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당을 망가뜨린 올랑드의 망상

2018-06-28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2년 전, 사회당(PS) 당수였던 프랑수아 올랑드는 리오넬 조스팽이 200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탈락한 데서 교훈을 얻었다. 그는 사회당 내의 모든 좌파 세력들에게 “사회민주주의를 혼자 두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좌파의 “두 개의 강”, 즉 온건파와 강경파가 “선거를 포함해 그 어떤 합류 지점에서도 하나가 되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1) 


그리고 이 우려는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났다. 사르코지에 대한 반감에 힘입어 2012년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된 올랑드는, 5년의 재임 동안 실질적으로 혼자 통치를 하면서 모든 정치적 지렛대를 소진했다. 재임기간  그의 행보가 어찌나 실망스러웠던지, 2017년 4월 사회당의 대선주자로 나선 브누아 아몽은 녹색당 후보가 사퇴하면서 녹색당의 지지까지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득표율이 6.3%에 머물렀다. 2012년 대선에서 올랑드에게 표를 던졌던 유권자들은 아몽보다는 에마뉘엘 마크롱이나 장-뤽 멜랑숑을 선호했다.(2) 지난 50년 동안 “두 개의 강” 사이가 이토록 멀었던 적은 없었다.

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회고록

전 대통령의 임기 중에 요직에 있었던 이들이 회고록을 출간해 그간의 일들을 고백하고(베르나르 카즈뇌브 전 총리),(3) 그로부터 “교훈”을 얻었다고(올랑드 전 대통령)(4) 할 때, 우리는 자기비판적인 부분들을 기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두 회고록 어디에서도 자기비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카즈뇌브의 경우, 당시 유럽의회 의장이던 마르틴 슐츠를 통해 “놀라운 다이어트의 효과(EU 예산 삭감)”를 경험한 일화를 제외하면 “긴장 속에서 보낸 마티뇽 총리 공관에서의 150일”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느 숲에서 “여린 새싹들이 내년 봄을 기약하는 듯한 축축한 흙내음”에 대한 후각적 기억을 상세하게 늘어놓은 부분도 있다. 그의 회고록 속에는 그 어떤 기대(식물학적인 기대 외에)도, 야망도, 그리고 프로젝트의 흔적도 없다. 카즈뇌브가 총리로 일했었다, 그게 전부다. 그는 회의를 주재하고, 사무실을 열고, 연설을 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대부분의 경우 그랬지만) 자신의 인기 없음을 ‘동료들’의 분열, 당원들 사이의 “뿌리 깊은 소소한 미움들”, 사회당 내에서 카즈뇌브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의 “좌익주의” 탓으로 돌렸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과 같은 노선이 아닌 대상을 적으로 생각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보다 더 좌파에 가까운 이들을 적대시했던 것이다. 2017년 대선 1차 투표를 11일 남겨두고 “프랑수아 올랑드는 장-뤽 멜랑숑의 지지율 상승세를 보고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고 카즈뇌브는 회고록에 썼다. 멜랑숑의 지지율 상승은 곧 극우파의 지지율 하락을 의미하므로, 사회당은 이를 반겼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카즈뇌브는 “멜랑숑을 당연히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급진좌파” 세력에 대한 올랑드와 카즈뇌브의 반감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반감보다 컸다. 올랑드 전 대통령은 급진좌파가 “대안적 시스템도, 믿을 만한 제안도, 동맹관계도 없으며, 단지 자본주의의 이상적인 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자본주의에 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올랑드와 카즈뇌브의 저서, 또는 마크롱 이전에 경제부 장관이었던 피에르 모스코비치의 저서를 읽어보면,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들지 않는다.(5) 이 세 명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선거 결과 또는 사회적 결과가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대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방법의 미숙함, 속도의 오류, ‘교수법’의 문제만 인정할 뿐이다. 예를 들면, 모스코비치는 자신의 정치적 동료들이 보인 지적 경직성을 은연중에 비판했다. “그들은 공급 위주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우고는, 앙겔라 메르켈의 입장에 따르기를 반대하는 의견들에 대해선 진지하게 논의하기는커녕 무시하고 경멸했다. 비판론자들은 이 문제를 들어 우리를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재정적자 감축을 우선시하는 방안을) 논의조차 하지 않았고, EU의 선택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모스코비치는 크게 상심했다. “아무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부당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논의도 없이 이뤄진 전략적 선택을 국민들이 ‘믿어주지’ 않았다니 정말 너무 비합리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 선택은, 국민들과의 약속인 선거공약과도 대치되는 것이었다.
사실 올랑드는 2012년 1월 22일에 부르제에서 있었던 연설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했었다. “만약 프랑스 국민들이 EU 문제를 저에게 전적으로 위임한다면, 저는 우선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만나 양국이 힘을 합쳐 유럽을 성장의 방향으로 이끌고 대형 공사에 착수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말뿐이었다. 올랑드의 보좌관이었던 아킬리노 모렐은 고발장에서, “부르제 연설 직후인 2012년 2월, 올랑드는 에마뉘엘 마크롱을 은밀하게 베를린으로 보내, 앙겔라 메르켈의 보좌관인 니콜라우스 마이어-란드루트를 만나 유럽 문제를 의논하는 한편 메르켈 총리에게 부르제 연설의 진정한 의도를 전달하도록 했다”고 폭로했다.(6) 이로써 메르켈 총리는 프랑스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도 올랑드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우리는 사회주의 기준에 부합하는 ‘또 다른 유럽’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과연 누구와 함께 ‘또 다른 유럽’을 만들 것인가? (…) 나의 경험은 다음과 같은 확신을 주었다. 새로운 유럽을 꿈꾸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떠나야 하는지, 남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중간은 없다.” 현재 EU의 경제담당 집행위원인 모스코비치 역시 이와 같은 무능한 이론을 지지한다. “실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누군가에게 헛된 환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다. (…) 만장일치의 법칙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사회주의적 유럽은 좋은 대안이자 좋은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유럽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종 조약들도 재협상이 필요한데, 모스코비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 걸림돌(또는 핑계)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올랑드 전 대통령의 표현을 빌자면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만 했던 시장지배 문제” 역시 프랑스 정부 내부적으로 수많은 장애물과 충돌해야 했다. 모스코비치가 회고록에서 자신이 이끌었던 행정부를 냉담하게 평가한 대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베르시(재정경제부)의 절대권력과 “EU 집행위 인원의 5배이자 님(Nî̂mes)과 같은 도시의 인구수에 맞먹는 16만 명의 공무원들”을 언급하면서, (개선의 여지가 있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썼다. “행정부는 프랑스가 유럽 통합에서 얻을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다는 사실에 확신하고 있다.” 

이런 확신과 더불어, 좌파 정부 하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다른 확신들도 있다. “재정부는 진보주의적 정책에 대해 오만하고, 강경하고, 완고하고, 적대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 태생적인 경향 자체가 보수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산협상에서도 모든 공공정책들이 사회, 환경, 교육 분야를 우선시하고, 대부분의 재정부 보고서 역시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미명 하에 경제적 자유주의와 규제 완화의 방향을 늘 택한다.”

대선공약을 지키지 못했던 온갖 이유들

우리는 이런 기관들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보통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 외국의 거대산업에 휘둘리지는 않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을까? 올랑드가 아르셀로미탈(세계 최대의 철강업체)이 폐쇄했던 로렌 지역의 제철소를 재개하겠다는 대선공약을 지키지 못한 연유를 설명한 부분을 보면, 의구심이 든다. “나는 (락시미 미탈과) 일을 단호하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에게 우선 기업 인수자를 찾을 것을 요청했다. 만약 찾지 못할 경우 미탈이 제철소에서 손을 떼고 정부가 플로랑즈 제철소를 국유화하겠다고 말해 뒀다. 미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럴 경우 2만 명이 넘는 직원들이 고용된 프랑스 내 모든 제철소들을 정부가 일괄적으로 인수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제 프랑스에서 철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부드러움이 ‘단호함’을 이겼고, 플로랑즈 제철소는 국유화되지 않았다.

고소득자에게 75%의 세금을 부과하려 했던 일화는 한층 가관이다. 2012년 초, 대선운동은 진척이 없고 멜랑숑에게 추월당할 게 두려웠던 시기, 올랑드는 자신의 노선을 좀 더 왼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한다. “진정한 적은 재계”라던 자신의 말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올랑드는 보좌관들 중 한 명이 제안한 연 소득 1백만 유로 이상 소득자에게 특별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받아들였다.(7)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뒤, 올랑드는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에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미탈이 아니라 베르나르 아르노였다. 프랑스 최고의 부자인 그는 당시 신임 경제부 장관이었던 모스코비치에게 훈수를 뒀다. 모스코비치는 당시의 대화를 이렇게 회상했다. “LVMH 그룹의 회장은 나에게 말했다. 만약 연 1백만 유로 이상의 고소득자에게 75%의 세금을 부과한다면 그는 자신의 회사의 모든 임원들을 해외발령 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뛰어난 인재를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세금 75%로는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정책이 시행되면 아무도 프랑스에 오지 않으려고 할 것이며, 따라서 절대로 시행돼서는 안 되는 정책이라고 말했다.” 

이에 모스코비치는 논평했다. “베르나르 아르노의 말 때문에 이 법안을 포기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법안은 대선운동 중에 큰 화제를 불러 모았고,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법안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스코비치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급조된 이 법안을 하루빨리 처리해야 했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났을 때도 크게 불쾌하지 않았다.” EU 집행위, 독일, 재정부, 헌법재판소는 자본의 이익이 달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난 변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그들이 부드러운 태도로만 일관했던 사회당을 이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올랑드는 자신의 회고록에 ‘권력의 교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올랑드가 말한 교훈 외에 다른 교훈들도 얻을 수가 있다.(8)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올랑드의 재임기간 만큼 사회당이 산업계와 재계의 요구사항에 적극적으로 응한 적이 없었다. 올랑드는 근로자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노동법 개정’과 기업주들을 위한 세금감면 방안(책임 협약-Pacte de responsabilité)까지 마련했다. 심지어 이 두 법안은 올랑드의 대선 공약에도 없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굴욕을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이 끌어들이고자 한 중상류층은 올랑드 대신 자신의 패와 지지 기반을 굳이 숨기지 않았던 마크롱을 선택했다. 마크롱의 뜻하지 않은 배은망덕함은 사회당 지도자들을 종종 힘 빠지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계 측에 굉장히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Medef와 CGPME로부터 어떤 공식성명도, 어떤 긍정적인 표현도 들은 기억이 없다.”(9) 모스코비치는 한탄했다. “사회당을 향한 재계의 적대심은 임기 내내 지속될 것임이 분명하다. 재계는 단 한 번도 새로운 정부에게 기회를 준 적이 없다.”

이 같은 회고록을 낸 의도가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고 해도, 많은 독자들을 위해 좌파정책의 진정한 적을 밝힐 필요는 분명히 있어 보인다. 그 적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찌르기 위해서 말이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Quand la gauche de gouvernement raconte son histoire(좌파 정부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7년 4월호. 
(2) 제롬 푸르케에 의하면, 201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올랑드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의 16%만이 아몽에게 표를 줬다. 이들의 48%는 마크롱에게, 26%는 멜랑숑에게 투표했다.(‘Sur la gauche radicale: le vote Mélenchon(급진 좌파에 관해: 멜랑숑의 표)’, <Commentaire>, Paris, 2017년 가을.)
(3) Bernard Cazeneuve, 『Chaque jour compte. Cent cinquante jours sous tension à Matignon(매일매일이 중요하다. 긴장 속에서 보낸 마티뇽 총리 공관에서의 150일)』, Stock, Paris, 2017.
(4) François Hollande, 『Les Leçons du pouvoir(권력의 교훈)』, Stock, 2018.
(5) Pierre Moscovici, 『Dans ce clair-obscur surgissent les monstres. Choses vues au cœur du pouvoir(이런 모호함 속에서 괴물들은 등장한다. 권력의 중심에서 보이는 것들)』, Plon, Paris, 2018.
(6) Aquilino Morelle, 『L’Abdication(기권)』, Grasset, Paris, 2017.
(7) 아킬리노 모렐은 자신의 저서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부의 상한제에 관한 기사에서 영감을 얻어 이 방안을 고안했다고 밝혔다.
(8) 『Quand la gauche essayait. Les leçons du pouvoir(1924, 1936, 1944, 1981)(좌파가 노력했을 때. 권력의 교훈)』, Agone, Marseille, 2018(초판: 2000년).
(9) 2개의 기업주 조직, 프랑스 산업 연맹(Mouvement des entreprises de France)과 프랑스 중소기업 연합회(Confédération générale des petites et moyennes entreprises)



박스기사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재임 기간 유럽 관련 주요 문제들에 있어서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태도로 일관했던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전 대통령은, 지방통합계획을 추진할 당시 자신이 얼마나 위풍당당하게 결정을 내렸는지를 회고록(1)에서 언급했다.

“나는 먼저 중요한 의견들을 수집한다. 총리와 주요 부처 장관들도 이 작업에 참여시킨다. 그러나 마지막에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다. 나는 집무실의 커다란 테이블 위에 프랑스 지도를 펼쳐 놓고,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다양한 의견들을 경청하고 수렴하고, 국토의 행정적 통폐합 방안을 의회에 제안한다. 브르타뉴는 페이드라루아르와 합치고 싶지 않아 하고, 랑그독 루씨용은 미디피레네와의 통합을 거부하고, 알자스는 혼자 남기를 원하고, 피카르디는 노르파드칼레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나는 어떤 요구사항은 수용한다. 어떤 것들은 멀리한다. 반대 세력은 일부 지방에 대한 통합 계획이 ‘현실성이 없고 불투명한 논리’에 입각해 있다고, 또한 도(道) 관리 인력이 줄어들고, 코뮌의 소송 제기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논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절로 멈춘다.” 

1982년 지방분권법 이래 가장 대대적인 국토 개혁은 바로 이렇게 결정되고 실행됐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1) François Hollande, 『Les Leçons du pouvoir(권력의 교훈)』, Stock,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