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정치전략국 디자인관리과 오 계장

[Corée]

2010-07-12     최범/ 디자인평론가

 ‘디자인 서울’의 운명

지방선거가 끝나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재선에 성공했다.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디자인 서울’ 정책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디자인 서울’이 지난 4년간 오세훈 시장이 추진해온 창의문화도시 정책의 핵심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 때문에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디자인이 정치적 쟁점이 되기까지 했다. 어쨌든 오세훈 시장이 재선됨에 따라 그의 ‘디자인 서울’ 정책도 재신임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세훈 시장의 재임이 자동적으로 기존 ‘디자인 서울’ 정책에 대한 지지 획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 선거 과정에서 오세훈 시장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방어하기보다는 회피하는 태도를 취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디자인 서울’ 정책은 정당화하기 어려운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오 시장은 민선 5기, 재임기를 맞아 이 부분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난 4년간의 ‘디자인 서울’ 정책은 이제 근본적으로 다시 수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관측은 이미 서울시의 조직 개편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기존의 부시장급이던 ‘디자인서울총괄본부’가 국장급 조직으로 개편되면서 ‘디자인 서울’ 정책도 근본적인 변화를 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오세훈 시장이 기존 ‘디자인 서울’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가기보다는 모종의 변화를 시도할 것으로 보는데, 현재로는 정확한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이 글에서는 기존 ‘디자인 서울’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발전적 방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디자인 서울’ 정책이 집중적으로 비판받은 것은 ‘전시행정’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서울’이 과연 전시행정인가. 전시행정이란 행정 행위가 그것의 목표나 내실보다 주로 겉으로 드러나는 측면에만 매달림을 지적하는 것인 만큼, ‘디자인 서울’에 딱히 적합한 말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서 ‘디자인 서울’은 전시행정이 아니라 그냥 전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정의 전시를 넘어선 전시의 행정이었으며, 심하게는 전시의 정치이자 정치의 전시였다. 이 대목에서 좀 성급하게 발터 베냐민을 끌어오자면, 그것은 정치의 미학화에 가깝다. 따라서 ‘디자인 서울’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전시행정은 너무 약소한 말이고, 실제로는 ‘전시정치’라는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다.

’전시행정’이라는 문제

‘디자인 서울’ 정책에는 많은 사업이 포함됐지만 크게 ‘전시성 사업’과 ‘개발형 사업’, 그리고 ‘기초 사업’으로 구분한다. 전시성 사업은 서울디자인올림픽과 세계디자인수도 행사 등이 해당한다. 개발형 사업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 서울’ 거리 조성 등이 해당한다. 그 밖에 ‘서울 서체’라든지 ‘서울 색’ 개발 사업 등은 이른바 기초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디자인 서울’ 사업은 광범위하고, 어떻게 보면 백화점식이라 할 만큼 다양한 내용을 포함한다.

이 모든 사업은 개념 구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모두 전시성 사업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다. 서울디자인올림픽이나 세계디자인수도 행사같이 순수 전시성 사업만이 아니라, ‘디자인 서울’ 거리 조성 같은 개발형 사업이나 서울 서체, 서울 색 개발 등 기초 사업도 모두 전시성 사업만큼 최종적으로는 홍보 효과에 더 주력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서울시의 모든 사업은 기본적으로 홍보용 사업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서울시가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울형 어린이집에서 한강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업을 홍보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오세훈 시장 임기 중에 홍보비가 이전보다 몇 배 증액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지금 서울시의 공간과 시설이 모두 일종의 홍보화해 있음은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가판대 외벽, 각종 공공시설물, 지하철 역내 통로와 차량 내부 등이 온통 서울시 시정 광고로 채워 있는 것을 우리는 지난 4년간 직접 봐왔다. 도시 정부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부터 특별히 ‘오세훈표 사업’이라 부를 수 있는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망라해 있어, 가히 서울시의 ‘총력 홍보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업이 사업 자체가 아니라 홍보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난 4년간 서울시는 점점 ‘홍보 도시화’되었다. 그래서 전시행정이라는 말조차 서울시에는 너무 겸손한 표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전시행정이 아니라 전시정치다. 모든 행정을 전시화하고 그것을 통해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행위다.

‘창의시정’과 창의문화도시의 허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창의시정’은 이른바 ‘창조도시론’을 배경으로 한 것 같다. 과거 ‘개발’을 앞세운 것에 비하면 ‘창의’를 내세운 오 시장의 전략은 분명 차별화된 것이다. 그 점만 보면 오 시장이야말로 최초의 포스트모던 시장이라는 누군가의 평가가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창의라는 탈근대적 가치에 주목한 점은 분명 차별점이지만, 문제는 그런 지향이 실제로는 도시 경쟁력이니 개발이니 하는 근대적 가치로 귀결된다는 데 있다. 창의문화도시라는 목표 설정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오세훈 시장 초임 초기에 만난 한 서울시 공무원이 “새 시장의 시정목표는 ‘창의시정’이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 나는 “아마 서울시가 다른 모든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창의만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어찌 그리 없는 것만 집어서 구호로 삼았을까”라고 대꾸한 적이 있다. 왜 창의는 불가능한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에 창의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 사회는 창의라는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한국 근대화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정치나 행정은 일정한 사회자원을 동원·배치해 공적 목표를 달성하는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행정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동원 가능한 또는 활용 가능한 자원이다. ‘창의시정’과 ‘창의문화도시’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면 우리 사회에, 서울에 창의성(Creativity)이라는 자원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 사회에 창의성이 존재하는가.

우리 사회는 창의성이라는 자원을 갖고 있지 않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사회의 발전은 창의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피와 땀, 사회자원의 총력 동원과 인간성의 한계를 실험하면서 이룬 것이다. 그것은 창의성 없는 발전이었고, 창의성을 억압해온 발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창의성이라는 것은 매우 희소한 자원일 수밖에 없다. 희소 자원에 기초한 정책이란 애초 실현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어떤 정책적 목표도 그를 위해 동원 가능한 사회자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서울시의 창의문화도시 정책은 기본적으로 탈근대 도시 이론인 창조도시론에서 가져온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영국의 도시이론가 찰스 랜드리의 이론이 기반이 되었다. 그는 창조도시론을 통해 탈근대의 도시 발전 전략을 제시했으며, 2008년 서울시 초청으로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서울시의 창의문화도시와 ‘디자인 서울’ 정책을 살펴보면 대부분 랜드리의 이론을 원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랜드리가 말하는 창조도시의 논리와 서울시 창의문화도시의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찰스 랜드리가 말하는 창조도시와 서울시의 창의문화도시는 선언적 목표나 상위 전략에서는 일치하지만, 하위 전략이나 구체적 사업으로 내려가면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고 만다. 창조도시론의 핵심은 ‘소프트 시티’ 전략에 있는데, 서울시는 표명된 수준에 그칠 뿐 실제로는 ‘하드 시티’ 사업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에게는 소프트 시티를 만들어낼 만한 자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정 능력이나 시민 생활 모두에서 마찬가지다. 결국 문제는 목표와 현실의 불일치다. 이 부분에서 정직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위로부터의 구호와 정치적 선전·선동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

부존하는 자원을 있다 하고 동원하려고 할 때 무리가 따르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위선적인 정치가는 거짓말로 대중을 선동할 수 있지만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내지 못한다. 현실적 정치가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지만 그 역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지 못한다. 창의적 정치가는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모험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의 동의를 이끌어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기 위한 발걸음을 기꺼이 내디딜 것이다. 과연 오세훈 서울시장은 어느 모델에 가까울까.

‘디자인 서울’의 참된 방향

오세훈 서울시장은 창의적 정치가가 되려 했지만 현실은 그를 점점 위선적 정치가로 만들고 있다. 그는 자원을 창조해내기보다 위조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정말 창의적 비전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아무튼 이제 문제는 오세훈 시장 2기의 방향이다.

2007년 ‘서울 디자인 컨퍼런스’ 행사에서 토론자로 나선 나는 ‘도시 정치와 디자인’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적이 있다. 나는 “디자인이 도시 정치의 수사(修辭)가 되어서는 안 되며 전략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나는 그때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디자인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현실은 내가 우려한 대로 전개되었다.

이제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요구한다. 지난 4년간의 ‘디자인 서울’ 정책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그에 기반해 4년간의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존하는 창의성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창의성이라는 가치를 창출해낼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창의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이제 서울은 창의를 말하는 도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창의를 창조하는 도시가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설과 한강 르네상스 같은 개발형 사업이나 기타 정치 선전용 사업이 아니라, 도시 구조와 시민의 삶 속에서 창의성을 이끌어내 도시의 새로운 자원으로 삼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그런 접근에만 유일하게 ‘창의적’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

글•최범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고,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현재 희망제작소 부설 간판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