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꾼들의 ‘먹잇감’이 된 정부

2018-07-31     르노 랑베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실뱅 르

정부와 금융권의 막장싸움이 이제 그 정점을 찍고 있다. 금융권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정부가 정책결정을 내리면, 그에 따라 시장의 협박과 정부의 체념이 차례로 이어지고, 언론도 금융권 쪽에 장단을 맞춰준다. 이탈리아와 터키에서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투자자 집단’이 유권자들의 목을 옥죄고 있다. 


유럽인들이 얼마 전 다시 한번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유럽의 민주주의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 중 하나가 정작 선거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이 막강한 권력의 주체는 바로 ‘투자자’라는 이름을 한 무리들이다. 

2018년 5월, 이탈리아 세르지오 마타렐라 대통령은 파올로 사보나 내정자의 경제부 장관 인준을 거부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파올로 사보나는 내각을 구성하는 두 정당, 동맹당(극우) 및 오성운동당(반체제)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문제는 반EU 성향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5월 27일, 세르지오 마타렐라 대통령은 “경제부 장관 임명이 경제계나 금융권 주체들에게 즉각적으로 신뢰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준다”며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했다. 투자자들에게는 막대한 수익보장의 길을 마련해주는 유럽연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파올로 사보나를 경제부 장관에 임명해 시장의 노여움을 사게 됐다는 소문이 돌고 나면, 이탈리아에는 동맹당과 오성운동당의 뒤를 이을 제2의 포퓰리즘 정당들이 등장할 것이다. 설령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탈리아 국민들이 선거심판을 강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귄터 외팅거 EU 예산담당 집행위원의 주장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경제발전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 될 수 있으므로 이는 유권자에게 좌파든 우파든 포퓰리즘 정당을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는 하나의 시그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일주일 후, 포퓰리즘 연립내각은 EU에 확실히 호의적인 인물로 새 경제부 장관 후보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EU 통합 반대론자인 사보나는 투자자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부차적인 직위인 유럽부 장관으로 밀려났다. 

시장에 종속된 이탈리아의 비극  

이탈리아 국민들은 최악을 피한 것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겁을 먹은 것일까? 아니, 금융시장에 맞서 싸워 이긴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최근에 있었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사례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 금융권과의 가벼운 전초전을 벌인 에르도안 대통령의 경우는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금융권 제재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순서대로 나열해본다면,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과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각각 양극단에 놓일 수 있다. 올랑드 전 대통령은 말로만 계속해서 거짓을 일삼은 반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단호하고 강력한 대응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과 마구잡이식 체포, 지정학적 측면에서의 과민반응 등 에르도안 대통령은 금융권 제재에 대해 보기 드문 의지를 내보인 지도자였다. 병력을 움직일 때 전략적 후퇴를 하는 것도 그의 방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에 그는 금리 문제에 있어 굴욕적인 후퇴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침반 바늘이 북쪽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중앙은행이 정하는 기준금리(공정금리)는 경제환경을 조성하는 기본도구가 된다. 이를 기반으로 대부분의 다른 금리가 형성되고, 특히 민간은행이 가계나 기업에 제시하는 금리를 정할 때도 중앙은행의 기준금리를 그 표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대출이 수월해져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고 가계소비가 촉진돼 경제활동이 전반적으로 탄력을 받는다. 따라서 이런 정책은 소비와 투자의 증가가 그에 상응하는 재화 및 서비스의 국내생산 증가를 동반하지 않을 경우, 인플레이션 상승을 초래할 수도 있다. 

중앙은행의 기준금리는 외환 투자자들에게도 투자 수익률을 계산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그런데 투기꾼들은 한 화폐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금리가 높은 다른 화폐에 투자하는 거래방식을 무척이나 선호한다(Carry trade: 차입거래). 가령 2018년 6월 초, 미연방준비은행은 기준금리를 대략 2%로 잡았는데, 이로써 투자자는 연간 2만 달러의 이자로 백만 달러의 자금을 빌려올 수 있다. 이후 투자자는 이 빌린 달러화를 터키 리라화로 바꾼 뒤, 15%에 달하는 터키의 기준금리를 이용해 투자수익을 챙긴다.(1)   

어떻게 보면, 외환시장의 이 떠돌이 투기꾼들에게 제재를 가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화가 진행된 경제체계에서는 이 같은 투기꾼들의 거래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투기꾼에 의한 달러화의 유입이 국내예금 균형을 맞추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터키의 예금상황은 국내에서 소비되는 석유와 가스 등의 에너지 수요 문제 때문에 구조적인 불균형을 겪고 있다. 터키가 이들 자원을 해외에서 사들여오는 상황이라 무역수지를 맞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한 마디로, 현재 터키는 투기꾼들이 끌어오는 달러화가 절실한 상황이다.

투기꾼들의 사냥터가 된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의 신흥개도국과 마찬가지로 터키 역시 서로 상반된 요구사항을 수용해야만 한다. 터키의 높은 금리를 이용해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투자자들의 요구도 맞춰줘야 하고, 낮은 대출 금리로 생산비용을 절감하고 가계소비 및 부동산 대출을 촉진해야 하는 내수경제의 요구에도 부응해야 하는 것이다. 즉, 터키는 투자자들의 수익보장이 제한되는 저금리를 실현해야만 국내 생산이 장려되고 내수 경제가 회복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대개 중앙은행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에게 기댄다. 중앙은행의 독립적인 지위를 이용한 일방적인 결정이 그대로 관철되는 경우는 상당히 많은 국가들에서 나타나는데, 선거 때만 되면 유권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선심성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 지도자들의 손아귀에서 통화 정책(화폐 가치 조정 및 금리 조절 정책)을 살리기 위해서다. 이에 중앙은행은 (금리 인하를 통해) 대출을 용이하게 만들거나 화폐를 대량으로 발행해 인플레이션 정책을 편다. (통화주의를 내세우며) 70년대 말부터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한 신자유주의 이념론자들이 정치인들의 인기영합주의를 차단한 방식도 이와 같다. 이들은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부자들의 현금 자산 가치를 갉아먹는 인플레이션 억제 및 고금리 정책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중앙은행을 주무르면서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을 저지했다. 

얼마 전부터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은 고리대금을 금기시하는 이슬람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고 생산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제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달리 말해 중앙은행의 기준금리를 낮추겠다는 것이다. 이에 <파이낸셜타임즈>는 투자자들의 근심을 헤아리며 “해외투자자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런던 내방(2018년 5월) 때를 이용해 투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켜주길 바란다”라는 내용의 논평을 내보냈다.(2)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런 조언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5월 15일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고금리가 “문제의 근원일 뿐 해법은 되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뿐만 아니라 6월 24일 치러지는 조기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자신이 터키의 통화정책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견해까지 분명히 밝혔다.

사실 지금까지는 에르도안 정부의 억압적인 성향이 금융 시장에 이렇다 할 영향을 주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의 발언은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는 게 <파이낸셜타임즈> 금융 컨설턴트의 생각이다. “오랜 기간 투자자들은 터키 정부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해왔는데(5월 24일), 이제는 터키 지도자가 통화 정책을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터키 대통령의 이런 오만한 발상에 놀란 <City Martin Wolf>지의 수석 경제학자는 그에게 “터키를 적절한 방식으로 이끌어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을 보여달라”고 조언했다(5월 25일). 여기에서 ‘적절한’ 방식이란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의 생각은 이와 거리가 먼 듯했다.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 당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일부에게 불편을 초래할 수는 있겠지만, 국민들에게 해명하는 것은 곧 정부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주장하면서 유권자들의 요구에 둔감한 중앙은행의 독립성 제한 방침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대통령의 발언은 여과 없이 전파를 탔고,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다. 인터뷰가 방송된 직후부터 투자자들은 터키 시장에서 썰물 빠지듯 사라졌으며, 이로써 터키 리라의 가치는 한 달 새 20% 급락했다. (같은 액수의 달러화를 사는 데에 더 많은 터키 리라가 필요해졌으므로) 그에 따라 자연히 수입 비용이 상승했고 생활비도 급등했다. 게다가 투자자들이 빠져나가면서 해외 자금도 이탈했고, 이로써 터키는 공공 및 민간 부문의 채무를 비롯해 다른 데로 투입되는 자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금이 부족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참고로 기업들의 채무 규모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선거가 코앞으로 닥친 상황에서 점점 상황이 악화하자 민족주의 우파의 1인자인 에르도안 대통령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금리 인하 정책을 포기하고 5월 24일 터키의 기준금리를 13.5%에서 16.5%로 올린 데 이어 6월 7일에는 17.75%로 인상했기 때문이다. 

‘스프레드(Spread)’라는 이름의 무기

유로존에 속하는 이탈리아의 경우, 터키보다는 외환시장의 변동성에 덜 취약한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금융관련 대비책이 마련돼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이 유럽 쪽 ‘파트너’를 파고들기 위해 ‘스프레드(Spread)’라는 이름의 무기를 사용한다. 1970년대부터 각국 정부는 통화주의자들의 영향 하에 더 이상 중앙은행에서 재정을 충당하지 않았다(인플레이션을 부추기는 방식이라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소득자를 중심으로 세금까지 인하했다. 따라서 정부는 국공채, 즉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투자자들에게 필요자금을 수혈받았다. 정부가 발행한 이 같은 채무증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거래된다. 정부는 먼저 채권발행에서 원금과 이율이 포함된 채권을 발행하는데, 원금은 빌린 액수에 해당하고 이율은 이자소득액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 가령 원금 100유로에 이율 3%인 채권이라면 연간 3유로의 이자수익을 제공하는데, 이때의 수익을 ‘이자표(Coupon)’라 부른다.

하지만 (채권 종류에 따라 만기가 2년에서 50년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채권을 만기일까지 갖고 있으려는 투자자들은 별로 없다. 따라서 채권유통시장에서는 이런 만기 전 채권들의 거래가 이뤄진다. 수요가 높은 국채의 경우에는 채권가가 상승하는데, 가령 발행가 100유로였던 채권이 150유로로 값이 뛰는 식이다. 반대로 채권 가격이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때에도 이자표는 변동이 없다. 그래도 금액이 달라지면 이자표의 비율이 달라질 수 있는데, 3유로의 이자표는 100유로 채권 가격일 당시 3%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이지만, 채권가가 60유로로 떨어지면 3유로의 동일한 이자표가 채권가의 5%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채권의 이율이 달라지고, 채권 이율이 높을 경우 그만큼 채권의 신뢰도도 떨어진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위험성 없는 ‘안전한’ 채권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채권들의 ‘매력도’를 계산한다. 가령 유럽 채권 시장의 경우, 가장 지급 보장이 확실한 독일 정부 발행 채권 이율을 기준으로 다른 채권들의 이율을 비교한다. 이탈리아 채권 이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독일 국공채 이율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백분율로 표시되는 이 격차율은 영어로 ‘스프레드’라 부른다. 투자자들의 언어가 영어인 까닭이다. 달리 말해 스프레드가 높아질수록(채권 사이의 이율 간 격차가 벌어질수록) 신규 채권 발행 시 채권발행시장에서의 이율이 높아지고, 투자자들은 채권유통시장에서 유통되는 채권에 유리하도록 이 신규 채권을 낚아챈다. 

‘세계화된 금융계’라는 파도를 다스릴 수 있는가

2018년 4~5월, 이탈리아의 ‘스프레드’, 즉 독일과 이탈리아의 10년 만기채권을 구입하기 위해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이율 간 격차는 2배로 늘어났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GDP의 130%를 상회할 정도로 채무가 많은 국가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역시 이런 채무를 말끔하게 상환할 역량이 안 되기에 이탈리아는 결국 채무를 ‘돌려막기’하는 상황에 이른다. 주기적으로 신규채권을 발행해 기존채권 취득자에게 빚을 갚는 것이다. 따라서 채권 스프레드가 올라가면 그만큼 비용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가급적 빨리 금융시장 진화에 나설 수밖에 없다.

5월 24일 사설에서 <파이낸셜 타임스>는 금리인하 정책을 “단념”한 터키 대통령의 결단에 환호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 11세기 잉글랜드의 크누트 대왕이 준 쓰라린 교훈을 이제 막 깨우치게 됐다. 밀려드는 파도 앞에 의자를 놓고 앉은 크누트 대왕은 아첨하는 신하들 앞에서, 자신이 바다를 다스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결국 보여주고 만다. 에르도안 대통령 역시, ‘세계화된 금융계’라는 이름의 파도가 호락호락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듯 막강한 세력 앞에 직면한 상황에서 “신중한 정치지도자라면 모두가 저들의 정책을 수락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정부가 앞으로 더 이상 시장에서 자금조달을 받지 않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동맹당이나 오성운동당, 민족주의 우파 모두 현재로선 이 같은 대안을 고려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고 늘 시장의 시각이 관철되는 것만은 아니다. 1971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역시 시장에 반기를 들며 달러의 금 태환을 중지한 바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가능했던 일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가능할 것이고, 그 밖의 (진보적인) 다른 정치 세력이 의욕적으로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금융 권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해방시키려면 상당한 진통이 불가피할 것이고, 싸움에 나서기 전 그 결과를 미리 가늠해봐야 한다.  


글·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실뱅 르데르 Sylvain Leder
경제사회학과 교수. 2016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경제 비평 교과서』 집필진으로 참가한 바 있음.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물론 이에 더해 인플레이션 수준과 환전비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2) Laura Pitel, Benedict Mander, Jonathan Wheatley & Roger Blitz, ‘Turkish lira leads broad sell-off in emerging market currencies’, <Financial Times>, London, 2018년 5월 15일