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는 과연 합리적인 경제주체인가?
2018-07-31 루이 팽토 | 사회학자
시장경제 사회에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소비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상품에 노출되며 소비욕구와 힘겹게 싸워야 하는 소비자의 모습은 외면되기 일쑤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며 ‘똑똑하고 합리적인 소비자’를 전면에 내세우기 전인 1960년대에는 ‘소비사회’라는 개념이 기존 경제 질서에 맞서기 위한 도구로 작용했다.
우리가 소비사회에서 살아간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대도시의 주요 도로만 다녀봐도 무수히 많은 상품들과 소비를 부추기는 거추장스러운 광고에 압도되기 십상이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이 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대다수 사람들의 행동이 이전과 근본적으로 달라졌으며, 이제 무한한 욕망으로 소비에 열광하는 완벽한 소비자가 됐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이 사회가 다분히 일차원적인 양상을 띠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 사회는 더 이상 소비 이외의 다른 전망을 제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현실 분석에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소비욕구를 채우며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집이나 가구 구매, 혹은 여가를 즐기는 데 있어도 소득격차에 따른 상당한 소비격차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반박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사실은 소비사회와, 그리고 그 구체적인 얼굴로 나타나는 소비자라는 두 개념이 상당히 가변적이고 모호해 다양한 맥락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존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지극히 당연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려면 소비사회와 소비자라는 단어를 당대 사회를 비추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거울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논리를 관철하며 사회 질서를 주무르고자 하는 정치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1960년대에 ‘소비사회’라는 표현은 사회 비판의 도구로 등장했다. 20세기 초만 해도 상품 제공자와 개인 소비자의 관계는 구매자 조합이나 가정주부 협회, 수요와 공급 조절 계획위원회 같은 일부 조직에만 한정된 문제였다.
그러나 60년대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앙리 르페브르나 앙드레 고르 등을 주축으로 다수의 지식인들이 1950년대 중엽부터 이 문제에 파고들며 반체제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과거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가했거나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등을 돌린 전력이 있는 이 지식인들은 철학 분야의 뛰어난 권위자임에도 제도권 대학에서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대부분 좌파 정당에서도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미국의 사상가들이나 독일의 비평 이론에 기반을 둔 이들의 연구는 ‘소외 현상’이나 ‘대중의 탈정치화’, ‘신 노동자층’ 등의 주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이들의 주장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과거와 달리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였기에, 급변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적 혁명이 불가피했다. 이에 이 학자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비(非)교조적 마르크스주의는 향후 십 년간 ‘사회운동’과 ‘시민사회’의 포문을 연 신흥 좌파의 전조가 됐다. 이 지식인들 중 일부는 당시 한창 떠오르던 사회학으로 전향해 철학과 문학, 사회학이 융합된 변종 장르를 만들어냈다. 롤랑 바르트(신화론), 장 보드리야르(사물의 체계, 소비의 사회), 기 드보르(스펙터클의 사회), 앙리 르페브르(현대세계의 일상성), 에드가 모랭(시대정신) 등이 보여주는 ‘일상의 해석학’(1)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광고와 미디어, 나아가 (남성성과 과시욕으로 나타나는) 치명적인 매력의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 숨은 의미를 풀어가는 자유로운 해석을 제안했다. 가령 르페브르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자동차 예찬론을 펼쳤는데, 그에 의하면 자동차는 “사물의 제왕이자 만물의 조종자”이며, “일상에서 모험을 건 대가로 부상자와 사망자라는 잔해를 남기고”, “사회적 지위와 권위의 상징이 된다.” 자동차를 통해 저자는 “세계의 스펙터클(사회적 표상)은 곧 스펙터클의 소비이자 소비의 스펙터클이 된다”는 보편적 교훈을 보여줬다.(2)
(재화의) 소비를 중심으로 한 사회는 실질적인 소비의 필요성보다 화려한 환상에 이끌린 스펙터클(표상)의 사회로 간주된다. 이 사회를 이루는 주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소외된 개인’으로, 광고의 화려한 이미지와 진열대 위 물건의 외양에 휘둘리는 불특정인을 가리킨다. 이어 두 번째는 개인이 더 많은 소비를 하도록 부추기는 제도적 ‘시스템’이다. 앙드레 고르는 “신자본주의 문명이 엄청난 규모의 구속 장치를 만들었다”면서 “달콤한 압박이 각 개인에게 소비를 재촉한다”고 기술한다.(3)
이제 소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은 이성과 분별력을 상실한 채 아찔한 소비 욕구에 휘둘리게 됐고, 이는 당대 사회학자들의 회의론에 부딪힌다.(4) 『풍요한 노동자』(5)라는 책에서 이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를 선보인 존 골드소프, 데이비드 로크우드, 프랑크 베흐호퍼(Frank Bechhofer)는 소비의 적정선을 유지할 것을 권장했다. “세탁기는 그저 세탁기일 뿐” 지위 상승을 열망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표상’이 되는 물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1960년대에는 소비사회에 대한 이론적 비판이 (그나마 소수였던) 소비자운동 단체와 연계되지 않았다. 이 문제가 구체화된 것은 68혁명 이후로,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폭넓게 확대된다. 1970년대 중반에는 다수의 소비자 단체가 등장하면서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된다. 1951년에 설립된 단체 ‘소비자연합-선택의 문제’가 봤을 때도 문제는 이제 제품비교를 통해 소비자의 올바른 선택을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기업의 전략과 상품의 구성, 유통구조 등에 대한 정보를 소비자에게 알리는 일이 됐다. 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도록 부추기는 것도 소비자운동 단체가 맡아야 할 중요한 역할이었다.
월간지 <크 슈아지르(선택의 문제)>의 발행 부수는 1971년 3만 5천 부에서 1974년에는 30만 부 이상으로 늘어났다. 여기에는 해안오염과 수은 조개, 유독성 탈크 등에 관한 ‘특종’의 힘이 컸고, 아울러 소비자운동 전선의 결성도 한몫했다. 1972년 2월에는 가전제품의 공유화를 주장하고 나섰고(“일부 재화를 나눠 쓰고, 공유 서비스를 조직해야 할 필요성에 관하여”), 1975년 특집 기사에서는 ‘광고를 혐오하는 일곱 가지 이유’를 소개했다. 그중 하나는 광고가 “매스컴을 타락시키고 진짜 정보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1977년 11월 사설에서는 “부당함이 판을 치고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니며 소비자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고립시킬 수 있는 그 어느 상황에서든 소비자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논평을 내보내기도 했다.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이 곧 기존의 사회질서를 반대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 잡자 기성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무대 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거 피에르 망데스-프랑스의 측근으로 고위직 공무원을 지낸 장 생-주르는 1971년 출간된 ‘소비사회 반대에 대한 반론서’의 제목을 『소비사회 만세』라고 지었다. 철학자 레이몽 뤼예와 경제학자 장-자크 로자 역시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옹호하고 시장경제의 장점을 내세웠다. 이들은 사상가들의 오만함을 집요하게 꼬집었는데, 현명한 지식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허상의 늪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근거가 대체 무엇이며, 이들이 사람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보수 진영은 소비자들의 주체 의식을 강조하며 상식적인 일반 소비자들을 옹호한다. 각 개인의 선호도는 원초적으로 결정되고 이런 소비자의 성향이 구매에 반영되므로, 소비자의 성향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전체주의적인 사고의 일환이거나 구시대적인 엘리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끝으로 오염된 생수(1973)와 석면 와인(1976), 클레베르-콜롱브(Kléber-Colombes) 타이어 파열(1979), 호르몬 송아지 등과 같은 일련의 스캔들로 논란이 확대되자 정치권도 이에 동참했다. 일부 좌파는 공장 담벼락을 넘어 일상생활로까지 소비자 각성 운동을 확대하려 했다. 1968년부터 1983년 사회당 정부의 급격한 경제 정책이 있기 전까지 소비 반대 운동에서는 소비자연합-기업 간 단체협정, 기업위원회 차원에서의 상품 테스트 등의 문제에 주목했다. 포괄적이고 정치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이들은 사회 구조가 정해놓은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소외된 개인을, 생산과 유통 측면뿐 아니라 임금 및 소득의 재분배 측면에서까지 이 같은 소외 현상의 반복적인 원인과 결과에 대해 지각하고 반대할 수 있는 개인에 대비시키며 소비반대 논리를 펼쳤다.
우파에서는 1976년 지스카르 데스탱 정부가 소비 전담 주무 부처를 신설하면서 결정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 부처가 맡은 일은 사회문화적 반발의 대안을 ‘선진화된 자유주의’의 요구에 맞게 조정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선진화된 자유주의’란 보호 장벽이나 집단주의를 배척해 해방 이후 지속돼온 정부 주도의 경제 체제를 종식시키고 경쟁에 기반을 둔 경제 체제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는 기업의 대항 세력으로서 소비자 단체 등을 통해 기업의 지나친 행태를 바로잡아주는 유익한 경제 파트너 역할을 하게 된다.
다만 이런 구조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는데, 소비자가 기업의 운영에 연루되지 않고 시장에 출시된 상품 간의 중재 정도로 그 활동을 제한해야 하는 것이다. 1976년 5월 초대 소비 정무차관에 임명된 크리스티안 스크리브네르는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기업 활동의 자유에 기반을 둔 자유 경제 체제의 맥락에서 소비 정책은 다른 형태의 소비 구조를 강제할 수도 없고, 기업 대신 상품을 구상할 수도 없다”고 설명한다. 유럽 통합을 거치는 과정에서 프랑스 법에는 1967년 명령을 통해 ‘공공경제 질서’의 개념이 등장한다. 경쟁을 기반으로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보장하는 이 개념은 프랑스 법에서 민법과 계약법의 틀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시장의 법칙을 앞세운다.(6) 이번에는 최소한의 정보 습득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는 신중한 소비자와, 학습이 부족하거나 혹은 광고전략에 쉽게 넘어가 피해를 보기 쉬운 무지한 소비자가 대비된다.
예로부터 수익 하나만을 보고 움직이는 존재로 여겨지던 상인은 1993년 의회가 마련한 소비자 법을 통해 부지런히 그리고 공정하게 그 역량을 발휘해야 할 ‘전문 직업인’ 타이틀을 달게 됐고, 소비사회도 이제 그 정당성을 갖게 됐다. (구매자는 구입을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갖게 됐고, 판매자는 제품에 대한 정보와 조언을 해줄 의무가 생겼으므로) 소비자가 정보의 습득을 통해 자유롭고 분명하게 구매 동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조건이 확보된 까닭이다.
소비자는 소비사회를 비판하는 존재인가, 합리적인 경제 주체인가? 소비자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역설적이게도 소비사회를 중립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서로의 입장 차이는 무시한 채, 양측 모두 경쟁적인 생산체제 및 상품의 대량거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인정하는 듯했다. 이런 상황이 분명 한쪽에는 득이 되고 다른 한쪽에는 실이 되는데도 말이다.
소비사회에 대한 이 같은 개념 인식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소비’라는 중요한 속성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경제사회의 방향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규정하는 정치 주체 대신 최적화된 구매행동을 하는 경제 주체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렇듯 소비사회 개념의 탈정치화가 이뤄짐에 따라 사회적으로 대치하던 과거의 반목관계 대신 새로운 문제가 대두된다. 현대사회는 과연, ‘마트 매대 앞에서 떼쓰는 아이’에 비유되는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줄 것인가?
글·루이 팽토 Louis Pinto
사회학자. 『소비자의 발명: 시장의 정당성에 관하여』(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2018) 등의 저서가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해석의 기술.
(2) Henri Lefebvre, 『La Vie quotidienne dans le monde moderne(현대 세계의 일상성)』, Gallimard, Paris, 1968.
(3) André Gorz, 『Stratégie ouvrière et néocapitalisme(노동자의 전략과 신자본주의)』, Seuil, Paris, 1964, 『Réforme et révolution(개혁과 혁명)』Seuil, 1969.
(4) Pierre Bourdieu, Jean-Claude Passeron, 『Sociologues des mythologies et mythologies de sociologues(신화론의 사회학자, 사회학자의 신화론)』, Les Temps modernes, Paris, 1963.12.
(5) 1972년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 책은 1968년 출간된 『The Affluent Worker』의 프랑스어 편역본이다.
(6) François Denord, Antoine Schwarz, 『L’Europe sociale n’aura pas lieu(사회적인 유럽은 없다)』, Raisons d’agir, Paris,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