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식 토지약탈에 맞선 모잠비크 농민들
2018-06-28 스테파노 리베르티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기업식 영농은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그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디에서 행해지든 상업성 있는 농사방식을 개발해 손쉽게 수익을 올리는 것이 기업식 영농의 목적이다. 그 과정에서 소규모 영농업자들의 생계형 농업이 위협받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일본과 브라질, 모잠비크가 합심해 구상한 공동계획 ‘프로사바나(ProSavana)’ 프로젝트의 맥락도 이와 같다. 그러나 3국의 영농인들은 이례적으로 거세게 반발했으며, 이에 따라 프로젝트의 진행이 중단됐다.
나카라리는 마푸투(모잠비크의 수도)에서 북쪽으로 2,000km가량 떨어진 말레마(Malema) 지구의 오지에 위치한 외딴 마을이다. 40명 남짓한 남녀가 망고나무 아래에서 방문객을 맞이했다. 나뭇가지에서는 과일이 하나씩 떨어지고, 아이들은 뛰노느라 여념이 없어 보인다. 태양에 한껏 그을린 피부와 굳은살이 박인 손…. 영락없는 농민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마을 이장 마고스티뉴 모세르네아가 이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정부의 말을 믿으면 안 됩니다. 필요할 때는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해요.” 인근 마을에서 갓 도착한 농민단체 대표들이 이어서 말했다. “정부는 현재 막다른 길목에 처해 있습니다.” 그중 40대로 보이는, 경쾌한 목소리의 전국농민연합 소속 디오니시우 메포테이아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간의 투쟁 덕에 우리는 사상 최초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토지의 침탈을 막아내고, 이 땅이 몇 세대 전부터 이를 일궈온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재확인시킨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성과는 오직 단결력으로 얻어낸 것입니다.”
나카라리를 거점으로 삼고 있는 농민운동은 전 아프리카에 걸친 대규모 기업식 농업 개발 계획 ‘프로 사바나’ 프로젝트에 일격을 가했다. 농민들 입장에선 치명타가 되길 원한 한 방이었다. 망고나무 아래에서 이뤄진 그 날의 집회는 오랜 기간 이어온 일련의 집회들 중 최근 집회일 뿐이었다. 메포테이아는 농촌지역 사람들에게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하러 분주히 움직이는데, 모잠비크의 외딴 지역에서는 인터넷이라는 것도 여전히 신기루에 불과하며, 휴대폰도 잘 터지지 않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농업지대
모잠비크 정부와 일본국제협력기구(JICA), 브라질국제협력청(ABC) 사이의 3자 협력으로 탄생한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의 목표는 나칼라 지대에 영리 농장을 건설하는 것이다. 모잠비크 북부의 3개 지방과 19개 지역을 포함한 이 지대의 면적은 총 1,400만 헥타르에 달한다. 프랑스 수도권 지역의 1/4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 지역은 특히 콩이나 면, 옥수수 등 세계 시장을 겨냥한 ‘돈 되는 농사’에 유리한 지대로 알려져 있다. 철로를 통해 이 지역과 이어지는 인도양의 나칼라 항은 중국으로의 진출 기회도 제공한다. 이런 프로사바나 프로젝트는 2008년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농지 경쟁의 하나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 국가를 비롯한 빈국들의 농지는 이미 이런 경쟁 때문에 초토화되고 있다.(1)
작물가격을 2배에서 심하게는 3배까지 끌어올린 식량 위기 이후. 대량생산용 농지의 확보는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또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도 하나둘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대규모 농지 확보에 뛰어든 것은 농식품 업체뿐만이 아니다. 증권사나 헤지펀드, 각종 투자펀드 등 영향력 있는 금융업체들도 이 분야로 눈을 돌렸으며, 이전까지는 골드만 삭스나 메릴 린치 등 상업은행에 종사하던 개인 투자자들까지 가세하고 있다.(2) 에티오피아와 콩고민주공화국, 세네갈, 수단 등 아프리카의 곳곳에서는 수억 헥타르의 토지가 매각됐는데, 이들 농지에서 생산되는 곡식은 내수용이 아닌 수출용이다. 후자가 더 수익성이 좋기 때문이다.(3) 이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 올리비에 드 슈터는 설명했다. “지역경제와 거의 무관한 이런 프로사바나 프로젝트 형 농지계획들은 토지를 상업재로 전락시키고, 소규모 영농업자의 중요성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4)
국토면적은 넓고(약 80만㎢) 인구는 적은(약 2,900만 명) 모잠비크도 이런 ‘농지 러시’의 주된 사냥감이 됐다. 2010년에 이미 호세 파체코(José Pacheco) 농업부 장관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국제회의 자리에서 국토를 1헥타르당 1달러에 50년 임대료로 넘기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상호 개발을 염두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는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다. 우리는 함께 새로운 녹색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5)
‘개발’을 위시한 개도국 간 ‘현대적’ 협력의 이면에서는 농촌지역의 전통적인 생산관계가 붕괴하고 자영농은 대기업의 임시직으로 둔갑했다. 모잠비크는 전 세계 농산물 수출의 거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2009년 이탈리아 중부 도시 라퀼라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서 일본 아소 총리 및 브라질 룰라 대통령 사이의 사적인 회담을 통해 구상된 프로사바나 프로젝트는 과거의 역사적인 선례를 재현하겠다는 뜻을 내세웠다. 1970년과 1990년 사이, 브라질 서남부의 마투그로수 고원 지대에 위치한 열대우림 지역을 전 세계 주요 콩 생산지대로 탈바꿈한 전례를 다시 한번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브라질 세라도(Cerrado) 지역이 “세계최대의 농지확장 지대”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본의 기술 및 막대한 재정 지원의 힘이 컸다는 것이 녹색혁명의 아버지 노먼 볼로그의 생각이다. 프로사바나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3자 협력 체계 역시 브라질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모잠비크 북부를 개발하는 한편,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한 농산물 판매는 일본 기업에 맡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전 세계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로부터 찬사가 쏟아졌다. 2011년 11월 한국의 부산에서 열린 제4차 원조효과 고위급 회담에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다 같이 움직여서 공통의 문제에 대한 해결법을 찾고자 하는 신흥경제블록”의 노력에 환호를 보냈다.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다수의 아프리카 개발 계획을 이끌어가는 세계 최대 갑부 빌 게이츠 역시 프로사바나 계획에 대해 “혁신적인 파트너십 구축의 본보기”라며 추켜세웠다.(6)
정부가 국민들 몰래 팔아넘기고 있는 것
이 ‘혁신적인 파트너십’의 무대 뒤에는 컨설팅 기업 GVAgro가 있다. 게툴리우 바르가스 재단과 연계된 이 회사는 브라질의 싱크탱크 겸 유명 직업학교다. 이런 GVAgro를 움직이는 것은 호베르투 호드리게스 전 농업부 장관인데, 그는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에 위치하는 아프리카 열대지방 전체의 기업식 농업개발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끌고자 하는 인물이다. 테트 지역에서 석탄을 채굴하는 채광기업인 발레(Vale)에 자문을 제공하기도 하는 그는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의 막후 인물로 손꼽힌다. 브라질 마투그로수 고원 지대의 성공을 모잠비크 북부지역에서도 실현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미개척 토지”(7)의 단일경작 개발 성공신화를 이어가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호드리게스 전 장관이었다. 나아가, 그는 브라질 예비 투자자들의 현지답사를 추진하기까지 했다.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의 기본계획을 세우고 재정구조를 마련한 것도, 그가 이끌어가는 GVAgro였다. 브라질 정부와 일본 정부가 출연한 초기 투자금 3,800만 달러로 사업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나칼라’ 특별기금의 추가지원을 받아 20억 달러의 민간투자금을 유치한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 명시된 기금의 목적은 “지역경제 및 역내경제 개발을 촉진함으로써 투자자들에게 장기수익을 발생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모잠비크와 일본 역시 ‘프로사바나 프로젝트 개발’ 기금을 조성해 “소규모 영농업자들의 다양한 통합 모델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농지전환 및 농촌개발계획의 구상은 현지에서 살아가는 소규모 영농업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농촌개발을 위한 학술행동(Adecru, 소규모 농가를 지원하는 마푸투 소재의 조직)을 총괄하는 제레미아 분자느는 “맨 처음 이 개발계획에 대해 들었던 게 2011년 8월의 일로, 그 당시 파체코 전 농업부 장관이 브라질 언론과 했던 인터뷰를 통해 이 소식을 접했다”고 이야기했다.(8) 전직 기자로 상당한 능변가인 그는 분개하며 말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정부가 국민들에게는 말 한마디 없이 외국에 뭔가를 팔아치운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어서 그는 “이 인터뷰로 우리도 눈이 번쩍 뜨였다. 관련 조사를 벌인 결과, 우리는 이 계획이 다국적 농기업에 우리 대문을 개방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이 사업에 대해 조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장관의 인터뷰 기사에서 이미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브라질 기업들은 턱도 없이 저렴한 지대를 받고 농지 제공을 약속해준 아프리카 국가에 입성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브라질 마투그로수 면화 생산자 연합회 의장인 카를루스 에르네스투 아우구스팅 역시 “모잠비크는 아프리카의 마투그로수다. 환경의 제약이 없는 땅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데다가, 중국으로의 상품 운송비용도 훨씬 더 낮기 때문”이라고 확언했다. GVAgro가 아무리 감언이설로 포장하고, 이 프로젝트의 지지자들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해도 실상 모잠비크 나칼라 지대는 브라질의 세라도 지역과 큰 유사성이 없다. 두 지역이 같은 위도 상에 있긴 하지만,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의 예정지가 훨씬 더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불모지였던 브라질 땅과 달리 이 지역은 현지 농민들에게 더욱 중요한 농지다. 특히 1970년대에는 인구가 적었던 마투그로수 고원지대와 달리, 500만에 달하는 이곳 주민들의 대부분은 내수소비용 식량 작물을 주로 생산하는 소규모 영농업자들이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모잠비크에서도 토지는 정부 소유이며, 매매할 수 없다. 1975년 독립 당시 정부에 부여된 이런 특권은 1990년 헌법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 모잠비크 정부는 법에 따라 개인 혹은 단체에 “토지 경작권과 이용권(DUAT, Direito de Uso et Aproveitamento dos Terras)”을 지급해 소규모 농지의 경작권을 준다. 그러나 농촌 주민 모두에게 경작권에 대한 정식허가증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농민들은 정식허가증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도 하는데, 허가증이 없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작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기도 한다.
문맹인 농민들을 속여 권리를 약탈한 공무원들
나카라리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우아쿠아(Wuacua) 마을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2012년의 어느 날, 해당 지구의 공무원들은 주민들을 찾아와 서류에 서명할 것을 요청했다. 공무원들은 주민들에게 소정의 금액과 함께 ‘사회지원 계획’의 이행을 약속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해당 문건은 토지 경작권과 이용권(DUAT)에 대한 포기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메포테이아는 분개하며 그때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공무원들이 주민들을 속인 것이다. 주민들도 농촌 지역 개발계획에 참여하게 될 거라며 저들이 서류에 서명을 요구했지만, 주민들은 서류의 진짜 내용조차 알지 못했다. 주민들이 받은 보상액은 4,500~6,000메티칼(60~80유로)에 불과했으며, 결국 울며불며 쫓겨나는 처지로 전락했다.”
얼마 후,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합자 기업인 아그로모스(Agromoz)가 9천 헥타르의 토지를 넘겨받았고, 아그로모스는 이 지역에서 주로 콩을 재배한다. “공무원들은 이곳 주민들 대다수가 문맹이며, 포르투갈어도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한 것이다.” 현재 우아쿠아는 아그로모스의 대규모 농장으로 둘러싸인 유령마을이 됐다. 기업소속 경비원들은 이곳으로의 진입을 원천봉쇄하고 있고, 허허벌판이 된 땅은 싹이 트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강낭콩과 카사바를 재배하는 작은 텃밭이 펼쳐지고, 망고나무 아래로 아이들이 뛰놀던 나카라리의 모습과는 새삼 다른 풍경이다.
아그로모스 사건이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주창하는 의도는 자명하다. 우아쿠아 사태와 이곳에서의 토지 침탈은 입에서 입을 통해 지역전체로 확산됐고, 이 일을 계기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은 농민 대표들은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마포테이아는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공무원들은 우리를 지역본부에 불러놓고 개발을 운운했다. 슬라이드로 그럴듯하게 작업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도 보여줬다. 우리는 아그로모스 사건에 대한 질문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만 할 뿐 우리 질문에는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방을 나와 버렸다.” 이후 무투알리 지역은 농민저항 운동의 상징이 됐으며, 이후 몇 달 간 국가 전체로 확산된 농민운동은 빠르게 해외로까지 퍼져나갔다.
분자느는 “모든 게 브라질 답사에서 시작됐다”고 이야기했다.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에 대한 소식을 접한 후, 30년 전 마투그로수 지역에서 시행된 농촌개발 계획과 동 프로젝트와의 유사성을 확인한 모잠비크 농민 조직은 직접 현장 답사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2012년 11월, 5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마투그로스로 떠났는데, 답사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농촌 상호부조연합(ORAM)의 아벨 사이다는 “우리가 수백 km에 달하는 지역을 둘러봤는데, 어디에도 광활한 콩 재배농장밖에 없었다. 농부 한 사람 찾아보기 어렵고, 농촌지역 하나 조성돼 있지가 않았다”고 토로했다. “토지 전체에 벌채가 진행돼 있었고, 생명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료와 살충제를 과도하게 사용한 나머지 황량한 사막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땅도 이렇게 공허한 풍경으로 둔갑한다고 생각하면 너무도 끔찍하다.” 현장 답사 이후 작성된 보고서는 현지 언어로 번역돼 모잠비크 전 지역에 배포됐다.(9)
전국농민연합의장 코스타 에스테방은 “우리도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우리에게 계속해서 관련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랑스레 조직의 배지가 달린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그는 모잠비크 정부를 맹렬히 비난했다. “우리가 개발 그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 농민들이 함께 참여하고, 농민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나. 하지만 정부는 독단적으로 모든 계획을 세우고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농촌개발 운운하며 우리를 자기들 맘대로 이 계획에 끌어들이려고 한다. 수십 년 전부터 이 땅을 일궈온 사람들의 땅을 갈취해가면서 말이다.”
모잠비크 북동부 남풀라에서 차로 약 30분 떨어진 작은 밭에서, 에스테방은 이토록 분노에 차서 말하면서도 열심히 괭이로 땅을 파서 옥수수 씨를 뿌렸다. 에스테방은 “이 계획의 전체적인 기본 방침에 대해 알고 나니 사람들이 우리에게 제안하던 것이 실로 사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얘기했다. GNAgro와 일본의 두 컨설팅 업체 오리엔탈 컨설팅 및 NTC인터내셔널은 문건 하나를 작성했었는데, 자료 유출로 그 전모가 밝혀진 내용을 읽어보면 농민들의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해당 문건에서는 “전통적인 농업 방식과 토지 관리 방식을 지양하고, 화학적 방식의 생산요소 및 민간 토지 증서를 활용하는 가운데 상업 작물에 기반을 둔 집약식 농업으로 농부들을 장려한다”는 내용이 확인되기 때문이다.(10)
“정부는 기회만 있으면 공격해올 것”
처음에 관련 지역에서만 한정됐던 농민들의 반발은 빠르게 그 규모가 확대됐다. 브라질과 일본, 모잠비크에서도 농민운동이 일어났으며, 관련 조직들은 정보를 공유하고 연대 행동을 벌였다. 모잠비크의 스물 세 개 조직은 일본 정부와 브라질 정부, 모잠비크 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내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중요도가 지대한 사안”임에도 “포괄적이고 투명하며 민주적인 공론화 자리가 일절 없었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11) 40여 개의 국제 조직들도 이 서한에 연대 서명을 하며 이를 배포했다. 에스테방 의장은 모잠비크 오지에서 도쿄의 하원 건물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자신들의 입장을 역설했다. “일본 국회의원들과의 회동 자리에 초대된 나는 우리가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에 비판적인 입장이라는 사실을 전달했다. 이 계획이 우리의 삶의 방식에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국내 집회와 해외 활동을 병행하고 공개서한을 보내며 여론을 조성하던 끝에 모잠비크 농민들은 브라질 농민조직 및 일본과 유럽의 시민사회 조직, 대학 등과 연대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에 대해 분자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농민들의 저항 운동은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우리는 천막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해줬으며, 공무원들의 허울뿐인 약속에 속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엄청난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굉장한 성과를 얻어냈다. 모잠비크 정부는 처음으로 국민들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국민들은 정부에게 위로부터 강요된 개발 모델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큰 목소리로 분명하게 전달했다.”
그 결과, 나칼라 지대를 제2의 마투그로수로 만들며 대대적인 농지 전환 계획을 주창하던 세력은 차츰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다시금 식민주의 토지 침탈의 주체로 받아들여 질까 우려하던 일본인들은 계획의 적절성에 대해 제일 먼저 의문을 제기했고, GNAgro의 초대로 모잠비크를 방문했던 브라질 기업들도 더 이상 이 계획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브라질 국제협력청 기술자들도 본국으로 돌아갔다. 20억 달러 가까이 조성했던 나칼라 기금도 소리소문없이 해체됐고, 이로써 프로사바나 프로젝트는 중단됐다.
일본 국제협력기구의 프로사바나 프로젝트 책임자인 요코야마 히로시는 “우리가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마푸투 시내의 한 신식 건물에 위치한 일본 국제협력기구 본부의 이 관계자는 사전에 그 어떤 실효성 연구도 이뤄지지 않았음을 솔직히 시인했다. “처음에는 우리도 마투그로수의 선례를 모잠비크에서 다시 한번 재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두 지역의 상황이 매우 다르며, 브라질의 개발 모델을 이곳에서 그대로 시행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요코야마는 “소규모 영농업자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모든 형식의 대규모 농업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 부분이 바로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그는 “관련 농촌지역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문체계와 더불어 기본계획을 새로 수립하는 중”이라고 얘기했다. GNAgro는 이 과정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다. 지난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프로젝트 진행자들은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라퀼라 G8정상회의에서 공식화된 후 약 10년, 프로사바나 프로젝트는 축포를 터뜨리기도 전에 좌초되고 말았다. 일본은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다가 다시 발을 빼면서 위신을 지켰고, 브라질도 이미 짐을 꾸려 자리를 떴다. 아프리카 지역의 농업 거점이 되길 꿈꾸던 모잠비크는 아직 논의 단계일 뿐인 단순 협력 계획만을 이끌어 가야 하는 처지다. 그나마도 이에 대한 세간의 신뢰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듯하다. 농업부 청사에만 가 봐도, 이 프로젝트의 위상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아프리카 최대 개발계획으로 여기던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의 진행본부는 농업부 건물 내에서도 구석으로 좌천됐다. 컴퓨터 한 대, 전화기 한 대 없는 텅 빈 사무실, 책상 뒤 벽면에 모잠비크 국기와 일본 국기가 초라하게 걸려 있었다. 그 앞에 선 프로사바나 프로젝트의 국내 담당자 안토니오 림바우는 자명한 사실을 부인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해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설명했다. “우리가 세라도의 브라질 모델을 가져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우리는 늘 모잠비크에 적합한 농촌개발 모델을 추진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장려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민들의 식량주권이다. 다소 오해나 지체가 있다 해도, 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나칼라 지역에서는 프로사바나 프로젝트가 이미 지나간 망령에 불과한 듯했다. 나풀라 외곽의 초원 한가운데에 뜬금없이 서 있는 성당건물처럼 외로이 솟아 있는 토지분석 연구소 건물이 눈에 띄었는데, 이곳은 프로사바나 프로젝트 기본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몇 안 되는 조직체 중 하나였다. 황량하고 텅 빈 건물 안에서 몇몇 학생들과 농공학자 한 명이 무기력하게 일부 기기들을 시연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프로사바나 프로젝트 책임자인 아메리쿠 우아시케트가 말했다. “계획 자체야 좋았지만, 계획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지금은 모든 게 중단된 상태다.”
차로 몇 시간 떨어진 나카라리의 망고나무 아래에서는 ‘프로사바나’라는 단어만 던져도 사람들의 얼굴에 분노가 솟는다. 모르세네아는 “수천 번 찾아와도 우리를 절대 설득할 수 없다”고 단단히 못 박았다. 그 옆에 있던 분자느는 “역사적인 성공”을 거둔 데 만족감을 표하면서도 신중함을 지키는 듯했다. “정부가 대외적으로는 말을 바꿨지만, 우리는 향후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정부는 기회만 있으면 공격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글·스테파노 리베르티 Stefano Liberti
기자 겸 감독. 이 기사는 퓰리처 재단 위기 보고 센터(Pulitzer center on crisis reporting)의 지원으로 작성됐으며, 엔리쿠 파렌티 Enrico Parenti와 공동제작한 전 세계 축산업 및 콩 단일재배업 관련 다큐멘터리의 일환으로 작성됐다. 영화는 2018년 가을 개봉 예정이다.(www.soyalism.com)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Joan Baxter, ‘Ruée sur les terres africaines 검은 대륙 짓밟는 강대국의 농지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0년 1월호·한국어판 2010년 3월호.
(2) Ward Anseeuw, Liz Alden Wily, Lorenzo Cotula, Michael Taylor, ‘Land rights and the rush for land. Findings of the global commercial pressures on land research project’, International Land Coalition, Roma, 2012.
(3) Land Matrix, www.landmatrix.org 데이터베이스 참고.
(4) Olivier De Schutter, ‘How not to think of land-grabbing: Three critiques of large-scale investments in farmland’, <The Journal of Peasant Studies>, vol. 38, no 2, Routledge, Abingdon (UK), 2011
(5) Stefano Liberti,『Main basse sur la terre, Land grabbing et nouveau colonialisme』, Rue de l’échiquier, Paris, 2013. 국내에는 『땅뺏기, 새로운 식민주의 현장을 여행하다』(레디앙, 유강은 역, 2014)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도서.
(6) Jun Hongo, ‘ODA transforming Mozambique’, The Japan Times, Tokyo, 2012년 1월 6일.
(7) Alex Shankland & Euclides Gonçalves, ‘Imagining agricultural development in South-South Cooperation: The contestation and transformation of ProSavana’, <World Development>, vol. 81, Amsterdam, 2016년 5월.
(8) Patrícia Campos Mello, ‘Moçambique oferece terra à soja brasileira’, <Folha de São Paulo>, 2011년 8월 14일.
(9) Face oculta do ProSavana, 2013년 10월 7일, www.youtube.com
(10) ‘Leaked ProSavana master plan confirms worst fears’, 2013년 4월 30일, www.grain.org
(11) ‘Open letter from Mozambican civil society organizations and movements to the presidents of Mozambique and Brazil and the Prime Minister of Japan’, 2013년 6월 3일, www.grain.org
[모잠비크 국가개요]
인구 2,800만 명
면적 79만 9,000㎢
인간개발지수 184개국 중 180위
경제현황 농업(GDP의 21%, 수출의 25%, 고용의 80%), 상업 및 서비스(GDP의 12%), 제조업(GDP의 8%), 광공업(GDP의 4%)
주요수입국 남아프리카공화국(49%), 중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주요수출국 네덜란드(45%),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중국
수출품목 알루미늄(27%), 석탄(11%), 전기(10%)
수입품목 기계류(21%), 건축 자재(8%), 선박 및 부유구조물(7%)
성장률 4.7%
인플레이션율 16%
빈곤율 49%
출처: UN아프리카경제위원회, 국제농업개발기금
[모잠비크 주요사건]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모잠비크 연안에 상륙. 포르투갈 해외상관 설립의 시초. 내부 토지개발 사업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작됐다.
1951년 모잠비크, 포르투갈의 ‘해외령’ 지역이 됨.
1962년 여러 차례의 민족운동으로 모잠비크 해방 전선(Frelimo)이 결성되고, 에두아르두 몽드라느가 조직의 첫 의장을 역임.
1964년 모잠비크 해방 무장투쟁 시작
1975년 6월 25일 모잠비크 독립
1976년 남아공의 지지를 받는 모잠비크 민족저항운동(Renamo)의 항쟁 시작.
1977년 모잠비크 해방 전선 3차 의회 - 마르크스-레닌 정당으로 전환
1992년 10월 4일 평화협정 체결로 내전 종식.
1994년 다당제 채택.
2013~2015년 모잠비크 민족저항 운동과 정부세력 사이에 산발적인 대치 국면
2016년 4월 국영어업회사 에마툼 Ematum, 해상안보업체 Proindicus, 모잠비크 자산 관리 회사 Mozambique Asset Management 3개 기업이 은밀히 국제시장에서 20억 달러 이상의 대출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감사를 통해 발각됨.
2017년 1월 모잠비크,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
2018년 4월 IMF와 모잠비크 정부, 채무 구조
조정 계획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