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아르메니아의 봄

2018-06-28     티그란 예가비안 | 기자

3주 동안의 평화적 시위와 시민불복종 운동 끝에, 지난 5월 8일 젊은 야당 국회의원 니콜 파시냔이 아르메니아 신임 총리로 선출됐다. 체코의 시민 세력들이 구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했던 ‘벨벳혁명(부드러운 벨벳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시민혁명을 이룩한 것을 비유)’을 연상시키는 시민운동을 통해 구소련 국가의 전형적인 전제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군복 무늬 티셔츠에 야구 모자를 쓰고 배낭을 멘 니콜 파시냔은 가두시위에 이골이 난 운동가다.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른 그는 무기력한 야당 소속의 눈에 띄지 않는 의원이지만 훌륭한 웅변가다. 그는 외국으로 떠날 생각밖에 없었던 아르메니아 청년들을 다시금 정치로 끌어들였다. 지난 3월 31일 파시냔과 10여 명의 투쟁가들은 1988년의 대지진과 대량실업의 여파로 을씨년스러운 북부도시 기우므리(Gyumr)를 출발했다. 인원은 적었지만 그들이 외친 슬로건 ‘세르지를 거부한다’는 정확히 핵심을 찔렀다. 2008년부터 10년 동안 권좌에 있었던 세르지 사르키샨 대통령이 개헌을 통해 강력한 권한을 가진 총리가 되려고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주 후 그리고 250km를 걸어 수도 예레반에 입성했을 때 시위자들의 수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모두 사르키샨 대통령의 사퇴를 외쳤다. 

인구가 300만이 채 안 되는 국가에서 5명 중 1명이 참가한 시위는, 처음에는 개울이었다가 강물이 되고 결국 파도를 일으켰다. 4월 23일에는 수도 예레반만 해도 15만 명이 결집해 잠시 구금돼 있던 파시냔 의원의 석방을 요구했다. 사르키샨은 총리 취임 6일 만에 “니콜 파시냔이 옳았다. 내가 틀렸다”라고 인정하며 자진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날 두 사람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 두 사람 사이의 극명한 세대 차이는 충격적이었다.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해 역사의 흐름을 바꾼 4월 시위는 1987년과 1988년, 예레반에서 환경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난 대규모 시위, 구소련의 붕괴를 예고한 역사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남캅카스에 위치한 작은 국가 아르메니아는 다른 구소련 국가보다 몇 달 앞서 1991년 8월 마침내 주권을 되찾았다. 민족학자 레본 아브라미안이 언급한 것처럼 두 시위는 30년이라는 시차가 있지만 시위가 축제와 예술이 됐다는 점, 그리고 한 줌이 안 되는 지식인과 잘 알려지지 않은 투쟁가들이 피워낸 불꽃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1987년 시위가 일어났을 때 파시냔 의원은 13세였다. 그를 비롯한 ‘1988년 세대’의 자녀들은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 후에 주민 대부분이 아르메니아인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1)를 아르메니아로 귀속시키기 위해 전쟁(1991~1994)(2)을 치러냈던 자신들의 부모에게 책임을 물으며 거리로 나왔다.  

20년 철권정치를 지탱해온 3대 기둥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실효적으로 점유하며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에서 승리하자 (외교적으로 아직 미해결이라 여전히 분쟁의 불씨가 남아있다) 국내외 아르메니아인들의 자긍심은 높아졌지만 국가는 경제적으로 파산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인접국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이 국경을 봉쇄하면서 아르메니아는 동맹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국방은 러시아에, 에너지 특히 가스 공급은 이란에 의지해야 했다. 전쟁의 주역들은 스스로 독립을 선포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의 정치에까지 세력을 넓혔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낸 로베르트 코차랸은 1997년에 아르메니아의 총리가 되고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아르메니아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의 후임인 사르키샨 대통령은 코차랸 정권에서 총사령관과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수도 스테파나케르트 출신이며, 소비에트 연방 시절 공산당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또한 아르메니아 초대 대통령인 레본 테르페트로샨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권력에서 제거하고 철권정치를 실시했다. 20년 동안 지속된 철권정치를 지탱해준 3대 기둥은 선거 개입, 기업 통제 그리고 친러시아 정책이다. 

먼저 선거와 관련해서, 아르메니아는 유럽의회 산하 베네치아 위원회가 정의한 ‘행정자원(정당과 정치 후보자가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해 정부기관과의 긴밀한 관계에 이용하는 것, 러시아와 구소련 국가의 오랜 부정부패 관행)’의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국가다. “행정자원은 선거 시 선거 후보자와 공무원(당선자)이 활용할 수 있는 인적, 재정적, 물질적, 비물질적 자원을 말한다. 이들은 행정자원을 통해 인사, 예산, 공공분야 사업에 더 쉽게 접근할 기회와 공직 특권을 보유하고 있다.”(3) 이런 관행 때문에 지금까지 선거 때마다 개표결과에 반발하는 시위가 있었다. 비록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시위는 지난 20년 동안 시민운동을 지속시켰고 파시냔 의원을 백기사로 만들었다.

파시냔 의원은 언론인 출신이다. 1998년 일간지 <오라구이르>의 편집장, 이후 코차랸 전 대통령에 반대한 친야당 성향의 <하이카칸 자마낙(아르메니아 타임스)>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언론으로 정치를 개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2006년 시민단체 ‘얄렌트랑크(대안)’를 설립하고 정치를 시작했다. 뒤이어 반공산당 성향의 ‘아르메니아 민족운동(MNA, 1990~1998 정권)’ 후보로 2007년 총선에 출마했다. 2008년 대선에서 테르페르로샨 후보가 사르키샨 대통령의 승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자 파시냔 의원은 예레반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후에는 지하로 잠입해 1년 넘게 도피 생활을 하다가 경찰에 자진 출두해서 2011년에 풀려났다.

아르메니아공화당(HHK)은 아르메니아 정치의 뼈대로 유럽인민당(European People’s Party. 보수기독계열)에 가입돼 있다. 극렬민족주의와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공화당의 이념은 민족 해방운동가이자 ‘민족 종교’의 사도인 가레긴 느즈데(1886~1955)의 글에서 가져왔다. 공화당은 앞뒤 가리지 않고 전방위 실용주의를 앞세우며 점차 주요 권력을 장악해갔다. 아무리 작은 시골 마을의 읍장이나 학교장도 공화당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1/3이 빈곤층, 불평등 심화시킨 민영화 

아르메니아 경제를 말할 때 민영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민영화는 테르페트로샨 대통령 때 시작돼 코차랸과 사르키샨 대통령 때 급속도로 가속화됐다. 투자정책은 러시아나 아르메니아의 민간기업의 이익에 좌우됐고, 천연자원, 특히 광물자원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팔려나갔다. 산업, 상업, 금융은 여러 명의 국회의원이 포함된 40여 명의 올리가르흐(신흥재벌)가 장악하고 있다. 2016년 국제투명성 기구가 발표한 부패지수에 의하면 아르메니아의 청렴도는 113위다. 전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상황을 조사하고 있는 프리덤 하우스는 아르메니아를 ‘불안하고 권위주의적인 체제’ 국가에 포함했다.(4) 자원 민영화는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최근 10년 동안 경제가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약 1/3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2016년 실업률은 18%를 기록했다.(5)

어려운 경제상황에 정치에 대한 불신이 겹쳐,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조국을 등졌다. 인구의 약 1/3이 떠난 것으로 나타나, 구소련 말기 인구와 비교할 때 최대 65만 명이 줄었다.(6) 러시아나 서구에 정착한 아르메니아 이민자들이 보내는 자금인 이전소득은 2013년에는 국내총생산의 20%, 2016년에는 12%를 차지했다.(7) 이 돈은 투자보다는 수입제품 소비에 사용됐는데 수입제품 유통은 올리가르흐가 장악하고 있다. 인구감소는 안보위협으로 이어졌다. 아제르바이잔의 연간 신생아 출생률은 아르메니아의 3.5배에 달하며, 국방예산 역시 3배가 넘는다.(8)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으로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두 국가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전략적 동맹국으로 공동 공군방위체계를 운용하고 있다. 1992년과 1995년 맺은 평화조약으로 아르메니아에 러시아군이 파견됐다. 현재 아르메니아-터키 국경에 인접한 기우므리에는 3,000명 병력의 러시아군 부대가 주둔 중이다. 부대의 임대차 계약은 2044년까지 연장된 바 있다. 러시아가 외교적 협상을 통제하고 있어 분쟁당사국은 전쟁도 아닌 평화도 아닌 현상유지를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다. 1992년 설립된 민스크 그룹(프랑스, 미국과 함께 창설)을 주도하는 러시아는 자국의 의도나 상황에 따라 아르메니아 혹은 아제르바이잔에 군사지원을 하며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와 터키가 가까워지면서 아르메니아는 점유 중인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를 반환하라는 압력을 받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친러시아 성향인 아르메니아 국민들은 2016년 4월 교전지역에서 94명의 아르메니아 병사들이 죽자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에 무기 판매한 것을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2017년 10월 아르메니아 정부는 러시아제 무기를 구매하는 데 러시아가 1억 달러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서둘러 발표했다. 동맹국 가격으로 무기를 구매한다는 것도 빼놓지 않고 덧붙였다.  

전략적 의존관계는 경제적 의존관계와도 맞물려있다. 원자력, 가스, 전기, 교통 등 아르메니아의 주요 산업에 러시아의 이권이 개입돼 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의 외국인 직접투자의 39.5%를 차지하고 있고 아르메니아 올리가르흐들과 러시아 올리가르흐들은 긴밀히 연결돼있다. 파시냔 총리는 야당 의원이었을 때 2013년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러시아가 중심이 된 옛 소련권 국가들의 연합체)에 아르메니아가 가입한 것을 비판했다. 당시 아르메니아는 우크라이나처럼 동방 파트너쉽(Eastern Partnership. EU와 구소련 6개국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조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가 맺은 경제협력협정) 참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올해 4월 시위가 확산되자 러시아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러시아가 아르메니아 정부가 급파한 특사들보다도 자국 외교관들의 보고서를 훨씬 더 신뢰한다는 것이 그 증거다. 아르메니아 특사들은 4월 시위가 2000년대 우크라이나(오렌지혁명), 조지아(장미혁명), 키르기스스탄(튤립혁명)에서 일어난 반정부‧반러시아 시위인 ‘벨벳혁명’과 같은 것이라고 경고했다.        

수도 예레반과 대도시에서는 활발하게 시위가 일어났지만 공화당이 득세하고 있는 남부 특히 카라바흐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공화당은 아르메니아인들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애국심을 자극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이 공격할 것이라고 끊임없이 위협했다.    

파시냔 신임총리에게 주어진 과제

하지만 공화당의 협박은 국외에 있는 아르메니아인에게는 통했을지 몰라도 국가 안보를 해치는 여러 부패사건에 실망한 국내 아르메니아인에게는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파시냔 신임 총리는 자신의 문제해결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총리가 된 후 첫 방문지를 슈사(Shusha)로 정했다. 1992년 5월 9일 아르메니아가 슈사를 점령함으로써 슈사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아르메니아 시민사회는 2008년 대선, 2011년 예레반 도시개발 반대, 2013년 버스요금 인상 반대, 2015년 전기요금 인상 반대 투쟁을 벌이면서 지속적으로 힘을 키워왔다. 파시냔 신임총리 역시 학생과 투쟁가들의 에너지와 움직임, 그리고 소셜미디어의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집하는 힘을 길렀다. 2018년 운동에서는 ‘나는 걷는다’라는 파시냔 총리의 주제곡까지 나왔다. 록가수 하이크 슈튜버(Haïk Stver)가 작곡한 것으로 가사는 총리 자신이 썼다. 

언론인과 거리 정치가 경력의 모든 것인 파시냔 총리 앞에는 여전히 공화당이 다수당을 이루는 의회와 협상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놓여있다. 공화당은 의석을 내놓거나 선거법을 개정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다. 올리가르흐인 가구익 차루키얀과 보수성향의 제2당인 번영아르메니아당의 당수에게도 보상을 해줘야 한다. 뿐만 아니라, 권력분립 체계를 확립하고 인구를 늘리고 나고르드카라바흐 분쟁의 장기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더 복잡한 문제도 있다. 

마지막으로 외교 분야에서는 ‘현실정치(Real politik, 이념이나 도덕이 아닌 국력과 국익에 기반한 외교정책)’가 벌써 힘을 받고 있다. 과거에 유라시아경제연합 가입을 비판한 파시냔 의원은 총리가 돼 5월 14일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이 열린 소치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신임총리가 이끄는 미숙하고 경험이 적은 과도내각이 실질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까? 아직 전망은 불확실하다. 수구세력이 된 1988년 세대의 전철을 밟지 않고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파시냔 총리는 무엇보다도 선거의 공정성 확립, 부패 척결, 러시아와의 관계 균형이라는 세 가지 문제에 대해, 빠른 시일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글·티그란 예가비얀 Tigrane Yegavian
기자. 주요 저서로 『Arménie. A l’ombre de la montagne sacrée(아르메니아. 성스러운 산의 그늘)』(Nevicatga, coll, 2015), 『Diasporalogue(프랑스의 아르메니아인)』(Serge Avédikian과 공저, 2017) 등이 있다. 

번역·임명주 mydogtulip156@daum.net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나고르노카라바흐: 아제르바이잔 남서부에 있는 지역. 아르메니아와 분쟁을 일으키는 지역으로 아르메니아계 세력이 장악하여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승인하지 않고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역주
(2) Philippe Descamps, ‘État de guerre permanent dans le Haut-Karabakh(영원한 분쟁지역 카라바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2년 12월호.
(3) 「Rapport sur l’abus de ressources administratives pendant les processus électoraux(선거과정 중 행정자원 악용에 관한 보고서」, Commission européenne pour la démocratie par le droit (commission de Venise), Conseil de l’Europe, Strasbourg, 2013. 12. 20.
(4) 「Rapport 2018 sur les nations en transition(과도기 국가 2018년 보고서)」, www.freedomhouse.org
(5) 아르메니아 통계 위원회, http://armstatbank.am
(6) 아르메니아 공식 통계자료에 의하면 아르메니아 인구는 1992년 약 360만, 2017년 약 290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다소 과장된 수치로 보인다.
(7) 「Migrant remittance inflows」 및 아르메니아 일반 자료, Banque mondiale, Washington, DC.
(8) 2017년 아제르바이잔의 국방 예산이 15억 2,900만 달러에 달하는 반면, 아르메니아는 4억 4,400만 달러에 그친다. ‘Military expenditure by country’, Institut international de recherche sur la paix de Stockholm (SIPRI),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