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1994?
코리아연구원 공동기획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미국의 굴복?
부시 행정부가 발표한 북·미 검증 합의 및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에 대해 한미 양국에서 부정적 평가와 긍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비판적 입장에서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협박 외교에 또 다시 굴복하였으며, 북한에게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뇌물'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고농축 우라늄 개발 의혹과 핵확산 문제를 푸는데 결정적인 미신고시설에 대한 검증을 누락한 합의는 단지 미진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실패한 협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이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비록 이번 합의가 미신고 시설에 대한 검증을 미해결 쟁점으로 남겨 놓기는 했지만 북핵문제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조금이나마 진전되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특히, 북한의 테러 지원국 해제가 북·미관계 개선의 촉매제로 작용함으로써 향후 북·미간 핵협상이 보다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이다.
이번 북·미 핵협상이 구조적으로 미국에게 불리한 게임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원상 복구시켜 2006년 10월 핵실험 직후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면 부시 행정부는 지난 집권 8년간 한 것이라고는 북한의 핵무기 숫자를 늘리고 핵실험까지 하게 해준 것 외에 무엇이 있느냐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제2차 북핵 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UEP) 개발 의혹 자체가 정보 신빙성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핵 문제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면 부시행정부의 북핵 협상팀은 줄줄이 청문회에 불려 나가 정책 실패에 대한 추궁을 당할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이 점이 부시 행정부가 국내적 논란을 감수하고 협상을 타결한 직접적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합의가 단지 미국이 북한의 협박 외교에 굴복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치게 인색한 평가이다. 북핵 문제가 불거진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이 제출한 신고서에 따른 검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핵확산 문제도 궁극적으로 해결되어야 하지만 북한이 확보한 플루토늄 량의 정확한 추정과 제거가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점에서 신고 시설에 대한 검증이 정확하게 이루어지기만 하면 의미있는 진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2.13 합의에 따라 불능화 프로세스가 복원되었다는 데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2.13 합의는 과거 제네바 합의와 비교할 때 북한에게 상당한 불리한 합의이다. 북한의 불능화와 신고의 대가로 중유 100만 톤에 상당하는 지원을 매년이 아니라 단지 한번만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경제·에너지 지원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핵폐기 과정의 진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불완전한 검증이지만 2.13 합의 체제로 복귀하는 대가로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뇌물'은 줄 만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워싱턴에서의 평가는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고 있다. 고농축 우라늄 문제를 제기한 네오콘 세력들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비판적이며 오바마 진영과 매케인 진영의 반응도 미묘하게 다르다. 그러나 최근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이번 합의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했다는 의견이 점차 힘을 얻는 추세이다. 일본의 분위기가 격앙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서울의 속내는 좀 더 복잡하다. 6자회담의 진전이라는 점에서 표면상 환영하고는 있지만 남북관계의 경색 상황에서 북·미관계가 속도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북·미관계 진전의 동력은 우선 북한으로부터 나온다. 북한이 자신의 체제 안전에 대한 담보로 북·미수교를 추구해 온 것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지만, 미국의 차기 행정부를 상대로는 문자 그대로 '빅딜'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0년 클린턴 행정부 임기말 북·미수교의 기회를 실기한 것을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실로 8년 만에 다시 찾아온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과도 만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민주당 오바마 후보의 당선이 가시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차기 행정부와 빅딜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핵 폐기의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북한이 진정으로 핵을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다. 특히 북한이 선군 정치를 고수하는 한 그 물리적 체현물인 핵무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에도 논리적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변 핵시설이 갈수록 노화되어 핵능력 증대 카드가 소진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북한으로서는 비싸게 팔 수 있을 때 파는 것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부각된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문제도 핵협상을 서두르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도 생전에 치적을 달성하고 북한 체제를 안정화시켜 후대에 계승하려는 조바심이 한층 심해졌을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경우도 사망 직전에 대미, 대남 관계에 유난히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다 강성대국 원년이자 주체 연호 사용 100주년인 2012년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도 핵협상에 적극성을 부여하는 요인이다.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북·미수교라는 외교 치적과 에너지 문제 해결이라는 경제 치적이 절실한 형편이다. 다만,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북핵문제에 그 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검증 문제로 북핵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위기를 고조시킬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다시 불능화 조치 중단과 영변 핵시설의 원상 복구를 추진하거나 불능화 차원에서 인출한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는 카드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나 제2의 핵실험도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고조조차도 그 만큼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을 서두르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미 차기행정부의 유리한 정책 환경
미국의 신행정부 출범도 북·미관계 진전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만남을 공언해 온 오바마 후보가 당선되면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매케인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최근 백악관은 오바마와 매케인 양 후보 측에 북핵 문제에 대한 브리핑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싱가포르 합의, 평양 합의 등 일련의 북·미간 양자 협상의 전모가 전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핵 문제에 대한 미 행정부의 정책적 연속성을 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6자회담이라는 다자틀의 존재도 북핵 문제에 대한 정책적 연속성을 보장하는 기제로 작용될 전망이다.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6자회담에서의 합의를 뒤집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북·미간 핵검증 합의가 6자회담 문서로 채택되는 과정에서 난항을 겪을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부시 행정부는 이제 좌고우면할 처지가 아니다. 설사 일본의 저항이 거세고 한국의 견제가 있더라도 미국식으로 밀고 나갈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 차기 행정부는 정확히 부시 행정부가 도달한 지점부터 북한과의 핵협상을 이어 나가게 될 것이다. 핵폐기 협상이라는 세 번째 단계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전임 부시 행정부보다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다는 점도 북핵협상 및 북·미관계 진전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우선 차기 행정부는 제 2차 북핵 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는 전임 부시 행정부와 달리 'HEU' 문제가 북핵 문제 진전에 결정적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부시 행정부는 이 문제를 피해갈 수가 없어서 싱가포르 합의의 핵심인 북?미간 별도 신고서(confidential minute) 등과 같은 기발한 아이디어까지 동원해야 했다.
차기 행정부는 이러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특히 미국의 차기 의회에서 'HEU' 의혹에 대한 미 정보 당국의 정보 과장이 있었거나, 시급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94년, 2000년, 그리고 2009년
북핵 문제는 한반도에서의 냉전과 분단에 그 기원이 있다. 북한의 핵 개발이 대미 협상용이건 체제 수호를 위한 무장용이건 북·미간 전쟁 상태와 남북간 무력 대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핵개발도 체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권 교체기를 즈음한 북·미관계의 진전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며 환영할 만한 상황의 진전이다. 다행히도 이번 북·미간 합의로 미국의 차기 행정부에서도 북·미 핵협상과 북·미관계의 진전이 예상되고 있다. 특히, 오바마 후보가 당선된다면 북·미관계 진전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오바마는 외교·안보 경험이 많지 않은데다, 금융위기 등 국내문제 해결에 전념하기 위해 외교·안보는 부통령에게 일임할 가능성이 높다. 부통령으로서 사실상 외교·안보 사령탑 역할을 하게 될 바이든 상원의원은 실제로 수차례 방북 시도를 했던 전례가 있으며, 북핵 문제에 대한 이해도도 매우 높은 인물이다. 북·미관계 진전의 속도가 예상보다 빠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이다. 내년부터 본격화될 북핵 3단계 협상은 핵폐기와 북·미수교, 평화협정 등을 놓고 벌이는 '빅딜' 게임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북·미간의 군사회담은 물론, 고위급 회담을 통한 제2의 조·미 공동 코뮤니케의 채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2000년 하반기의 흐름이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 핵폐기 협상에 성실하게 응하고 북핵 문제가 순조롭게 진전된다는 전제 하에서이다. 북·미관계 진전과 남북관계 경색이라는 유사 '통미봉남' 현상으로 인해 자칫 1994년이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닐까. 지난 시기 있었던 북·미간 빅딜과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반복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