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가 무너진 말리의 비극
2018-06-28 레미 카라욜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아프리카 말리의 중부 도시 몹티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코나에 어둠이 내렸다. 노란색 안전조끼와 주머니가 여럿 달린 바지를 입은 수십여 명의 남자들이 청소년센터 건물 앞에 모여 있다. 곤봉과 벌초용 칼을 든 채 6~7명씩 무리 지어 있던 남자들은 무전기를 받아들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흩어졌다. 이들은 모래 먼지로 뒤덮인 거리를 새벽까지 순찰할 것이다. ‘자경단’은 약 500여 명의 지원자로 이뤄졌다. 대부분 청년들이다. 이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은, 9개월 전 치안을 담당하는 헌병대가 마을을 포기하고 떠나버린 데다가, 50km 거리에 주둔해있는 군대 또한 이 지역에서 들끓고 있는 무장세력의 공격이 두려워,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공권력을 대신해 주민들을 지키는 자경단
주민들은 헌병대가 코나를 포기하기 훨씬 전부터 절도와 살인 사건에 속절없이 당하고 공권력이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에 좌절한 나머지 ‘자경단’을 조직했다. “2016년 3월 23일 도시 한 가운데서 마라부(이슬람 수도자)가 살해당했고 그다음 날에는 상인 한 명이 자신의 상점에서 죽었다. 하지만 헌병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나선 것이다.” 자경단을 이끄는 코나 시장의 수석보좌관 야야 트라오레가 자경단이 조직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자경단이 변화를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이 절도범을 잡으면, 일단 자경단의 본부격인 청소년센터로 데려온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가 경찰에 절도범을 넘기면, 경찰은 절도범들에게 다시는 오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절도범들도 우리의 메시지를 이해한다. 그래서 절도사건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트라오레는 이슬람 반군 역시 자경단이 두려워 더 이상 출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코나에 있는 학교가 폐쇄되지 않고 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자경단 덕분이다. 실제로 주변 마을에서는 지하디스트들 때문에 학교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프랑스가 말리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세르발 작전)하게 된 계기인 코나 전투(2013년 1월 10~17일)가 끝난 후, 말리의 수도 바마코와 가오를 연결하는 요충지이자 1만 5천 명의 주민이 사는 코나는 말리의 부흥의 상징이 돼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말리의 실패를 처절하게 상징하고 있다. 불에 탄 자동차들이 거리에 널려있고 프랑스군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프랑스군, 말리 정부군, 아프리카 연맹군이 말리 북부지역을 회복한 후 주민들은 더 이상 지하디스트들을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국가체제 붕괴의 가능성도 멀어진 듯 보였다. 2013년 8월 대선에서 큰 득표 차로 승리한 이브라힘 부바카르 케이타 대통령은 강력한 국가재건을 약속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7월 29일 대선을 앞두고 전국에 선거가 실시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케이타 대통령은 조각조각 찢긴 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북부의 주요 도시 가오, 팀북투, 키달, 테살리트는 2012년부터 유목민족 투아레그의 무장 조직과 지하디스트 세력이 장악하고 있고, 말리 안정화를 위한 다차원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UN 평화유지군 미누스마(Minusam)가 지역을 나눠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다. 2015년 6월에는 말리 정부와 투아레그 반군, 그리고 말리 북부 아랍 반군(투아레그 반군이 주축)이 주도하고 있는 아자와드 민족해방운동이 바마코에서 평화조약을 맺었고,(1) 지방의 도지사들이 임명됐다. 말리군도 차차 모양새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진전은 평화조약에 명시된 원칙일 뿐 아직 이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혼란한 틈을 타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재조직됐다. 알카에다 북아프리카 지부(AQMI), 안사르 에딘, 마시나 해방전선, 알무라비툰이 규합해 2017년 3월 누스라알이슬람(GSIM) 결성을 발표했다. 말리 출신 투아레그족 이야드 아그 갈리가 이끄는 GSIM은 민간인과 군인들의 안전을 매일 위협하고 있다.
북부에서 중부로 옮겨온 폭력의 진앙지
말리 정부군은 팀북투와 가오에 부대를 두고 있지만 키달을 비롯해 여러 북부지역에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말리인들에게 국가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존재다. UN에 의하면, 2017년 12월 현재 북부로 발령을 받은 공무원 3명 중 자리를 지키는 이가 1명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에는 북부로 발령을 받은 공무원 숫자 자체가 줄었다. 올해 5월 30일 말리를 방문한 안토니오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은 우려를 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리 중부가 무너져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치안과 정상 생활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부지역의 치안은 매우 불안하다. 이제 폭력의 진앙지는 북부의 키달이나 팀북투가 아니라 더 남쪽에 있는 몹티와 세구 지역이다. 2017년 말리군, 프랑스군, UN군은 테러조직이라고 여겨지는 무장단체에 63번 공격을 당했는데 대부분 몹티 지역에서 발생했다. 올해 3월까지만 해도 미누스마에 따르면 중부에서 85건의 ‘중대 폭력사건’이 발생했고 민간인 180명이 사망했다.
중부지역은 거대한 고립 지역이다. “몹티와 세바레는 괜찮다. 하지만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위험해진다.” 전임 세바레 시장인 우마르 바틸리가 씁쓸하게 말한다. 몹티와 세바레는 십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우기 동안 불어난 습지를 가로지르는 제방이 두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중부지역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섬 같은 곳이다. 몹티는 니제르강과 바니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다. 그러나 ‘말리의 베네치아’라 불리며 매년 수천 명의 관객이 찾던 과거의 영광은 오래전에 저물었다. 지금은 관광객을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북쪽 팀북투행 유람선이 출발하는 항구는 뜨거운 햇볕 속에 텅 비어있다. 할 일 없는 나룻배 사공들의 무료한 시선 속에 몇 명의 여인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근처에 있는 카나가호텔 직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객실이 80개, 스위트룸이 7개 하지만 손님은 0명이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호텔 매니저인 아마솜 돌로는 한탄한다. “다른 호텔들은 문을 닫았다. 그래도 우리는 뒤에 단체고객이 있어 그나마 버티고 있다.” 돌로 매니저는 2013년 북부가 회복된 후 경기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말한다. “너무 위험해서 도곤족이 사는 지역이나 팀북투, 젠네(고대도시)에 가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몹티에는 올 수 있지 않은가? 공격당할 위험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 강 건너에 지하디스트들이 있다고 하는데, 물이 말라버리는 바람에 걸어서 강을 건너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세바레는 공항이 있는 덕택에 몹티보다는 안전해 보인다. 세바레는 말리 정부군, 지휘 본부, 미누스마 신속대응군 400명 그리고 G5 사헬 연합군 사령부가 있어서 말리에서 가장 방어가 잘 되고 있는 곳이다. 호텔에는 전투복을 입은 군인, 덩치 좋은 ‘컨설턴트’, 출장 온 외교관들로 넘쳐난다. 에코 플라이트는 이곳에 사무실을 둔 유일한 여행사로 전투 지역에 항공 수송을 담당하는 유럽연합 소속 부서다. 거의 모든 건물은 군인들에게 임차돼 벙커로 변신했다. “상인들과 건물주들은 특수를 누리고 있다. 전쟁으로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내동댕이쳐졌다.” 세바레의 바틸리 전임 시장의 말이다.
“몇 달 동안, 정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말리 사람들은 중부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에 매우 놀라워한다. 3년 전 2015년 1월 5일 지하디스트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든 무장괴한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 남팔라 군사기지를 공격하고 11명의 군인을 사살했다. 모리타니와 접해있는 국경 마을 남팔라는 몇 시간 동안 점령당하기도 했다. 약사 출신으로 2016년 남팔라 시장으로 선출된 세쿠 바가 들려주는 남팔라의 사정은 몇 년 동안 버림받았던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2012년 지하디스트가 북부를 장악했을 때 남팔라에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도 오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도주했다. 프랑스가 남팔라를 탈환한 후에야 정부군이 돌아왔다. 그러나 소 절도 사건이 빈번한데도 군인들은 도와달라는 주민들의 부탁을 무시했다. 몇몇 농부들은 가축을 지키려고 무기까지 들었다. 상황은 다소 진정됐지만 1월 5일 공습 후에 군대와 공무원들은 다시 도망갔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사소한 일도 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전임 시장은 덧붙인다.
남팔라가 수복되자 다른 마을들이 공격을 당했다. 공무원들이 살해당하고 정치인들이 위협을 받았다. 처음 몇 달 동안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누구의 소행인지도 밝히지 못했다. 우기 때마다 물에 잠기는 마시나 지역에서는 총격을 가했던 자들을 ‘오토바이 탄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마시나 해방전선을 이끄는 하마둔 쿠파를 추종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샤리아법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 말리군 장교는 이렇게 말한다. “몇백 명에 불과한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숲속에 숨어 있다가 목동으로 변장하고 마을로 침투한다. 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군대나 정착부족의 수탈로부터 유목민인 풀라니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적 요구 뒤에는 종종 부족 간의 원한에 따른 약탈이나 복수같이 입 밖으로 내기 힘든 이유가 숨어 있다. 중부지역은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다. 1960년 말리의 독립 후에도 프랑스 식민지배자들에게도, 말리 행정관들에게도 이 지역은 어둠에 가려진 불확실한 곳이었다. “중부에서는 반란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북부와는 달리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중부지역에는 대규모 전쟁 대신 소규모 분쟁이 많았고 이를 시작으로 테러리즘이 뿌리내렸다는 것이다.” 바마코에 주재하고 있는 한 외교관의 말이다.
19세기에 몹티 지역은 ‘말리의 엘도라도’였다고 말리인 기자 아당 티암은 말한다. “농업이 발달해서 매우 번창했다. 수출액의 30%를 차지하며 독립 후 몇 년 동안 말리 경제의 허파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가뭄이 계속되면서 지역경제가 타격을 입었다. 1985년 중부는 식량난으로 인한 정치 불안지역으로 분류됐고 1986년에는 정부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고 언급한 보고서가 작성됐다.”
종교적 신념? 살기 위해 지하디스트가 된다
아당 티암 기자가 ‘만딩고족(말리와 그 주변에 사는 흑인계 종족) 권력’이라 부르는 말리 정부가 실시한 정착농업 정책은 유목민들을 고려하지 않는 토지개발 정책으로 유목민인 풀라니와 투아레그족, 농경을 하는 밤바라와 도곤족 그리고 어부들인 보조스족(Bozos)이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균형을 무너뜨렸다. 수십 년 동안 서아프리카 부족들은 자신들의 규범과 부족장에게 복종하며, 비옥하지만 경쟁이 심한 땅에서 함께 살았다. 문제가 생기면 종종 폭력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매번 지역 유력자들의 개입으로 신속하게 해결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는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공존 방식을 해체하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렸다. 1995년 북부가 불안해지기 이전부터 몹티 지방은 말리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이었다. 3년 전 몹티 지역의 가정 전기 보급률은 7.1% (전국 평균 22.9%), 중학교 취학률은 41.9% (전국 평균 72.3%)로 각 분야에서 전국 꼴찌였다.
원래 고립돼 있었던 중부는 북부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사람들의 관심에서 더욱 멀어졌다. 2013년 정부가 다시 돌아왔지만 정부는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으며, 말리 국민들에게는 ‘나쁜’ 정부일 뿐이었다. 특히 군대는 수탈을 일삼으며 주민들을 괴롭혔다. ‘그로 인해 군과 주민들 특히 풀라니족 사이에 불신이 더욱 깊어졌다’고 국제위기그룹(ICG)이 밝혔다. 여러 인권단체들도 인권 침해의 심각성을 고발했다.
군과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부러 부족 간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케이타 대통령이나 참모부의 측근들이 중부에서 지하디스트 반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통 사냥부족인 도조족(Dozos) 민병대에 무기를 제공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올해 3월 풀라니족과 도곤족의 자위부대가 충돌했는데 30명이 넘게 죽었다. 미누스마 관계자를 비롯,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전쟁무기가 말리군의 비축품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12월 임명된 수멜루 부베예 마이가(Soumeylou Boubèeye Maïiga) 총리는 첫 방문지로 몹티를 선택하고 경제개발 계획과 정부의 귀환을 발표했다. 그리고 몹티와 세구 지역에서 가장 낙후된 곳에 3,000명의 군인을 동원해 공세를 펼치며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적도 기니 주재 말리 대사를 지냈던 이스마일라 시세 장군은 이를 두고 판단 착오라고 말한다. “군인들은 풀라니족을 모두 지하디스트라고 여기지만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는 이유로 이륜차 통행을 금지한 것(중부에서는 연초부터 실시됐다.) 역시 판단 착오이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지역에서는 모두 이륜차를 타고 다닌다. 이륜차 통행을 금지하는 것은 목축하는 사람들과 상인들의 통행을 막는 것이다. 금지를 해제하지 않으면 시장이 문을 닫아야 한다. 국가가 경제활동을 막으면 선량한 사람들도 지하디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지하디스트 단체에 합류했다가 다시 돌아온 63명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대부분의 경우 ‘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가족과 부족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지하디스트가 됐다고 밝혔다.(2)
지하디스트 치하의 삶, 표적이 된 학교
행정부가 채우지 못한 빈 공간은 극단주의 운동으로 채워지고 있다. 말리 중부의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교육 운동을 하고 있는 ‘델타 서바이벌’(세바레 소재) 협회는 이를 날마다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델타 서바이벌의 이브라히마 상카레 대표는 점점 더 이동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탄한다. “모든 마을에 지하디스트 세력이 있고 그들이 마을을 다스리고 있다. 세금을 걷고 판결을 내리고 여자들이 밖에서 목욕하는 것이나 얼굴을 가리지 않고 외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세례식이나 결혼식을 못 열게 하고 전통 이야기꾼인 그리오들을 공격했다.” 이런 조치들은 효과를 거뒀다. “아내에게 몸 전체를 가리게 하는 것과 가축을 잃는 것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면 목동들은 당연히 전자를 선택한다.” 지하디스트들이 국가가 보장해주지 못한 질서와 안전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상카레 대표는 수년 동안 유목민족의 생활방식을 정부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우리는 유목민들을 따라서 함께 이동하는 이동학교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정부가 아니라 외국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이동학교는 2012년에는 백여 개였던 것이 지금은 5개밖에 남지 않았다.”
‘프랑스’ 학교라 불리는 곳이 특히 지하디스트의 표적이 되고 있다. UN에 따르면 올해 3월 715개의 프랑스 학교가 ‘치안 불안을 이유로’ 문을 닫았고 21만 5천 명의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몹티 교육청의 부교육감인 다우다 둠비아(Daouda Doumbia)는 지하디스트의 위협을 피하고자 학교를 떠난 교사들이 매일같이 교육청을 찾는다고 말한다.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가는 교사들도 있지만 대부분 숨어 지낸다. 이브라힘 선생님의 경우가 그렇다. 학교가 문을 닫은 후 세바레에서 가족들과 지내고 있다. 이브라힘 선생님은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1월 어느 날 칼라시니코프로 무장한 십여 명의 ‘괴한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들이닥쳐서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하늘에 대고 총을 쏘아댔다. 아이들은 사색이 돼 울었다. 괴한들은 학교 물품을 빼앗고 교실 창문에 총을 발사하고는 ‘다시 왔을 때 여전히 교사들이 있으면 안 좋은 일이 있을 줄 알라’고 경고하며 떠났다. 학교는 매일 군 수송차가 지나가는 도로에서 몇십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치안기능을 잃은 정부, 선거가 가능할까?
지하디스트 단체는 영향력을 점점 넓혀가면서 국가체제를 흔들기 위해 공무원들을 협박한다. 무력을 사용하거나 달래서 대안을 관철시키는데 이를테면 공립학교를 폐쇄하면서 코란학교로 변경하라고 요구한다. 부패한 공무원들도 표적이다. 마시나 해방전선의 놀라운 ‘업적’ 중의 하나는 세구에서 차로 1시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니오노시(市)의 법원장을 납치한 사건이다.
아당 티암 기자에 따르면 예전에는 공무원들, 특히 판사들이 부정 축재를 위해 중부로 왔다고 한다. “중부는 분쟁이 심한 지역이어서 소송이 매우 많다. 재판에 이기기 위해서는 돈을 써야 한다.” 그런데 지하디스트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 사람들은 지하디스트가 공정하거나 균형 잡힌, 아니면 최소한 정직한 판결은 내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료다! 그래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국가가 아니라 지하디스트들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고 남팔라의 시장 세쿠 바는 말한다. 사람들은 지하디스트가 하는 재판을 ‘항소법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말리 정부는 아직 전쟁 중인 북부보다 중부의 이런 상황을 더 걱정하고 있다. 말리 국회의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풀라니 부족의 비공식 대변인인 알리 누훈 디알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부가 말리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허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중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말리 국가체제의 균열을 증명하는 행정부의 직무유기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는 아무런 정통성이 없다. 정치권은 2012년 위기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013년 잠시 국민적 화해 및 북부 개발부 장관을 했던 셰이크 우마르 디아라는 거침없이 말했다. 케이타 대통령의 측근이며 전직 외교관인 그는 “새로운 사회 계약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불의를 거부하고 연대를 주장하는 주민들과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쉽게 ‘지하디스트’라고 부른다. 그들이 진정 누구인지, 우리나라를 갉아먹는 악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디아라 전 장관은 1990년대 초반 정치 민주화가 이뤄질 무렵 시작돼,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 임기 때(2002~2012) 정점을 찍은 관료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를 치르는 것은 정치적 연극에 불과하다. 야당은 2017년 12월로 예정됐다가 다시 2018년 4월로 미뤄진 지방선거가 무기한 연기된 것에 우려를 표시한다. “국가의 절반을 통제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선거를 치를 수 있겠는가?” 야당인 공산당 소속 우마르 마리코는 질문을 던진다. “정부가 키달 지역에서는 반군들이 선거진행을 감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이 정권의 무능과 실패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글·레미 카라욜 Rémi Carayo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임명주 mydogtulip156@daum.net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왜 책을 읽는가』 등이 있다.
(1) Daniel Bertrand, ‘Conjurer la fragmentation au Mali(말리, 분열의 위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5년 7월호.
(2) ‘Enseignement sur le terrorisme(테러리즘에 대한 교육’, <Instituts d’études et de sécurité>, 2017. 9. 18. https://issafric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