판이나 법 집행에 사용된 지출영수증이나 회계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알려졌을 뿐이다. 이 말은 동물재판이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호기심을 별로 자극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동물재판이 인간의 재판과정에서 진행되는 법적 절차를 그대로 따랐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동물들을 엄연히 의식이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판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1457년 부르고뉴 공국의 사비니에서는 암퇘지 한 마리와 새끼 돼지 여섯 마리가 5세 아동에 대한 ‘살인죄’로 기소됐다. 변호인들은 범죄를 저지른 동물이 아니라 동물의 주인을 변호했다. 암퇘지의 유죄가 인정되면 그 주인은 벌금형, 즉 소송비용을 내야 하는 벌을 받았고, 암퇘지는 교수형에 처했으나, 새끼 돼지들은 그들을 처벌해야 할 증거가 없으면 사형을 면했다. 

사람과 동등하게 동물 구금 재판 

예심 기간에는 동물들도 사람과 동등하게 범죄예방 차원에서 구금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삼엄한 감시를 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마도 동물들은 특히나 한곳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두 발로 걷는 그들의 동족, 즉 인간에 비해 덜 이성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408년 생미옐에서는 궁수들이 아동을 살해한 돼지를 이틀간 감시해준 대가로 ‘술값’ 명목의 사례금을 받았으며, 퐁 드 라르슈에서는 24일간 구금된 동물도 있었다. 

일단 판결이 내려지면 사법기관의 소임은 끝나고, 판결의 집행은 공권력의 몫이 된다. 사람의 재판과 마찬가지로 판결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예를 들어 1416년 보주 주의 엔느쿠르(Hennecourt)에서 발생한 사건처럼 피해자가 부상을 당했으나 목숨을 건졌다면 소송은 취하될 수 있었다. 또 (사비니의 새끼 돼지 사건처럼) 피고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방면 되기도 했다. 반대로 해당 동물무리 전체가 처형될 수도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동물들에게는 사람과 동일한 선고, 사형이 내려졌다. 이들의 사체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려는 목적으로 한동안 교수대에 전시되기도 했다. 미셸 파스투로가 “‘사법적 정의’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이런 법적 절차들은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법정에 소환되는 동물의 종류는 비교적 한정적이었다. 아동을 살해한 돼지가 거뜬히 수적 우위를 점했고, 고양이나 황소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런 사실들에 비춰볼 때 당시 시골이나 도시에는 돼지가 월등히 많았고, 어디에나 떠돌이 돼지 떼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돼지 떼는 거리며 광장, 묘지 주변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청소부 역할을 톡톡히 하는가 하면, 때로는 샘물 오염을 우려하는 도시 당국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이런 이유로 1607년 로렌 공작은 낭시 주민들에게 마을 내 돼지사육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돼지들이 부모가 일하는 동안 집에 남아있는 아동들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중세 말 농부들의 유언장을 보면 아버지가 “그들의 자녀가 개나 돼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자녀를 책임지고 부양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프랑스, 영국 및 다른 유럽 국가들의 법원은 가정에서 그들의 자녀와 가축을 더 주의해서 돌보라는 명령을 지속해서 내렸다. 

이런 소송들은 민사법정에서 담당했고, 그 밖에 이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고 장기간 지속된 또 다른 형태의 동물재판도 있었다. 농사에 피해를 주는 곤충이나 설치류에 대해서, 교회와 관련된 사건들을 주로 담당하는 종교재판소가 제기한 소송들이었다. 확인된 최초의 소송은 1120년 라옹(Laon)에서 있었던 들쥐와 곤충 애벌레 관련 사건이었는데, 이런 유형의 소송들은 19세기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692~1733년(1766년 로렌 공국이 프랑스에 합병되기 이전)에 로렌에서 있었던 네 건의 소송을 보면 동물재판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곤충이나 설치류에게도 법정출두명령

해로운 동물을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경우, 농촌공동체는 종교재판소에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종교재판소는 밀사를 파견해 기소된 곤충이나 설치류에게 법정으로 ‘직접’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재판이 열리면 판사는 해당 동물 중 하나(그런데 대체 누가 재판에 직접 출두한단 말인가?)에게 피해지역 바깥으로 자신의 무리를 데리고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결국 이 퇴거는 사람이 집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해로운 동물에 대한 형이 집행되면 공동체는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반면 재해가 계속되면, 신이 동물 무리에게 죄를 물어 그들을 벌할 방도를 찾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법정은 평신도회나 종교단체들을 모아 대대적인 기도회를 조직하라고 명령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해로운 곤충이나 설치류는 파문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낭시 인근의 톰블렌에 있는 커다란 목초지의 건초더미를 쑥대밭으로 만든 메뚜기들은 1719년에 파문을 당한 전력이 있는데, 그보다 9년 뒤에는 욀몽 마을의 포도밭을 망쳐놓은 딱정벌레들에게도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이런 행위들은 신이 의도한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는 것이기에, 해로운 벌레와 동물들을 소송으로 다스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야생동물들은 대부분 마녀재판에서만 다뤄졌다. 일반적으로 사탄은 가축 또는 혼자 있는 사람을 공격하거나, 아동을 잡아먹기 위해 늑대 혹은 사냥개의 모습을 했다(더러는 이들을 조종했다)고 여겼다. 악마, 흡혈귀, 마녀나 마법사들은 쥐, 토끼, 까마귀, 새, 개(길들여진 가축이라는 말이 무색한 떠돌이 개들)의 모습을 취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마녀재판과 동물재판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동물은 고양이뿐이다. 악마는 잠든 어른이나 요람에 누워 있는 아기들을 습격하기 위해, 주로 고양이로 변신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법적 판례들을 이해하기 위해 무수한 가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령 민간의 미신이 그것이다. 사회를 억압하는 위협을 제거하고자 하는 의지이거나, 처형된 동물의 동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려는 욕구이거나, 또는 샤리바리(시끄럽게 냄비나 솥을 두드리면서 행진하는 민속적 의식, 또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소란이나 폭력으로 이를 해결하려는 유럽의 오래된 전통-역주)나 카니발처럼 사회와 자연의 질서를 뒤집으려는 시도와 같은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해왔다. 

현재로서는 이런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던 근거를 뚜렷이 명시한 법조문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동물들이 저지른 이런 범죄들은 바로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었고, 해로운 동물들로 인해 발생한 농사의 재해는 공동체의 존속과 영속성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철학자 르네 지라르가 말한 의미에서의 희생양 모티브(희생양에게 대신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재난이 가져오는 폭력을 정화한다는 논리로, 희생양 메커니즘에는 동물로 인간을 대신하는 경제적 기능, 좋은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막는 종교적 기능이 있다-역주)를 확인할 수 있다. 재판관들은 동물들의 범죄를 보다 포괄적인 위기라고 보기도 했으나, 개별 사건을 통해서는 사회 전반에 해를 입힌 모든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자 했다.(3) 역사가 로베르 무샹베르에 의하면 동물재판은 점점 더 초자연적인 힘을 키워가는 마법과 미신에 대한 믿음을 보다 근본적으로 뿌리 뽑는 데도 기여했다.(4) 

즉 동물재판은,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가 지닌 종교적 우려를 반영한 제도로 볼 수 있다. 즉 신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 만들어놓은 위계질서를 재건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인간을 자기 모습대로 창조하면서,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했다(<창세기>, 1:26). 동물들이 이 신성한 위계질서를 깨뜨린다면, 재판을 통해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 질서는 중세적 의미를 온전히 구현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사회 보호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이 메커니즘은 “상상의 구조이자, 제의와 행동 양식, 정신세계를 구현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하며,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세상 위에서 작용한다.”(5) 

동물재판은 인간이 동물들과 계속 뒤섞여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위험에 맞선 적응의 산물이자,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탄성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당위성을 합리화하고 인간에게 다시금 주도권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글·로랑 리첸뷔르거 Laurent Litzenburger
로렌대학교 역사연구소(CRULH) 객원 연구원

번역·조민영
서울대 불문학과 석사 졸업

(1) Michel Pastoureau, 『Une Histoire symbolique du Moyen Âge occidental(서양 중세시대의 상징적 역사)』, Seuil, Paris, 2004.
(2) Edward Payson Evans, 『The Criminal Prosecution and Capital Punishment of Animals』, William Heinemann, London, 1906. 
(3) René Girard, 『Les Origines de la culture(문화의 기원)』, Fayard, Paris, 2004.
(4) Robert Muchembled, 『La Violence au village(XVe-XVIIe siècle)(마을에서 일어난 폭력(15~17세기))』, Tournai, Brepols, 1989.
(5) Amaury Chauou, 『Le Roi Arthur(아서왕)』, Paris, Seuil,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