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이스라엘 친구에게 고하다

[서평]

2010-07-12     알랭 그레슈

답답하게 우회적으로 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보스니아, 체첸 혹은 티베트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하는 표현을 이스라엘 군사작전에도 사용할 수 있을까? 전쟁범죄는 어쨌든 전쟁범죄라고 솔직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난민캠프가 과거 강제수용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할까?

레지 드브레가 최근 출간한 저서 <이스라엘 친구에게>(1)에서 용기 있게 다룬 문제들이다. 저자가 역사학자 엘리 바르나비에게 편지를 보내 짧게 답장을 받는 형식의 책이다. 시대가 변한 것일까, 이 책은 반유대주의적(2)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소송당하지 않았다. 가자지구의 전쟁, 이스라엘의 구호 선박 공격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다루고 있다.

레지 드브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을 바라보는 서구의 닫힌 시각에 도전한다. 팔레스타인인을 가두는 벽을 가리켜 서구인이 ‘안전의 울타리’라고 생각하는 시각, 방어력이 없는 적(팔레스타인)을 과도하게 억누르는 이스라엘의 행동을 축소해 ‘비대칭적이고 불균형적인 전쟁’이라 표현하는 태도에 도전한 것이다. 또한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라는 표현 역시 ‘재판 당국이 수감자를 풀어주었다고 발표하면서 뒤로는 이들을 외부 이중 탑에 들여놓고 식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약품 보급과 전기를 끊는 행위’와 진배없다고 드브레는 본다. 이제 진실을 말할 때가 아닌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하는 행동은 식민화라기보다는 지배·점진적 와해 전략이 아닌가?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해온 범죄가 유대인 학살 ‘쇼아’(Shoah·가스실과 소각로를 거치는 대량학살을 ‘홀로코스트’라 부르는 것은 적절한 의미가 아니라는 지적이 있어 프랑스어권에서는 재난을 의미하는 헤브라이어인 ‘쇼아’를 널리 사용함-역자)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서구는 되레 이스라엘에 ‘마음대로 죽이고 파괴할 수 있는 허가증’을 주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하는 모든 공격에 그대로 당해야 하는가?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저지른 죄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당해야 하는가? 유대인 학살에서 보편적 교훈을 얻었다면 이 교훈을 폭넓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 ‘끔찍한 학살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예외 없이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레지 드브레의 주장이다.

한편, 레지 드브레는 서유럽에서 반유대주의는 사라져가며 유대교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지위를 누린다고 본다. “종교의 서열을 보면 유대교는 신자가 소수이긴 해도 로마 가톨릭을 대신했다. 유대교는 응집력이 강하다.” 이어서 드브레는 프랑스유대인대표평의회(CRIF) 만찬에서 장관이 보이는 열의가 프랑스 공화국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지적한다. “프랑스의 랍비들이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프랑스 국기 아래서, 프랑스의 탱크가 가자지구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는 프랑스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레지 드브레는 “국제사회는 오직 팔레스타인 사람에게만 이런저런 조건을 단다. …서구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의 관점·시각·이야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드브레 역시 이스라엘 관점에서 아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 호감을 갖고 있으며, 그 역시 스스로 ‘친팔레스타인적 시오니스트’라고 한다. 무엇보다 드브레도 시오니즘의 지배 사조에서 나타나는 식민 지배적인 면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기존 관점을 뒤엎고 국제법 원칙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경에 적용되어야 하고, 팔레스타인의 국가 건설은 정의와 보편성 사상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보편주의가 곧 유럽이나 서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인 듯하다. 레지 드브레의 책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글•알랭 그레슈 Alain Gresh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각주>
(1) 레지 드브레, <이스라엘 친구에게: 엘리 바르나비의 답변과 함께>, Flammarion, 파리, 2010.
(2) 플라마리옹(Flammarion) 출판사는 기자에게 정오표를 보내 엘리 바르나비가 에드가 모랭의 글에 붙인 ‘유대인을 배척하는’이란 표현은 ‘이론의 여지가 있는’이란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