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바라보는 관점

2018-06-28     르몽드디플로마티크

자만심이란 인간의 선천적인 질병이다. (…) 인간은 바로 이런 상상력에서 나온 허영심으로 자신을 하느님과 견주고, 하늘의 거룩한 조건들을 스스로 차지하며, 스스로를 골라내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해놓고, 인간의 친구이자 동료인 동물에게 그들의 몫과 능력과 힘을 제멋대로 결정해 부여한다.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이해력으로 동물들의 내적인 움직임과 비밀을 안단 말인가? 인간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동물과 인간을 비교해 동물이 어리석다고 결론짓는 것인가? 내가 고양이와 놀 때,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인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미셸 드 몽테뉴, 『수상록』, 1580년.



광산의 말들 중 가장 나이가 든 바타유(프랑스어로 ‘전투’라는 뜻-역주)는 백마로, 땅속에서만 10년을 보냈다. 바타유는 10년 동안 이 굴속에 살았고, 마구간에서도 늘 같은 구석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채 지하의 어두컴컴한 갱도를 오가며 내내 같은 일을 반복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털에는 윤기가 흘렀으며 점잖아 보이는 바타유는 지상의 불행을 피해 이 땅속에서 현자의 삶을 영위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녀석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졌다. 날마다 오가는 갱도에 익숙해져 머리로 통풍구 문을 밀거나, 천장이 바짝 낮은 곳에서는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몸을 낮출 줄도 알았다. 아마도 바타유는 자기가 이 갱도를 몇 번이나 오가는지 세어 보는 듯했다. 정해진 횟수를 채우고 나면 더는 일을 하려 들지 않아 마구간으로 데려다줘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버린 녀석의 고양이 같은 눈은 때로 슬픔에 젖어 흐릿해지곤 했다. 

에밀 졸라, 『제르미날』, 1885년.



릭은 횃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올빼미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무수한 상념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전쟁에 대한 기억, 올빼미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던 날들에 대한 기억 말이다. 그는 어린 시절, 신문에서 날마다 또 하나의 동물 종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하던 일들을 기억했다. 어느 날 아침엔 여우가, 그다음 날엔 오소리가 멸종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그러다 마침내 사람들은 그 일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신문에서 들려오는 동물들의 부고 소식을 더는 읽지 않게 됐다. 

릭은 살아 있는 동물에 대한 소유욕을 다시금 생각해봤다. 그러자 진짜 살아 있기라도 하듯 정성껏 돌봐야 하는 그의 ‘전기 양(羊)’에 대한 생생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생각했다. ‘사물들은 마치 폭군 같아. 이 사기꾼(전기 양)은 나라는 존재가 있는 줄도 모르니까. 안드로이드처럼 그놈에겐 다른 존재들을 소중히 여기는 능력이 없어.’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제), 더블데이, 1968년.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온 니체. 그는 자기 앞에 있는 말 한 마리와, 그 말을 채찍질하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두 팔로 말의 목을 감싸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일은 1889년에 있었던 것이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질환이 나타난 것이 정확하게 이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이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 같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통곡한 그 순간에 시작됐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갈리마르, 파리,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